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코 하나 눈 둘
[페이지] F01
劇團(극단) 에저또 公演(공연)
弟三回(제3회) 大韓民國演劇祭(대한민국연극제) 參加(참가)
作品(작품)
코하나 눈둘
(원제 : 가출기)
尹朝炳(윤조병) 作(작)
이조운 演出(연출)
79.9.27-10月(월)3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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戱曲(희곡)
<<家出記(가출기)(全三幕(전3막)) <<코하나 눈둘>>
尹朝炳(윤조병)
나오는 사람들
남편, 아내, 조민수, 여인, 여객전무, 역원.
[때] 현대
무대 서민아파트의 거실. 탁자, 의자, 전화기, 꽃병의 꽃이
알뜰하다. 이 연극은 한 작가의 아내가 남편의 작품에 의혹을 품고
그 내용이 허구인가, 사실인가를 따져가는 얘기로서 극중 극의
장면이 나오는데 거실의 공간을 몇개의 부분으로 처리하여
철도역의 플랫폼, 객차, 주막으로 이용한다. 무대 안쪽은 거의
창문이어야 하는데 이유는 객차, 주막, 거실의 창문이 되어 밤,
황혼 미명, 강물, 갈대밭, 옥수수밭, 과수원, 원두막, 열차의
바깥풍경 따위를 나타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표현의
하나하나의 특징을 확대하여 추상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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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제1막
남편과 아내가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남편은 신문을, 아내는
책을 읽고 있다. 남편이 고개를 들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신문에 시선을 보내면 이번엔 아내가 책에서 눈을 떼어 남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본다. 그런 동작을 대화없이 두세번
반복하는데 아내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내는 뭔가 궁금해하면서
재미있어하는데 그게 읽고 있는 책 때문인 것같기도 하고
남편에게서 캐낼 어떤 비밀 떠문인 것같기도 하다. 드디어 아내가
입을 연다.
[아내] 손을 흔드셨어요? 그여자가 어떻게 해요? 받아서 손을
흔들었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그여자가 전줄 아셨군요, 홋호호.
그럴 수밖에 없지 뭐예요. 입구에서 우리 동 잔디밭까진 꽤 멀어서
사람을 바꿔보기 쉬워요. 더구나 그날 우린 스카프를 바꿔 하고
있었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책에 시선을 보낸다.
남편이 신문을 본다. 아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아내] 가까와지니까 제가 아녔죠. 그래서 당신이 웃으면서
눈인사를 하셨죠. 잘 하셨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요? 그여자도
눈으로 인사를 받다았구요. 홋호호. 우스웠겠네요. 서로 우스웠을
거예요. 그때 그여잔 뭘하고 있었어요. 잔디밭에서 말예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입을 다물고 책에
시선을 보낸다. 남편이 다시 신문을 본다. 아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아내] 참, 맨발로 잔디를 밟고 있었다고요! 맨발로
잔디를------ 그여잔 발이 예뻐요. 그 예쁜 발로 잔디밟기를
좋아해요. 봄부터 가을까지 그여잔 맨발로 잔디를 밟아요. 그리고
당신은 봄부터 가을 까지 줄곧 그러는 그여자에게------
전화가 울린다. 아내가 말을 끊고 수화기를 든다.
[아내] 여보세요. (사이) 여보세요. (사이) 말씀하세요.
전화가 끊겨버린다. 아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서서히
의혹에 빠져든다.
[아내] (혼자말처럼) 간밤에도 똑같은 전화가 왔어요.
[남편] 여보, 왜그러오?
[아내] 커피를 끓여야겠어요.
[남편] 커피?
[아내] 네.
[남편] 커피는 방금 들었잖소.
[아내] 넉 잔을 끓이겠어요.
[남편] 넉 잔을?
[아내] 네. 위층 신혼부부를 다시 부르겠어요.
[남편] 뭐요? 당신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소? 어제 종일
얘길 했는데 또 그 얘길 하려는 거요?
[아내] 저도 끝내려고 했어요. 개운찮은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당신 말씀대로 이 {가출기}를 순수한 창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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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방금 전화가 왔어요. (책을 펴보이며)
여기 이 여자한테서 말예요.
[남편] 여보------
[아내] 당신은 지금 알고 있어요. 아니, 전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남편] 당신 아무래도 신경과민이오.
[아내] 만일 이 {가출기}가 허구라면 당신은 좀더 논리적으로
썼을 거예요. 그런데 이건 앞뒤가 맞지 않아요.
[남편] 그건 또 무슨 얘기요?
[아내] 두 남녀가 이름도 성도 모르면서 만나는 날부터 사흘동안
정사를 나눠요. 애들도 아닌 나이든 남녀가 말예요.
[남편] ------ (뭔가 말할듯 하다가 그만둔다)
[아내] 일주일동안 찾아헤맨 여자를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요.
그런데 서로 아무것도 알아놓지 않고 헤어져요.
[남편] ------ (역시 말할듯 하다가 그만둔다)
[아내] 그런데 작품 끝에 그여자가 뭐라고 하죠? 서울역
전철승강장에서 헤어질 때 말예요. 그여잔 남자에게 강렬한 시선을
곧바로 보내면서 언젠가 생각나면 전활 하겠다고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활하죠?
[남편] 그여자가 한 얘긴 그게 아니예요. 때마침 전철이
들이닥쳐서 그 소리 때문에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작중인물
민수가 그렇게 들은 거예요. 이를테면 환청이오. 아니면
바램이기도 하고.
[아내] 작중인물의 바램이 아니고 당신의 바램이죠. 아니 그여잔
당신의 모든걸 알고 있어요.
[남편] 내가 아니고 민수라니까.
[아내] 민수가 아니고 당신이에요.
[남편] 민수!
[아내] 당신!
[남편] 조민수!
[아내] 조민수가 누구죠? 당신이 지어낸 이름이에요.
[남편] 허지만 이건 허구요.
[아내] 허구는 진실이 아닌가요?
[남편] 진실이긴 해도 사실은 아니오.
[아내] 시작부터 당신의 얘기예요.
[남편] 가출동시와 현장스케치는 사실이지만 기타의 것은 모두
허구요. 이건 작품이란 말이오.
[아내] 당신은 불리하면 작품으로 미루고 있어요. 나 혼자선
안돼요. 증인이 필요해요. 커피를 올려놓고 위층 신혼부부를
부르겠어요.
[남편] 어젠 종일 그 신혼부부와 얘기했잖소. 이 {가출기}를
쓰게 된 동기와 어디까지가 경험한 사실이고 어디가 만든 얘긴가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소. 그분들도 쉬어야 하오. 모처럼의
신혼 연휴인데 그걸 하찮은 일로 빼앗으면 되겠소?
[아내] 제겐 중대한 일이에요. 더구나 그 신혼부부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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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서 두 차례나 전호가 걸려온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주방으로 간다)
[남편] 그게 꼭 내게 온 전화라는 걸 어떻게 아오? 더구나
여자라는 것까지 말이오.
[아내] (돌아선다) 전환 두번 다 제가 받았어요. 제게 오는
전화거나 당신께 오는 정당한 전화라면 말이 있을거예요. 그런데
두번 다 음성만 확인하고 끊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오는
정당하지 못한 전화예요. 그여자일 수밖에 없죠. 전활 하겠다고 한
여자는 그여자뿐이니까요.
[남편] 그건 작품 속의 얘기요. 더구나 전화는 잘못 걸리는 수도
많아요.
[아내] 이쪽을 확인하지 않았어요.
[남편] 직감으로 잘못 걸렸다는 걸 알 때가 있어요.
[아내] 미안하다는 인살 해선 안되나요?
[남편] 미안하니까 급히 끊는 거요.
[아내] 급히 끊지요 않았어요. 살필 건 다 살피고 끊었어요.
[남편] 당황하면 동작이 뜨게 돼요.
[아내] 두번씩이나요?
[남편] 실수는 겹치는 경우가 많아요.
[아내] 이어서 겹친 게 아니고 어젯밤과 지금이예요. 전활 끊는
버릇으로 봐서 같은 사람이에요.
[남편]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잖소.
[아내] 맞아요. 이 {가출기}가 창작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우연히 사실과 일치시킨 거예요. (안으로 들어간다)
[남편] 여보 이것과 그건------
그러나 아내는 이미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심각해지는 남편.
책을 집어 급히 넘겨보면서 뭔가 변명할 실마리를 찾느라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문득 전화기를 본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미소를 띠며 일어선다.
[남편] (주방을 향해 큰 소리로) 여보, 담배가 떨어졌소. 나가서
담배를 사오겠소.
남편이 급히 밖으로 나간다. 아내가 주방에서 나온다. 그녀는
책의 첫머리를 보면서 탁자와 의자의 위치를 쓰인대로 옮기려다가
힘이 부치자 그만두고 꽃병, 신문지, 재떨이 따위를 맞게
옮겨놓는다. 그러다가 담배를 발견한다.
[아내] 아니? 담배가 한갑 그대론데?
전화가 울린다. 아내가 시계를 보고 조심스레 수화기를 든다.
[아내] (사이를 두었다가) 여보세요. (대답 없다) 여보세요.
(사이) 녜? 잘못 걸렸다구요? 누구세요? 여보세요. 여보------
(그러나 끊겼다)
아내가 수화기를 놓고 급히 창가로 가서 먼 곳을 본다. 그녀의
시선이 먼 곳에서 점점 가까와지다가 되돌아와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남편이 숨을 몰아쉬며 급히 들어온다.
[아내] (일을 계속하며) 담배를 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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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거북선이 떨어지고 없어서 그만뒀소.
[아내] 이걸 피우세요.
[남편] 담배가? 아직 남았소? 난 빈갑인줄 알았는데------
[아내] 이것 좀 들어주세요.
[남편] 탁자는 왜 옮기는 거요?
[아내] 당신이 가출하던 날 이게 그쯤에 있었어요.
[남편] ?------
[아내] 가출동기부터 밝혀야겠어요. 어젠 부끄러운 일이라서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는데 안되겠어요.
[남편] (힐끗 전화를 보고) 그 전화 때문에 그러는 거요?
아내가 말없이 창가로 가서 남편에게 손짓한다. 남편이 다가가서
아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보낸다.
[아내] 보여요?
[남편] 아파트 정문 말이오?
[아내] 그 밖에요.
[남편] 어떤 여자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군. 그여잔 차를
기다리는 여자요.
[아내] 그다음 말예요.
[남편] 애기를 데리고 있는 부인? 저 부인도 차를 기다리는
거요.
[부인] 그다음.
[남편] 가로수?
[아내] 그다음에요.
[남편] 가로등?
[아내] 그 아래를 보세요.
[남편] (사이) 공중전화박스가 있군------
[아내] 첫박스엔 여학생이 있어요. 둘째박스엔 중년신사 한분이
다이얼을 돌리고 있고요. 세째박스는 비었는데 고장이죠.
(돌아나오며) 손바닥만한 쪽지가 붙어있어요. 그것까지 보여요.
[남편] ------
[아내] 수화기에 댔던 손수건은 챙겨왔어요?
[남편] ------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놓는다)
[아내] 누가 봤으면 당신을 유괴협박범으로 보았을 거예요.
[남편] 여보, 사실은 너무 답답해서------
[아내] 걱정할 건 없어요. 오히려 잘됐어요. 그렇잖아도 애매한
당신을 볶아대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명분을 주셨어요. 이
의자도 마저 들어주시겠어요? (아내와 남편이 의자를 옮겨놓는다)
[아내] 됐어요. 거기 앉으세요. 당신의 자리니까요. 제 위치는
부엌이에요. 어서 앉으세요. (남편이 앉는다) 이 신문은 당신이
보고 계셨어요. (책을 보이며) 여길 보세요. 당신의 묘사가 그날과
똑같고 우린 그대로 준빌 했어요. 맞죠?
[남편] -------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 현실에서 당신의 {가출기}로 들어갈 때는 손뼉을 두번
치는 거예요. 다시 현실로 나올 땐 한번을 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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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보세요.
[남편] ------
[아내] 그럼 따라서 쳐보세요.
아내가 손뼉을 두번 친다. 남편이 마지못해 따라진다. 아내가
한번을 친다. 남편이 따라 친다.
[아내] 시작해요.
[남편] 그날 우리가 다툰 건 하찮은 일 때문이오. 그걸 다시
재현할 필요가 있소?
[아내] (냉랭하게) 하찮은 일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어요.
그렇잖으면 위층 신혼부부 내외가 있는 데서 하게돼요. (부엌으로
들어가며) 시작하세요.
남편이 신문을 집어든다.
사이
[아내] (부엌에서 소리만) 손뼉을 치셔야죠!
남편이 신문을 놓고 손뼉을 두번 친 다음에 신문을 든다. 아내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부엌에서 나온다. 그녀는 상냥하고 헌신적인
아내로서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내] 여보, 커피 드세요.
[남편] 그렇잖아도 입이 구순했는데 잘됐소. 자, 듭시다.
그들 커피를 마신다.
[남편] 여보, 꽃이 시들었구료. 바꾸도록 하오.
[아내] 시들긴요? 아직 예쁘고 싱싱한데요. 요즘 꽃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세요?
[남편] 허지만 꽃이 시들어서야------
[아내] (커피를 남편의 잔에 더 따르며) 야박한 마담이라고
하시지 말고 천천히 다 드세요. 전 시장에 다녀오겠어요.
(일어선다)
[남편] 아침에 장에 다녀왔잖소.
[아내] 하루에 두번은 가야죠. 더구나 여름철이잖아요.
[남편] 산보삼아서라면 모르지만------
[아내] 네? 아침에 장봐온 게 얼만데요?
[남편] 상에 놓인 건 없잖소.
[아내] 한번에 다 먹어치워서야 되나요. 절약해가며
먹어야죠.냉장고도 사왔는데 그걸 사용하려면 보관을 해야죠.
[남편] 알았소. 다녀오구료. 냉장고에 보관하기 위해서---
[아내] 홋호호, 당신두. 결국 당신과 애들 건데 뭘 그러세요.
키는 제가 하나 가져가니까 걱정 말고 당신 할일이나 하세요.
애들이 몰려오면 시끄러우니까 문을 열어주지 마세요. (가까이
다가와서) 다녀오겠어요.
[남편] (계속 신문을 보며) 다녀오우.
[아내] (신문을 당기며) 오늘아침엔 그냥 갔었단 말예요.
[남편] 가만. 어떻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운 인생인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발언이오.
[아내] 요즘은 예쁘다고 안해줬단 말예요.
[남편] 아지도 꽃처럼 예쁜줄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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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송이를 뽑아든다. 아내가 남편과 등을 맞대고 키스를 하는
자세로 턱을 위로 든다. 꽃이 키스의 매개채가 되는 것이다.
[남편] (키스하며) 예쁘다, 팔천번!
[아내] (흡족해서) 잡숫고 싶은 것 없어요?
[남편] (꽃을 꽂으며) 너무 많아서------
[아내] 말씀만 하세요.
[남편] 점심엔 냉면을 시킬까?
[아내] 그래요.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아내가 나가고 남편은 다시 신문에 골똘해진다. 아내가 뭔가
곰곰이 계산하면서 되돌아온다.
[아내] 여보, 냉면 네 그릇이면 그게 얼마예요? 그 돈으로
재료를 사다가 해먹어요. 그게 알차고 실컷 먹을 거예요.
[남편] (신문에 팔려 건성으로) 좋지.
[아내] 다녀오겠어요. (나가다가 다시 계산해보고) 여보, 냉면을
제대로 해먹자면 얼마나 드는지 아세요? 모밀국수, 돼지고기,
달걀, 파, 마늘, 고추가루, 깨소금, 초김치, 겨자, 그리고 배, 잣,
육수에 참기름------ 시켜먹는 것보다 더 들겠어요.
[남편] (역시 건성으로) 그렇게 합시다.
[아내] 허지만 음식점 냉면은 먹을 게 있어요? 그럴 게 아니고
이렇게 해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돼지고기를 빼고 달걀은
한쪽만 넣어요. (큰 소리로) 그래도 맛은 좋아요. 우리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거든요. 괜찮죠?
[남편] ------(역시 고개만 끄덕인다)
[아내] (작은 소리로) 배와 잣을 사려면 먼 시장에 가야 해요.
겨자는 조금씩 안 팔아요. 많이 사두면 매운 맛이 없어져요.
그것들을 빼는 게 좋겠어요. (큰 소리로) 그래도 맛은 좋아요.
우리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거든요. 괜찮죠?
[남편] ------ (끄덕인다)
[아내] (속삭이듯) 육수를 만들려면 연료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려요. 육수대신에 물김치를 넣어서 먹어요. (큰 소리로)
그래도 맛은 좋아요. 우리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거든요. 괜찮죠?
[남편] ------ (역시 건성으로 끄덕인다)
[아내] (활짝 웃는다) 다녀오겠어요.
아내가 돌아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가 되와서 수화기를
든다.
[아내] 여보세요. 네? 맥주요?
[남편] (퍼뜩하여) 맥주?
[아내] 여긴 가게가 아니에요. 잘못 걸렸어요. (수화기를 놓고)
맥주를 한 상자 배달해달래요. (하며 돌아선다)
[남편] (입맛을 다시다가) 여보, 이왕이면 맥주도 두어 병
사오구료. 시원한 걸로.
[아내] 네? 맥주를 사오라구요?
[남편] (입맛을 다시며) 냉면을 먹기 전에 시원한 맥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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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쭉 마시고 냉면에 저며넣은 돼지고기를 양념겨자에 착착 찍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 그 맛이란------ 기막히지!
[아내] 돼지고기요?
[남편] 냉면에------
[아내] 빼기로 했잖아요.
[남편] 빼다니?
[아내] 방금 결정하셨잖아요. 돼지고기, 배, 잣, 겨자 따윌 빼고
육수대신 물김치에 말기로요.
[남편] 그게 냉면이오?
[아내] 얼음은 넣을 거예요. 냉장고에 얼어있으니까 많이
넣겠어요.
[남편] (마땅치못해서) 알았소.
[아내] 그래도 맛은 좋아요. 우리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에요.
[남편] (갑자기 큰 소리로) 그만둬!
[아내] 네?
[남편] 알속은 다 빼버리고 쭉지만 먹으란 말요?
[아내] 그래도 영양가는 시켜먹는 것보다 더 많아요. 안 그래요?
[남편] (아내의 흉내로) 영양가는 더 많아요. 안그래요? 그래도
맛은 더 좋아요. 우리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거든요! 괜찮죠?
(자신의 얘기로) 질렸소. 듣기도 싫어요!
[아내] 아니, 당신?
[남편] 거짓으로 한 방울이나 넣어 냄새만 피우면서
끼니마다------ (흉내로) 참기름이 얼만지 아세요? 참깨 한 말에
얼만지 아세요? 참깨 한 말 짜는 삯이 얼만지 아세요? (자신의
얘기로) 내, 원, 참, 아니꼬와서------
[아내] 비싸니까 비싸다고 했어요!
[남편] (현실로 돌아와) 여보, 그만둡시다. 하찮은 일로 싸운
건데 그걸 굳이 재현할 건 없잖소.
[아내] 부부싸움이 언젠 대단한 걸로 일어났어요? 어서
계속하세요. (사이) 어서요.
[남편] (할수없이) 어디까지 했소?
[아내] 비싸니까 비싸다고 했어요, 까지요. 당신이 공격할
차례에요.
[남편] (과거로 돌아가서, 의외로 강하게) 비싸면 한 끼에 한
되를 먹소, 한 말을 먹소?
[아내] 참깨가 비싸다고 했지 한 끼에 한 말씩 먹는다고는
안했어요.
[남편] 당신은 끼마다 한 말씩 몽땅 먹어버리는 것처럼
얘기했소!
[아내] 해마다 한 말씩 짰으니까요! 기름집에서 한 줌씩은
짜주지도 않아요.
[남편] 냉면이고 뭐고 그만둬! 먹고싶지 않아! 안 먹겠어!
남편이 신문, 담배, 재털이를 거둬들고 방문쪽으로 성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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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걸어간다.
[아내] (현실로 돌아와서) 여보, 그게 아니잖아요.
[남편] (아직 과거상태에서) 아니긴 뭐가 아냐!
[아내] (급히 손뼉을 한번 친다) 지금 얘긴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에요.
[남편] ------ (되돌아와서 신문, 담배, 재털이를 탁자에
놓는다)
[아내] 당신이 두 마디를 더 하셔야 해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매섭게 쏴붙이면 당신이 에이, 나가버릴테야,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챙겨들고 가출하는 거예요.
[남편] 그건 그때 그랬지.
[아내] 그러니까요.
[남편] 작품엔 그걸 나중에 썼는데. 처음부터 그걸 밝힌다는 게
어쩐지 당신의 인격을 격하시키는 것같아서------
[아내] 그건 잘하셨어요. 역시 당신은 절 사랑하시는 거예요.
[남편] 허지만 그때 그 대꾸는 너무 지나쳤소.
[아내] 당신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 얼마나 잔인했다고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작품엔 그걸 너무 약하게 묘사하셨더군요.
[남편] 아니오. 난 그대로 썼소.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어도
심정은 그게 아니었소.
[아내] 그건 당신의 심정이지 상대는 저였어요.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헤치는 말씀이었어요. 제 입장이면 누구든 그렇게
대꾸했을 거예요.
[남편] 난 그렇지 않았다니까!
[아내] 상대는 저예요. 느끼는 진동은 제가 받는 거예요!
[남편] 그때 내가 어떻게 했소? 내가 여기 서서, 냉면이고 뭐고
그만둬! 먹고싶지 않아! 먹지 않겠어! 하고 잠깐 쉬었다가, 당신은
말야------
[아내] (말을 중단시킨다) 여보, 손뼉을 쳤어요. 순서대로
해나가야지 엇갈려요. 아니, 이게 무슨 냄새지?
[남편] 커피!
[아내] 참, 커필 올려놨는데------ 내 정신봐!
아내가 부엌으로 달려간다. 남편이 담뱃갑을 집어들고
망설이다가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붙인다. 깊게 빨아 연기를
내뿜는다. 아내가 커피포트를 들고 나온다.
[아내] 여보, 이를 어째요? 커피가 다 타버렸어요.
[남편] 할수없지.
[아내] 할수없다니요? 여섯 잔이면 칠백팔십원이에요.
칠백팔십원이란 말예요.
[남편] 넉 잔에서 두 잔은 우리가 먹었잖소. 그리고 다방에서나
그 값이지 집에서도 그렇게 셈을 하오?
[아내] 당신은 그게 틀렸어요. 다방에서 백삼십원이면 집에서도
그렇게 쳐야 하는 거예요. 더 진하고 양도 배가 돼요. 또 두 잔을
더 넣었어요. 우리가 마신 두 잔도 지금 우리가 마신 게 아니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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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마신 걸 해보느라고 먹은 거니까 그건 없어진 거나 같아요.
[남편] 뭐, 뭐라구?
[아내] 어디서든 보충을 해야 한다구요. 맞아요. 이건 순전히
당신 책임이니까 당신 용돈에서 보충해야겠어요. 담배 한 갑
절약애서 삼백원, 목욕 한번 건너뛰는데 삼백원, 그럼 육백원이죠.
버스쇠표 두개를 내놓으시고, 전화 세번을 걸지 마세요. 그럼 꼭
칠백팔십원이에요. (버릇으로) 여보, 괜찮죠?
[남편] 맙소사------
[아내] 이건 시작이에요. 만일 {가출기}가 사실의 기록이란 게
확인되면 그 여행 중에 쓴 돈을 모두 반납하셔야 해요.
[남편] (잘됐다싶어) 그럼 되오?
[아내] 아니, 아니에요. 이혼이에요. 그런 당신하곤 못 살아요.
아내와 자식을 두고 가출해서 다른여자와 지낸 남편과 어떻게
살아요. 더구나 전화까지 걸려오고------ 못 살아요, 못 살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밝혀야 해요. 빨리 밝혀내야 해요.
(책을 편다) 당신은 용산역으로 갔어요. 거긴 완행열차 역인데 왜
거길 갔죠? 거기서 그여자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죠? 그렇죠?
[남편] 우연히 간 거요.
[아내] 그건 말도 아니예요.
[남편] 당신도 알다시피 사전에 계획한 여행이 아니잖소. 그날
우발적으로 가출한 건데 약속이 있었겠소?
[아내] 그게 더 계획적이죠. 당신은 사건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게 직업이에요.
[남편] 여보------
[아내] 지금까지 그정도 일로 크게 화를 내지 않았는데 그날은
거의 광적으로 화를 냈고 그 핑계로 집을 나갔어요. 당신은 불과
몇분만에 가방을 챙겨들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까 필요한 건
빠뜨리지 않고 몽땅 챙겨 가셨어요. 용산역까지 뭘로 가셨죠?
[남편] 뻐스요.
[아내] 여기서 뻐스노선은 없어요. 택시로 가셨어요. (책을
건성으로 보이며) 자, 보세요.
[남편] 그건 택시를 타고 싶었던가, 쉽게 묘사하느라고
그랬던가본데 택시는 안 탔소.
[아내] 아내와 다투고 가출하는 남편이 택시를 타고 싶을까요?
또 작품을 쓰는 분이 쉽게 써버리느라고 택시로 간 것으로 할 수
있어요? 당신, 가정과 작품에 그렇게 무책임하세요? 약속시간에
늦기 때문에 택시를 탔다면 말이 돼요. 그래서 택시를 탔죠?
그렇죠!
[남편] (혼란스럽다) 생각해봅시다. (사이) 맞소. 뻐스를 탔다가
지하철은 탔소.
[아내] 왜그랬죠? 처음부터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가면
되는데요.
[남편] 집에선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소. 그렇다고
[페이지] 011
노상 걸을 수도 없고 택시는 탈 마음이 안 나고, 그러는데
버스정류장이더군. 마침 버스가 왔고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안내양이 빨리 타라고 손짓을 하더군.
[아내] 안내양이 손짓을 해요?
[남편] 그야 우연이지. 안내양은 내가 그 버스를 타려는 걸로
보고, 난 안내양의 손짓에 내가 그 버스를 타려고 나온 걸로
착각을 한 거요.
[아내] 그래서요?
[남편] 버스가 달리다가 멎을 때마다 승객들이 하나씩 둘씩
정류장에서 내리더군. 나도 목적지를 정해야겠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목적지가 쉽게 정해지지 않더군. 그버스가 몇시간이고 길게
달렸으면 하는 생각에 미치자 어린시절에 빠르면 비행기, 길면
기차, 하고 말잇기놀이를 하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기차를 타고
싶어졌소. 그것도 길고 오래 달리는 기차를 말이오.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갔소.
[아내] 그럴듯하군요. 지금 생각하신 건가요, 그때의 사실
그대론가요?
[남편] 그대로요.
[아내] 됐어요.
[남편] 됐다니?
[아내] {가출기}에도 그대로에요.
[남편] 그럼 끝난 거요?
[아내] 그러니까 이 {가출기}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란
증거를 또 한가지 잡은 거예요. 용산역에 도착하니까 그여자가
나와있었나요?
[남편] 주머니엔 돈이 별로 없었소. 완행열차를 타고 노숙하면서
며칠 돌아다닐 정도밖에 없었소.
[아내] 그런데도 당신은 끝내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표를 샀군요?
[남편] 아니오. 찻시간은 다섯 시간이나 남아있었소. 결정하기
전에 표를 먼저 샀을 뿐이오.
[아내] 그여자가 표를 미리 사놨군요?
[남편] 광장이 너무 뜨거워서 대합실로 들어갔는데 거긴 냄새가
너무 심했소. 다시 광장으로 나오려다가 호남선 어디쯤 갈까, 하는
생각으로 열차시간 안내판 앞으로 갔소. 용산을 시발점으로
영등포, 시흥, 안양, 군포, 부곡, 수원 그리고 크고작은 역
열여섯개를 지나 대전역과 서대전역으로 갈리더군. 다른때같으면
대전쪽으로 갔을테지만 그날은 어딘가 깊숙이 버려진 곳으로
가보고 싶어서 서대전쪽을 읽어나갔소. 서대전, 가수원------
가수원------ 이름이 괜찮더군. 마음에 들었소. 그런데
오백이십원, 너무 가까왔소. 흑석리, 원정, 두계, 개태사, 연산,
논산, 강경, 함열, 황등, 이리, 부용, 화룡, 김제, 잠곡, 신태안,
초강, 정읍------ 정읍------ 잠시 머물렀다가 천원, 백양사, 절에
들어갈까 하다가 신흥리, 장성, 송정리, 노안, 나주, 영산포------
영산포------ 다시------ 다시, 별이름도 다 있더군. 고막
[페이지] 012
원, 학교, 사창, 목탄, 일로, 임성리, 목포------ 결국 마음에 썩
내키는 데가 없었소. 결국, 끝에서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소. 종점
목표를 시작으로 해서 가수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용산가지 왔소.
역시 딱 집어내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아내] 작품엔 그런 내용이 없어요.
[남편] 길고 긴 여행을 거리로 생각할 게 아니다. 가수원은
이름도 좋고,이름 그대로 조그만 간이역일테고, 완행열차니까 밤
영시에 도착할테고, 그야말로 내가 간다면 그곳뿐이다.
[아내] 그때까지도 꼭 출발할 생각은 아녔나요?
[남편] 물론이오. 표를 사고서 비로소 출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소.
[아내] 표를 사고나서 출발하기로 결정하셨다구요?
[남편] 나는 매표창구로 갓소. 아니, 간 게 아니고 두어걸음
다가가소 바라보았을 뿐이오. 일요일이었지만 이미 늦여름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갈 곳을 다녀온 후라 매표구는 한산했소. 그런데
마침 역원이 똑똑 창구를 두드리면서 오라는 신호를 하잖겠소.
내가 다가가니까 역원은 한묶음의 표를 간추리느라고 똑똑거렸고,
나는 심심삼아 바라보았는데 역원이 고개를 들더니 어디요, 했소.
난 생각도 없이 가수원 했고, 역원은 표꽂이에서 한참 표를 찾더니
내게 다시 어디요? 하더군. 가수원 했지. 드디어 역원이 씩
웃더군. 그리곤 날짜를 찍어서 표를 내주었소.
[아내] 보세요. 역원이 왜 씩 웃었죠? 여자와 같이 정답게
서있으니까 웃었을 거예요.
[남편] 글쎄, 실없이 씩 웃으며, 금년에 꼭 두 장 팝니다,
그것도 오늘, 하더군. 내가 돌아서려는데 그여인과 동행이십니까?
하잖겠소.
[아내] 보세요. 그리고도 감추시겠어요?
[남편] 난 어리둥절했단 말요.
[아내] 황홀하고 흐뭇했겠죠.
[남편] 그러더니 또 한다는 말이, 미인이시더군요!
[아내] 미인이시더군? 그럼 같이 간 게 아네요?
[남편] 그런데 그 표가 아주 오래 묵은 것이더군.
[아내] (곰곰히 생각해보고) 지능적으로 따로따로 산 거예요.
여자에게 먼저 사게 하고 뒤에 당신이 산 거예요.
[남편] 차표에 인쇄한 팔십원외에 백팔십원, 이백구십원,
오백이십원으로 세번이나 스탐프로 바꿔 찍었소. 그러니까 한
이십여년 전에 인쇄된 표를 산 거요.
[아내] (남편의 팔을 쿡 찌르며)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같이
샀죠?
[남편] 순간, 소년이 구둘 닦으라고 내 팔을 찔렀는데 비로소
떠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를 결정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표원의 말이 실감나더군. 결국 호기심에 들떠버렸소. 금년에 두
장밖에 팔지 않은 가수원표를 어느 여인과 내가 한장씩 샀다,
그것도 미인이 바로 내
[페이지] 013
앞서 샀다, 그 호기심 때문에 난 쉽게 결정을 해버렸소. 기차를
타자. 가수원이 어떤 곳인가 가보자. 길고 긴 여행을 하자. 그렇게
결정하자 난 점심을 굶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더군.
[아내] 그래요. 당신은 젖배를 곯아서 배고픈 걸 못 참아요.
[남편] 역 광장 끝 식당에 가서 냉면을 시켜서 먹었소.
[아내] 그건 영양가도 없고 맛도 없어요. 우리처럼 진짜
참기름도 아니구요. 얼음은 꺼내버리지 그러셨어요. 그건
비위생적인 얼음이라구요.
[남편] 그때 당신생각이 났소.
[아내] 당신은 큰맘 먹고 나가셨지만 마음이 약해요.
[남편] 홧김에 냉면을 얼음까지 몽땅 먹어버렸소. 소주도 한잔
곁들여서 말이오.
[아내] 저런, 맥주로 하시잖구요.
[남편] 배가 부르자 궁금하기 시작했소.
[아내] 그럴 거예요. 당신은 화를 내고 나가셔도 대문 밖
세발짝이면 후회를 하셨죠.
[남편] 기차시간까진 아직도 세 시간이 남았는데 그 긴 시간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소.
[아내] 당신은 언제나 삼십분 안에 돌아오셔서, 여보, 미안하오,
하던가 전화로 저와 아이들을 불러내셨어요. 그런 분이 세 시간을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남편] 대합실로 갔소. 대합실은 늦더위가 한창인 오후의 열기로
푹푹 찌고 있었소. 그여잔 없었소.
[아내] 뭐라구요? 그 여잘 찾았다구요? 그여자가 궁금했단
말예요?
아내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어지러운 듯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본다.
[남편] 난 다방으로 찾아나섰소. 역 가까운 다방이 모두 다섯
곳인데 그여잔 없었소.
[아내] (힘없이) 그여자의 얼굴을 모른다고 하셨는데
거짓이었군요------
[남편] 뒤늦게 생각이 나더군. 그래서 다시 한바퀴 돌면서
카운터에게 부탁해서 가수원 가는 여자손님을 찾았지만
헛일이었소. 제과점도 두 곳 모두 가봤는데 그 여잔 없었소.
실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역 광장의 구석 구석 그늘진 곳에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늘어지고 있는 걸 알았소. 그래서 땡볕을
무릅쓰고 한바퀴 돌았는데 그럴 법한 여인 한두명을 보았을
뿐이오. 다시 매표구로 갔소. 매표원 대답이 표를 사는 입이
예쁘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하게 생겼는데 얼굴은 못
보았다는 거요. 개찰할 때 역원에게 부탁하거나 차 안에서 검표할
때 차장에게 부탁해서 찾기로 마음 먹었소.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한데 아직도 한시간 반이 남았더군.
전화의벨 울린다. 아내가 일어나서 다가가려다가 그만둔다.
[페이지] 014
[아내] 당신이 받으세요.
남편, 망설인다.
[아내] 그여자예요. 내가 받으면 또 끊어요. 어서요.
남편, 마지못해 다가간다.
[아내] 당신 괜히 엉뚱한 신호를 보내면 안돼요.
남편이 수화기를 들려는데 아내가 급히 그 손을 누른다.
[아내] 그여자면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 그여잔 아니오.
[아내] 글쎄 그여자면 어떻게 하겠냔 말예요?
[남편] 당신에게 바꾸겠소.
[아내]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송화기에 대답만 하세요.
수화기엔 내가 듣겠어요.
아내가 수화기를 들어 송화기쪽은 남편의 입에, 수화기 쪽은
자신의 귀에 댄다.
[남편] (아내의 지시에 따라) 여보세요.
[아내] (송화기를 막고) 다시 하세요.
[남편] 여보세요.
[아내] (송화기를 막고) 다시------ (하는데 전화가 끊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를 놓고 남편을 쏴본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얘길 해야지 뜸을 들이니까 저쪽에서 알아차린 거예요.
[남편] 여보, 이건 잘못 걸린 거요. 아니면 누가 장난을 하는
거요.
[아내] 그래요. 그여자가 장난을 하는 거예요!
[남편] 아니, 뭐요?
남편은 어이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아내를 바라보는데 아내는
의혹이 가득찬 시선으로 남편을 쏴본다. 그 동작이 계속되면서
무대가 서서히 어둬진다. (암전)
[막] 제2막
응접탁자, 의자, 전화기, 꽃병의 꽂이 전막의 처음과 똑같이
놓여있다. 다만 다른점은 아내의 옷차림인데 그녀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을 굳힌 듯 코트를 입고 띠가지 맸다. 남편과
아내가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신문과 책을 들고 전막의 처음과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가 아내가 입을 연다.
[아내] 손을 흔드셨어요? 그여자가 어떻게 해요. 받아서 손을
흔들었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그여자가 전줄 아셨군요, 홋호호.
그럴 수밖에 없지 뭐예요. 입구에서 우리 동 잔디밭까진 꽤 멀어서
사람을 바꿔보기 쉬워요, 더구나 그날 우린 블라우스도 바꿔입고
있었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책에 시선을 보낸다.
남편이 신문을 본다. 아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아내] 당신이 가까와졌을 때 그여잔 돌아서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구요! 그래서 당신이 살그머니 다가가서 뒤에서 눈을
가렸다구요. 그때 그여자가 어떻게 했어요? 눈가린 당신의 손을
꼬집었는데 그 감촉이 너무 보드라와서 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구요. 깜짝 놀랐
[페이지] 015
겠네요. 서로가 깜짝 놀랐을 거예요, 홋호호. 그때 그여잔 뭘하고
있었어요? 잔디밭에서 말예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책에 시선을 보내다.
남편이 다시 신문을 본다. 아내가 고개를 든다.
[아내] 참, 맨발로 잔디를 밟고 있었다고 했죠! 맨발로
잔디를------ 그여잔 발이 예뻐요. 그 예쁜 발로 잔디 밟기를
좋아해요. 봄부터 가을까지------ 줄곧------ 그러는 그여자에게
관심을------
전화가 울린다. 아내가 말을 멎고 수화기를 든다.
[아내]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어제도 전활 건
분이죠?
전화가 끊겨버린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깊은 의혹에
빠져든다.
[남편] 여보, 전화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오. 잘못 걸렸거나
누가 장난을 하는 거요.
[아내] 사람은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건데------ (사이) 제가
당신의 작품에서 분노와 수치를 느낀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예요.
[남편] 그러니까 작자가 작품에 대해 변명이나 보충설명이
필요없는데도 이틀동안씩 이러고 있잖소.
[아내] 어쩔수없군요. 인간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인간의
창조물에 의한다고 했으니까 당신을 알기 위해선 당신의 작품
{가출기}를 더 캐보는 수밖에 없어요.
[남편] 여보------
[아내] 예술은 평화의 산물이에요. 전우주를 평화롭게 포용해야
해요. 헌데 당신은 예술이란 미명으로 아내를 분노와 수치에
몰아넣었어요.
[남편] 그건 당신이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아내]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문제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예요.
[남편]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현실의식에서가 아니고
비현실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요. 이를테면 이
{가출기}의 인물이나 사건이 작자인 나의 전경험적 현상의 기록이
아니고 반경험의 상상적 연장과 확대에 의해서 쓰여진 거란
말이오.
[아내] 인간에겐 옳고 그른 것을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양심이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문학의 본질이나 작품판단기준이 수치로
딱떨어지게 만들어져있지 않다고 해서 그 이론으로 저를 몽롱하게
혼란시키는군요. 당신은 스스로 양심을 속이고 있어요.
[남편] 난 당신에게 창작의 원리를 얘기하는 것이지
혼란시키거나 속이려는 게 아니오. 당신이 이해를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말했을 뿐이오.
[아내] 나도 이해하고 싶어요. 헌데, 당신이 솔직하지 못해요.
커피를 올려놓겠어요. 시작하세요. (손벽을 두번 치고 돌아선다)
[남편] 여보------
[페이지] 016
그러나, 아내는 대꾸없이 들어가버린다. 남편이 걱정스레
바라보는데 거실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달리는 객차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 기적, 쇳바퀴 마찰음, 승객의 소음 따위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거실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무대 중앙에 라이트가
들어오고 검표기를 든 여객전무와 {가출기}의 조민수로 분장한
남편(분)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객석을 향해 서있다. 달리는 객차
안이다.
[전무(분)] 선생께선 아직 그여인을 찾지 못하셨군요.
[남편(분)] 네. 전무께서 협조해주십시오.
[전무(분)] 협조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아직 가수원 가는
여자손님은 없군요.
[남편(분)] 차내 방송을 하시면 쉽지 않겠읍니까?
[전무(분)] 아, 그렇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방송은 전객차에
동시에 연결되니까요.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님.
[전무(분)] 천만에요 선생. 불행하게도 지금은 기재가 가동되지
않습니다.
[남편(분)] 고장인가요?
[전무(분)] 네, 선생.
[남편(분)] 손을 보면 되잖겠읍니까?
[전무(분)] 됩니다.
[남편(분)] 손을 봐드리겠읍니다. 그 방면에 조금 알고
있읍니다.
[전무(분)] 지금 손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
[남편(분)] 고맙습니다, 전무님.
[전무(분)] 천만에요, 선생.
[남편(분)] 곧 될까요, 전무님?
[전무(분)] 네, 곧 설치될 겁니다.
[남편(분)] 네?
[전무(분)] 왜 놀라십니까, 선생.
[남편(분)] 곧 설치된다고 하셨읍니까?
[전무(분)] 그렇게 말씀드렸읍니다, 선생.
[남편(분)] 그렇다면?
[전무(분)] 수리하기 위해 삼년 전에 공작창에 반납했으니까 곧
설치될 겁니다, 선생.
[남편(분)] 전무님, 우린 가수원에 도착하기 전에 그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전무(분)] 지금 찾고 계시잖습니까, 선생.
[남편(분)] 첫객차부터 끝객차까지------
[전무(분)] 열다섯간입니다, 선생.
[남편(분)] 열다섯간을 세번 반 찾았읍니다.
[전무(분)] 그렇군요. 이 객차가 여덟번째니까요, 선생.
[남편(분)] 그런데 없읍니다.
[전무(분)] 승차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선생.
[남편(분)] 표를 샀읍니다.
[전무(분)] 분명한가요, 선생.
[남편(분)] 출발역에서,
[전무(분)] 목적역까지,
[페이지] 017
[남편(분)] 출발역 매표원이 두 장을,
[전무(분)] 분명히 팔았다고 했지요, 선생.
[남편(분)] 네.
[전무(분)] 그렇다면 분명히 승차했읍니다, 선생.
[남편(분)] 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이 차를 탔읍니다.
[전무(분)] 희망을 잃지 말고 찾아보십시오, 선생.
[남편(분)] 고맙습니다, 전무님.
전무가 모자를 벗었다가 쓴다. 동시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다.
[전무(분)] 선생께선 아직 그 여자를 못 찾으셨군요.
[남편(분)] 네, 전무님.
[전무(분)] 안됐군요, 선생.
[남편(분)] 아무래도 전무님께서 좀더 협조해주셔야겠읍니다.
[전무(분)] 적극 협조하고 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전무님께서 육성으로 방송하시면 그 여인을 찾을수
있읍니다.
[전무(분)] 육성으로,
[남편(분)] 열다섯번이면 됩니다.
[전무(분)] 열다섯번!
[남편(분)] 한번일 수도 있고 열다섯번일 수도 있읍니다.
[전무(분)] 참 좋은 생각입니다, 선생. 그러나 계산이
틀리는군요, 선생.
[남편(분)] 제 말씀은 매칸마다 한번씩------
[전무(분)] 한칸에서 한번으로 보든 승객에게 알린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남편(분)] 전무님의 음성은 큰데요.
[전무(분)] 큽니다. 그러나, 첫째, 입추의 여지 없이 승차한
승객의 벽이 본전무의 육성방송의 진로를 방해하고, 둘째, 입추의
여지 없이 승차한 승객의 대화로 발생하는 소음이 본전무의
육성방송의 진로를 방해하고, 세번째, 본열차는 야간열차로서
입추의 여지 없이 승차한 많은 승객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있기
때문에 본전무의 육성방송을 신속하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선생.
[남편(분)] 두번씩이면 되겠읍니까?
[전무(분)] 글쎄요, 선생.
[남편(분)] 세번씩이면 되겠읍니까?
[전무(분)] 글쎄요, 선생
[남편(분)] 네번씩이면 되겠읍니까?
[전무(분)] 글쎄요, 선생.
[남편(분)] 다섯번씩이면 되겠읍니까?
[전무(분)] 다섯번! 가능합니다, 선생.
[남편(분)] 협조해주십시오.
[전무(분)] 협조하고 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님.
[전무(분)] 그러나, 선생.
[남편(분)] 네, 전무님.
[전무(분)] 본인은 호남선 야간완행열차의 여객전무로서
[페이지] 018
모든 승객의 안전하고 신속하며 편리한 여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읍니다. 모든 승객 속에는 선생도 포함돼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분)] 물론, 선생께서 찾는 그 여인도 포함돼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분)] 깊이 잠들어있는 많은 승객도 포함됩니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분)] 선생과 선생이 찾는 여인과 잠들어있는 많은 승객을
제외한 모든 승객도 포함돼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분)] 따라서 본인은 호남선 야간완행열차의 전무로서
육성방송을 함으로써 많은 승객의 대화를 중단시킬 수 없으며,
잠들어있는 많은 승객의 단잠을 방해할 수 없으며, 선생께서 찾는
여인을 많은 대중 앞에 드러낼 수가 없읍니다, 선생.
[남편(분)] 그렇다고 속삭일 순 없잖습니까, 전무님.
[전무(분)] 속삭여서는 찾을 수가 없읍니다, 선생.
[남편(분)] 딱하시군요, 전무님.
[전무(분)] 네, 선생.
[남편(분)] 그러니까 전무님께서 검표를 하시면서 가수원표를
알려주시면 되잖습니까.
[전무(분)] 알려드렸죠, 선생. 첫칸 첫좌석 말입니다.
[남편(분)] 가보았는데 아니었읍니다.
전무가 모자를 벗었다 쓴다. 그들의 위치가 바뀐다.
[전무(분)] 그래서 둘째칸 둘째좌석으로 수정했죠, 선생.
[남편(분)] 거기도 아니었읍니다.
전무가 모자를 벗었다 쓴다. 그들의 위치가 바뀐다.
[전무(분)] 세째칸 세째좌석, 선생.
[남편(분)] 아니었읍니다.
전무가 모자를 벗었다 쓴다. 그들의 위치가 바뀐다. 이렇게
첫칸에서 열다섯 마지막칸까지 입에 오르내린다.
[전무(분)] (드디어 마지막칸 열다섯번째 좌석, 선생
[남편(분)] 거긴 승무원석 입니다.
[전무(분)] 그렇던가요, 선생.
[남편(분)] 그렇습니다.
[전무(분)] 그렇다면 다시 시작해야겠군요. 어떻게 생긴
분이라고 하셨죠, 선생.
[남편(분)] 가수원까지 가는 여인입니다.
[전무(분)] 그건 나도 알고 있읍니다, 선생.
[남편(분)]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하게 생긴
여인입니다.
[전무(분)] 맞습니다, 선생.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여인.
[남편(분)] 허지만 전무님께선 승차권으로 알아내는 게 쉽
[페이지] 019
지 않습니까?
[전무(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남편(분)] 검표를 하시잖습니까.
[전무(분)]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승객의 행선지를 일일이 볼
순 없읍니다.
[남편(분)] 네? 검표 이유가------
[전무(분)] 무임증차를 적발하는 거죠. 그러나 그 많은 승차권의
행선지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다간 열흘도 못 가서 불면증에
걸려들고, 한달이면 정신병자가 됩니다, 선생.
[남편(분)] 그렇겠군요.
[전무(분)] 그렇습니다, 선생.
[남편(분)] 결국, 검표할 필요가 없군요.
[전무(분)] 무임승차는 여객전무가 적발하는 게 아니고 승객
스스로가 적발되어옵니다, 선생.
[남편(분)] 이해가 안되는군요.
[전무(분)] 그게 인간입니다.
[남편(분)] 어느쪽이 말인가요?
[전무(분)] 양쪽 모두죠, 선생.
[남편(분)] 가수원에 도착하기 전엔 그여인을 찾는다는 건
불가늘한 일이군요.
[전무(분)] 가능합니다, 선생. 설사 행선지를 일일이 읽진
않지만 이걸로 표를 찍어가는 순간 그 승객이 어떤 사연으로 어딜
가는가 직감으로 알 수 있읍니다.
[남편(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전무(분)] 경험으로 얻은 것이라, 이렇다는 것은 알아도
왜그러냐는 것은 모릅니다.
[남편(분)] 그러니까 정확하진 않군요.
[전무(분)] 거의 정확합니다, 선생. 사람이 오래면 지혜요,
물건이 오래면 귀신이라지 않습니까?
[남편(분)] 지금까지 가르켜준 자리엔 그여자가 아니었읍니다.
[전무(분)]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열다섯명은 삼천명의
승객에 비해 영점오프로에 지나지 않으니까 거의 정확하다는
개념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수치입니다. 참고, 믿고,
노력하십시오, 선생.
[남편(분)] 감사합니다.
[전무(분)] 문제는 그여인과 선생의 관계가 애매합니다, 선생.
[남편(분)] 그건 처음에 설명드렸읍니다.
[전무(분)] 그런 극히 개인적, 감정적 일시적 이유로는
곤란합니다. 그여인이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때는 선생께
알려드릴 수가 없읍니다. 여객전무로서 승객의 안전하고 신속하며
편리한 여행을 위해서 취하는 조치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모자를 벗고) 그럼 쾌적한 여행이 되시기를!
동시에 객차 안이 어두워지면서 기적과 함께 소음이 멀어진다.
거실이 밝아진다. 아내가 보던 책에서 시선을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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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남편을 본다.
[아내] 저는 당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부득이한
일로 외박한 일은 있어도 집에서 다투고 나가서 밤을 넘긴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밤을 넘기기는커녕 당신은 화를 내고
뛰쳐나가지만 대문 밖 세걸음부터 후회를 시작하고, 삼십분에
걸음을 멈추고, 세시간안에 돌아오던가 전화로 애들을 통해 사과를
하는 분예요.
[남편] 그게 약점이오?
[아내] 물론이죠. 우리 사이가 오손도손할 땐 그게 사랑이오
진실이며 고마움이지만 유사시엔 재겐 최대의무기이며 당신에겐
최대의 약점이에요.
[남편] 당신 언제 그런 전법을 연구했소?
[아내] 옆길로 유도하지 마세요. 문제는 그렇게 모질지도
매섭지도 못한 분이 집에서 뛰쳐나간 여섯시간 후에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거기엔 분명히 여자가 있어요.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 여자 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요. 당신은
여자를 좋아해요. 아니, 여자에 약해요. 그래서 당신은 일주일씩
가출을 한 거예요.
[남편] 일주일의 가출이 당신에게 충격을 준 건 사실이오. 나
자신도 밤열차가 영시사십분에 가수원역에 도착했을 때, 단
한사람의 승객인 나를 어둡고 쓸쓸한플랫폼에 버려둔 채 기차가
떠나버릴 때 갑자기 몰려오는 외로움에 당황했소. (거실이 서서히
어두어지기 시작하며) 그래서 이 {가출기}의 조민수로하여금
누군가를 갈망하도록 그리게 된 것같소.
기적이 울려오면서 완전히 어두어진다. 그 어둠속에서 기차가
달려와서 달려간다. 무대의 어느 곳에 희미한 빛이 들어오면
가수원역 플랫폼에 조민수로서의 남편(분)이 조그만 가방을 들고
서있다. 어둠 저쪽 역사에서 램프빛이 깜빡거릴뿐 깊은밤이라
사위는 적막하다.
[역원] (어둠속에서 소리만) 여보세요. 거기 누가 있읍니까?
(사이) 플랫폼에 누가 있느냐구요?
[남편] --------- (남편은 듣지 못한 듯 좌우의 어둠 속을
바라볼 뿐 대답을 않는다.)
[역원] 여보세요. 누가 있소? 플랫폼에 누가 있느냔 말요!
[남편(분)] 사람을 찾고 있읍니다.
[역원] 사람을 찾아요?
[남편(분)] 같이 기차를 타고온 여자요.
[역원] 빨리 찾아갖고 나오시오. 당신들 때문에 한없이 서있을
순 없소.
[남편(분)] 그리 나가지 않았읍니까?
[역원] 뭐라구요?
[남편(분)]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여인이오.
[역원] 여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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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분)] 네, 여자 승객이오.
[역원] 여자는커녕 그림자도 나가지 않았소. 어서 나오시오.
[남편(분)] 저 어둠속으로 간 것같소. 그쪽에도 출구가 있나요?
[역원] 어느쪽이요?
[남편(분)] 저기 강물이 부옇게 보이는 곳 말요.
[역원] 그쪽은 길이 없소. 간혹 젊은 사람들이 철교를 넘지만
밤엔 위험해서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아요.
[남편(분)] 강건너에 마을이 있나요?
[역원] 뭐라구요?
[남편(분)] 사람들이 살고 있느냐구요?
[역원] 갈대밭뿐이오. 강을 따라 갈대밭이 시오리쯤 뻗어있고 그
다음엔 늪과 절벽이오. 그나저나 어서 나오시오. 나도 들어가서
자야겠소.
[남편(분)] 여자가 그리 갔단 말요!
[역원] 여자가 가요? 쓸데없는 소리요. 손님이 잘못 본거요.
[남편(분)] 그렇다면 승객 한사람이 어디 갔소?
[역원] 낸들 알겠소? 어서 나오시오.
[남편(분)]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여인이
행방불명이란 말요.
[역원] 당신 누구요? 어서 나오지 못하오?
[남편(분)] 시발역에서 가수원표를 두장 팔았소.
[역원] 그야 표를 사고도 타지 않는 수도 있소.
[남편(분)] 그 여잔 분명히 탔소.
[역원] 여기서 내리지 않은 거요. 그런 일은 가끔 있어요. 여긴
잘곳이 없기 때문에 윗역이나 다음 역에서 내렸다가 낮차로 오죠.
[남편(분)] 여관이 없다구요?
[역원] 여인숙도 없소.
[남편(분)] 여행자는 어디서 밤을 보내죠?
[역원] 그야 역사나 마당이죠.
[남편(분)] 주막도 없소.
[역원] 주막은 마을 끝에 있소. 그렇지만 이미 문을 닫았소. 아,
지금 불이 켜졌소. 파랑불이요. 당신은 재수가 좋은 사람이오.
주막 주인여자는 간혹 정신이 이상해지는데 그땐 남자를 받소.
그러나 아무나 받지 않아요. 이 마을에 처음 온 손님이라야
받는다오.
[남편(분)] ------ (몇걸음 움직이다가 멎는다)
[역원] 문이 잠겼거든 노크를 하시오. 잘하면 그여자가 당신을
원하겠지만 잘못하다간 혼날테니 조심하시오. (기적소리) 열차가
오고 있소. 어서 나오시오.
[남편(분)] 어디 행인가요?
[역원] 상행이오. 되돌아가겠다면 열차를 세우겠소. (기적소리)
어떻게 하겠소? (기적소리) 어서 결정하시오. 차를 급정거시킬 순
없으니까 어서 결정하시오. (기적소리) 어느쪽이오? 어서 결정하란
말요. 그렇잖으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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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통과시키겠소.
남편(분)은 말없이 서있을 뿐이다. 드디어 열차가 요란스레
통과한다. 열차의 바람과 불빛이 휘몰아치다가 조용해지면
남편(분)이 역사를 향해 걸어나간다. 그가 어둠 저쪽으로 사라지면
한줄기 깜박이던 램프가 꺼지고 가수원역은 완전히 어두워진다.
거실이 화사하도록 밝아진다. 아내와 남편이 대치하듯 서있다.
[아내] 당신이 혼자 갔다면, 그것도 홧김에 바람이나 쐬려고
기차를 탄 거라면 역원이 상행열차를 세워주겠다고 했을 때 왜
거절을 했죠? 그땐 이미 찾는 여인도 없고 여인숙조차 없다는 걸
알았는데 말예요.
[남편] (어려움을 느끼며) 당신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승객 한사람 때문에 역원이 임의로 예정도 없는 열차를
세울 수가 있느냔 말이오.
[아내] 당신이 그렇게 쓰셨잖아요?
[남편] 그건 상상력에 의한 경험이오.
[아내] 당신은 그날 거기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편] 물론 역사에서 밤을 새웠소. 그러나 역원이 열차를
세워주겠다는 얘긴 없었소. 주막과 주인여자의 얘기도 물론
없었소.
[아내] 이 {가출기}엔 주막과 주인여자의 얘기가 있어요. 그것도
본능적 유희의 생생한 기록으로 말예요.
[남편] 그건 상상적 경험을 미적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지 현상을
기록한 게 아니오.
[아내] 그 미적 감동이 아무런 근거없이 생겨났을까요?
이를테면, 실제로 역원이 당신의 귀가를 위해 열차를 세워주겠다고
하더라도 그걸 거절했을 사실성 말예요.
[남편] 그때의 심정은 그랬소.
[아내] 그것 보세요.
[남편] 반대로 열차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그걸 거절하리라는
의지를 갖기도 하고, 열차가 없거나 있어도 정거하지 않고
통과해버리기 때문에 세워줬으면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적 경험을 할 수도 있소. 물론 그 이면에는 내가 가출하게 된
매우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 웅크리고 있으면서 말이오. 그건
당신과 관계되는 일이오. 그러나, 문학예술에서의 표현은 혼탁한
감정을 명료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세워주겠다고 제의를 햇는데
거절한 걸로 쓴 거요.
[아내] 결국 같은 얘기예요.
[남편] (화를 내어 크게) 같은 얘기라면 내가 돌아오도록 당신이
끌어들였으면 될 게 아니오!
[아내] 네?
[남편] (열을 내어) 당신말대로 난 큰소릴 치고 뛰쳐나가도 대문
밖 세발짝이면 후회하고, 삼십분이면 걸음을 멈추고, 세시간이면
돌아와서 사과를 했소. 그런 내가 그렇게 먼 곳, 그렇게 오랫동안
겪은 갈등은 어떠했겠소. 수백 수천 수만번 후회하고, 멈추고,
돌아서고, 망설이고------ 그러면서 결국 돌아오지 않은 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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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오. 하찮은 것이 쌓여서 벽이 됐소. 이해도 설득도 도저히
불가능한 벽이오. 도대체 관용할 능력이 내겐 없었소. 수백 수천
수만번씩 귀가하겠다는 충동을 받았는데 그 충동 다음에는 가슴이
턱턱 막히는 답답한 벽이 저편에서 달려와 나를 짓누르곤 했소.
그래서 귀가를 못했소! 그런데 반성은커녕 이 {가출기}를 갖고
시시콜콜 따져들다니!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건데------
[아내] 제가 어떻게 했어요? 그체적으로 말씀해보세요.
[남편] 한마디로 말해서 당신에겐 향기가 없어! 군내뿐야!
[아내] 왜 향기가 없어지고 군내만 남았을까요?
[남편] 그야 스스로 알 일이오. 그게 왜 내 책임이오?
[아내] 책임을 묻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 때문에
다투었느냐 하는 거예요.
[남편] 그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어. 집안일이란 사소해서
드러낼 수 없잖소.
[아내] 그렇담 큰 소린 누가 하구요?
[남편] (사이) 나요.
[아내] 사과는 누가 하구요?
[남편] 그야------ 내가 했소.
[아내] 당신이 큰 소리해서 다투고 당신이 사과해서 끝났으면
얘긴 다 된 거예요.
[남편] ---------
[아내] 그렇죠? 누가 들어봐도 판정은 뻔하죠.
[남편] 이상하군.
[아내] 뭐가요?
[남편] 얘기가 이상하게 결말지어졌소.
[아내] 당신이 큰 소리 하실 건 민들레 깃털만큼도 없어요.
(책의 한곳을 펴서 넘겨주며) 읽어보세요.
[남편] --------- (겨우 받아들고 망설인다)
[아내] 표한 데를 읽어보세요.
[남편] 조민수는 그만 지쳐버렸다. 찻속에서 그 여자를 찾는
일을 포기햇다. 비좁은 의자의 한 귀퉁이를 얻어 앉은 그는
몰려오는 피로 때문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가 퍼뜩 눈을
떴을 때 기차는 벌써 네시간 반을 달려와서 가수원역에 도착했다가
지금 막 출발하려는 찰라였다. 선반에서 허겁지겁 가방을 끌어낸
조민수는 통로를 비집고 마구 뛰었다. 그가 승강대에서 플랫폼에
발을 내려놓는 순간 기차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 넘기세요. 플랫폼에서 역사에 나와서의 얘기를
읽어보세요.
[남편] (몇장을 넘겨 읽는다) 여인숙조차 없는 벽지의 외롭고
적막한 곳이다. 조민수는 낡은 역사에서 밤바람과 함께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어둠은 우주의 공간에서 이어온 듯 깊었다. 그때
모기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겨우 몰아낼 듯 여인의 노랫소리가 어둠
저쪽에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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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왔다. 조민수는 문득 역원이 일러준 카페의 여인을 생각했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어둠 저쪽에서 파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내] 그만 됐어요. (엽서를 보이며) 당신은 가출한 일주일동안
하루에 한장씩 일곱장의 엽서를 보내셨어요. 제1신은 가수원
역사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거예요. 이 엽서와 {가출기}의 일부가
어떻게 같은가 비교해보겠어요.
[남편] 그건 작품과는 관계가 없소.
[아내] 같으니까 문제죠. (읽는다.) 지금 아빠는 네시간 반을
달려 이곳 가수원에 내렸다. 여인숙조차 없는 벽지의 외롭고
적막한 곳이다. 앉아있을 의자도 마땅치 않은 지금 너희들의
따뜻한 볼과 초롱초롱한 눈과 귀여운 재롱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면
아빠는 어둠 저쪽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 것만 같다.
아빠는 지금 낡은 역사에서 밤바람과 함께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사이) 이 엽서에서 아빠는 {가출기}에선 조민수로, 엽서에서의
아이들은 {가출기}에선 여자로 바끼 거예요. 당신은 차에서 졸거나
잠드는 분이 아니예요.
[남편]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니잖소.
[아내] 맞아요. 표현을 바꿔봐요. 그여잘 찾느라고 허둥댄 것은
그여자와 얘길 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못한거고, 의자의 한귀퉁이를
얻어맞고 깜빡 졸았다는 건 그여자에게 몸을 기대고 있으니까
꿈속처럼 달콤했던 거고, 그러다보니까 네시간 반이 순간으로 흘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뿐예요? 어둠
저쪽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노랫소리는 그여자의 속삭임이었어요.
당신은 아이들의 볼과 눈망울과 재롱이 없으면 어떻다고 했지만
그건 모두 여자의 것들이에요. 파란 불빛------ 그건 여관이나
호텔이에요. 자정이 넘어 빛나는 건 그밖에 더 있어요?
[남편] 가수원엔 그런 게 없다니까 그러오.
[아내] 그게 꼭 가수원이란 보장도 없죠.
[남편] 엽서의 우체국 스탬프가 있잖소.
[아내] 말씀 잘하셨어요. (엽서를 주며) 보세요.
[남편] (받아서 본다.) 아니? 이건?
[아내] 어디죠?
[남편] (중얼거림으로)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모를
일이군------
[아내] 거긴 온천에서 가까운 곳이에요. 온천장, 호텔,
여관------ 자정 이후에도 불빛은 수두룩해요.
[남편] 아니오. 여기가 아니오.
[아내] 당신은 여인숙조차 없는 벽지의 외롭고 적막한 가수원의
낡은 역사에서 새벽을 기다리면서 이 엽서를 쓴 게 아니라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온천장의 호텔 객실에서 목욕을 끝내고
나올 그여자의 황홀한 육체를 기다리면서 이걸 쓴 거예요! 그렇죠?
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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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여보, 이건------ 이건------
[아내] 듣기싫어요! (쏴붙이고 분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가로 간다)
[남편] (주춤주춤 다가간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요. 난
결코, 결백하단 말요------
[아내] (되돌아나오며, 차분한 음성으로) 당신이 그런 델 갔다고
믿진 않아요. 당신은 작품에서도 연애장소를 그런 데로 택하는 건
금기로 알고 계시니까요.
[남편] (마음을 풀고) 가수원에선 우편물을 가까운 이웃으로
보내는 모양이오.
[아내] (냉랭하게) 그렇다고 당신이 연앨 안했다는 건 아녜요.
당신은 더 지능적이고 알찐 연앨 한 거예요.
[남편] 여보.
[아내] (책을 집어든다) 다음장면을 보면 알아요. 당신은 어둠
저쪽에서 비쳐오는 불빛을 보고 찾아갔죠. 그 주막 아닌 카페엔
아름다운 여인이 외롭게 밤을 새우고 있는 걸로 되어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당신이 가출한 일주일동안 밤을 꼬박 새웠어요. 헌데
당신은------
아내가 남편을 쏴보고, 남편이 아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거실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무대에 시고의 여름밤을
알려주는 벌레소리, 바람소리가 들린다. 창가에 불이 들어오면
시골 주막의 밤이다. 카페의 여인이 된 아내(분)가 남편(분)에게
술을 따라준다.
[아내(분)] 손님은 재수가 좋았어요.
[남편(분)] 옛날옛적 아주 먼 옛날에 나무를 하던 소년이
깊고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죠. 해는 서산으로 넘은지 오래고
헤매도 인가는 나오지 않고 밤은 깊어만 가고 무서운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와오고------ 그때 깜빡거리는 불빛이 까물까물
보였죠. 소년은 살았다 싶어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죠. 그 오두막엔 선녀처럼 예쁜 여자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하얀 실을 하얀 바늘에 꿰어 하얀 천으로 하얀
두루마기를 깁고 있었어요.
[아내(분)] 천년묵은 여우예요, 백년묵은 구렁이예요? 홋호호.
[남편(분)] 핫하하. 어떻든 역사에서 밤을 새우지 않게 돼서
다행입니다. 역원이 일러주더군요. 누군지 어둬서 얼굴은 잘
모르지만.
[아내(분)] 상관없어요. 역원은 한사람뿐이니까요.
[남편(분)] 혼자서 역사를 지키나요?
[아내(분)] 마을사람들이 도와주죠. 마을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다 알고 있어요. 이를테면 한집안 식구같아요. 그래서 우린 해가
넘어가고 두시간 후엔 술을 팔지 않아요.
[남편(분)] 누가 또 있나요?
[아내(분)] 혼자예요. 이 마을에선 버릇처럼 우리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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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분)] 네.
[아내(분)] 마을사람들은 그 시간을 잘 지켜줘요.
[남편(분)] 그런데 왜 불을 켰읍니까?
[아내(분)] 열차가 자정에 도착하니까요.
[남편(분)] 열차손님을 기다리시는군요.
[아내(분)] 아니예요. 열차손님은 거의 없어요. 외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마을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그분들은 곧장 집으로 가죠.
마을사람은 밤늦게 찾아올 생각도 않고 제가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전 마을사람들과는 연앨 하지 않아요. 가족들을 모두 알기
때문이죠. (사이) 불을 켜놓고 선생님같은 손님을 기다린 거예요.
[남편(분)] 나를?
[아내(분)]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같은 손님이에요.
[남편(분)] 나같은 손님?
[아내(분)] 네, 손님같은 선생님, 홋호호. 그렇지만 매일밤
이러는 건 아녜요. 일년에 한두번------ 꼭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게 계절의 탓만도, 나이의 탓만도 , 술이나 생리적
탓만도 아닌 것같아요. 이 증세가 시작되면 꼭 일주일 가요.
일주일동안 불을 켜놓고 기다리죠. 선생님같은 손님을. 꼭
선생님같은 손님을 만나는 건 아니지만 간혹 만나게 돼요. 어느땐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가 불을 꺼버리고 말아요. 이증세도 가라
앉아요. 물론 처음부터 개운한 건 아니지만 차츰 개운해져요.
언젠가 첫날에 찾아오신 분이 있었어요. 그러면 일주일동안
머물다가 가셔도 돼요. (일어선다) 불을 바꾸고 오겠어요.
아내(분) 밖으로 나간다. 청등이 홍등으로 바뀐다. 남편(분)이
일어나서 집 안을 둘러본다. 아내(분)가 술단지를 들고 들어온다.
[아내(분)] 이건 향기로운 술이에요. 이제부터 우리만의 카페가
시작되는 거예요. (술을 따르며) 원산지의 술보다 더 향기로와요.
제가 담아서 선생님같은 손님을 위해 깊숙이 보관한 거예요.
(건배한다) 이 술엔 달콤한 향액이 들어있어요. 향액! 달콤한
향액! 선생님은 그걸 이해 못하실 거예요.
[남편(분)] ------ (창밖의 홍등에 신경을 쓰듯 바라보고 있다)
[아내(분)] 선생님, 듣고 계세요?
[남편(분)] 아, 네------
[아내(분)] 홋호호------ 밖에 켜놓은 홍등이 걸리시는가보죠?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홍등가는 아녜요.
[남편(분)] 그야, 물론이죠.
[아내(분)] 청등과 홍등- 도시의 네거리에 기찻길의 건널목에
설치되어있는 신호등같죠. 그런 의미도 있긴 하지만 꼭 그건
아니에요. 푸른 하늘과 붉은 태양같죠. 제가 푸른 하늘이면
선생님은 빛나는 태양이죠. 그런 의미도 있긴 하지만 꼭 그것만도
아니예요. 의미가 없어요. 제 마음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한가지 의미가 있긴 있군요. 자, 드세요.
[페이지] 027
[남편(분)] (술을 든다) 그게 뭐죠?
[아내(분)] 마을사람들의 마음이죠. 마을사람들은 우리주막이
일년에 한두번씩 카페가 되는 걸 알아요. 모두 명절을 기다리듯
기다렸다가 축복을 해줘요. 제게 그 이상야릇한 증세가 시작되면
파란 불을 켜놓았다가 선생님같은 손님이 찾아오시면 빨강으로
바꾸죠. 저 불이 일주일 내내 청등으로만 있다가 꺼지면
마을사람들이 더 슬퍼해요. 입 밖으로 얘긴 않지만 제가 쓸쓸해
할까봐 몰려와서 떠들어주곤 하죠. 그렇지만 오늘처럼 홍등으로
바뀌면 그날부터는 얼씬도 안해요. 그만큼 제게 자유를 주는
거예요. 축복을 하는 거예요. (술을 따라 놓고) 선생님.
[남편(분)] 네.
[아내(분)] 이제 선생님 얘길 들어야겠어요. 너무 제 얘기만
했어요.
[남편(분)] 고맙다는 인사와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소개를
해야겠군요.
[아내(분)] 인사도 소개도 필요없어요. 우린 서로 만난 걸로
되고 사흘 후에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않는 거예요.
[남편(분)] 사흘 후라면?
[아내(분)] 선생님은 닷새만에 오셨으니까 오늘까지 사흘만
계셔야 해요. 그후엔 선생님이 다시 찾아오셔도 안되고,
찾아오시더라도 제가 만나드리지 않아요. 저는 누구든 두번은
만나지 않으니까요. 그건 괴로운 일이거든요. 더구나, 목적을 갖고
오시는 분은 저 등불을 볼 수가 없어요.
[남편(분)] 난 목적이 있었는데요?
[아내(분)] 여인을 찾는 목적 말씀인가요?
[남편(분)] 아니?
[아내(분)] 홋호호.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여인!
[남편(분)]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아내(분)] 홋호호.
[남편(분)] 당신이 그 여인이오?
[아내(분)] 그렇게 보여요? (턱을 들어 입가에 미소를 띤다)
예뻐요?
[남편(분)] ---------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분)] 다리도 보여드리죠. (자리에서 나와 치마를
들어올리고 다리를 움직인다. 그게 점점 빨라지면서 캉캉이 된다.
마치 무희처럼)
[남편(분)] 아------
[아내(분)] (계속하며) 미끈해요?
[남편(분)] 아름답군요!
[아내(분)] (멎는다) 허지만 전 그여자가 아니예요. (자리에
앉으며) 전 입보다 얼굴 전체에, 다리의 뒷모습보다 몸전체의
균형에 자신이 있어요. (술을 따르며) 선생님은 지금 입과 다리의
뒷모습에 집착되어있어요.
[페이지] 028
그래서 전체를 못 보시는 거예요. 그 역원의 말에 홀린거예요.
[남편(분)] 역원?
[아내(분)] 매표원이죠.
[남편(분)] 그건 또 어떻게 압니까? 난 그 얘길 안했는데!
[아내(분)] 홋호호. 알고 있어요.
[남편(분)] 아니, 당신은?
[아내(분)] 궁금하시죠? 서두르실 필욘 없어요. (술을 마시고)
몇해 전에 선생님같은 손님이 오셨죠. 그분 얘기가 매표원이
그여자의 얘길 하더니 동행이냐고 묻더라는군요.
[남편(분)] 이상하군요.
[아내(분)] 이상할 건 없죠. 그 역원이 그러고 싶었을 거예요.
입이 예쁘고 다리가 미끈한 여인과 멀리 어쩜 여기 가수원쯤으로
떠나고 싶었을 거예요. 자신의 염원을 그럴만한 승객에게 넘겨준
거죠.
[남편(분)] 그래서 그런 장난을------
[아내(분)] 아니죠. 장난은 아녜요. 혹 모르지만 말예요. (사이)
선생님, 입이 예쁘고 다리가 미끈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셨어요?
[남편(분)] 미녀가 아닐까요?
[아내(분)] 전 두가지로 생각해봤어요. 하나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의미예요. 여자의 입, 여자의 미끈한 다리는 감각과
관능이죠. 그건 본능이고 인생이고 그래서 호기심이 가고 빠져들게
돼요. 그 역원이 매표구의 조그만 창구로 볼 때 그게 인생의
전부로 볼 수 있죠. 표를 살 때 입을 보고, 돌아서서 걸어갈 때
다리를 보니까요. 그 조그만 창구론 더 자세히 볼 수가 없죠. 그게
모두죠. 인생의 모두. 선생님은 지금 거기에 집착되어있어요.
그러나, 그게 인생의 모두는 아니잖아요. 드세요.
남편(분)과 아내(분)가 잔을 들어 단숨에 마신다. 아내(분)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남편(분)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쪽으로 움직인다. 어둠에서 라이트가 그들을 따라간다.
[아내(분)] 또 한가지는 그 역원이 선생님의 여행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장난을 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분의 직감이
일치된 거예요. 그래서 제게 증세가 일어났을 때 선생님은
가수원엘 오셨고 우린 마침내 만난거예요. 우연히 정확하게 일치된
거예요. 불가사의한 것을, 기적같은 것을 흔히 인연이라고 하죠.
우리의 사흘간의 인연을 위해 많은 우연의 일치가 있은 거예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우연의 일치보다 그 우연을 만들어낸
대상물이에요.
[남편(분)] 대상?
[아내(분)] 근본이죠.
[남편(분)] 근본?
[페이지] 029
[아내(분)] 부인과 다투고 나오셨죠?
[남편(분)] 그걸?
[아내(분)] 놀라실 건 없어요. 마음을 텅빈 그릇처럼
비워놓고보면 그쯤 알게 돼요. (고개를 돌려 남편(분)을 본다.
남편(분)이 허탈과 실망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또
모르죠. 전 그 역원을 모르니까요. 정말로 그런 여인이 선생님보다
조금 앞서서 가수원행 승차권을 살 수도 있어요. (남편(분)이
서서히 생기를 얻는다) 선생님은 그여잘 찾아나섰고, 그여잔 지금
어딘가에 존재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사이) 혹, 꼽추가
아녔어요?
[남편(분)] 꼽추라뇨?
[아내(분)] 입과 다리만 내세운 걸 보면 그럴 법도 해서요.
[남편(분)] 아니오. 그럴 리가 없소.
[아내(분)] 강건너에 그 꼽추의 집이 있어요.
[남편(분)] 강건너엔 마을이 없다면서요?
[아내(분)] (개의치않고) 일년에 한두번씩 다니러오는 모양인데
밤열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요. 역사로
나오지 않고 철길을 따라 되걸어서 강으로 가요. 거기서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달빛을 받으며 강물을 건너요. 수심이 별로 깊지
않아서 제일 깊은 곳이 보통사람들의 불두덕까지 차는데
그여자에겐 젖가슴까지 찬다고 해요. 그런데 소문일 뿐이지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 모양이에요.
[남편(분)] 그쪽으로 가는 그림자가 있었어요. 마치 검은
고양이같기도 하고 달그림자같기도 했어요.
[아내(분)] 졸다가 내리셨군요.
[남편(분)] 잠깐 졸았는데 그만------
[아내(분)] 졸다가 내리면 헛것을 보기도 해요.
[남편(분)] 그여자가 정말------
[아내(분)] (기다리지 않고) 만나려면 날이 새는대로 강을
건너가보면 돼요. 그러나, 만나면 실망하실 거예요.
[남편(분)] 꼽춘가요?
[아내(분)] 모르죠. 아무도 강을 건너가보지 않았으니까요. 설사
그 여자가 꼽추가 아니고 절세의 미녀라도 결국 싫증을 느끼게
돼요. 사람은 사람끼리 사랑하다가도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에요.
특히 남자들은 누구나 다 그래요. (뭔가 퍼뜩 기회라고 생각한다.
손뼉을 치려다가 그만두고 다가간다. 위장이다) 선생님이 댁에서
뛰쳐나온 것도 부인에게 싫증을 느껴서예요. 그렇죠! (남편이
대사에 혼란이 되어 머주한다) 바가질 긁어요? (역시 혼란이다)
부인이 밉죠! (아직 혼란이다) 꼴도 보기 싫죠? 그렇죠?
[남편(분)] ---------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분)] (발끈한다) 뭐라구요?
남편(분)이 깜짝 놀라 물러선다. 동시에 무대가 확 밝아지면서
거실의 아내와 남편이 된다.
[아내] 여보, 정말로 당신은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거예
[페이지] 030
요? 네?
[남편] 아니------ 그런 얘긴 없잖소.
[아내] 방금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셨잖아요!
[남편] 작품에선 그여자가 그렇게 묻는 게 아니잖소.
[아내] 지금 작품이 문제예요? 현실이 문제예요!
[남편] 우린 지금 작품얘길 하고 있었단 말요.
[아내] 조민수는 {가출기}에서 아내를 사랑한다고 대답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선뜻 그 말을 안했어요?
[남편] 억양이 달랐소. 순간, 조민수의 대답이 잘못 됐구나
싶었소. 아내 때문에 가출했는데 그의 아내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걸 긍정해야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소.
[아내] 아내 때문에 가출한 건 조민수가 아니고 당신이에요!
당신!
이때 전화가 울린다. 그들이 흠칫 놀라며 전화기를 바라본다.
(암전)
[막] 제3막
응접탁자, 의자, 전화기, 꽃병의 꽃이 전막의 처음과 똑같게
놓였다. 전막에선 아내가 코트의 깃을 세우고 여행용가방을 의자에
놓고 있다. 남편과 아내가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신문과 책을 들고
전막의 처음과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아내가 입을 연다.
[아내] 손을 흔드셨어요? 그여자가 어떻게 해요? 받아서 손을
흔들었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그여자가 전줄 아셨군요, 홋호호.
그럴 수밖에 없지 뭐예요. 입구에서 우리 동 잔디밭까진 꽤 멀어서
사람을 바꿔보기 쉬워요. 더구나 그날 우린 스커트까지 바꿔 입고
있었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책에 시선을 보낸다.
남편이 다시 책을 본다. 아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아내] 당신이 가까와졌을 때 그여잔 돌아서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구요. 그래서 당신이 뒤로 살그머니 다가가서 그여자의 볼에
키스를 하셨죠. 그때 그여자가 어떻게 했어요?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 열기가 너무 높아서 제가 아니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구요,
홋호호. 깜짝 놀랐을 거예요. 그때 그여잔 뭘 하고 있었어요?
잔디밭에서 말예요.
남편이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아내가 책을 본다. 남편이
다시 신문을 본다. 아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아내] 참, 잔디를 밟고 있었죠. 맨발로 잔디를! 그여잔 발이
예뻐요. 그 희고 예쁜 발로 잔디밟기를 좋아해요. 봄부터 가을까지
맨발로 잔디를 밟아요. 당신은 몸부터 가을까지------ 줄곧------
그러는 그여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어요. 그여자에게서 뭔가를
얻고 싶어했어요. 향기로운 것, 달콤한 것, 새롭고 싱싱한 것,
[페이지] 031
사랑으로 방울진 아침이슬같은 것, 영혼의 한 조각같은 것------
맞아요------ 그여자가 갖고 있을 신비한 영혼의 한조각을 당신은
원하고 있었어요. (사이, 힘없이) 그래서 당신은 가출을 한
거예요.
[남편] 여보, 가출한 동긴 당신이 더 잘 알잖소.
[아내] 전엔 그정도의 일로 화를 내고 가출한 일이 없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때문에 제게서 싫증을 느끼신 거예요.
그래서 전 사랑의 확인을 얻고 싶었어요. 처음엔 아침에 한번이면
되었어요. 그런데 얼마후엔 아침저녁으로 두번이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뭔가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했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한번 더 해서 아침, 점심, 저녁 세차례에 사랑의
확인을 받아야 했어요. 그건 필수사항이었어요. 하루 세끼밥을
줄이더라도 그 확인은 있어야 했어요.
[남편]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내] 처음엔 당신도 제 뜻대로 잘 해주셨어요. 그런데 위층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오고부터, 정확하게 말해서 위층 신혼부부의
신부가 잔디밟기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당신은 그걸
귀찮아하셨어요. 당신은 묘안을 생각해내셨죠. 예쁘다에 대수에
쓰이는 지수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남편] 여보, 반복은 무서운 거요.
[아내] 그래서 당신은 예쁘다, 세번! 으로 하루치를 끝내셨군요.
[남편] 서양영화에서 보잖았소. 깜깜한 밤 깊은 산속에서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소리가 들렸소.
[아내] 그게 뻥튀겨져서 예쁘다, 백번!에서 예쁘다, 육천번이
되었어요.
[남편] 사냥꾼에게 쫑겨 길을 잃고 외롭게 돌아다니던 늑대
한마리가 그 소릴 듣고 달려갔소.
[아내] 처음엔 황홀했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남편] 그러나 멈칫했소.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했기
때문이오.
[아내] 언젠가 문득 그 숫자가 대중적 상술로 쓰이고 있는 걸
알게 되면서 다시 불안하기 시작했어요.
[남편] 그러나 암컷을 부르는 그 소린 계속해서 밀림을 울렸고
인가의 사육장에서 탈출해 쫑기던 암컷은 그 소리에 홀려
한걸음한걸음 탁 트인 풀밭으로 다가갔소.
[아내] 이젠 예쁘다, 팔천번!은 돼야 옛날에 예쁘오,
한마디쯤이에요.
[남편] 순간, 사방에서 숨겨놓은 자동차의 강한 불빛이
쏟아지면서 다섯개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소. 결국 암컷은 사냥꾼이
장치한 녹음기의 덫에 걸려 총탄을 맞고 쓰러졌오. 난 그게 두려운
거요. 내 확인의 반복이 당신을 흡수해버릴 것같았소.
[아내] 당신은 그 말을 녹음테이프처럼 반복했어요?
[남편]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린 서로 덫을 놓고 살 순
[페이지] 032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아내] 제가 당신에게 흡수돼버린다고 나쁜가요?
[남편] 그건 체면술같은 건데 우리가 그렇게 살 순 없잖소.
[아내] 반복도 좋고, 흡수도 좋고, 체면술이래도 좋아요. 전
사랑의 확인을 받으며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하찮은
이유로 가출해서 카페의 여인과------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울먹이며) 그건 나의 죽음과 같아요.
[남편] (서서히 다가가서) 여보, 그건 조민수의 얘기요.
조민수와 카페의 여인은 허구의 인물이오.
[아내] (슬픔을 억제하고) 결국 당신은 자라목이군요.
[남편] 자라목?
[아내] 목을 내밀었다가 건들기만 하면 갑옷 속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자라 말예요.
[남편] 오 답답하군.
[아내] 답답한 건 나예요. 사주관상쟁이 손금읽듯 뻔한데 체험의
확대다, 상상적 체험이다, 미적 예술적 표현이다, 허구다, 하는
자라갑옷으로 감춰버리니 답답한 건 나예요! 허지만 끝내는 밝히고
말겠어요. 당신이 자백을 않으면 제가 현장을 하나하나 답사해서
밝혀낼 거예요. 그리곤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어요!
[남편] 여보, 어떻게 해야 날 믿겠소.
[아내] (책을 펴주며) 여기부터예요.
[남편] ------ (망설인다)
[아내] 위층 신혼부부를 증인으로 부를까요?
[남편] 제발------
[아내] 증인이 꼭 필요한 건 아녜요. 그여자 앞에서 당신은
새롭게 가슴이 뛰고 있었어요. 거짓말을 못하죠. 솔직해진단
말예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남편] 그건 오해요. 다만 그여자가 어딘지 우리 신혼시절의
당신을 닮은 데가 많아서 착각을 했던 거요.
[아내] 그럼 시작하는 거예요.
아내가 코트를 벗고 전막에서 중단했던 그 자리를 찾아선다.
남편도 똑같은 위치를 찾아간다. 동시에 조명도 주막의 밤으로
변한다.
[남편] --------- (대사를 잊은듯 멍하다)
[아내] --------- (웬일인가 싶어 바라본다)
[남편] (억지로) 난--- 난--- 아직--- (그러나 계속하지 못한다)
[아내] (속삭인다) 잊었어요? (사이, 속삭인다) 난 아직 아내를
사랑합니다예요.
[남편] 그건 알아요.
[아내] 그런데 왜그러세요?
[남편] 그 말이 나오지 않아요. 아직 조민수 분위기가 아니오.
[아내] 너무 밝아서 그런가봐요. (불을 줄이려다가) 아니?
당신은------ 조민수가 아닌 당신으로선 아내인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단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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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글쎄, 그게 도무지------
[아내] 좋아요. 끝까지 캐고 말겠어요! (불을 줄인다) 분위기를
위해 그여자의 대사를 반복해드리죠!
아내가 쏴붙이고 위치로 가서 카페위 여인이 되면 말씨가
매끄럽고 곱게 돌변한다.
[아내(분)] 아무도 강을 건너가보지 않았어요. 설사 그 여자가
꼽추가 아니고 절세의 미녀라도 결국 싫증을 느끼게 돼요. 사람은
사람끼리 사랑하다가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에요. 특히 남자들은
누구나 다 그래요. 선생님이 댁을 버리고 뛰쳐나온 것도 부인에게
싫증을 느껴서예요. (전막에서 억양을 변형시켰던 이 부분을
부드럽게) 그렇죠?
[남편(분)] 난 아직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만 답답했을
뿐입니다.
[아내(분)] 선생님은 착하시군요. 순진하시구요.
[남편(분)] 보기와는 다릅니다.
[아내(분)] 착하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남편(분)] 글쎄요.
[아내(분)] 전 착한 사람을 못 만났어요. 그래서 깊이 사귀지
않기로 했어요. 단 한번, 일주일 이내로 사귀는 거예요.
[남편(분)] 그게 가능할까요?
[아내(분)] 선생님같은 손님이면 돼요.
[남편(분)] 그건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없죠.
[아내(분)] 인생이 뭐죠? 교과서같은 답변 말구요.
[남편(분)] 글쎄요.
[아내(분)] 스승이 제자에게, 어른이 아이들에게, 연인이
연인에게 대답하는 그런 답변은 말구요. 스님이 중생에게, 목사나
신부가 신도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대답하는 그런 답변은 말구요.
(사이) 장군이 군졸에게, 사업주가 종업원에게, 대통령이 국민에게
하는 그런 답변은 말구요.
[남편(분)] 모르겠군요.
[아내(분)] 저도 모르겠어요. (사이) 인간은 자유라죠. 영혼은
불멸이구요. 신은 존재하구요. 저는 그걸 믿어요. 보이진 않지만,
따져들면 매시껍지만 그저 술을 한두잔씩 마시듯 그것을 믿고
싶어요. 허지만, 한가지 밝혀두고 싶은 건------ (생각해보고)
그만두겠어요. (기분을 바꾸려는 듯 명쾌한 제스처를 하며) 일년에
한두번 찾아오는 이 증세에 선생님같은 손님을 만났는데 괜한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사이,
남편(분)이 의자로 간다. 아내(분)도 의자로 간다) 선생님, 제
증세의 치료법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남편(분)] 술맛이 참 좋군요.
[아내(분)] 부부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 일 그대로예요. 첫날엔
덥지만 제 침실을 쓰는 거예요. 어차피 땀을 흘리긴 마찬가지예요.
다만 그날만은 침실에서 송아냄새가 흠뻑 나도록 하죠.
[페이지] 034
[남편(분)] 송아냄새라면!
[아내(분)] 너무 짙으면 조금은 끈적끈적해요. 거기에
밤꽃냄새가 섞이면 그렇게 곱고 예쁠 수가 없어요.
[남편(분)] 곱고 예쁘다------ (잔을 들고 아내(분)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신다)
[아내(분)] 냄새가 곱고 예쁘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
그렇게 얘기해야 제 느낌이 전해지는 것같아요. 아마 밤꽃냄새가
끈적끈적한 걸 없애주는가봐요.
[남편(분)] 울 안에 밤나무가 있군요.
[아내(분)] 아니예요. 밤꽃냄새는 선생님의 냄새예요.
[남편(분)] 그건------ 저------ (술을 마신다)
[아내(분)] 다음날은 이 가게예요. 시골 주막을 카페로부른다고
다를 건 없어요. 그 침상은 삐그덕거리지만 어느만큼 견뎌주죠.
그렇지만 어차피 주저앉게 돼요. 와그르르 무너진다고 열기가 식진
않아요.
남편(분)이 침상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흔들거린다.
[아내(분)] 세째날은 강물에서죠. 그 여인, 선생님이 찾는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여인이 건넜을지도 모르는
강이죠. 달빛을 사정없이 흔들어놓는 거예요.
[남편(분)] ---------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아내(분)]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마을사람들의 곤한 잠이 더욱
깊어져야 강물이 부우옇게 어둠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해요.
[남편(분)] --------- (고개를 돌려 잔을 본다)
[아내(분)] 네째날은 호밀밭이에요. 밀이 익고 익어서 둥지를
만들기에 썩 알맞는 곳이 있어요. 그 밀대를 바람결을 따라
쓰러뜨리면 호밀밭주인도 너털스레 웃고 말아요. 허지만 오늘은
닷새째예요. 제가 말씀드린 네가지 치료방법은 지나가버렸어요.
닷새째니까 원두막이에요.
남편(분), 술을 마시다가 멎고 아내(분)을 바라본다.
[아내(분)] (계속으로) 지금쯤 비어있는 원두막을 알고 있어요.
엿새째인 내일은 옥수수밭이죠. 옥수수닢 부딪는 소린 그야말로
본능의 합창이에요. (남편(분)이 또 술을 마신다) 이례째인 모래는
갈대밭이에요. 선생님과 저와의 마지막 밤이에요. (술을 따라준다)
강을 건너야 해요. 어쩜 그 여인의 외딴집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남편(분)이 술잔을 입에 댔다가 그 말에 그대로
멎는다) 서둘러야 해요 가이 너무 짧아지겠어요.
(아내(분)과 남편(분)이 일어선다. 창밖엔 포도원과 원두막의
그림자가 길게 나타난다. 아내(분)와 남편(분)이 판토마임으로
애정유희를 시작한다. 음향과 조명과 창밖의 추상적 배경이 그들의
유희를 도와준다.
일체가 멎는다.
[남편(분)] 오늘은 옥수수밭으로 가요!
아내(분)와 남편(분)의 위치가 바뀐다. 창밖엔 옥수수의 행렬이
나타난다. 아내(분)와 남편(분)이 무용으로
[페이지] 035
애정유희를 시작한다. 음향과 조명과 창밖의 배경이 그들의 유희를
도와준다.
일체가 멎는다.
[아내(분)] 오늘은 갈대밭이에요. 강을 건너요.
아내(분)와 남편(분)의 위치가 바뀐다. 창밖엔 강물이 흐르는가
하더니 갈대밭이 펼쳐진다. 아내(분)와 남편(분)이 꿈속에서처럼
느린 동작으로 애정유희를 시작한다. 음향효과, 조명, 갈대밭의
추상적 배경이 그들의 유희를 도와준다. 드디어 두사람이 한몸으로
엉킨다. 순간 멀리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뒤이어
무거운 물체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첨벙! 하고 들려온다. 두
사람의 동작이 멎는다.
[남편(분)] 저게 무슨 소리요?
[아내(분)] 글쎄요!
그들 창가로 가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아내(분)] 저 절벽에서 사람이 강물에 뛰어들었어요.
[남편(분)] 사람이 강물에------ 가봅시다.
[아내(분)] 거긴 깊어서 헤어나지 못해요. 물돌기가 세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해요. (사이) 가끔 있는 일예요.
[남편(분)] 가끔?
[아내(분)] 소문이에요. 아마 그 여인일 거예요.
[남편(분)] 그 여인?
[아내(분)]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한------
[남편(분)] 그 여자가 왜 자살을 하죠?
[아내(분)] 그만한 사연이 있겠죠. 제 손으로 제 목숨 끊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니까요. (한숨을 쉰다)
[남편(분)] 그 사연이란 게 뭐냔 말요.
[아내(분)] 그여자의 외딴집은 절벽 위에 있어요. 딸만 셋이죠.
모두 입이 예쁘고 뒷모습에서 다리가 미끈해요. 그런데 그만------
[남편(분)] 그런데?
[아내(분)] 셋이 모두------ 꼽추예요.
[남편(분)] 뭐라구요?
[아내(분)] 모두 착하고 부지런했는데 살기가 어려워서 하나를
도회지로 나가 가발공장에 취직하고, 기성복 재봉사로 들어가고,
전기제품공장에도 나갔는데 첫째에게 혼사말이 있더니 어떻게 된
건지 어느날 절벽에서 몸을 던져 물 속에 빠져버렸어요. 삼년후엔
둘째가 또 그 지경이 되었죠. 얼마 전엔 그 어머니가 딸을 둘이나
죽인 절벽 위 외딴집에서 혼자 집을 지키다가 외롭고 무서웠든지
두딸을 따라가셔서 함께 살려고 그랬던지 물돌기 속으로 몸을
던져버렸어요. 남은 건 세째였는데 꽤 버티는구나 했는데 오늘
기어코 가버린거죠.
[남편(분)] 세 자매의 부친은?
[아내(분)] 그 사람은------ 아내가 꼽추만 셋을 놓자
실성해선지 말짱한 정신으론지 어디론가 슬그머니 떠나버렸죠.
가출한 거예요. 이젠 가출이 아니고 출가한 셈이죠. (사이)
세자매는 나이가 들면서 남자를 사귀었
[페이지] 036
을텐데 그 남자들이 모두 착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같아요. 착한
사람은 없는데------.
[남편(분)] 착한 사람도 있어요.
[아내(분)] 선생님은 선생님이 착하다고 생각하세요?
[남편(분)] ---------
[아내(분)] 댁에 돌아가시면 더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잠시 침묵한데로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부옇게 새벽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내(분)] (침묵을 깨고, 새로운 기분으로) 선생님, 사흘이
후딱 지나버렸어요. 저 등을 끄고 주막을 열어야 해요.
마을사람들이 몰려오면 강 물돌기에 사람이 빠졌다고 얘길
하겠어요. 목선을 타고 위령주라도 뿌릴려면 술을 준비해야죠.
(소지품을 챙겨주며) 그걸 구경하시는 건 선생님의 자유지만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위령제는 막차가 올라간 뒤에
시작되기도 하지만 또 볼게 있겠어요.
아내(분)가 남편(분)에게 그가 들고 왔던 가방을 들려준다.
남편(분)이 담배를 한가치 뽑아 불을 당기고 가방을 받아든다.
시골 주막에 어둠이 깔린다.
거실이 밝아진다.
남편은 담배를 피워물었고, 아내는 책의 어느 곳을 열심히
보다가 고개를 든다.
[아내] 두사람이 서로 사랑한 건 아니죠?
[남편] 사랑을 한 건 아니오. 그러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걸
위해 그게 필요했소.
[아내] 사랑보다 중요한 게 뭐죠?
[남편] 한마디로 나타낼 순 없어요.
[아내] 동물적인 본능인가요?
[남편] 그것도 이유의 하나지만 그것만은 아니오.
[아내] 분위기였나요? 두사람이 모두 외로왔으니까요?
[남편] 그것도 이유지만 그것만은 아니오.
[아내] 인연인가요? 남녀가 그렇게 만났다는 인연 말예요.
[남편] 그것도 이유지만 그것만은 아니오.
[아내] 그럼 불장난을 했단 말예요?
[남편] (사이. 되묻는다) 우리가 꼭 사랑할 때만 정사를 가졌소?
[아내] 그럴 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예요.
[남편] 본능적으로 정사를 가졌소?
[아내] 그럴 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예요.
[남편] 분위기였소?
[아내] 그럴 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예요.
[남편] 불장난으로 정사를 가진 거요?
[아내] 아니죠. 그게 왜 불장난이에요?
[남편] 그것보오. 한마디로 꼬집어서 얘기할 순 없소. 그렇지만
그들에겐 그게 필요했던 거요.
[아내] 당신도 원두막엘 갔었죠?
[남편] 갔었소.
[아내] 호밀밭에도요?
[페이지] 037
[남편] 갔었소.
[아내] 갈대밭에도요?
[남편] 갔었소. 현장에 갔었다고 내가 거기서 여인과 함께
있었던 건 아니오.
[아내] 갔었다고 인정하구서 왜 함께가 아니죠? 따로따로 갔었단
말예요?
[남편] 조민수와 카페의 여인이 그 현장에 실재했던 것도
아니잖소.
[아내] 그럼 그여자가 물돌기에 몸을 던져 죽은 것도요?
[남편] 마찬가지요.
[아내] 사실이 아니라구요?
[남편] 그러나 진실이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건 본질이
아니고 현상일 뿐이오. 거기에 비하면 그게 더 본질에 가까운
거요.
[아내] 결국 허구란 말예요?
[남편] 물론이오.
[아내] (힘주어) 정말 당신은 가수원 역사에서 밤을 새고 떠난
거예요?
[남편] 새벽에 옥수수밭, 강물, 갈대밭을 돌아보고 곧 떠났소.
[아내] (혼란이 되어) 그럼 그여자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건
어떻게------ (하다가)------ 아니지------ 꾸민 얘기랬지.
(생각해보고) 그러니까 당신은 자라목이에요. 사실을 내밀듯
하다가 쑥 들어가버리는 자라목------
[남편] 난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거요.
[아내] (책을 들었다가 다시 던져버리고) 이젠 아이들에게 보낸
엽서를 갖고 밝히겠어요. 제1신은 앞서 얘기했으니까 이건
제2신이에요. (읽는다) 네 이름으로 편지를 받고 싶어 했지.
아빠가 네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니까 소원의 한가지는 이뤄지는
셈이구나. 흥, 알량한 아빠군요. (다시)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
(조금은 흐믓한듯) 엄마도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잖아요.
미워해요! (다시) 그런데 엄마와 아빠가 간혹 의견이 맞지 않아 큰
소릴 내게 되는구나. 그건 잘못이다. 그래서 아빠는 그것을 더
생각하기 위해 잠시 밖에 나와있는 거다 엄마는 지금 집에서 그걸
생각하실 게다. -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엽서 한장으로
풀릴줄 아셨어요? 사탕발림이라구요! (다시) 내일은 목포로
갈게다. 정읍에서 아빠가. (다른 엽서를 집어들며) 그런데 당신은
이 세번째엽서를 목포가 아닌 영산포에서 보내셨어요.
[남편] 목포행을 타고 나주를 지나서 안내판을 보니까 다음이
영산포였소. 그래서 내렸소.
[아내] 무슨 얘길 하면서 가셨죠?
[남편] 누구하고 말이오?
[아내] 누군 누구예요? 같이 간 여자 말이죠. (사이, 대답을
않자) 한자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다섯개나 먹어치우는 처녀같은
애기엄마 얘기가 있어요. 아이스크림까지
[페이지] 038
사주면서 어쩌구저쩌구 했잖아요?
[남편] 그건 옆자리의 젊은부부 얘길 귀동냥해서 빌어쓴거요.
[아내] 어떻든 핑계는 편리하군요.
[남편] 핑계가 아니고 인간의 삶에 대한 탐색적 욕망이오.
작가가 주변의 사물에 끌려다니는 건 어쩔 수 없소. 선택이
이뤄지면 그땐 다르지만 말이오.
[아내] 경험의 선택은 인간적인 거예요. 당신 말대로 주어진
경험이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사상적, 미적, 지성적 작업의 중요한
바탕이 되는 거면 결국 작품의 바탕은 당신의 경험이란 말예요.
[남편] 문학환경으로서 바탕이지 현상 그대로의 바탕이 아니오.
문학------
[아내] 알았어요. 그만해요. (엽서를 읽는다. 기계처럼, 잽싸게
줄줄 읽어간다) 영산강이 흐르는 포구로서 뭔가 가슴에 느껴지는
게 있기를 바랬는데 막상 들어서고보니 옛날에 아빠가 동경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구나. 거리와 집들은 어둡고 쓸쓸하며 폐쇠된
포구에선 썩은 갯냄새가 기분나쁘게 풍기고 있구나. 마침
<갈매기집>이라는 술집이 좁고 긴 영산교 머리에 있어서 들렀는데
갈매기는 간곳없고 파리와 바퀴벌레만 뒤끓고 있구나. 아무래도
목포까지 가서 자는 게 좋을 것같아서 지금 역대합실에 앉아
파리떼와 냄새와 친하려고 노력하면서 책도 읽고, 눕기도 하고,
너휘들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지 그건 아빠도 아직 모르고
있다. (숨을 돌아쉬고) 왜 아내 생각은 안했죠?
[남편] ------
[아내] 한마디쯤 넣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 교육적 입장에서도
꼭 넣어야 되는 거예요! 왜 없죠?
[남편]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소.
[아내] 뭐라구요? 아내 생각이 다른 생각쯤밖에 안돼요?
[남편] 아내 생각이 아니고 당신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아내] 난 당신의 아내요. 당신의 아내가 나란 말예요!
[남편] (큰 소리로) 난 당신을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소!
[아내] 네? 뭐라구요? 당신------ 정말------ (아내가
어지러운듯 벽에 기댄다. 사이. 남편이 아내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남편] 미안하오. 내가 지금 조민수의 독백을 잘못 옮긴
모양이오.
[아내] (사이, 정신을 가다듬고) 그게 당신의 의식세계고
경험이에요.
[남편] 당신이 너무 몰아대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그런
거요.
[아내] 끝내야 해요. (벗었던 코트를 입으며) 이미 제 심정은
결정되어있지만 이대로 헤어질 순 없어요. 이별이 우리 두사람의
것이면 몰라도 가족이란 집단으로 이어질 때 아이들을 위해서도
밝히고 떠나야 해요.
[남편] 여보, 그게 아니라고 하잖소.
[페이지] 039
[아내] (무시하고, 네번째의 엽서를 든다) 새벽 네시에
역전거리의 가로등 밑에서 몇자 적는다. (눈으로 읽어가다가) 불을
끄면 빈대들이 몰려나와 사정없이 물어뜯는 게 꼭 지옥이 이런가
싶구나. 밤새 불을 켜놓고 방 가운데서 외다리로 서서 그놈들을
피하거나 잡아죽이다가 통금해제 사이렌을 신호로 단거리선수처럼
뛰쳐나왔단다. 통금만 없다면 차라리 거리에서 새웠을 게다.
대합실은 아직 잠겨있고------ (눈으로 읽어가다가, 다른 엽서를
집어들며) 제4신은 두장이군요. (읽는다) 가난이 더러운 것인지
무지가 더러운 것인지 아빠는 오래 생각했다. 숙박업소, 음식점,
화장실, 대합실 따위들이 돈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은 깨끗하고,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은 더러운 게 현실이고 보면 가난이 더러운
것이 옳고, 그런 빈부를 떠나서 서로 조금씩 신경을 쓰면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무지가 더러운 것이 옳으니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 구분짓기가 몹시 어렵구나. (사이) 아직도 아빠의 마음이
풀리지 않으니 내 고집이 너무 한 건지 엄마가 너무했는지
답답하구나. 또 편지하마. (사이) 이 긴 편지를 어떻게 쓰셨나요?
(대꾸를 않는다) 그여자가 잠든 사이에 쓰셨나요? (역시 대꾸를
않는다) 소화제를 사먹겠다고 핑계대고 나와서 우체국에서
쓰셨나요?
[남편] 여보, 날 그렇게 못 믿고 의심을 하오?
[아내] 의심이라구요? 의심이란 사실을 모를 때예요. 이건
사실을 알고 묻는 거예요. (책을 주며) 보세요. 당신이 조민수로
둔갑해서 아이들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써보냈는가 똑똑히 보세요.
[남편] 이건 조민수 얘기라니까!
[아내] 그리고 지금 그렇게 지저분한 업소가 어딨어요? 옛날에
듣던 걸 꾸며서 써보낸 거예요.
[남편] 이거 답답해서 미치겠소.
[아내] 미치지 않아 다행인 것은 나예요. (갑자기) 나란 말예요.
[남편] 여보, 냉정합시다.
[아내] 네, 냉정하게 처리해요. (사이) 그날 새벽 네시부터
목포역 근처에 있었다고 하셨죠? 첫차가 몇시에 들어왔죠?
[남편] 정확한 건 모르지만 다섯시 반경이요. 편지를 다 써서
우체통을 찾아헤매다가 역사로 돌아온 게 그쯤인데 기차가
도착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소.
[아내] 첫찬데 승객이 많아요?
[남편] 일곱시까지, 그러니까 한시간 반동안 두개의 출구로
쏟아져나왔소.
[아내] 거짓말 마세요. 꼭두새벽인데 웬 사람이 그렇게
많겠어요.
[남편] 놀란 건 그 많은 사람들이 피난짐처럼 이고 짊어졌는데
그게 알고보니까 뭍에서 몰려온 쪽은 고구마닢, 깻닢, 고추닢,
호박닢, 더덕, 열무, 땅콩 따위들이고, 갯마을에서 몰려드는
쪽들은 바지락, 대합, 굴, 능쟁이, 활발이, 망둥이, 꼴대기
따위들이었소. 수백명은 됐소.
[아내] 정말 아직도 그래요?
[남편] 그사람들은 밤이 새벽이고 새벽이 낮이었소.그
[페이지] 040
한보따리가 몇푼이라고------ 가난한 건 불쌍한 거요.
[아내] 당신 이 엽서엔 가난과 무지가------
[남편] (앞질러) 그땐 구분짓기가 어려웠지만 가난이나 무지가
더러운 건 아니요. 버려졌기 때문에 더러운 거요.
[아내] 글쎄요.
[남편] 오천년동안 버려졌다가 지금은 너무 기울어서 그런 거요.
사실------
[아내] 옆길로 유도하지 마세요. 지금의 문제는 그게 아니예요.
이 다섯번째 엽서는 발신지가 정읍이예요. 당신은 정읍에 들러서
목포로 갔는데 왜 또 정읍이죠? 동행한 여자를 정읍에 안주시켜
놓고 위장엽서를 보내기 위해 목포로 갔던가 아니면 그여자와
정읍에 편안하게 머물면서 다른 여행객을 시켜 영산포, 목포에서
엽서를 띄우게 한 거예요. 그렇죠?
남편 대답을 않는다.
[아내] 정읍사를 읊고 망부석이 된 여인을 기려서 다시
가셨나요? 정읍사를 읊은 아내는 식솔을 위해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린 거지 가출한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된 건 아내예요.
그것도 백제 때 얘기구요.
[남편] 난 정읍사의 가사도 모르오. 망부석이 될 아내를
생각해본 일도 없소. (사이) 내가 다시 거길 간 건 두가지
이유에서요.
[아내] 꾸미지 말고 어서 말씀하세요.
[남편] 하나는 내장산 기슭에서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서고------
[아내] 강물은 어디든 있어요.
[남편] 또 한가지는------ 그 엽서에 쓴 그대로요.
[아내] 편지는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 있어요.
[남편] 만들어 쓰지 않아요.
[아내] 당신의 직업이------
[남편] 내 직업이?
[아내] (주춤한다. 엽서를 읽는다) 이곳 정읍에서 삼십리쯤 가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는데 방금 거길 다녀왔다. 첩첩산중
황토길이 지금은 버스가 간혹 다니지만 그때만 해도 무척
험악했을텐데 그런 민중운동을 어떻게 그리 은밀하고 깊게
넓혀갔는지 놀랍기만 하구나. (남편에게) 거긴 왜 갔죠?
[남편] 동학 후손의 얘길 쓰고 싶어서 자료를 얻으려고 갔던
거요.
[아내] (눈으로 읽어가다가 엽서를 놓고) {가출기}에서 당신은
그 기념탑에서 마을 소년을 만났다고 했어요. 그 소년이
녹두장군의 후손이라고요.
[남편] 소년이 아니고 청년이오.
[아내] 벙어리였다면서 어떻게 말을 했죠?
[남편] 청년은 말을 하지않았소. 내가 그렇게 느꼈을뿐이오.
[아내] 청년이 말을 안한 건 벙어리여서가 아니고 당신이 여자와
한가롭게 돌아다니니까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어버린 것일 거예요.
[남편] 조민수는 혼자 거길 갔소
[아내] 조민수는 혼자지만 당신은 여자와 동행을 했죠.
[남편] 나도 혼자였소.
[아내] 거기 가서 청년을 찾아 알아보면 당장 밝혀지니
[페이지] 041
까 꾸밀 생각은 마세요.
[남편] 그 청년은 없었소.
[아내] 네? 방금 청년이 있다잖았어요.
[남편] 그건 작품에서요. 내가 갔을 때는 나 혼자였소.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소.
[아내]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죠?
[남편] 허구요.
[아내] 오, 이 일을------ 그럼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게 뭐예요?
네? 뭐냔 말예요? (엽서와 책을 집어던지며) 필요없어요. 나머지도
다 허구로 돌려질 건데 무슨 소용이에요! 필요없어요!
필요없다구요! 흑------ (사이)
[남편] (엽서를 하나하나 모아들며) 이 엽서는 사실이오. 허구는
{가출기}요. 허구와 사실이 완전히 절연되어서는 그 존재의 의미가
없는 거요. 당신은 그걸 혼돈하고 있소. (엽서와 책을 탁자에 놓고
나오며) 올라올 땐 차창을 통해 평야의 장관스런 모습을 보았소.
마치 끝없이 뻗쳐나간 대평원처럼 광활했소. 벼가 뜨거운 햇살에
한창 익어가고 있었소. 그 익어가는 벼이삭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열기의 함성을 올리고 있었소. (아내가 고개를
든다) 철로연변엔 쭉쭉 뻗어오른 미류나무가 논두렁을 따라
십리길을 이어오다가 휘어서 또 십리를 이어가곤 했소. 그 사이로
물이 흐르는데 바람에 살랑거리는 미류나무잎들이 물 속에서도
춤을 추었소. (아내가 서서히 일어선다) 그 넓고 넓은 논바닥에는
참새를 쫑는 허수아비와 깃발과 흰 테이프를 이쪽에서 저쪽까지,
평야의 시작에서 끝까지 드리워놨는데 바람이 자면 그것들이
내려앉아 학이 되고, 바람이 일면 그것들이 출렁거려 마치
만선으로 돛을 올리고 돌아오는 어선의 행렬같기도 하고,
황산벌에서 아우성치는 동학군의 깃발같기도 했소!
멀리서 기적이 운다. 창밖으로 평야의 장관스런 모습이
음향효과, 조명, 그림자로 추상화되어 재현된다. 아내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빨려든다. 기적이 멀어지고 창밖의
풍경이 사라진다.
[아내] (희망을 갖고) 여보, 당신이 오실 땐 야간열차를 타신 게
아녜요?
[남편] 낮차를 탔소.
[아내] 차에서 그여자를 다시 만난 게 아녜요?
[남편] 줄곧 당신 생각을 하면서 왔소.
[아내] 역전다방에서 그여자와 차를 마시지도 않구요?
[남편] 사무실에 들러서 그간의 결근에 대해서 사과를 했소.
일주일중 하루는 공휴일이고, 닷새는 여름휴가로, 그날은 지각으로
출근부 정리를 해주더군.
[아내] 지하철에서 그여자와 헤어지지도 않았죠?
[남편] 그건 조민수였소. 난 휴가비가 나와서 택시로 왔잖소.
[아내] 오 그런 걸!
아내가 코트를 벗어던지고 남편의 가슴에 달려든다. 순간,
전화의 벨이 요란스레 울린다. 아내가 우뚝 멎는다. 남편의 얼굴에
긴장이, 아내의 얼굴에는 의혹이 다시 떠오른다. 전화의 벨은 계속
울리면서 거실이 서서히 어두워지면 막이 내려온다.
울리면서 거실이 서서히 어두워지면 막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