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열풍이 거세다. 얼마 전 한 일본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자기는 한국 남자가 다 2PM이나 슈퍼주니어처럼 멋진 줄 알고 있었다. 내가 한국 남자는 다 그런 아이돌 그룹처럼 생겼다는 환상을 깬 건 미안하지만 어찌됐건 참 뿌듯했다. 한류 열풍은 그 나라의 이미지까지 개선하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한류 열풍이 비단 연예계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축구의 한류 열풍도 거세다. 오늘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축구의 한류 열풍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박성화 감독은 미얀마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사진=연합뉴스)
박성화 감독, 미얀마의 영광 재현을 위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을 이끌었던 박성화 감독은 올림픽이 끝난 뒤 중국 프로축구 다롄 스더 감독으로 2년 간 활약했다. 그리고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아시아에서도 한참 축구 실력이 떨어지는 미얀마로 향했다. 그렇게 지난해 12월부터 미얀마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의외의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얀마는 과거 한국과 경쟁할 정도로 축구 실력이 뛰어났다. 지금은 비록 실력이 떨어졌지만 가능성 있는 팀이라 도전해 보고 싶었다.” 박성화 감독은 2013년까지 미얀마 대표팀을 맡게 된다.
박성화 감독이 미얀마를 맡게 된 건 미얀마 대통령의 ‘한국 축구 사랑’이 한 몫했다. 과거 ‘버마’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일격을 가했던 미얀마는 1970년대 들어 국가가 혼란에 빠지면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미얀마 축구계 역시 부정부패로 얼룩지면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시아에서도 3류로 전락한 미얀마 축구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싸맨 미얀마 대통령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 “한국 축구가 무척 강하다. 한국의 감독을 모셔오라.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대통령이 불호령을 내리자 미얀마축구협회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미얀마축구협회는 곧장 대한축구협회에 한국 감독 파견을 부탁했고 박성화 감독이 결국 지휘봉을 잡게 됐다. 여기에 현지에서 가스 개발 사업을 펼치고 있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보조를 맞췄다. 대우인터내셔널이 박성화 감독의 연봉을 부담하기로 한 것이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68위의 약체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탈락한 미얀마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2009년 프로축구가 출범한 뒤 최근 들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대표팀 경기에서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열기가 뜨거운 미얀마 축구를 한국인 감독이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참 자랑스럽다. 미얀마는 최근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갖기도 했다.
김판곤 감독은 홍콩 축구 역사를 새로운 인물이다. 그가 가면 길이 됐다. (사진=연합뉴스)
토트넘 꺾은 홍콩 클럽을 아시나요
우리에게는 세 번이나 부산아이파크 감독대행을 해 더 잘 알려진 김판곤 감독도 홍콩에서는 히딩크 못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2009년 홍콩 축구 역사상 주요대회에서 거둔 최초의 우승은 여전히 홍콩 축구팬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다. 김판곤 감독이 이끄는 홍콩은 2009년 동아시아대회에서 한국 내셔널리그 선발을 4-1로 대파한 뒤 북한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에 진출해 일본과 맞붙었다. 0-1로 뒤지다가 후반 들어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낸 홍콩은 결국 승부차기에서 4-2로 승리를 따내고 한국의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신화를 일궈냈다.
하지만 결국 김판곤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홍콩 대표팀 감독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다. 홍콩 프로축구팀 사우스차이나와 대표팀을 겸업하던 김판곤 감독은 대표팀 감독이 전임제로 변경되면서 홍콩축구협회로부터 가장 강력한 러브콜을 받았다. 사우스차이나에서도 김판곤 감독이 대표팀으로 떠나는 건 당연히 반대했고 결국 그는 대표팀 감독을 포기하고 사우스차이나 감독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 김판곤 감독은 비록 친선전이었지만 2009년 사우스차이나를 이끌고 토트넘을 2-0으로 제압하는 홍콩 축구 역사상 최대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토트넘에는 로비 킨과 저메인 제나스, 로만 파블류첸코 등 주축 선수들이 대거 경기에 나선 바 있다. 스파르타 프라하도 사우스차이나의 제물이었다.
서울시청 축구팀이 해체된 뒤 2004년 브루나이 대표팀을 맡게 된 권오손 감독은 2년 계약을 세 번이나 연장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브루나이 왕실이 권오손 감독을 체육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할 정도다. 신생 독립국가인 동티모르에서 축구와 함께 꿈을 전파하고 있는 김신환 감독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티모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가니스탄에는 이성제 감독이 있다. 축구공 살 돈도 없어 축구를 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비를 털어 직접 지도하는 이성제 감독은 아프가니스탄 축구의 희망이나 다름없다. 이성제 감독은 가난한 선수들을 위해 쌀과 기름을 사주기도 한다. 김상훈 감독 괌을 이끌고 2007년 U-16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마카오를 1-0으로 제압했다. 이 승리는 괌 축구 역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승리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돼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청소년 및 올림픽 축구대표팀을 맡아 희망을 전하고 있는 이성제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태호 감독 “한국 이기고 싶다”
과거 대전시티즌을 이끌었던 이태호 감독도 최근 대만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대전에서 물러난 뒤 신안고와 동의대 감독을 역임했던 그는 이후 브라질과 과테말라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다. 많은 이들은 이태호 감독이 다시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홀연히 네팔로 날아갔다. 그것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네팔 클럽팀 MMC를 맡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이태호 감독이 이끈 MMC는 놀랍게도 네팔에서 전승으로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네팔 경찰청 팀도 이태호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네팔 경찰청도 전혀 다른 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축구협회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감독님. 대만에서 감독님을 모시고 싶다는군요.” 대만축구협회에서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이태호 감독에게 영입 제안을 보낸 것이었다. 네팔에 잠시 머물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프로리그 감독 자리를 알아보려던 그는 고민했다. 한국에서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태호 감독은 대만행을 수락한 뒤 이런 결심을 굳혔다. ‘대만 축구가 한국을 꺾을 때까지 한 번 도전해 보자.’ 이태호 감독은 지난해 6월 1년 계약으로 대만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이태호 감독은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예선부터 대만을 지휘하고 있다.
한국 여자 대표팀을 두 차례 이끌었던 이태훈 감독은 최근 캄보디아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아시아에서도 가장 약체로 평가받던 캄보디아는 이태훈 감독이 부임한 뒤 우리에게는 브라질이나 다름 없는 라오스와 말레이시아를 제압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면서 충격을 선사했다. FIFA 랭킹이 180위였던 캄보디아는 최근 150위권에 진입하면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동안 형편없는 축구 실력으로 실망했던 캄보디아 국민들은 이태훈 감독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등 나라 전체가 축구에 대한 응원 열기로 뜨겁다. 이태훈 감독은 연봉 5천만 원과 거주비, 자동차 지원이라는 캄보디아에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스리랑카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장정 감독이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사진=스리랑카축구협회)
장정 감독 향한 스리랑카의 간곡한 부탁
스리랑카에서 ‘롱런’한 장정 감독도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그는 1987년부터 2년간 K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한 뒤 말레이시아에서 선수 겸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싱가포르로 날아가 지도자 경력을 쌓았고 2006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스리랑카축구협회가 대한축구협회에 유능한 감독을 부탁한 것이었다. 특히 영어에 능통한 이를 원하던 스리랑카는 장정 감독에게 큰 매력을 느꼈고 2006년 스리랑카 U-23 대표팀을 맡았다. 장정 감독은 이 대회에서 3위에 오르는 성적을 내며 가치를 입증한 뒤 곧이어 성인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됐다.
성인대표팀을 이끌면서 큰 발전을 일군 장정 감독은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스리랑카축구협회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렇게 가면 스리랑카 축구 발전이 더디다. 어린 선수들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 내가 다시 청소년 대표팀으로 돌아가겠다.” 결국 스리랑카축구협회는 장정 감독의 뜻대로 그를 청소년 대표팀 지도자로 내려 보냈지만 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성인대표팀이 최고의 빅매치인 센트럴아시안게임에서 참패하자 스리랑카축구협회는 다시 장정 감독에게 의지했다. “다시 성인 대표팀을 맡아주시오. 지금 이 난관을 극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결국 그는 스리랑카축구협회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다시 성인대표팀을 맡고 있다.
그는 스리랑카 선수들을 데리고 자주 한국에 온다. 스리랑카 성인 대표팀에게는 최고의 연습상대인 한국 대학 축구팀과 격돌하기 위해서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스리랑카 대표팀의 전지훈련을 지원해 주고 전남도체육회는 자비를 털어 이들에게 훈련 용품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스리랑카는 장정 감독은 물론 한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축구화 하나 제대로 구입하기도 쉽지 않은 스리랑카로서는 최고의 훈련 파트너와 최고의 장비를 선물하는 한국에 무척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장정 감독의 스리랑카 생활은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최윤겸 감독은 최근 베트남에 진출해 축구 한류를 이끌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들이 있어 한국 축구가 빛난다
최근에는 부천과 대전을 이끌었던 최윤겸 감독이 베트남 1부리그 호앙 안 야 라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최윤겸 감독은 올해부터 일단 한 시즌 동안 팀을 맡아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베트남 현지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이 팀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최윤겸 감독과 계약을 맺을 때 이런 말을 했다. “한국 같은 강한 팀을 만들어 달라.” 아들은 ‘샤이니’라는 그룹으로, 아버지는 ‘한국의 축구 감독’으로 한류를 이끄는 모습은 참 흥미롭다. 이렇게 문화뿐 아니라 우리가 잘 주목하지 않았던 축구에서도 한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한국인 지도자는 이제 아시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자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성적을 선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가난으로 꿈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쌀을 선물하면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능력 있고 인간적인 한국의 지도자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은 참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지금도 아시아 전역에서 열악한 환경을 딛고 한국 축구를 전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모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건 어떨까.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축구가 빛이 나는 건 아닐까.
footballavenue@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