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thei.aust.com/music2/sinead.html
September '97
Feature Interview
Universal Mother
음악계에 있어서 여성의 역사는 인정받고 동등해지기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물론, 아이콘이 될만한 (여성) 가수들, 작곡가들 그리고 섹스 심벌들이 많이 있긴했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갈채를 받는 것은 남성쪽이었죠.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최전선에서 이러한 상황에 맞써왔고 여성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어온 결과, 새로운 여성 가수들이 90년대 말에 음반업계와 세상을 집어삼킬 듯히 호령하고 세상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릴리스 페어(사라 맥라클란 등이 여성 음악인을 모아 벌인 음악축제)이후의 시대인 1997년, 여성들은 록음악을 하고 포크 음악, 힙합 등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여성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전선이 남성진영 쪽으로 많이 옮겨온 것은 사실입니다. 재니스 조플린, 로라 나이로가 하늘에서 웃고 있겠네요. 그레이스 슬릭, 조니 미첼, 조앤 젯, 에밀루 해리스, L7 그리고 토리 아모스는 여전히 당당하고 도전적인 태도로 있구 말이죠.
그리고 신비롭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아일랜드의 사회`문화적 혁명이라할 시네이드 오코너가 있었죠.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iZINE 지의 제이니 마가렛이 찾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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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무례한 시선도 그녀의 분노에 흠집을 내거나, 그녀의 차가운 비난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녀가 교황사진을 찢어 미국과 미국 가톨릭의 분노를 초래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녀가 자신의 부드러운 음악과 미국국가가 섞이는 것을 거부하자 성난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어 무대에서 내려가게 하였고, 아동학대, 종교, 에이즈 그리고 낙태에 대해 그녀가 거리낌없이 얘기한 결과 그녀는 -특히 조국 아일랜드에서- 20세기 중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죠. 시네이드 오코너라.. 멋지고 고귀하고 신비로운, 언덕위의 성채나 고대 에메랄드 섬(아일랜드의 애칭) 곳곳에 세워져 있는 석상들만큼이나 강인한 현대의 여성 성직자. 그녀의 켈틱 언어로 매혹하는 심볼이자 뿌리깊은 터부에 저항하는 시 운동가. 그녀의 펜이 그녀의 칼이고, 그녀의 꾸밈없는 교향곡이 그녀의 갑옷인 현대의 잔다르크 같은 인물.
현혹적이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미를 가진 갓난아이와도 같은 솔직함과 분노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나이팅게일인 그녀가 포즈를 취하면 어떤 위치에서든 그녀의 다양한 페르소나가 드러납니다. 그녀의 독창적인 앨범커버에는 태아 모습의 그녀가 펼쳐져 있고, 입 한쪽에 담배를 물고 있는 외로운 반항아의 스냅샷도 있고, 피터 가브리엘이나 스팅과 편안하게 같이 있는 정치`사회적인 영령 같은 모습도 있으며 한이 서린듯한 눈빛의 악녀의 모습과 함께 어린아이인 아들 제이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앨범 북릿에 있는 사진)도 있죠.
최근에, 오코너는 그녀를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의 저주섞인 눈길이나 파파라치들의 피에 굶주린 듯한 추격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마치 불만에 쌓여 지난날을 회고하는 겨울을 보내듯이 그녀는 치료와, 자기인식, 양육 그리고 작곡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물이 놀랍도록 개인적이고 아름답도록 신선하며 평론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유니버설 마더> 앨범입니다.
오코너가 음반을 내지 않는 동안 음악계의 기후가 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아이슬랜드 팝의 여왕이라할 비욕으로부터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셰릴 크로우까지 여성 작곡가들의 무리가 선두에 발을 들여놓았죠.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고 강력한 듯이 보입니다. 이는 잊혀지지 않고, 원숙해지고 맑은 <가스펠 오크 EP> 앨범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할 삭발한 머리는 이제는 갈색 머리로 덮여있지만 반면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리낌 없는 감정으로 떨리고 있으며, 몇 달 전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그녀가 쉬는 기간 동안 그녀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 갈지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곧 발표될 앨범의 선배격인 <The Gospel Oak Ep>에서 그녀는 'I'm enough for myself'라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쾌활한 'Petit Poulet'를 통해서는 르완다인들의 어려움에 대한 분노와 분개를 노래했고 그녀와 그녀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는 이교도적인 묵례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이 여성적인 원리라는 점, 신이 어머니라는 생각은 떡갈나무를 통해 상징화되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오래된 전통이거든요. 그리고 어머니인 신에 대한 숭배는 성스러운 떡갈나무 숲이라 할 곳에서 벌어지곤 했었죠."
"'For my love'같은 노래는 정말 그냥 사랑 노래에요. 사랑에 영감을 받았지만 바로 또 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죠. 저는 이앨범이 정말 아일랜드적인 음반이자, 작은 음반이라고 생각하고 이곡이 그런 성격을 분명하게 해준다고 봐요. 애초에는 그냥 사랑노래이지만 동시에 아일랜드인이 조국을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는 개념도 이야기 하고 있지요. 그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특히 그렇게 누군가를 죽인다면 진실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셈이 될 땐 말이죠."
"제 생각에 앨범의 모든 곡들은 치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에요."라고 그녀는 말을 잇습니다. "맨처음엔 저 자신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경험상, 그리고 제가 인식하기에 세상사람들도 치유받고 어머니같은 존재의 보살핌음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저자신을 치유하고 어머니처럼 보살펴 줄 필요가 바로 이 앨범의 영감이 된 것 같아요."
이 앨범을 만드는 동안 두 번째 아이인 브리지틴 로이진 워터스("아일랜드의 여신의 이름을 따왔죠. 브리짓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여신이죠)를 가져 만삭인 오코너는 그녀 몸속의 고요한 물속에 그녀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여성적인 꾀를 자극했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저는 제 딸이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졌으면 해요."라고 덧붙입니다. "여자에한테 예를 들어서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안된다고 말하면 안돼요. 저는 제 딸에게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을 거에요."
"여성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나 여성성이나 타인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성인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요. 아름다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계속해서 그녀를 너무 종교적이라고 볼 것이고, 누군가는 영적이라고 보는 반면, 좀더 근본주의적이거나 이교의 힘에 거칠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아일랜드 여성이라는 점 자체에서부터 저는 언제나 이교도적이었던 것 같아요. 수 세기나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요." 잠시 말을 멈추고 데뷔 앨범인 <The lion and the cobra>를 돌아보면서 "그 앨범은 종교로 가득하죠. 그러니까 저는 이교적인 전통의 관점에서 언제나 굉장히 영적이었던 거에요. 아일랜드에서는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죠"라고 부드럽게 반복합니다.
그녀는 1966년에 아일랜드 글리나저리(Glenageary)에서 태어나 더블린에서 성장했고, 아주 어린나이에 부모와 헤어지고 가족을 떠나 비행소녀들을 위한, 도미니크 회 수녀 운영의 센터에 보내졌습니다. 그렇지만 1985년까지, 더블린 음악학교를 다닌 이후에 지역 밴드인 <Ton Ton Macoute>에 몸담았고, 거기서 남자친구이자 후에 매니져가 될 Fachta O'Ceallagiah도 만났습니다. 1년 후에 그가 오코너를 U2의 The Edge의 사운드트랙앨범인 <Captive>에 게스트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녀는 엔자인 레코드사의 Nigel Grainge와 Chris Hill의 눈에 띄게 되었죠.
친구들인 World Party의 앨범 <Private Revolution>에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아들 제이크를 낳으면서 그녀는 데뷔 솔로곡인 'Troy'를 진행했습니다. 같은 해 11경, 앨범 <The lion and the cobra>와 싱글 'Mandink/Drink before the war'를 내놓았죠. 계속되는 발매는 그녀의 힛트곡인 1990년 1월의 'Nothing compares 2 U'까지 이어졌죠. 석달 후 그녀의 (두번 째) 앨범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에서는 'The Emperor's new clothes'가 히트했습니다.
1991년에 오코너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래미 어워드의 얼터너티브 1990 앨범 부분 수상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녀는 아일랜드에서의 낙태반대법안에 대해 티비에서 반대의견을 표현하기도 했고,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밥 딜런 콘서트에서는 야유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관중들의 소음 때문에 밥 말리의 곡인 'War' 공연이 제대로 되지 못했고, 그녀는 이후에 바로 은퇴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경력에서 크게 어두운 부분은 그녀가 종교와 아동학대에 대한 것을 그녀의 가슴아픈 시를 통해 드러내면서부터 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그 기억으로 아파하기 일쑤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고통스러워한다고 했고, 제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고, 제가 겪어온 아동학대에 대해 얘기할 권리가 있고, 그 치유과정과 그 학대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죠. 상처를 드러내세요. 그게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는게 용기 있는 일이에요."
"많은 상담치료사들이나 상담치료사였다가 지금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저에게 자신들이 그런 얘기들을 사무실벽에 써놓고 상담하러 오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을 보고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털어놓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다고 편지를 보내오더군요. 물론 털어놓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들은 제가 그냥 관심을 끌고자 하는 좀 화가 난 여자가 아니라 뭔가 실제로 그 밑에 내포한 게 있다는 것을 이해하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얘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내와요. 성직자에게 절을 하고 자신들은 종교에 먹칠을 할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약속해야 한다는 점도 말하더군요."
일년 후에 오코너는 컴백 앨범인 <Am I not your girl?>앨범을 발표했고, 1994년에는 <Universal mother> 앨범을 발표하였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노출된 상태에서 성장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라고 인정하면서 "그건 사적인 공간에서든 어디서든 힘들어요. 그렇지만 계속 그렇게 해나가진 않을꺼에요. 왜냐면 동시에 제 상황을 좀더 낫게 하려는 욕구로 바꿔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불평만 하고 있진 않을 꺼에요. 제 삶은 제가 만든 것이기도 하니까요.."
혹자는 그녀를 아일랜드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녀의 강경하고 용기있는 태도에 비추어서 그런 면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젊은 날의 열정이 (하룻밤새에) 서른 즈음의 자조로 변해버릴 위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천사같은 얼굴에 비단으로 짠 듯한 목소리에 고통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이 나이킹게일은 그렇게 될 것 같진 않네요.
한 라디오 디제이가 그녀를 빗대어 한때 잘나가던 찬송가가 산산이 부서져서 세속으로 빠졌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달콤한 켈틱 아가씨의 음성이 성층권에 닿을 듯이 높이 울려퍼지는 것을 들으면, 그녀가 스스로의 분노나 공감대를 전혀 잃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횟볼과도 같은 인물이자 불안정한 미래의 시민들을 위한 계몽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10대를 가톨릭 수녀회문을 들락날락하던 불안정한 소녀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다정하고 흥미로운가 봅니다. 진정한 현대의 잔다르크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