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LG엔시스 사보 2003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얼음썰매타기의 추억
겨울이다.
양지바른 골목에서도 얼음이 꽁꽁 언 냇가에서도 아이들의 놀이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어져 메아리쳤던 아이들 ‘놀이소리’ 지금 그 소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추억을 더듬는 TV프로그램에서,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에서 소줏잔에 섞여 들려 올 뿐 이제는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세대가...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추억’이라는 두 글자는 존재할까?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눈을 감아 추억의 문을 두드려 본다.
훌쩍거리는 콧물을 옷소매로 닦아가며 어머니의 잔소리와 추위에 상관없이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그렇게 쉼 없이 놀았다.
‘얼음썰매’, ‘연날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오징어’, ‘팽이치기’, ‘술래잡기’, ‘비석치기’, ‘총싸움’ 등 날 밤을 세며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을 만큼 우리들의 놀이는 풍성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놀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얼음썰매 타기’이다.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고 얼음소식이 전해오면 ‘뚝닥 뚝닥’ 온 동네는 얼음썰매를 만들고 고치는 소리로 시끄러워 지기 시작한다.
“할배 백 원 만 주소”
“뭐할라꼬?”
“스케이트 만들라꼬요”
“옛다.”
할아버지의 바지춤 은행에서 꺼내 주신 돈으로 대못과 철사를 사와 동네 형들 틈에서 낑낑거리며 얼음썰매를 만들었다.
얼음썰매가 완성 된 밤은 내일 당장 얼음이 꽁꽁 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로 가장 긴 겨울밤을 보내야 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 얼음이 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얼음썰매를 들고 냇가로 모여 들었다.
얼음썰매 타기는 얼음이 깨어져 빠지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준비과정을 밟는다.
먼저 제법 큰 돌멩이를 얼음위에 던져서 일차적인 두께를 확인하고 그다음은 놀이대장의 지시에 의해 몸무게가 가벼운 아이부터 차례로 얼음 위를 걸어보게 한다.
‘타도된다.’라는 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고 바로 얼음 위로 들어가지 않는다. 형들 중에 한명은 얼음이 잘 깨지지 않도록 ‘숨구멍’을 만들면 그제 서야 본격적인 얼음 타기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모두 흥분된 마음으로 얼음 위를 마구 달리지만 잠시 후 부터는 나름대로 정해져 있는 순서에 의해 얼음위에서의 놀이가 착 착 진행된다.
오전에는 빠르게 달리는‘경주대회’와 송곳을 스틱으로 삼아 노는 ‘아이스하키’ 얼음조각을 공으로 사용하여 즐기는 ‘얼음축구’를 하였고 오후에는 얼음에 구멍을 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함정 지나기’, 그리고 얼음을 출렁거리게 만들어 놓고 그 위를 지나가는 ‘출렁다리 건너기’로 스릴을 즐겼다.
서산에 해가 걸릴 때 쯤 마지막 놀이를 즐기기 위해 송곳으로 얼음을 깨기 시작한다.
쓸데없는 얼음은 떠내려 보내고 사람이 올라서도 될 만큼의 얼음 배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냇가의 양쪽에서 송곳으로 밀어주는 힘대로 얼음 뱃놀이를 즐겼다.
모든 놀이가 끝났다고 집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집으로 갈수도 있는데 어머니의 잔소리가 무서웠는지 아니면 귀찮았는지 너나 할 것 없이 젖은 신발과 양말을 말리기 위해 모닥불 주위에 올망졸망 모여 들었다.
양말과 옷감의 소재가 나일론이었던 그 시절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양말은 오징어 구이처럼 오그라들고 바지에는 불씨에 탄 콩알만 한 구멍들이 군데군데 뚫어 졌다. 그럴 때 면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골목에서 어머니의 진정된 허락을 기다리기 위해 어슬렁 거렸었다.
모닥불에 말리던 양말에서 피워 오르던 괴상한 냄새와 김, 그리고 단 둘이 동네 근처 저수지에 얼음썰매를 타러 갔다가 얼음이 깨져 ‘종대야 살려도’라며 허우적거리던 동내 형의 모습이 기억의 창고에서 아른거린다.
얼음썰매타기가 모험심과 용기를 기르고 다리와 팔의 근력을 향상시키며 자연의 변화와 현상을 이해하는 엄청난 결과를 우리에게 준다는 사실을 알고 놀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이 오늘의 현실에서 이웃과 더불어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소중하고 값진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밤,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는 이렇게 놀았단다.’라며 추억의 놀이를 들려주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아빠의 정성이 담긴 얼음썰매를 직접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 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