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차의 성질이 냉한 것으로 여겨 한국차를 외면하고 중국차(中國茶)에 빠져들었다. 차는 왜 냉한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민을 하다가 지난달 특집으로 한국 전통 제다법을 소개하면서 뜨거운 열탕법을 공개해 차 애호가들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차의 달 5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열탕법과 식혀서 마시는 방법을 놓고 우리 제다법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게 됐다.
지난 12일 밤 항주의 호반거(湖畔居)에서 본지와의 제휴사인 '중국차박람(茶博覽)' 잡지사의 관계자들과 차를 나누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마침 손장운(孫壯云) 차박람 편집부 주임이 이제 차계도 무역이 성행해야 한다는 말을 넌지시 꺼냈다. 이어 한국의 '차의 세계'와 '중국차박람' 잡지사가 공동편집국을 두고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중국전역에 알려지자 '차의 세계'를 통해 한국에 진출하려는 중국의 차 기업들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마침 그때 필자는 800년 전 송나라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이 송나라 황실 어용차인 용봉단차(龍鳳團茶)를 수입했고 의천을 통해 고려의 뇌원차(腦原茶)로 송과의 무역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마침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중국 '항주불학원'과 한국의 '차의 세계'가 공동 발의하여 의천 탄신 960주년을 기념하여 학술 연토회를 갖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말을 했다. 그때 손주임은 "최선생의 발군의 차문화에 대한 열정을 중국인들도 배워야 한다"며 극진한 예우를 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특용정차(龍井茶)가 나왔다. 용정차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황제가 강남에 내려왔다가 용정촌 부근의 사자봉(師子峰) 아래에서 잠시 쉬었을 때 용정차 한잔이 황제 앞에 나왔고 그 차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옥같이 새하얀 찻잔 속에 있는 한 조각 한 조각 어린 찻잎이 마치 작설(雀舌)과 같다." 그런 옛 고사를 이야기하자 호반거 주가찬(朱家撰) 부주편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놓고 동서(東西)가 손을 맞잡았다.
항주에서 갖는 첫 의천 차문화 교류
본지 발행인은 지난해 11월 10일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탄신 1100주년 학술연토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는데 그 때 「고려지종과 그 시대의 선사상」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행사를 주관한 항주불학원 광천스님에게 서호 근교에 고려사가 복원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자 필자는 2005년 제 3차 오월불교학술연토회의 주제를 의천 대각국사로 하자고 공식제의했다. 그 뒤 금년 봄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고 항주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제 3차 오월불교학술연토회를 6월 8일~10일까지 동방상무중심에서 갖기로 합의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지난 달 12일 항주불학원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불학원을 찾아 전반적인 토론을 거친 끝에 의천 대각국사 탄신 950주년을 기념하여 학술연토회를 갖기로 했다. 이번 학술회의의 핵심은 의천이 송과 차 무역교류를 한 점을 살펴 다예교류를 갖기로 했다. 학술회의 기간 중 중국항주불학원에서는 선종 보차의식과 용정차 품차(品茶)를, 우리 측에서는 숙우회와 반야로가 참여하여 선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렇듯 차의 본고장 항주에서 의천 차문화 교류를 갖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알다시피 의천은 송과의 차문화 교류의 산파역을 했고 고려사를 복원 한중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개성 흥왕사터에서 발견된 「대각국사묘비명」에 따르면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가 재차 경책(經⁄x)과 차향(茶香), 금백(金룸) 등을 보내 국사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밖에도 송나라에서는 대각국사 의천에게 용봉단차를 선물한 것을 계기로 고려로 수입되었고 고려의 뇌원차 또한 의천을 통해 송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것 등을 상기해볼 때 본지와 항주불학원과의 만남은 매우 뜻 깊다 할 수 있다.
세계의 차가 변하고 있다
20g에 2500만원에 팔린 세계의 차 대홍포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공식적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차왕은 없다. 다만 농림부에서 명인제도를 도입 수제차 명인이 탄생했다. 그런데 우리 차산지를 살펴보면 모두가 차박사요 차의 달인들이다. 어찌 그토록 차천지가 되어 버렸는가? 이유인즉 대대로 명맥을 지켜온 명인이 없다는데 기인한다. 차왕은 고사하고 중국에서 흔한 차박사(茶博士: 차를 우려내는 사람), 다예사(茶禮師: 차를 갖가지 다예로 표현)가 없다. 한국차계에 태풍처럼 몰아온 묻지마 다예사 열풍도 한국차계가 안고 있는 현실 중의 하나이다. 일찌감치 중국에서 다예사를 배워온 중국 다예연구가인 김영숙 씨는 차를 우리는 방법 또한 기교이며 예술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우리 차계에 300여명이 다예사를 중국으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다예 열풍에 힘입어 작년부터 '티 소믈리에'라는 독특한 차전문가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차문화를 말할 때 겉으로는 한국 전통차의 색과 향기와 미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은 모두가 중국차에 의존하며 안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알다시피 중국은 거대상인의 등장으로 차문화가 국가전략 산업으로 발전하는 추세이다. 지난해 12월 중국 명차 중의 하나인 무이산 차가 20g에 2500만원에 팔렸다. 그 차를 상하이(上海)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한 홍콩 여성기업인이 경매를 통해 사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2002년에 광주차박람회에서 금값보다 18배 비싼 푸얼차를 100g에 2300만원에 사들인 광동성 순덕시의 한 기업인도 보았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품격차 생활을 즐기고 있음을 실감했다.
변화하는 세계의 차와 묻지마 한국의 차
우리차의 소비량은 년간 2000억에 이른다. 하지만 그 중 티백류의 소비량이 70%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대부분의 티백류가 중국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차 애호가들도 많지 않다. 중국에 차밭을 임대 계약한 우리 기업 또한 적지 않다. 태평양이 안휘성 광덕에 18만평을 시작으로 무이산과 대만에까지도 한국기업 여러 곳이 차밭을 계약하고 있다. 세계 차왕의 대열에 오른 이서하 회장이 이끄는 천복집단은 중국 10대 명차의 차밭 계약을 속속 중국정부와 체결하고 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필자가 중국과의 차문화 교류에 앞장서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중국정부 측에 차 무역을 제시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를 뿌리치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장사꾼의 길과 언론인의 길 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고 말하자 그들은 적극 수용하면서 오히려 이를 계기로 중국 관리들과 더욱 절친해졌다. 본지가 중국과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중국국가와 기업이 본지를 통해 물밀 듯이 한국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본지를 통해 광고유치등 중국기업들이 적극 광고에 나섰다. 적극적 학술 교류 등을 통해 우리 차문화 교류 20년사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 평가 받고있다. 이 점에 대해 중국차 연구가들은 '차의 세계' 발행인의 정신을 중국인이 배워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차 한국에 간다
태평양이 30년간 계약한 안휘성 광덕 태평다원
지난 13일 필자는 호주를 거쳐 중국 차 연구가인 구단과 주민 씨와 함께 백차의 고향 안길에서 뜻밖에도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중국은 지금 하무차(霞霧茶)를 한국의 입맛에 맞게 생산하려고 합니다." 이 말을 중국 차 연구가인 구단이 넌지시 꺼낸 것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 한국에 선차행다례가 유행하듯이 태고 보우국사의 정신이 녹아 있는 하무차를 개발하는 것은 곧 한국차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발단은 지난해 11월 10일 중국 호주신문을 통해 석옥청공의 시를 통해 본 사상이 신문 지상에 공개되면서 호주시 관리들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지난해 8월 본지 발행인과 구단 선생이 나눈 이야기가 지상신문에 공개되면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다시 그때 내용을 보자. 그(본지 발행인)가 갑자기 물었다.
진지하고 흥겨운 품차회의 모습
"석옥이 심은 15그루의 차나무가 아직도 있는지요?" "750년 전에 심은 차나무가 어떻게 있겠어요?" 라고 답해왔다. 이 이야기가 일파만파로 번져 호주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 차를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차로 만들려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중국차계는 지금 변화하고 있었다. 2005년 5월 항주, 호주, 광덕 등 주요 차산지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중국은 차의 세계화를 위해 현재 몸부림치는데 아직 우리 차계는 정중동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고비는 W.T.O(세계무역기구) 개방을 통해 물밀 듯이 중소기업이 한국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한다. 한 예로 태평양 차밭이 있는 안휘성은 한국과 매우 밀접하다. 그 옛날 지장법사가 차 잎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간 것이 그 계기였다. 최근 지주시는 구례와 자매 결연을 맺었고 그러한 안휘성이 한국적 정서를 내세워 안휘의 차(茶)는 곧 한국이더라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왜 뜨거운 차여야 하나
지금 세계의 차 중심 음다풍은 뜨거운 열탕법이다. 오직 한국만이 식혀 먹는 차를 고집해 오고 있다. 따라서 차 제다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세계 차 시장에 한국차가 잠식당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최근 덖은차 제다 실습장을 연 혜우스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차는 냉하지 않다는 지론을 내놓았다.
한국차의 제다법이 개선되지 않는 한 외제차의 홍수를 피할 수 없다
"찻잎의 본래 성질은 냉하나 차로 만들어진 후에는 그 성질이 평(平)해집니다"라고 말씀한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따라서 한국차의 제다법이 개선되지 않는 한 외래차의 홍수를 피할 수가 없다. 면면히 이어온 한국 차의 제다 비법은 거의 뜨거운 열탕법이었다. 한국의 차에서 세계의 차로 도전하는 그 길만이 한국차가 살 길이라는 생각이 모든 차인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본지가 중국을 찾을 때마다 놀라운 사실은 중국차 전문가들로부터 귀한 차를 선물받게 되는데 차마다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 맛이야말로 왕포나 육우, 노동이 즐겼던 것이 아닐런지. 늘 깨어나는 중국인의 차의 정신 속에서 한국차의 정신을 찾아보자. 그 길만이 우리 차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