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짧지 않은 침묵을 깨고 시나위가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1983년부터 시작된 밴드의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다. 18년간 묵묵히 한국 록을 이끌어온 시나위는 명실 상부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밴드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20대 초반의 나이로 헤비메틀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신대철은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고 그동안 시나위를 거쳐간 많은 뮤지션들은 독립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나위는 많은 멤버의 부침속에서도 리더인 신대철을 축으로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역시 시대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또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신대철의 능력과 밴드 중심의 음악작업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4집의 실패와 함께 헤비메틀의 몰락은 여타 밴드처럼 시나위와 신대철에게도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재결성된 시나위는 80년대 헤비메틀을 버리고 과감히 얼터너티브를 채용하여 크게 성공한다. 특히 90년대 최고 걸작으로 봐서 손색이 없는 6집의 완성도를 통해 시나위는 음악성과 인기를 겸비한 밴드로 우뚝선다. 김바다의 블루지한 보컬은 또 다른 매력을 주어 임재범, 김종서 시기의 영광을 또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시나위는 다음 앨범작업에서 6집의 '내버려둬','죽은나무'식의 블루스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고 '사이키딜릭'을 통해 또다시 실험을 시도했다. 7집 '사이키델로스'는 비록 전작과 같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사이키딜릭 록 사운드를 가장 완성도 있게 구현한 앨범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사이키딜릭은 신중현이 전성기 시절에 연구한 장르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아름다운 강산'도 신중현이 the men에서 보여준 연주는 전율이 돋을만한 몽롱함이 지배하는 사이키딜릭의 완숙함이었다. 세월이 흘러 신대철은 결국 7집을 통해 2000년식 사이키딜릭을 완성하고자 했다. '희망가','해랑사2'에서의 기타연주는 압권이다. 또한 '개야 짖어라'의 김바다의 거친 사우팅은 수준급이다. 그러나 2000년에 60년대식 사이키딜릭 사운드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훌륭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시나위 7집은 전작만큼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매니아층에게 시나위라는 네임 밸류를 깊이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또한 대규모 콘서트 홀을 가득 메울수 있는 몇 안되는 록밴드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실력파 밴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7집이후 매력적인 보컬리스트 김바다가 탈퇴를 한다. 임재범,김종서의 대를 이으며 걸출한 보컬리스트로의 성장이 기대되었던 김바다는 개인적인 활동을 위해 시나위와의 인연을 마감한다. 김바다 탈퇴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시나위는 신예 김용을 보컬리스트로 맞이한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미니 앨범을 발표하여 바뀐 보컬리스트에 대한 맛뵈기를 한 뒤 드디어 정규 8집앨범을 선보인다.
이미 미니 앨범을 통해 김용의 목소리가 한차례 소개되어 평론가와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바 있다. 시나위 8집을 감상하면서 역시 바뀐 보컬에 대한 비교는 제일 우선시 될 것이다. 시나위 옛영화를 부활케 했던 김바다와의 비교는 필연적이다. 시나위가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거쳐간 밴드이긴 하지만 1집의 임재범과 3집의 김성현 그리고 5집의 손성훈은 사실상 앨범작업만 했을뿐 연주활동을 오래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시나위의 보컬은 80년대 김종서, 90년대 김바다의 이미지가 매우 강한 편이다. 더군다나 그들로 인해 시나위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보컬의 교체는 일종의 작은 모험일수 있다. 또한 이번 8집이 전작인 '사이키델로스'와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더욱 비교대상이 될만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용'의 보컬은 중저음이 강조되며 나름대로 매력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김바다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필링을 커버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김바다의 보컬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김용의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아 그렇게 느낄수도 있다. 신대철은 김용의 보이스 컬러에 맞게 기타의 사운드 메이킹을 맞추고 있어 전체적인 앨범의 완성도는 탄탄하지만 그래도 최고의 보컬리스트들이 거쳐간 시나위의 역사를 볼 때 김용은 다소 선배들보다는 좀 처진다는 느낌은 지울수 없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견해이다. '나는 웃지'나 '파란밤'에서 보여준 김용의 보컬은 초기 짐모리슨이나 이언길런을 연상시키지만 역시 사우팅은 약한 편이다.)
시나위 8집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몽롱함과 억눌림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음반보다도 깔끔하고 산뜻한 녹음도 눈에 띈다. 초기 헤비메틀 시기의 시나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본작은 답답함으로 느껴질수도 있다. 과거 직선적인 기타리프에 터질듯한 샤우팅과 파워풀한 드러밍은 분출과 해방의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8집의 사이키딜릭에서의 내지르지 못하고 뭉쳐지는 듯한 보컬과 몽롱한 기타 리프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21세기 현실은 에너지를 충만시켜 폭발시키는 파워로만 표현되기는 어려운 복잡함이 있는듯하다. 노브레인식의 표현도 필요하지만 시나위와 같은 몽롱함 속의 자기 분열적인 표현도 상당히 자극적으로 다가 올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본작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사운드 메이킹이다. 각각 싱글마다의 특색을 지니지만 사운드를 주도하는 기타는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비록 신대철의 화려한 애드립은 많이 거세되어 아쉬움이 있지만 철저한 '밴드음악'의 규칙을 지키며 합주와 공동작업의 틀을 유지한 것이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공격적인 '두 돼지'로 시작되는 앨범은 '날 깨워줘'의 멜로디를 거쳐 'PC 폭력'에서 줄기찬 중저음의 기타 리프의 매력을 선사한다. 속주는 아니지만 하드록 초기의 사운드를 재연하는듯한 기타연주의 느낌은 상당히 좋았다. '파란밤'에서의 극적인 곡 구성과 화려한 기타 연주와 '금지된 노래'의 아르페지오와 첼로의 협연은 이미 미니 앨범에 수록되어 검증되어서 그런지 듣기 편안했고 완성도 역시 매우 높았다.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트랙이라 볼 수 있는 '나는 웃지'는 모던록적인 요소도 느낄 수 있는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다. 신대철의 시타연주가 돋보이는 '해가 진다'도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인도악기 '시타'를 한국적 록에 접합시킨 수작이다. (하지만 도시락 특공대 2집에서 연주했던 '라니'의 느낌만은 못하다.) 그리고 가장 사이키딜릭적인 몽롱함을 선보이고 있는(the doors를 연상시키는) 대곡 '낙오자의 꿈'으로 앨범은 맺음을 한다.
시나위 8집은 전작인 '사이키델로스'에 이어 사이키딜릭을 주된 코드로 잡은 두 번째 앨범이다. 그러나 '사이키델로스'에 비해서는 좀더 다양한 스타일을 사이키딜릭의 범주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정신좌착'에서의 스피드함과 '나는 웃지'의 모던록적인 요소는 따로 떼어 놓는다면 굳이 사이키딜릭과 연관 시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수록곡 전체가 앨범의 컨셉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적당한 발란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거물 밴드 시나위 답다. 거의 20년동안 밴드의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시나위를 아직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록밴드로서의 지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모습 때문이다. 물론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멤버의 부침이 심한 것은 시나위의 큰 약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멤버가 바뀌더라도 항상 밴드의 합주를 통해 곡작업을 하면서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6,7,8집 모두 최상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번 앨범 또한 보컬리스트의 변화가 있었지만 오랜 공동작업을 통해 완벽한 호흡을 이끌어 내었기에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나위! 최초의 헤비메틀 밴드이자 여전히 최고의 위치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하는 밴드이다.
ps1) 새로운 보컬리스트 김용이 언제까지 시나위에 재적할런지는 모를 일이다. 시나위 8집에서 그는 가능성과 아쉬움을 함께 보여주었다. 좀 더 많은 앨범이 그의 목소리로 채워질 것을 기대해 본다.
ps2) 영어 앨범이 보너스로 수록되어 있다. 시나위 베스트 앨범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역시 8집의 컨셉으로 녹음되어 있다. 베스트 앨범이라기 보다는 시나위 8집의 두 번째 시디로 보고 감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예전의 느낌을 찾아내고자 애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