감옥에서 얻은 폐문 임파선염, 장하수
기 세 문 (사회운동가, 광주시 북구 내곡동 200-3 빛고을 단식원, 062-571-0100)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몹시 허약했다. 어머니의 젖이 나지 않아서 미음과 죽, 밥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인지 유아 때부터 위장이 좋지 않아 늘 설사를 했다. 약한 아이의 위장이 견디어내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많은 질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일제 식민치하의 교육도 내 건강을 악화시킨 한 요인이다. 일제 말기 패망기에 접어든 일제의 잔혹한 통치는 교육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근로봉사라는 미명 아래 어린 초등학생들을 내몰아 강제노동을 시켰다. 나는 근로봉사를 갔다가 몇 번이나 실신하여 집에 업혀 오곤 했다.
성년이 되면서 건강은 차츰 좋아지는 듯하였으나 청년기에 통일운동에 뛰어든 이후의 모진 시련은 내 건강을 더욱 극심하게 파괴했다. 잔혹한 고문과 감옥이란 최악의 생활조건, 사람으로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식생활은 건강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게 하였다.
출소 이후 새로운 생활로 건강을 얼마쯤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치르게 된 가혹한 고문과 옥중생활은 건강을 지탱할 수 없게 했다. 지난번 옥중에서도 고문으로 토혈을 했는데 이번에도 또 피를 토했다.
18년 동안의 긴 감옥살이는 온몸을 병들게 했으며 특히 위장과 심장은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결국 폐문 임파선염과 장하수, 헤르니아(탈장), 치질, 이명증 등 갖가지 병이 나를 괴롭혔다.
감옥 안에서 약을 사먹고 그것으로도 안되어 의무과장의 처방에 의해 오랫동안 약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체중이 내 정상체중에서 15킬로그램이나 모자라는 45킬로그램까지 떨어졌다. 그야말로 피골상접이었다. 협심증 증상이 나타나고 토혈할 때에는 곧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웠다.
회복 불가능으로 삶을 포기해버린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내게 서광이 비추어왔다. 1975년경에 자연건강법에 대한 책이 집에서 들어온 것이다. 이 몇 권의 책이 건강회복의 첫 길잡이가 되었다.
생수, 잡곡밥, 건강운동법, 그리고 설탕을 비롯한 가공식 끊기를 시작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생채소 문제였다. 감옥 안에서 어떻게 생채소를 구한단 말인가. 다행히 우리는 여러 번의 처우개선투쟁으로 공간을 확보했고, 그 결과 나는 감옥 안에서 텃밭을 만들어 가꿀 수 있었다.
내 손으로 채소를 키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감옥 안에는 화학비료나 농약이 없으니 완전 무공해 청정채소를 키울 수 있었다.
허용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나는 자연건강법을 최대한 실천하였고 그 결과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감옥 안에서 건강이 회복된 또 하나의 이유는 잦은 단식이었다. 비록 투쟁을 위한 단식이었지만 나는 자연건강법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서라도 철저히 몸관리를 했고 그 결과 서서히 건강이 회복되어 간 것이다.
답답하고 지루한 감옥생활이 지나고 출소한 뒤 1986년 여름, 처음으로 장두석 선생을 만났다. 이 만남으로 나는 책에서만 보았던 자연건강법을 좀더 정확하게 현실 속에서 실천할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자연건강법에 관한 여러 책자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장 선생과 함께 자연건강수련회에 참가해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자연건강법에 대해 더욱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연건강법이 내 몸에 밸 때까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조식(朝食) 폐지와 경침을 베고 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나처럼 병약한 사람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자연건강법을 열심히 실천한 후 6개월쯤 지났을 때 내 몸에는 놀라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첫째는 위장과 심장이 좋아져서 이제는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다음으로는 건강이 최악의 상태일 때 피부에 나타났던 빨간 반점과 티눈, 사마귀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몇 년을 두고 없애려고 애를 태우던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끗이 없어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일년 열두달 달고 다니던 감기를 앓지 않게 되었다. 나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랬다. 우리 가족은 자연건강법을 실천한 후 감기를 모르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신기한 효과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자연건강법에 의한 탁월한 체질개선효과를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조금만 무리하면 예전의 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목에서 피가 났다. 출소 후 종합진찰을 했을 때 신장에 큰 돌이 있다고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기분이 언짢았었다.
그래서 생식을 하여 체질을 좀더 확실히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무등산 자락에 있는 소화자매원 피정의 집에서 생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서 단식건강법 책을 번역하며 장두석 선생과 같이 자연건강 수련생을 교육하게 된 것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소나무 우거진 숲속에서 좋은 물, 좋은 공기를 마시며 생식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밥을 먹지 않고 오곡가루와 채소를 된장국, 김치와 먹고 사는 것이다.
생식 6개월이 지난 어느 날부터 내 몸에는 세번째 이변이 일어났다. 온몸이 깨끗하게 청소된 것이다.
생식을 통해 장이 깨끗해지고 온몸의 피가 맑아지니까 머리까지 맑아져 잠을 세 시간밖에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 몰랐다. 번역하는 일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시력이 회복되고 이가 좋아진 것이다.
이전에는 돋보기를 써야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생식을 마칠 무렵에는 돋보기가 필요 없게 되었고 치과에서는 원장님이 어떻게 이가 이렇게 깨끗해졌냐며 놀라 물었다. 생식을 시작할 때에는 이가 아파 채소를 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좋지 않았던 피부도 깨끗해졌다.
이외에도 표현할 수 없는 괴로운 증상들이 생식 후에 모두 없어졌다.
무등산 기슭 자그마한 집에서 평생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묵묵히 헌신 봉사하는 분들, 나의 생식을 위해 채소와 좋은 음식을 마련해주신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분들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민족생활의학과 건강운동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신 장두석 선생님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앞으로 자연건강법을 대중에게 전하여 전 국민이 건강해지고, 튼튼한 몸을 바탕으로 올바른 민족정신이 깃들 수 있도록 남은 여생을 바칠 생각이다.
의학적 소견
기세문 선생은 평생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몸바쳐온 분이다. 기세문 선생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고 김세원 선생으로부터 소개받고 선생의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전남의대를 다니던 선생의 큰자제가 의문사했을 때였다. 선생의 가정생활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딱하게 여겨졌다. 가장은 옥고를 치르고 큰자제는 운동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분들로부터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능하고 머리가 좋은 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던 기 선생이 18년 만에 출소했다. 출소 후 3일이 지나 나는 기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선생을 모시고 광주호 주변 식당으로 갔다. 저녁을 나누며 민족생활운동을 함께 하기로 언약을 했다. 민족생활, 민족의 혼, 민족의 문화를 일깨우는 데 힘을 모으자고 약속한 것이다.
나는 민족생활운동이 가장 올바른 민족운동이며 통일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믿고 있었고 기 선생도 이 점에 동감했다. 통일은 남한동포들이 깨달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누누이 말했다.
나는 우선 건강을 회복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선생을 설득했다. 이상이 높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선생도 몸을 돌보지 않아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극음성체질인 선생은 위와 장이 하수되어 있고 온몸이 무력증에 빠져 있었다. 건강회복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가정을 돌본 후 통일운동도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기 선생은 고봉 기대승 선생의 후예로서 학문이 깊고 영문학과 일어에 능하시다. 첫인상은 차고 냉정하며 매섭게 보였으나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인정이 많고 다정다감하며 자상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넘쳐 흐르는 분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정으로 열심히 생활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제 기 선생과 함께 일한 지 9년이 되었다. 선생은 광주호에서의 만남 이후 빛고을 민족생활관을 내고 민족생활보급운동에 전념하고 계시다.
마음이 통하고 평생을 함께 일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은 여생을 나와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렵고 험난한 비제도권 의자(醫者)의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확고한 의지와 신념이 없으면 곧 좌절하고 만다. 나도 마찬가지다. 늘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 일에 기 선생과 같은 지기가 함께 해주니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이 힘이 난다. 민족생활의학 발전에 힘을 모아 민족생활, 민족문화,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 기여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 않는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234-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