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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자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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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그 상흔은 우리 곁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육필수기에서 전쟁으로 겪어야만했던 한 인간과 한 가문의 파란만장한 삶을 재조명함으로서 전쟁의 무서움과 가정의 소중함을 7천만 국민들에게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만약 저의 수기집이 중국에서 출판된다면 수익금 전액을 6.25전쟁으로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중국인민들을 위해서 양로원 건립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혹시 저의 수기집이 북한에서도 판매가 된다면 역시 수익금 전액을 전쟁으로 상처받고 있을 백성들에게 위해 양로원 건립에 전액 사용하고 싶습니다.…”
유대지씨는 유복자의 고백수기(제목: '호로자식은 이렇게 말했다') 집필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다면서,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2010년에 발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남북전쟁의 뼈저린 아픔을 가슴에 품고 ‘전쟁반대, 평화수호’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뛰고 있었다. 휴전선 155마일 최초 부부도보 횡단, 북미대륙 38선사상 처음 횡단, 조국 38선 13년 66회 횡단, 우리 문학사상 최초 육필 수기집 평양출판기념회 행사 준비 북한주민접촉승인(통일부)…그는 전 생애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대지씨는 14년 가까이 울산광역시 지방공무원으로 있다가 1985년 7월 상경하여 국가보훈처의 고용명령에 의해 국가유공자 복지증진을 위해 설립된 공단에 입사하였다. 보훈가족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 공기업가운데 가장 명분 있는 직장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는 21년 4개월간 수익, 복지, 의료, 20년사 발간준비단, 본부홍보실, 시설건립단, 이렇게 공단 여러 부서를 회전식으로 근무하면서 공단업무에 매진하였다.
특히, 지난 1994년 1월 그동안 국가보훈처에서 수행하고 있던 무의탁 양로, 양육업무를 인수할 때 보훈가족으로서, 인수팀원으로서 업무를 성공적으로 인수받아서 초대 담당대리로서 만 6년간 어르신들의 수발을 해드리고 주야로 근무했던 일이 새삼스럽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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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전선 북춘천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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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지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저도 어릴 때 고향에서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입소할 뻔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분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힘이다’는 생활철학의 실천으로 ‘국가유공자예우 및 지원에 관한법률’을 매주 한 번씩 정독하면서 법률 속에 담긴 보훈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으며, 생활 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6.25전몰군경 유자녀로서 보훈업무를 그 누구보다도 체험으로 알고, 현장을 통해서 그분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었으며,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빛만 봐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훈가족의 희로애락은 바로 저의 근무 좌우명이 된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혹시 기자님은 1994년, 김영삼 정부 시절, 남과 북이 핵문제로 전쟁발발의 위기까지 간 사실을 아시는지요?”
당시, 국민들이 제2의 6.25를 걱정하며 라면 등 생필품을 사재기 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전쟁발발의 위기가 팽배하였을 때, 그들 부부는 전쟁반대와 가정의 소중함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부전선 최북단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백령도까지 20일간 휴전 후 사상 처음으로 도보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었다. 당시 신문, 방송 등 전 언론매체들에서는 그들 부부의 행사를 특종으로 앞 다투어 보도했었다.
그후 그들 부부는 닉네임이 ‘3,8선’맨으로 불리 울 만치 꾸준히 이 행사를 추진해 왔으며, 지금까지 13년간 66회, 4천km, 즉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자동차로, 도보로, 자전거로 달리면서 조국의 평화와 가정의 소중함을 온 국민들에게 알려왔었다. 그들 부부의 꿈은 완전한 38선, 북한 옹진반도까지 달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2000년 6월, 6.25발발 50년을 맞이하여 유대지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을 출발, 덴버-샌프란시스코-LA까지 북미38선을 사상 처음으로 현지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10일간 달리면서 조국의 평화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현지교민들의 깊은 관심을 받았었다. 앞으로도 그들 부부는 38선행사를 힘닿는데 까지 하려고 하고 있다.
왜서 그런 집념을 갖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유대지씨는 이런 사연을 털어놓았었다.
“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49년 경상북도 도경 경주경찰서 안강 지서장으로 재직하시던 선친께서는 당시 출몰하여 양민을 괴롭혔던 ‘빨갱이’들에게 습격당하시어 27세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건국의 경찰로서 산화하셨으며 지금은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결혼 3년째 되시던 신혼의 시절이었습니다. 후사도 없다는 유족의 이야기를 듣고 장례위원회에서는 경주 안강읍 두류리 전사 현장 노상에서 애국청년단 3명과 함께 화장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 1달이 채 안되었으니 어머니도 몰랐습니다. 실신한 어머니를 병원으로 이송하여 진찰하는 중에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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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50주년 맞아 38국토 횡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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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운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그 넓은 가슴에도, 그 목소리도 한번 듣지 못한 채, 저는 호로자식이라는 동네아저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제가 다섯 살 때 병으로 돌아가시고 저는 할머니 슬하에서 외로운 인생을 걸어야만 되었습니다. 어릴 때의 그 사연들이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저는 전쟁의 그 무서움과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어릴 때 그이야기들을 모아서 지난 6.25 발발 50년을 맞이하여 110만 보훈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아! 나는 반도의 호로자식이었다’ 수기집을 자비로 만권을 출판하였습니다. 저는 이 수기집에서 전쟁으로 인하여 겪어야만 했던 파란만장한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한가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습니다.
저는 이 수기집을 동기들, 보훈가족들, 고향공무원들, 주위 분들, 선친이 그 옛날 근무하셨던 경주경찰서를 방문하여 전달하였습니다.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는 수기였기에 저는 더욱더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저와 같은 불우한 유자녀가 생기지 않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유대지씨의 일상생활은 이러하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1시간동안 달리기와 가벼운 운동 실시, 집주변 탄천산책로를 달리면서 “하면 된다”고 속으로 외치며 5km을 달린 후 자기가 고안해 낸 ‘38선 백팔번뇌 팔 굽히기’를 북녘하늘을 향해 하면서 조국의 평화와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남모르게 다진다. 정신과 육체적으로 무장하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자신감을 기른다. 주량은 1주일에 소주 2병정도, 취미는 대화- “166m의 신장에 60kg의 체구는 57세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바라는 표준체격이 아닐까요?”하고 웃어보였다.
그는 수기집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왜 자신을 호로자식이라고 불러야만 했던가. 그는 왜 성추행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던가. 그는 왜 도적질을 해야만 했던가. 그는 왜 평양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려고 하는가. 그들 부부는 왜 개성, 해주, 옹진반도까지 완전한 38선을 달리려고 하는가. 그들 부부는 왜 휴전선을 걷고, 3년 6개월 동안 38선을 매달 달려야만 했던가. 그들 부부는 왜 뉴욕에서 LA까지 4,000㎞ 미국38선을 달려야만 했던가. 그는 왜 이 수기집을 중국어판, 영문판으로 출판하려고 하는가. 그는 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서해 38선 횡단에 도전하는갉전쟁은 짧지만,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영원하며, 전쟁이 있는 곳에 호로자식 있고, 전쟁이 없는 곳에 호로자식이 없다…’
그랬다. 유대지씨와 그의 부인은, 전쟁으로 인해 이 세상에 더는 호로자식이 생겨나면 안 된다고 세상에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