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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며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라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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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다. 이 법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 구금, 고문에 시달렸다. 재일 조선인들은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지만, 국보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재일 조선인이다. 서경식 교수는 간첩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고문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난로를 끌어안았던 서승 선생과 인권운동가 서준식씨의 동생이기도 하다. 서경식 교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서툴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고 말한다.
일본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의 신분으로 사는 서경식 교수는 최근 그 삶을 담은 책(<소년의 눈물> 돌베개 간)을 펴내 재일교포로는 처음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서 교수는 지난 16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한국 독자들이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외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혹은 그들이 살던 지역)'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좋겠다"며 "이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이날 가진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논란을 비롯해 재일 조선인들의 참정권 문제, 과거사 청산문제와 일본의 반성, 디아스포라로서의 삶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다음은 서경식 교수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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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는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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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는 국내에서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으로도 이름이 높다.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등을 출판했으며,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서경식 교수는 전작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슬픈 가족사와 미술작품과 완벽하게 조화시켜 독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낸 <소년의 눈물>도 서 교수 문체의 독특한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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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국보법 개폐논쟁이 한창이다. 일본에서도 이 논쟁을 접했을텐데.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이 법의 폐지가 공론화 된 것에 감사를 느낀다.
- 재일 조선인 사회도 국보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국보법 철폐문제를 말하겠다. 재일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배 결과 일본사회에 남게 된 조선인이다. 해방 후 일본정부는, 1952년 재일 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부정했다. 그래서 재일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또, 재일 조선인들이 소속돼야 할 한반도는 분단에 직면하게 됐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잘려 있지만,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릴 이유가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리지 않은 '하나의 집단'으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그 일본사회에서 집단으로 존재하는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가보안법이다.
재일 조선인들은 한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인데, 아들은 거류민단 소속인 경우, 또 가족 중 어떤 이는 북한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한국에 가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가족들 중 한 사람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너의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이거나, 북한에 갔다고 해서 한국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시대의 산물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사람들에게나 재일 조선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던 법이다."
- 재일 조선인들이 국가보안법으로 당한 피해는 주로 어떤 것들인가. "1965년 한일협정 조인으로 인해 나는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자유롭게 이주하고 유학도 가능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두 형님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현실이 벌어졌다. 재일 유학생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옥고 치른 사람이 100여명이다. 1970년대 이후 정치범으로 몰린 유학생들이 100여명이다. 대학 선후배들, 조총련계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진짜 많았다.
지금 내가 100여명이라도 얘기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눈에 보이는 일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은 사건을 치면 더 많았을 것이다."
- 대표적인 악용사례가 있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정책으로 우리 민족교육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어하는 데도 국가보안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자기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승 형님의 경우, 초기 유학생이었다. 서승 형님은 한국에 간 뒤 간첩단사건에 걸려 국보법으로 고초를 겪었다. 본국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하고 싶었는데 옥고를 치른 것이다. 유학생들이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만, 나도 서승 형님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서승 형님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알고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국보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본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형성하는 데 큰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국보법은 남북분단의 장벽이자 남한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장벽, 국내와 해외 동포들을 분단시키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마당에 그 일원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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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NPO전야의 이사로도 활동중인 서경식 교수는 "재외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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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 분단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에 살면서 이런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당연히, 나도 혼란스러운 나라를 못 본 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옥중에 계셨던 두 형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좋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재일 조선인으로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안락한 사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 일본사회에 대해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은 무엇인가. "해방 뒤,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배를 평가하고 책임지는 사회였다면 긍정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일본사회가 역사적 책임을 부정하는 마당에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내면적인 이유가 있다. 열 다섯의 나이에, 1966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때 경험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재일교포 하계휴가학교였는데, 주로 반공교육과 우리말교육을 하는 '섬머프로그램'이었다. 이때 처음 받은 인상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비참함이었다.
일본에서 넉넉하게 산 편은 아니었지만, 껌 파는 아이들과 구두 닦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만일 인도나 에티오피아처럼 여행자의 마음으로 조국을 방문했더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돈 좀 주세요!' 하는 소년은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뒤 사촌 할아버지가 귀국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 남아 한국으로 귀향한 친척들의 생활비를 보탰다. 아버지가 그들처럼 귀향했다면 나도 그 소년들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나. "당시 나는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전방에 갔었다. 망원경을 통해 북한군을 바라보았고, 그때 우리들은 이 북한군이 언제 남한을 칠 지 모른다는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북한 쪽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일본에 살던 동포들이 저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받는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북송선을 탔다. 그들은 조만간 남북통일이 되어 곧 만난다는 기대를 가지고 북으로 갔던 것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이 분단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나도 북한에 갔을 지 모른다. 또, 경제적으로 가난했다면 북으로 갔을 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민족통일은 선진조국의 건설을 바라는 게 아니다. 식민지 시대이래 분열된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통일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민족통일은 각기 떨어져 있는 자신의 분신을 자유롭게 만나고,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북한, 중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우리 민족들이 서로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해외동포법도 마찬가지다.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10만 명의 해외동포들은 이 법의 대상자가 아니다. 이 법의 목적은 재미동포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데 있다고 들었다. 이 법은 남북대립 상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세력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재일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서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 현재 해외동포들은 선거권이 없다. 따라서 참정권이 금지돼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놀라운 일이겠지만, 재일 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우리는 투표권이 없다. 본국에 대한 투표권과 일본 정치에 대한 참정권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우선, 국내문제를 먼저 말하겠다. 대통령선거와 국민투표의 경우에는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정부가 어떤 정부냐는 재외동포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정부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애매하게 넘어갔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 상황과 지금의 정치의식은 굉장히 다르다. 지금의 정치의식은 매우 성장해 있다.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재일 동포들의 참정권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 재일동포들은 국내선거에 관심없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에서는 재일 동포들이 이기적이다, 정치의식이 없다, 무관심하다고 비판하겠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다. 정치행위를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한일협정 체결당시 일본사회도 매우 시끄러웠다. 그때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똑같이 평등선거를 치렀다면 우리는 그 협정에 반대했을 것이다. 한일협정은 결코 재일 조선인에게 유리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는 어떤가. "일본의 경우,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만 투표권을 준다. 헌법상으로는 국적에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다.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은 투표권은 준다는 규정이 있다. 물론 나는 주민세를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투표권이 없다.
오사카의 이쿠노구의 경우에는 재일조선인이 1/4이다. 이들이 이 지역 주민세의 1/4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지방자치법에 따라 투표할 수 없었다. 최근 이런 기묘한 상황을 인식한 사람들이 외국인 중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언론은 이 움직임을 반대하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투표하고 싶으면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해 역사적 청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더러 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굴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국적 있는 사람들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국민주의'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한국정부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보호한다. 한국정부의 '국민주의'도 일본의 '국민주의' 흐름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재일 동포인 정태균 코마자와대학 교수는 일본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재일 조선인들에게 주민자치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 정태균 교수는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일본인이 되지 않느냐, 왜 참정권을 주장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정태균 교수의 말은 일본 우익들이 좋아하는 발언이다. 더군다나 일본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이 말은 매우 힘 빠지는 발언이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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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새 책 <소년의 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디아스포라를 동정하기보다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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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현재 과거사 청산 논의가 진행중이다. 이 논의의 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화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것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의 공동저자 다카하시 테츠야 선생에 대해 말하겠다. 다카하시 선생은 화해, 진상규명, 용서 이 세 가지에 대해 말했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사회의 경우, 화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진상규명은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찾기 위한 기본인데도 마치 진상규명이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양 인식되고 있다.
원리적으로 보면, 죄가 있어서 용서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재일 조선인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춰보자면 식민지배가 있었는지, 누가 식민지배를 했는지, 누군지 알아야 죄를 물을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왜 식민지배를 했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그 이유는 철저하게 해결하지 못한 애매한 역사가 이어져왔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자꾸 화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사하거나 사과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도 가해자에 대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진상규명, 진실을 밝혀내는 게 필요하다. 가능한 한 섬세하게 조사하고 진상규명의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없다. 과거사 청산은 애매한 화해를 위한 게 아니다."
-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는 한국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책이다. 이 책에 이어 <소년의 눈물>이라는 새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내용들의 배경과 설명이 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 1960년대는 일본이나 조국이나 민족의 분기점이었다. 분기점을 사춘기로 보내면서 일본사회의 두터운 장벽에 고립됐고, 나는 조국과 조국의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이 책의 특징은 소수인 재일 조선인이 다수인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 한국독자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한국독자들이 '디아스포라'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탈리아계의 유태인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강력히 비판했었다. 당시 프리모 레비는 유대민족의 역사 중에 있는 '디아스포라'적 전통을 상실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어 레바논을 침공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정체성이라는 말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국가와 연결시키면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자기의 식구가 누구냐, 이웃이 누구냐, 이런 것을 되풀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 같은 '디아스포라'는 하루도 못 살 것이다.
유태인은 유럽에서 넓은 시야와 관용의 정신을 갖고 살고 있다. 우리도 국가를 통해서만 여러 세상을 보는 것을 넘어야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니지만 한국의 동포들도 재일 조선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오마이뉴스
어느 재일조선인의 우울한 독서 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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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독감 27] 일제와 한국 독재정권에 할킨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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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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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 - 에리히 케스트너 독서에 파묻힌 소년 1970년대 말, 영어의 몸인 서준식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때, 저자는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다음과 같이 독서 행위를 정의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自己硏鑽)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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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경식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그 무엇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 독재정권의 가혹함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 돌베개, 2004 | ‘재일조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던 저자의 독서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일하게 혼자만 재일조선인 학생으로 다닌 중학교 영어 시간에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웠을 때 저자가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머뭇거려야만 했던 것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저자의 책 읽기는 일본 내에서 소수자라는 아픔과 슬픔을 상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저자는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라는 관념이 싹트게 된 것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과 ‘사춘기 교양 콤플렉스’에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독서 행위는 여느 어린 아이와는 사뭇 달랐다. ‘캠핑 따위보다는 집에서 책 읽기를 더 좋아했’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에는 꾀병을 부려 집에서 네댓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더군다나 야구 시합에서 정규멤버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이제 집에 돌아가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기까지 했다. 어린 그에게 안중근의 저 유명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는 말은 평생의 화두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명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일별해 보자. 저자의 독서 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인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 엘리자베스 루이스의 『양쯔강 소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현대시인선집』, 토마스 만의 『만의 산』, 루쉰의 「고향」ㆍ「아Q정전」「광인일기」,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버거운 책들로 장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의 주인공 마르틴 타라가 내뱉은 “절대로 울지 말자”는 말을 되뇌이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추억」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능숙하게” 그려내 오랫 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것은 소설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끝없는 논쟁 뒤 /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숟갈을 홀짝인다 / 혀끝을 만지는 그 쌉싸름한 맛 / 나는 알겠네, 테러리스트의 / 슬프고도 애처로운 그 마음을.” 이것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코코아 한 숟갈」이라는 시인데, 여기에서 ‘테러리스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또한 언젠가 꼭 정복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읽지 못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그래서 저자는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지목한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닌 일본 사회에도 날카로운 눈을 벼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모국어로서의 조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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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은 ‘재담가’로, 서준식은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로 저자는 두 형을 기억한다(앞쪽에서부터 저자인 서경식, 셋째 형 서준식, 둘째 형 서승) © 돌베개, 2004 | 1971년 박정희 정권은 4ㆍ27 대선을 열흘 앞두고 서승ㆍ서준식 형제를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그들이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했다고 하지만, 날조된 거짓말이었다. 이 사건으로 서승은 무기형을,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승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참지 못해 기름을 붓고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둘째 형인 서승은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민단계 재일한국인 학생단체에 가입하여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동생에게 이야기보따리이자 재담가였다. 저자는 그의 셋째 형인 서준식을 “애초부터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이자 “전도유망한 기계체조 선수”로 기억한다. 그런데 서준식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조선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들의 영향으로 저자는 자기 자신이 지리수업 시간에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논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일본인 아이가 일본은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자, 그 아이를 루쉰의 「광인일기」에 나오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과 서양의 책들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독서에는 허남기 시인의 『조선의 겨울 이야기』와 김소운이 편역한 『조선시집』도 들어 있었다. 허나 ‘모국어 상실자’인 저자가 조선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조선인이었지만 조선어를 전혀 몰랐던 저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웠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한국 이름을 썼다.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선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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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상실자’인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울 수 있었다(왼쪽에서 두 번째 줄 세 번째 아이가 저자 서경식이다). © 돌베개, 2004 | 당시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만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 조잡한 것, 어딘지 뒤끝이 씁쓸한 것, 볼썽사나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저자는 대한민국보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 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해야만 하는 저자의 비애와 고통은 누구도 추량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서경식, 이목 옮김, 『소년의 눈물』, 돌베개, 2004년)은 단순한 독서 에세이가 아니다. 전경에는 어린 시절 자신을 지배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와 후경에는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암울한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그려 놓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의 독재정권의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고, 독재정권의 공작으로 두 형을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 남겨둘 수밖에는 없었던 동생의 애틋한 사랑도 배태되어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겪은 경험들은 이후 그의 삶을 온이로 바뀌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부여한다. “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 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 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은,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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