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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가 역사를 말해주는 증언이다.
요가란 무엇인가를 심각히 고민 할 수있는 증거다.
몸을 향한 요가의 산 증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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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단식원이라는 사이트에서 옮김
한국 요가 50년
50년 전 1955년 장인선 선생 한국최초로 신명요가원 서울 서대문구에 설립하신 장인선 선생님은 키 1m76cm에 75kg의 모두가 인정하는 미남이시고 판단력과 순발력이 뛰어 나셨으며 검도를 좋아하시고 승마를 즐기신 그 시대의 멋쟁이 이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시면 책 한권을 통째로 외우시는 기억력이 탁월하시고 6.25때는 안성 미리내 전투에서 괴뢰군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신 애국청년 이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전투에서 포위를 당해 함께 싸우던 전우들과 함께 잡혀가서 집단 총살형을 당하셨습니다.
다행히도 장인선 선생님은 눈을 떠보니 수 십명이 쓰러져 죽어있었고 장 선생님은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나가며 창자가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창자를 밀어 넣고 사력을 다해서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서 의식을 읽고 쓸어 지셨습니다.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별다른 치료도 못한 채 집에서 사모님의 간호로 힘들게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으며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나가며 화약속의 독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이 후유증으로 위장병과 심장병 그리고 신경쇠약증상 불안공포증 불면증으로 심하게 고생하시던 중에 당시 가깝게 지내시던 이교선 상공부 장관으로부터 미국유학중에 구입하였다 면서 미국 요가책(Physical-yoga)을 주시며 요가를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지고 왔다면서 선물로 요가책을 받고 집에서 틈나는 대로 요가훈련을 집에서 하고 있을 때, 장인선 선생의 친구이신 조종익 해군대장으로부터 일본에서 구입했다며 일본 요가책("기적의 요가"저자 오끼 마사히로)을 또 가지고 오셨다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시는 장인선 선생은 책에 있는 요가훈련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요가를 연습한 것이 한국요가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요가수련에 매력을 느끼고 건강이 점점 좋아지시자 장인선 선생님은 일본으로 건너가 "오끼요가 센터"에서 요가를 수련하시며 공부를 하시고 일본의"생명의 실상"도 함께 공부를 하시고 귀국하시어 한국적인 요가수련법을 체계화시켜 요가보급을 시작 하셨다. 인선 선생님과 이교선 상공부장관은 가까운 친척분이며 조종익 해군대장은 친구로서 서로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었다. 마침내 장인선 선생님은 1955년 서울 북아현동에 작은 한옥 집에서 녹음기 한대를 설치하시고 요가책을 주셨든 이교선 장관과 김근욱(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 동생)박한익 장군..등 10여명이 요가수련에 최초로 참가하게 되었다, 고 당시 서울대 재학 중이던 장만수씨(장인선 선생 조카)의 증언이다.
북아현동에서 교남동(독립문옆) 이전 개업
한국최초로 요가원을 개업하였던 북아현동 한옥 집에서 1958년 교남동(독립문 옆) 건물 2층(15평)으로 이전하였다 한옥 응접실에서 수련하다가 이전을 하니 아주 넓어 보였다 요가회원들은 하루에 2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주로 외국에서 공부하신 분 들이다. 반도호텔 사장, 국도극장 사장, 3.1빌딩사장, 장군, 정치인 등 사회 저명한 인사들이 여러분 모여서 요가수련을 하였는데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교남동의 요가원이 좁을 정도로 요가수련생이 늘어나서 1961년 서대문로터리 적십자병원정문 건너편 2층(30평정도)으로 또 이전을 하였으며 이전 하자마자 요가발전에 탄력을 받게 됐다.
장인선 선생님의"건강한 마음을 얻기 위한 요가 의식훈련"운동도 잘못하면 독이 되고 과학적으로 훈련해야 약이 된다..등 명강의 내용들이 신문에 보도되자 각대학교의 수재급 학생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요가원에 몰려들기 시작 했다. 당시 경희대 체육과에 재학 중이며 장인선 선생님으로부터 요가를 배워서 하루 2회 요가를 지도하셨든 장익수 선생의 증언이다.
장종수선생 요가와의 첫 인연
장종수선생은 1965년 경기도 안성 안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 진학상담을 하기 위하여 삼춘이신 신명요가원 장인선원장님을 방문한 것이 요가를 처음 만나는 인연이 되었다. 다음날 요가원을 방문하여 처음 보는 요가수련장면은 궁색.. 그 자체였다. 유도를 하면서 체력을 단련하며 90kg이 넘는 거구의 체구를 가지고 있는 본인이 처음만난 요가훈련장면에서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이나 비틀고 거꾸로 서고 있는 모습이나 입으로 이상한 숨을 쉬고..힘들도 없이 앉아있는 신명요가원의 요가분위기를 처음 접하는 저에게는 젊어서 그런지 요가는 참 시시콜콜하게 생각했으며 요가를 배워 보겠다는 의욕이나 욕심도 관심도 없었다.
요가훈련실 바닥에서는 냄새가 심하고 추리닝도 입지 않고 상의는 내복차림이고 하의는 집에서 입는 잠옷 차림이다. 탈의실도 없고 옷보관함도 없고 샤워장도 없다. 저에게 우상이던 삼춘 장인선 원장님이나 외삼춘 이교선 상공부장관에게 실망도 컸다. 그런데 안성초등학교를 설립하시고 교장을 하신 장호선 큰아버님이 중풍으로 고생 하셨는데 신명요가원에서 요가훈련을 하시고는 앉지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시던 분이 일어나셔서 지팡이를 잡고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요가건강법의 신비스러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국 요가책(Physical-yoga)을 탐독하면서 신기한 요가가 아니라 믿음직한 요가수련법임을 느끼게 되었었다.
그런데 본인에게 급작스런 이상한 징후가 왔다, 해군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으로 낙방된 것에 쇼크를 받고 평소 고생하던 고혈압과 위장병 간염이 악화되어 탈모가 심해지고 허리신경통으로 고생이 시작 되었다 특히 위장병으로 심한 고생이 시작 되었다. 그래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합격통보를 받고 국민 민생복지를 선진국 수준으로 끓어 올려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정치가로의 꿈을 계획하여보니 컨디션도 좋아 지는 듯 했다.
그것도 순간이었다. 내 몸은 몹시 악화되기 시작하여 90kg이 넘는 튼튼했던 내 몸은 매일 설사에 빈혈이 심하더니 체중은 62kg까지 급격히 줄었다.(한국최초의 요가책인"소화된 요가"책 아사나편 모델이 본인인데 촬영 당시 때가 고생을 할 때다)
안성에서 정치가로 활동하신 아버님(장지선)이 문병오셨다가 돌아가시면서 12남매 중에 가장 똑똑한 종수가 회복이 어려울 것 이라면서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요가수련에 믿음이 가지 않았던 저에게 삼춘(장인선 선생)은 '네가 살길은 요가수련을 열심히 하는 길 뿐이 없다'고 하시며 호흡법을 가르쳐 주시고 아사나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분 좋았던 일을 생각하고 즐거웠던 일들만을 웃으면서 상상하라며 명상을 시켜 주셨다. 3개월간 매일 5시간씩 호흡과 요가아사나 명상을 하고 아침마다 북아현동 뒷산으로 등산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 했다. 소화가 안 되어 밥을 못 먹고 죽을 조금씩 먹으면서도 요가수련을 열심히 하였드니 식욕이 생기기 시작했고 얼굴혈색이 맑아지기 시작하였으며 밤에 깊은 수면을 취할 수가 있었으며 말을 많이 하면 목이 쉬기 때문에 평소에 말수를 줄이는 훈련이 되어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빈혈 증세다. 빈혈증세가 심하여 자주 쓰러졌는데 거울을 보다가 거울로 쓰러져 이마를 16바늘을 꿔메는 상처를 입은 것이 아직도 흉터로 남아있다. 이런 질병들이 서서히 호전되어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눈동자가 광채가 난다며 장인선 선생님이 기뻐 하셨다. 내 몸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다른 요가회원들도 더욱 열심히 요가수련을 하게 만드는 분위기로 반전하였다.
나는 요가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병을 고칠려는 집착과 욕심을 부리지 말고 병이 내 몸에서 스스로 떠나 도록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원리"라는 글귀가 내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요가는 나의 생명을 구해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요가는"평화로운 삶을 위한 수련법"이다. "건강한 삶을 위한 수련법"이다. 내적인 평화와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추구하는 수련법이다. 이런 신념으로 스스로 자신의 허울을 벗기 위한 자신의 초점을 찾아가는 "정신적인 인생의 여행길이다"이 여행에 몸과 마음이 함께 할 때 내 몸의 모든 고통이 스스로 떠난다는 이치를 깨닫고 본격적인 요가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래서 인지 요가회원들이 많이 늘어나서 신명요가원은 또다시 종로 낙원동으로 이전(60평)하였다 당시 장인선 원장님은 저에게 너는"화를 복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너는 미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다. 너는 존경받는 큰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제 귀에는 그런 말씀은 들리지 않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친구들과 어울려 광화문 대학로나 무교동에 가서 술 마시고 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낙원동으로 이전한 후 하루에 4-5회의 요가수업에는 항상 회원이 많았고 대부분회원들은 노이로제 고혈압 위장병..등 초기 또는 중증 환자들이었다. 운동신경이 발달된 저로서는 요가운동은 싱거울 정도로 잘했다. 5개월이 지나자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고 얼굴혈색도 맑아지고 친구들도 만났다. 나는 요가 운동하는 재미에 푹 빠졌으며 요가와 함께 내 인생도 간다는 믿음이 강해지기 시작 했다. 요가는 나에게 종교와 같았고 하루 5시간 이상 요가수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장인선 원장님이 저보고 요가운동 아사나를 가르쳐 보라고 하시기에 처음 요가를 지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요가와의 인연이 시작 된 것이 생존해 있는 한국요가 요가지도자 중에 가장원로인 본인은 한국요가를 지켜온지 벌써 40년이 됐습니다.
장인선선생 대한요가협회 창립 회장 취임
1965년10월 장인선 원장님은 "대한요가협회"를 창립하시고 회장에 취임 하셨다. 부회장에 장익수, 양재원(국악원장), 이내동(감사원(구.심계원) 계장), 이순구 서울경찰청장, 김창범 육참총장 비서실장, 장종수 부산지부장, 이보인 대구지부장이 취임하였다. 부산지부장 장종수(1966년), 인천지부장 권창세(1966년), 대구지부장 이보인(1967년), 송영선원장(부산요가협회 서면요가원장)이 개업하시고 그후 종로에는 황영석선생이 청주는 김정희선생님이, 원주는 신동길선생님이 제주도는 김용섭선생님이 동대구는 조준화선생님 등 많은 장인선 회장님의 제자들이 전국 주요도시 10여곳에서 요가원을 1 2년 간격으로 개업하셨다.
대한요가협회 신명요가원의 요가수련생들 중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장경석 27사단장, 조종익 해군대장, 조중훈 대한항공사장, 이교선 상공부장관, 이순구 경찰청장, 해병대 박효열 대령과 육군본부의 장성들과 국회의원 대학교총장..등 귀하신 분들이 요가훈련에 참여하시었으며 요가발전에 물질적으로 협조하셨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기둥역할을 하신 분들입니다.
장종수선생은 장인선스승의 권유로 부산시 범일동에 1966년 가을 부산요가협회 부산요가원을 부산최초로 설립하였다. 화술이 좋으셨던 황영석선생은 종로에서 개업하였지만 몇 년 후에 요가를 떠나 목사가 되셨으며 씨름을 잘하시고 의리가 있고 남성적인 매력이 넘처 났던 이보인선생은 미국 보스턴에서 요가센터를 운영하고 계시며 장익수선생은 대한요가협회부회장을 맡아 전국의 15곳의 지부와 요가회원들의 조직관리 및 요가지도자교육을 하시다가 장인선스승님의 타계로 1978년 대한요가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장익수 회장은 육군본부, 총무처, 새마을연수원, 공무원연수원, 서울경찰청...등 많은 곳에서 요가를 지도하시면서 서울 성북구에 진아 단식원을 개업하시고 단식원으로 대한요가협회 사무국도 이전을 하였다.
이들이 바로 장인선선생님의 수제자들로서 한국의 요가를 이끌어오신 1세대 요가지도자들이다. 몇 년 후에 장인선 선생님의"소화된 요가"책에 의지하던 요가지도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동국대학교 정태혁 박사께서 요가철학학문을 다룬 요가책을 출간 하시어 요가지도자들에게 인도요가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여 주신 분으로 항상 존경하는 분이다.
그후 김광백선생은 한국요가협회 2대회장으로 취임 하셨으며 부산에서 활동하는 저와는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는 지인 사이다. 김광백회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악한 협회운영을 이겨내며 지켜왔다. 당시는 요가활동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협회장직을 내놓고 고민한적도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회장을 맡아 한국요가발전에 큰공을 세운분이다.
고인이 되신 김현수선생은(한국요가회장) 의대출신으로 마음수련 없이 육체의 질병은 하나도 고칠 수 없다는 논리로 교육시킨 요가계의 큰지도자였다. 이들이 한국요가발전에 큰 공을 이룩한 2세대 요가지도자 들이다.
그러나 불행했던 역사도 있다. 당시 김광백회장의 권유로 김현수선생, 장종수선생, 정판식선생..등 한국을 이끌어가는 큰 지도자들이 한국요가협회의 중책을 맡아 뭉쳤었다. 그러나 민주화 되지못한 협회운영방식 즉 일인독주의 회장자리 분쟁 때문에 한국요가협회는 쪼개지고 제각각 새로운 단체들을 만들어 큰 지도자들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놓이게 된 것은 한국요가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된 마음 아픈 불행한 기록들이다.
그후 10년 이상 한국의 요가는 깊은 수렁에 빠겨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이정훈(한국요가협회장), 정강주(한국요가문화협회장), 송방호(송방호요가아쉬람 회장), 신석규(한국요가지도자연합회장), 정판식(국제요가협회장), 안지용(한국요가연구회장), 장미수(코리아요가센터 원장), 이희찬(온살이 요가센터 원장)...등 많은 요가지도자들이 높은 학력과 많은 지식정보를 바탕으로 인도나 미국 일본..등 여러 나라를 유학하고 요가경전들을 만나며 수준 높은 요가보급에 앞장선 분들로서 한국요가가 전국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준 3세대 요가지도자들이다.
협회운영은 시끄럽고 고통스러워도 내가 앉을 자리는 민주적으로 선택해야하고 모든 요가지도자들이 협회가 구심점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높은 의식 정책을 집행하여 요가지도자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의식이 곧 요가지도자의 기본인 야마(Yama)와 니야마(Niyama)를 지키는 일입니다. 지도자들이 근본의 기본부터 인격의 한계를 보인점은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게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협회가 한 개인의 자리가 되면 결국 그 단체는 비리와 아부 집단으로 형성되어 무명단체나 비리단체로 전략 되는 것이 상식 입니다.
이런 지난날의 역사를 이겨내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인정받는 세계 속의 한국요가는 현재보다도 미래가 더욱 인정받는 다양한 쿼리큘럼화 될 것이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요가지도자의 길에 합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요가에 인생을 함께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은 곧 한국요가의 믿음 입니다. 장종수선생은 동아대학교와 부산정보대 요가학과 교수로 계시고 김광백선생은 명지대학교에서, 정강주선생은 호원대에서, 안지용선생은 조선대에서 그 외 여러대학의 요가교수들과 한국을 대표하는 요가철학자 정태혁 선생과 이태영선생 ..등 많은 한국요가지도들이 다양한 방향에서 최선을 다하여 후배양성에 노력하고 계시기 때문에 한국요가는 전 국민의 가슴속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한국최초의 원정혜 요가박사가 탄생하고 수십명의 석사가 탄생됐으며 10명이상이 현재 박사과정에서 정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요가지도자들은 더 많은 요가지식정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서 훌륭한 요가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으며 열심히 요가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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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정에도 인도와 일본 미국 중국 태국 필리핀을 12회나 다니며 많은 지식과 정보를 마음에 담을려고 노력하였으며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세계평화운동에 힘을 얻기 위하여 금강산, 백두산, 미국의 그랜드캐년, 중국의 장가계, 인도의 리쉬케쉬..등을 찾아서 요가수련을 하고 명상을 하는 수련을 하면서 인도 노나불라 대학교에서 요가공부를 마치고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하였다. 부산에 6곳의 요가원을 운영하고 2500명이 넘는 요가회원들과 함께 요가생활에 만족 하고 있다. 600여명의 제자들이 부산, 경남, 울산..등에서 250여 곳의 요가센터에서 요가를 지도하고 있다 요가대학을 설립할려고 학교부지까지 마련했다. 국내최장수 요가지도자로서 조용히 명상하며 요가세상을 펼치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한국요가 좌초 침몰하다
국내 핼스클럽이나 뚜렷한 수영장하나 없던 시절에 부산 MBC-TV와 KBS-TV에서 매일아침 방송되는 "장종수의 아침요가교실"프로는 8년간 계속되어 12곳의 요가원에 매일 3천명 이상이 몰리는 요가붐을 이루게 되어 한달 수입도 일억 원이 넘는 기업형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1975년경 모든 요가방송은"에어로빅"에 밀려 중단되었고 미국에서 도입된 에어로빅 장으로 몰려가기 시작하여 요가개업 10년 만에 12곳의 요가원은 2곳만 남고 모두 문을 닫아 부산뿐만 아니라 서울..등 한국요가는 좌초되어 침몰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울이나 지방에 요가간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요가는 침몰하였을 때 그래도 경제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갖추고 있던 부산요가협회의 2곳의 요가교실은 한국요가를 지켜왔다.
단식원설립이 요가 역사 이어 줘....
본인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기에 체질개선과 다이어트(체중조절)를 전문지도하는 요가식 단식원을 개업하였다. 생각한대로 단식원은 또다시 붐을 이뤘고 한달에 250명씩 단식회원을 받아도 1개월 전에 예약을 하고 기다려야 했다. 힘들게 시작된 요가가문이 이어져가고 있는 그 자체가 요가뿌리이다.
월빙 시대의 주역 요가는 새롭게 태어났다
음식을 적게 먹고 연한 블랙커피 한잔을 마시고는 운동 호흡 명상으로 연결하여 인도고전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며 월빙 시대를 이끌어가는 월빙 요가..... 결혼을 미루는 세대들과 아이를 안 낳을려는 세대들, 그리고 인생은 60부터를 주장하는 주부들의 의식이 병원에서 주는 약보다는 운동을 해야 건강하고 오래살수 있다는 의식수준 발달로 힘들지 않고 몸은 활력이 생기고 마음은 편안하고 회춘이 되는 요가를 배우기 위하여 요가센터는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다. 드디어 요가시대는 다시시작 되었다.
미국에서 요가인구 2000만명을 돌파하면서 그 위력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요가붐은 다시일어 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옛날의 요가붐과의 차이점은 전문화된 다양한 쿼리귤럼(교과과목)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L .H 백화점 문화센터에 요가회원이 1200여명 이상이 모인이유도 다양한 요가과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건강관리요가, 체질개선(치료)요가, 비만관리요가, 각선미를 위한 요가, 인도정통요가, 명상요가, 라자요가, 임산부관리요가, 산후관리요가, 체형관리요가, 인도고전요가, 인도 아유르베다요가, 어린이요가, 실버요가, 호흡요가, 개인처방요가....등 다양한 교과과정이 다양한 계층의 요가 매니아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은 더 큰 발전으로 가는 길이다.
첫댓글 코리아다이어트단식원 글이다.
긴 글이다. 그러나 한국 요가의 현모습을 이해하기 좋은 자료다. 몸고치는 요가의 현주솔르 말이다. 심신 통합, 심리 현상 연구, 명상은 어디로...
맞습니다. 제 자신부터도.....끄덕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