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에서 소중히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와 고서적을 정리해서 물목를 만들어 오래 보관해 보자고........
시간 나는대로 연구 조사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 같고.......
어렸을 때 사랑방에 딸린 귀중품 보관하는 작은 곳간(항상 주먹보다 더 큰 자물쇠로 잠겨둠)과 건너방에 나무로된 큰 장식상 안에 가득 들어있던 그 휘귀하고 값진 좋은 책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희소의 가치를 알고 있는 가족 중에 누구라도 갖고 있다면 다행이련만....
1922년(임술) 11월 26일 부모님의 혼사시 외가(영양남씨)로 부터 받은 '허혼서'
당시의 아버지는 14세(기유생:1909년)이었고 어머니는 16세(정미생:1907년)로 얼마나 설레이셨을까?
'공유물 분할 계약서'
대정12년 3월 15일의 '대정'은 일본 연호이며 '서기 1923년' 이다.
그러니 휘 寧大 할아버지(丙申生, 작은 집으로 출후)가 28세때이다. 지내동 임야를 다섯분이 여섯 지분으로 분할 소유했는데 백전동, 화지동, 금동, 상동 어른들이시다. (당시는 예천면이었다)
참고로 明治元年 (めいじ)이 1868, 大正元年 (たいしょう)이 1912년, 昭和元年 (しょうわ)이 1926년, 平成元年 (へいせい)이 1989년이다.
'상례문서' 다. 아버지가 승중손으로 되어있으니 증조부모님 상인데 증조할아버지는 1915년에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는 1944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1924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신 순서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순이니다. 아버지가 승중손이 되자면 증조할머니 상이 틀림없다. 증조할머니(長興林氏,1858~1944, 87세)가 돌아가신 해는 1944년 내가 태어나던 전 해이다. 그러니 나와 작은 형수님 두분이 빠져있다. 다른 내용 해석은 좀도 알아봐야겠다.
무속(巫俗)의 경문(經文)이다. 본시 무(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영혼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고, 그것을 치유해보기 위해 노력하고, 중생의 복을 빌고, 또 비는 형태가 무속의 경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문은 불교의 경문, 성경의 경문 등이 있다.
이 명당경은 '불설명당경'으로
「불설명당신주경 안토지신명당경 여시아문일시불 천황대제수명장 지황대제정복수 인황대제액소멸 제석천황관재멸 대법천황오액멸 .........」
언제, 왜 이 경문을 사용했는지......
정사년(1977년)이면 69세, 돌아가시기 10년전이다. '연원제'(안동 제비원) 도유사를 역임하셨다.
연원제는 14세손 휘 혁(파시조 휘 지정의 현손, 나의 22대조)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관리하는 재실이다. 파시조 이후 4대의 분묘는 실전되고 분묘를 지키고 있는 제일 윗대 어른 이시다. 주위에 자 휘 용일과 증손 휘 치 두 분묘가 있다.
기미년(1979년)에 '지동제' 일을 맡아보셨다. 지동제는 용문의 못골에 있으며 (아직 가보지 못했음) 17세손인 (휘 지) 현감공파 중시조를 모시는 재실이다. 7형제 중에 네째로 여기서 판도공파, 문경공파, 현감공파, 판사공파, 현령공파로 나뉘어지고 두 분은 무후하다.
을축년(1985년)엔 예천향교에서 춘기 석전제시 아헌관(亞獻官.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을 위임받으셨다. 돌아가시기 2년 전이었다.
석전(釋奠)이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4성(四聖) 10철(十哲) 18현(十八賢)을 제사지내는 의식.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이다.
'만사(輓詞)' 이는 1915년(을묘년) 증조부(휘 형직) 상에 쓰던 만사로 글은 휘 형도(안골 혁첨이 형님네 조상으로 증조부 보다 14세 위 시다.)가 보내온 것이다. 왼쪽은 '족종형 형도 통곡 만'
-매도증서 뒷면-
1946년 6월 10일, 매도인: 예천군 농회 재산관리인 예천군 농회장 권대일, 매수인: 개포면 상동 299 권오규, 부동산 표시: 개포면 상동303번지 밭 733평, 대금 1,000원(앞면에 기제) ※ 서기요금 1원 50전 사서법사('사법서사'의 오자인가?) 박우서
참찬 노은(휘 명호, 9대조의 호) 권공 묘갈명 초안 ※ 좌승지에 '承' 대신 '丞'을 쓴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좌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써 둔것으로 볼때.........
'참찬공 수갈고유문' ~~~~~~~~ 기미 10월 상순 성주 이진환
-'매도증서' 앞면-
매매목적물: 예천군 개포면 상동 239번지 답 1118평 가격 500원
같은 주소 398번지 답 972평 가격 400원
매매대금: 900원
~~~~~~~~~~
소화 14년(1939년) 10월 25일 위는 '일본정부 수입인지 20전'이 붙어있고 오른쪽 아래 도장은 '등기제(登記濟)'와 '대구지방법원예천출장소인' 이다.
뒷면, 예천군 개포면 상동 300번지
매도인 김철진
예천군 예천읍 석정동 122번지
매수인 김도성 앞
서기료 16전 사법서사 강두원 인
※ 이 증서와 같이 붙어있는 또 한장의 증서는 매도인 김도성, 매수인 권오규로 된 매도증서가 붙어있다.
서기 1946년 5월 10일 가격 5700원, 그러니 900원이 7년에 5700원으로 표기되어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매 계약서'
부동산 표시: 상동 127번지, 논 1066평, 매매대금: 162,000원, 단기 4289(1956년)년 3월 8일, 매도인 권태석, 매수인 권오규
통정대부 승정원 증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9대조) 큰 산소 기미년(1979년) 10월 묘사 축문(초헌관 8세손 오숙)
※ 1979년 4월 묘비를 새우고 첫 묘사다.
홍갑사 상(裳:치마상) 8원 50전~~~~~~ 합계 80원35전, 계해 2월 15일 '경성부~~ 김종화?'란 고무인에 '일본정부수입인지 3전'이 붙어있는 걸로 보아 큰일 때 장본 물목으로 본다. 계해년이면 1923년이다.(고종이 붕어하시고 三一獨立運動이 일어난지 4년후이다- 대정12년-).
할머니(개성고씨)의 혼사시 연길을 보낸 택일 서한으로 본다. 경자(1900년) 9월 26일로 랑랑18세 이시다(1883~1981)
첫댓글 들여다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보물같이 보이는 것들이기에 올려 봅니다.
이제 모두 그리운분들 뵈올 수가 없으니 가슴이 아파요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