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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전, 어디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2] 2. 산업별 현장 현황(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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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핵심 산업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그러나 반도체, LCD 등 첨단 전자산업은 남한 경제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아직 노동운동의 완전한 미개척지이며, 따라서 이 영역에 관한 현장이전 정보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하기에 여기서는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장이전이 비교적 용이한 금속대공장, 중소제조업, 공공부문의 산업과 운동 동향을 정리해보았다. * 취재 및 정리 = 이태영, 장희수
세계 시장에서의 이러한 위치에 걸맞게 남한의 완성차와 조선 공장들은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는 정규직·비정규직 합쳐 약 35000명의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에도 30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 도시들이 가진 산업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치투쟁의 중심지인 수도권과 공간적 거리 때문에 80년대 초중반 현장이전의 붐이 불 때 구로·인천 등 수도권 공업지대에 비해 학생활동가들의 현장이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87년 이전까지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을 제외하면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 이어 7~9월 사이 울산과 마창, 거제도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거의 자생적으로 폭발적인 투쟁을 개시했다. 매우 초보적인 요구조건에도 불구하고 대공장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준 엄청난 잠재력은 그들을 단숨에 남한 노동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도록 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울산, 마창, 거제 등 남부 산업도시들에서의 강력한 노동운동의 성장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대공장의 입지를 다각화하도록 강제했다. 울산처럼 몇 만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은 아니지만 현재 4~5000명 규모의 대공장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실리주의에 침식되고 있는 대공장 정규직운동
그러나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은 주기적으로 노동귀족 논란에 휩싸여왔다. 90년대 초반 집중적인 탄압으로 인해 전노협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현총련(현대계열사), 대노협(대우계열사)처럼 대기업 그룹협의회로 묶여있던 대공장 노조들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 호황(86~88년)을 정점으로 89년부터 경기후퇴가 시작되고 이 시기 산업구조조정은 전노협의 기반이던 중소제조업을 몰락시켰다. 반면 대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계속 개선되고 있었다. 87년 이후 90년대 초까지 금속 대공장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직력에 힘입어 불과 몇 년 사이에 실질임금이 100% 이상 증가하는 폭발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을 경험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대공장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당시 활동가들에게 정서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임금의 경우는 1987년 분출된 노동자의 요구에 재계 스스로 선택한 대응이었다. 1980년대 후반의 급속한 실질임금 상승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은 재벌계열 기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후적이나마 이미 분출해 버린 노동자의 요구를 복지제도 등 사회안전망의 구축이나 정상화와 같은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개별기업 차원의 임금인상으로 대응한 결과,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노동자간 임금격차가 현저히 확대되어 노동자 사이에 대립구도가 형성되게 된 점을 감안한다면 “훌륭한” 선택이었다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남한 금속대공장 특유의 기업별 노조와 총회민주주의 전통은 대공장노조의 조직력과 단결력을 강화한 반면 조합주의와 조직 이기주의를 심화시키는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대공장과 중소기업 간 노동조건의 격차와 대공장 노동조합이 보였던 조합주의적 경향은 90년대 초반 노동운동위기론이 대두되는 주요한 배경이었다. 자본이 90년대 초반부터 들고 나온 ‘신경영전략’ 역시 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활동가와 일반대중을 분리시키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사실 87년 이후 20년 가까이 대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외환위기 시기를 제외하면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97년 IMF 사태와 이어진 98·99년 구조조정 시기에 대공장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등 노동조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2년 동안 기아, 만도, 현자, 한라, 대우 등 금속대공장에서 생존권을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잇따랐다. 이 투쟁은 현장조직 출신의 전투적 집행부가 이끌었지만 거의 다 무력하게 패배했다. 그러나 99년 이후 남한경제는 급속히 회복됐고 수출호황과 내수호황, 수출호황이 반복되면서 대공장의 호황은 계속되었다. 그 속에서 다시 대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노동귀족 이데올로기 공세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경기양극화 문제에 대해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오히려 수혜자의 위치에 서 있다. 90년대 중반이후 정규직 취업의 문이 막히면서 대공장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고령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웬만한 대공장에서는 20대 젊은 노동자를 만나보기 어렵다. 대공장에서 급속히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울산의 한 활동가의 말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의식의 현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공장 정규직들, 대부분 적게는 30대 후반에서 많게는 50대 가장으로 집 장만, 자식 교육, 노후 보장이 주 관심사를 이루고 있다. 울산에서는 이들이 주요 소비층인 셈이다. … 현장 안에서, (관리자) 눈앞에서 싸우기 싫으니까 민주노동당, 정치운동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구조조정 투쟁 이후에 금속대공장 정규직 운동에서는 투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 임단협이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투쟁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다 보니 활동가들이 투쟁 속에서 재생산되는 구조가 유실되고 있다. 금속대공장에서 투쟁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은 2003년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다. 대공장과 하청노동운동 대공장 비정규직은 대다수 사내하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도급이란 사전적으로 “일의 전부나 일부를 제3자가 독립하여 맡아 완성”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계약을 통해 다른 업체에 일을 일부분 떼 주는 것이다. 따라서 도급관계는 하도급 업체가 독립적인 생산수단을 갖고 있거나 건설업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같이 특정분야의 전문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사내하청처럼 원청업체에 노동력만 공급하는 것은 사실상 인력파견이다. 남한의 노동법은 98년 이전까지 하도급관계가 아닌 순수한 인력파견을 원천적으로 금하고 있었고, 도입된 파견법 역시 일부 업종에 한하여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파견법 도입 훨씬 전부터 대공장에 횡행하던 사내하청제도는 애초부터 불법적 소지가 컸다.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대공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 이전 정규직 취업의 관문이던 직업훈련원을 나와도 정규직이 되지 않게 되었다. 대규모채용은 거의 사라졌고, 간간히 있는 정규직 채용도 취업비리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연줄과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재 대공장에서 정규직 채용은 공장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사내하청에서 20% 내외를 뽑고 나머지는 신규채용하거나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규취업자들을 3개월 정도 수습으로 쓴 이후 일부를 채용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활동가가 금속대공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사내하청으로의 취업이 유일하다. 하지만 완성차 공장의 경우 1차 하청의 문도 상당히 좁아지고 있다. 2001~2002년경부터 총연맹 지침에 의해 특별 임단협 형태로 1차 하청업체 노동자에 대한 노동조건 개선이 이루어지고 현자 등 주요공장에서 하청노조가 건설되면서, 1차 하청업체에서 이직율은 현저히 줄고 있다. 이와 함께 1차 하청업체에 들어가는 것도 인맥과 돈 없이는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웬만한 대공장 1차 하청업체에는 취업대기자들의 이력서가 쌓여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요즘엔 하청업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주변 중소제조업체들을 다니면서 이력을 쌓고 자리가 날 때까지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화 시도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96년 현대중공업에서는 ‘상선’이라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걸고 투쟁했다. 97년 아시아자동차에서는 대규모 계약해지에 맞서 용역노동자들이 투쟁한 바 있다. 97년 말에는 금속대공장 하청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전국모임)이 결성되었고 99년에 전국모임 활동가들 중심으로 한라중공업에서 최초의 대공장 사내하청노조가 결성되었다. 하청운동의 역사는 정규직운동질서와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의 역사였다. 최초의 하청노조인 한라하청노조는 정규직노조와 갈등을 빚으며 대중적 노조를 건설하는데 실패하고 3년 만에 해산했다. 2001년 캐리어노조건설 투쟁의 경우 정규직노조가 노골적으로 적대적 태도를 취했으며 정규직노동자들이 구사대로 돌변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고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대공장의 경우 자동화의 진척으로 인해 숙련공이라고 할 수 있는 직무가 별반 없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 스스로도 물론 자신의 직무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98년 정리해고 도입은 정규직노동자들의 심층의식에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깊이 새겨놓았다. 2000년 현대자동차에서 하청 도입을 인정하는 대가로 정규직의 고용을 보장하는 완전고용합의를 맺은 것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은 사측과의 합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대해 연대 의식은커녕 자기 고용에 대한 방패막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노사협의회에 기반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이러한 실리주의적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제도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금속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은 모두 2003년 이후에 건설되었다. 2003년 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식칼테러를 계기로 금속노조 현대아산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었고, 그해 여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도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조가 건설되었다. 가을에는 이웃 현대중공업에서 노조가 건설되었다. 현재는 그 외에도 현자 전주공장, 기아 화성공장, GM대우 창원공장에서 비정규직노조가 건설되었고, 철강업체인 현대 하이스코에도 비정규직노조가 있다. 자본이 비정규직노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청노조 건설투쟁은 노조인정투쟁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극심한 탄압으로 이미 현장에서 밀려나온 하청노조들이 대부분이지만, 1차 하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교섭력을 가지면서 안정화되고 있는 하청노조도 있다. 최근 기아 화성공장에서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하청사장단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노조도 자체의 투쟁력으로 교섭능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정규직운동질서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처우개선 역시 기본적으로 정규직노조의 특별 임단협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하청노동자들에게 대리주의적 의식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비정규직노조가 확대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 2004~2005년에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문제가 대공장 하청운동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2003년 금호타이어에서 불법파견 판정과 정규직화가 이루어지자 금속연맹은 이를 모델링하여 각 대공장에서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벌였다. 이 결과 현대자동차에서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 영향으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벌어지고 새로운 비정규직노조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최초의 사례인 금호타이어를 제외하고 별다른 성과를 획득한 곳은 아직 없다. 불법파견 판정이 나더라도 자본이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조선산업 조선 산업은 D램 반도체와 함께 세계시장에서 남한자본의 독과점이 가장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산업이다. 2005년 남한 조선 산업의 세계시장점유율은 39%에 이를 전망이다. 건조·수주량은 2003년부터 3년 연속, 시장점유율은 99년부터 7년 연속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2004~5년에는 남한자본이 세계 1~5위(현대, 삼성, 대우, 미포, 삼호)까지 휩쓸었다. 국내 조선 산업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으나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조선공업 진흥법’이 제정되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에서 조선 산업이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되면서부터였다. 1973년 세계최대의 단일조선소인 현대중공업이 건설됐으며 1980년 삼성중공업, 1981년 대우조선이 조업을 개시했다. 이때부터 남한은 수주 및 건조 실적에 있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세계적인 조선 대국으로 떠올랐다.
최근 전남 서안해안에는 중형조선소들이 잇따라 건설되고 조선 기자재 업체가 밀집된 ‘중형조선클러스터’ 건설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포항에 선박블록공장을 세운 이후 2008년까지 18만 평 규모의 선박건조장과 도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포항시는 그 외에도 조선업체, 선박엔진과 선박 건조에 필요한 각종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들어설 22만평 규모의 조선 산업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다.
조선 산업의 노동운동 현대자본이 건설업 기반을 토대로 조선 산업을 구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소의 작업 공정은 자동차공장처럼 자동화된 라인작업이 아니라 배를 짓는다는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건설업처럼 막노동에 가까운 작업부터 상대적인 숙련영역까지 다양한 직종이 존재한다. 조선 산업에서 비정규직 비율은 다른 대공장에 비해 매우 높다. 이는 남한에서 조선업이 만들어지던 시기부터 건설업적인 전통이 이식되면서 일용직과 같은 비정규고용 관례가 같이 넘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공장이 건설된 직후부터 이미 하청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조선소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전공장 노동자들의 45~55%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 조선 산업의 노조들은 90년대 초반만 해도 민주노조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으나, 90년대 초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크게 타격을 입었다. 대우조선의 91~94년 무쟁의, 현대중공업의 95년 이후 지금까지의 무쟁의를 거치며 활동가들의 현장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99년부터 계속된 호황과 노령화 등으로 정규직노동자들의 실리주의 의식은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며, 상당수의 사업장에서 어용세력이 수권 세력이 되고 있다. 미포조선과 현대중공업은 어용노조가 들어서 있고, 삼성중공업은 삼성계열사가 다 그렇듯 무노조 사업장이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2001년 이후 내리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어용노조가 집권하여 현장이 극도로 피폐화되고 있다. 전임 탁학수 집행부 시절인 2004년 초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분신으로 빚어진 투쟁에서 현중노조는 철저히 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 끝에 결국 민주노총에서 제명당했다. 탁학수 집행부는 열사 규정을 거부한 것은 물론 어용대의원들을 수 백 명씩 조직해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서 행패를 부리고 하청노조 조합원들과 지역 활동가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극단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사내하청 비율이 대단히 높은데도 불구하고 조선 산업의 하청운동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96년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업체투쟁이 벌어졌고, 99년 한라중공업(현 삼호중공업)의 하청노조 건설투쟁, 2000년 거제도 대우·삼성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투쟁, 2003년 현대중공업사내하청노조 건설과 하청노동자들의 요구투쟁 등 조선소에서 하청노동자 투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하청노조는 안착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조선공장에서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가 유일하다. 사내하청제도가 워낙 고착화되어 있는데다 자동차와 달리 직무상의 특성상 불법성의 소지도 적어 2004~2005년 불법파견 판정흐름에서도 조선 사업장은 비껴나 있었다. 다른 사업장에서 불법파견 진정 붐이 불던 때도 조선사업장에서는 거의 동요가 나타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이주노동자들도 상당수 고용하고 있다.
▣ 자동차 산업
IMF 이전 남한의 자동차 산업은 기본적으로 현대, 대우, 기아 3사의 경쟁구도였다. 여기에 아시아자동차, 쌍용자동차와 같은 소규모 업체가 존재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삼성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을 시도하고, 세계자동차 산업이 과잉생산으로 인한 불황의 늪에 빠지자 남한 자동차산업은 위기를 맞이했다. 97년 기아자동차 도산은 한보철강 도산과 함께 IMF 공황의 예고편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삼성자동차, 아시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대우자동차가 기아자동차의 뒤를 이어 줄줄이 파산했다. 구조조정을 거치며 기아, 삼성, 대우, 쌍용이 매각되고 국내 완성차 업계는 현대·기아·GM대우·쌍용·르노 삼성 등 5개의 완성차 업체로 재편됐다. 하지만 실상은 자동차 생산 세계 7위의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한 현대자본과 GM, 르노 등 외국 초국적 자본으로 재편된 것이었다. 기아는 현대에 인수됐고, 대우는 GM으로, 삼성은 르노로, 쌍용은 중국 상하이자동차로 매각됐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에서 자동차의 과잉생산은 오래 전부터 심각하다고 제기되었고 21세기에는 5개의 완성차 메이커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최근에는 미국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GM과 포드가 심각한 경영위기를 겪으며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때문에 자동차 산업의 호황은 이미 끝났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자동차 산업은 세계시장에서 저가자동차 틈새시장을 뚫으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GM대우, 르노삼성도 본사의 부침과 상관없이 아시아 생산거점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완성차 공장 노동운동 완성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르노삼성을 제외하면 모두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 자동차 사업장들, 특히 완성차 공장 노동자들은 라인작업의 특성상 집단성과 동료의식이 강하고 비교적 조직력이 강한 편이다. 현자 울산공장이나 기아 화성공장은 여전히 활동가들의 현장장악력이 살아있는 사업장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완성차 노조들 역시 다른 대공장과 마찬가지로 실리주의와 보수화의 문제를 동일하게 겪고 있다. 98·99년 구조조정 반대투쟁 당시 매각과 정리해고 공격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던 완성차 공장들이 선두에 섰다.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모두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집행부가 집권하여 투쟁했으나 모두 무력하게 패배했다. 매각문제가 걸려있던 기아, 대우, 쌍용자동차의 경우 해외매각 반대·공기업화와 같은 소부르주아적 요구들에 노동자들의 사활적 요구들이 묻히기도 했다. 99년 이후 완성차공장에서는 플랫폼 통합과 모듈화를 핵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플랫폼 통합은 구동체계, 운전석, 차축체계, 연료체계와 같은 차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부분을 하나로 통합하여 개발과 투자비용을 줄이면서 다양한 모델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듈화는 플랫폼 통합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부품을 기간단위로 조립하여 완성차공장에 납품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성차공장의 생산라인과 고용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이러한 구조조정들이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에 실질적인 위협이나 투쟁 사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고용에 대한 처분이 자유로운 하청노동자들을 완충막으로 고용안정위원회나 노사공동위원회 같은 일상적 합의구조를 통한 전환배치 등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차 공장에서의 비정규직운동 자동차 공장은 라인작업의 특성상 전통적으로 조선소만큼 비정규직의 비중이 크진 않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경영전략과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하청노동자들이 상당히 늘었다 2000년 현대자동차노조 정갑득 집행부는 사실상 비정규직 확대를 인정하는 소위 완전고용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정규직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비정규직 도입을 16.9%까지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16.9%는 지켜지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다. 현재 완성차 공장의 사내하청 비율은 대략 20~30%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완성차 공장의 비정규직노조는 2003년을 기점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먼저 현자 아산공장에서 식칼테러사건으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촉발된 것을 계기로 노조가 건설되었으며, 현자 울산공장에서도 임·단협 시기 비정규투쟁위원회가 건설되어 투쟁한 끝에 노조로 전화되었다. 기아 화성공장에서는 2003년 임단협 시기 비정규직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정규직,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현장투쟁단이라는 투쟁체를 건설했었고, 2005년 노조를 건설했다. GM대우 창원공장도 올해 비정규직노조를 건설했다. 완성차 공장의 하청노조들은 1차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안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2·3차 하청에 대한 조직화가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1차 하청업체의 경우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고용이 안정되고 있으나, 2·3차 하청노동자들은 배제되고 있다. 그로인해 하청노동자들 내부에서도 분절화가 일어날 소지가 크다. 2004년 현대자동차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이 났으나, 현대자본의 경우 불법파견 판정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우자동차나 쌍용자동차 같은 일부 완성차공장에서는 동일한 라인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는 혼류생산을 줄이고 라인을 완전히 대여하는 방식으로 인력파견의 합법화를 진행하는 흐름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산의 동희오토와 같이 100% 비정규직을 채용하여 만든 완성차 공장이 생기고 있다. 모듈화로 인해 변화를 맞고 있는 자동차부품공장 자동차 생산비 중 부품 등 재료비가 70%를 차지하기 때문에 부품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기는 어렵다. 남한의 경우 부품은 국산화율이 95%에 이르며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중국과도 적어도 2015년까지 기술격차가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남한에는 1000여개의 자동차부품 업체가 있고 대부분이 중소업체들이다. 정부는 1970~80년대 완성차업체의 부품자체 생산을 억제하는 한편, 완성업체 별로 부품업체를 따로 두는 ‘수직적 계열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부품업체의 영세성과 완성차업체로의 종속성을 가져왔는데, 완성차 업체들이 전속부품업체를 육성하여 다른 경쟁업체와 거래하는 것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거치고 완성차 업체가 재편되면서 수직계열 고리가 끊어지고 부품업체도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99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플랫폼통합·모듈화 역시 이를 강제하고 있다. 이는 모듈을 생산하는 대형부품업체를 중심으로 부품업체를 급속히 중층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GM계열의 델파이, 포드계열인 비스터온, 보쉬 등과 같은 외국자본이 많은 국내부품업체를 인수했으나 최근 들어 현대자본이 독주하는 분위기다. 99년 현대정공에서 이름을 바꾼 현대모비스는 부품공장으로 전환한지 불과 몇 년 만에 국내 모듈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모비스는 울산, 천안, 서산, 아산, 평택(포승공장), 화성(이화공장) 등에 9개의 공장을 두고 2010년까지 세계 10대 부품업체(현 21위) 안에 드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현대자본은 현대오토넷, 카스코 등을 인수한 데 이어 만도기계의 인수도 유력해 국내 부품시장을 석권할 전망이다. 정부는 소규모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클러스터로 집적화시켜 경쟁력을 기르고 대형화를 유도할 계획을 잡고 있다. 충남, 전주·군산, 대구·경북, 울산 등이 완성차 공장입지를 배경으로 한 자동차부품 클러스터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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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태영 picollo@jinbo.net 등록일 : 06.01.10 (17:05) 쪽수 : 194 ~ 22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