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명 - REPUBLIC OF INDONESIA, 수도 - 자카르타
.국토 - 동서의 길이 4,300km(바탐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남북의 길이 1,600km.
넓이 약 2백만 km2(한반도의 10배정도). 13,667개의 섬 중에서 유인도 1,000여개.
.인구 및 종족 - 인구 2억3천만, 300여종족,말레이계94%(자바족42%,순다족13.6%,마두라족7%,미낭까바우족3.3%, 바딱족2.9%,수마트라 말레이족2.9%,부기스족2.8%,발리족2.1%),중국계4%,기타2%.
.언어 - 국어: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백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종족어 17개.
.문맹율 - 35%
.종교 - 회교 78-80%,기독교13.2%,(개신교9.7%,카톨릭3.5%),힌두교3.1%,불교1.22%
.1인당 국민소득 - 약 US$800
B. 인도네시아의 역사
인도네시아의 명칭은 원래 India라는 의미의 'Indos', 그리고 섬이라는 의미의 'Neosos'라는 Greece 어에서 우래된 말로서, 1850년 영국인 J.R. Logan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고대시대
B.C. 3,000년에서 500년 사이 아시아로부터 몽골계 이주민들이 인도네시아에 이주해서 토착인들과 결혼하였고, 후에 1000년쯤에 인도-아리인 계의 이주민들과의 혼혈이 있었다. 1세기 경에 인도 동남부의 구자랏(Gujarat)으로부터 첫 인도인 이주민들이 도착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짜까(Caka)시대는 인도 왕자 Aji Caka(AD 78)에 의한 산스크리트 어와 팔라 문자의 소개를 증거하고 있다. 이 당시부터 남 인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무역 관계가 형성되었다. 수마트라는 '황금의 땅'이라는 의미의 "Swarnan Dwipa" 로 불리어 졌고, 자바는 '쌀의 섬'이라는 "Java Dwipa"라고 불리었다. 수마트라에 있는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과 남인도의 나란다(Naranda)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차이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나중에 외교적인 관계를 맺었고, 상호 무역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인도 이주민들은 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힌두 및 불교 왕국 시대
높은 문명을 지닌 많은 왕국들이 힌두 혹은 불교를 믿는 토착인 왕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고대사회로부터 악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인도 문화와 관습들이 도입되어 정치, 군대 조직, 문학, 음악, 춤, 건축, 종교 행습, 관례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 계급을 카스트 제도로 나누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처음으로 인도 불교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다. 불교는 두 분파, 즉 Hinayana와 Mahayana를 소개하였고, 후자가 8세기 경에 더욱 번성하였다. 중국까지 불교의 교세 확장으로 인하여 많은 중국인 순례자들이 말라카 해협을 통하여 인도로 항해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불교에 대하여 배우기 위하여 잠시 인도네시아에 머물기도 하였다. 144년 중국 불교의 성자인 Fa Hsien은 폭풍을 피하여 자바섬에 잠시 기착하였고, 약 5개월 동안 머문 기록이 있다. 132년의 중국 연대기에는 이미 중국과 자바사이에 외교 관계가 있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502년의 연대기에도 남 수마트라에 불교 왕국 Kanto Lim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Kanto Lim"는 아마 당시의 강력한 불교 왕국이었던 스리비자야(Crivijaya) 왕국을 말하는 것 같다. 불교의 번영과 함께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향은 전 군도로 퍼져 나갔다.
또한 중부 자바에는 사이렌드라(Sailendra)라는 다른 불교 왕국이 있었다. 이는 사이렌드라 왕조의 왕들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이들의 통치기간인 750-850년 사이에 족자카르타에 위치한 유명한 불교 사원인 보로부드르 사원이 건축되었다. 이 왕국은 또한 상업과 해군력으로 유명하였고,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도 번성하였다.
732년의 팔라 언어 비문의 하나는 산자야 왕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중부 자바의 짜이렌드라 왕조를 바꾼 마따람 왕으로 알려졌다. 시바(Siva)신에게 헌납된 쁘람바난 사원은 닥사 (Daksa)왕에 의해 856년 건축을 시작하여 900년 경에 완성되었다. 초대 시바 사원은 675년 마따람 왕국의 수도인 메당 까모란의 남서쪽 산지인 디엥에 건축되었다.
서부 자바에는 가루(Galuh), 까노만(Kanoman), 꾸낭안(Kuningan) 그리고 빠자자란(Pajajaran)의 왕국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따루마 너가라(Taruma Negara), 까와리(Kawali) 그리고 빠라히양안 순다(Parahyangan Sunda) 왕국이 뒤따른다.
13세기 말경에 남 수마타라의 수리비자야 왕국은 봉건 지역군주들의 분리, 졸라(Chola)의 남인도 왕국 그리고 마자빠힛 왕국의 잦은 침입에 의하여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멀라유(Melayu)왕국의 Aditiawarman 왕의 도움에 의해 마자빠힛(Majapahit)왕국으로부터 정복당하고 만다. 이어서 마자빠힛 왕국은 중부 수마트라의 잠비 왕국과 서부 수마트라의 빠가르 류융의 왕국, 나아가 전 수마트라를 정복하였다.
한편,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에 의하여 중부 자바의 강력한 왕국들이 갑자기 역사 연대기에서 사라졌고, 동부 자바에 새로운 왕국이 나타났다. 서부자바의 왕국들이 사라진 이유는 자연 재난 혹은 전염병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820년과 832년 사이에 바리퉁(Balitung)왕에 의하여 중부와 동부 자바를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10세기 말에는 강력한 싱가사리 왕국이 Dharmawangsa왕에 의해 동부자바에 나타났다. 이러한 동부 자바의 왕국들은 마자빠힛 왕국에 의하여 다 점령되었고, Kartarajasa왕으로 알려진 위자야(Wijaya) 왕자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몽골 제국의 Kubiilai Khan이 마자빠힛 왕국에 침입을 시도하였지만 패배하여 돌아갔다.
하얌 우룩(Hayam Wuruk)왕이 통치할 때에 마자빠힛 왕국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번성한 왕국이 되었다. 이 당시에 마자빠힛 왕국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군도의 경계를 넘어 북 베트남의 참빠Champa), 캄보디아, 필리핀까지 진출하였다. 하얌우룩 왕은 가자마다(Gajah Mada) 수상과 함께 Dwipantara의 이름으로 전 군도를 점차적으로 통일하였다.
회교 왕국 시대
13세기에 구자랏과 페르시아로부터의 회교 상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기 시작하였고, 인도, 페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무역의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무역을 통하여 인도네시아 사람들 가운데, 특히 자바의 북쪽 해안을 따라 회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힌두교 왕들을 회교로 개종을 시켰고, 첫 번째 사람이 데막(Demak)의 회교 술탄(Sultan)이 되었다. 이 회교 술탄은 회교를 찌레본과 반턴의 서쪽으로, 자바의 북쪽 해안을 따라 그레식(Gresik) 왕국까지 전파하였다. 그는 강력한 불교 왕국인 마자빠힛 왕국(1293-1520)의 멸망을 가져왔다.
마자빠힛 왕국의 몰락 후에, 회교는 동쪽으로 나아가 술라웨시 보네(Bone)와 고아(Goa)를 회교 술타의 영지로 만들었고, 말루쿠의 뜨르나테(Ternate)와 띠도레(Tidore)를 정복하였다. 이들은 자바 섬 북쪽과 수마타라의 빨렘방(Palembang), 미낭카바우(Minangkab며), Perlak지역을 개종시킨다. 한편 마자빠힛 왕국의 귀족, 종교학자 그리고 힌두교 성직자들은 동부자바, 발리와 롬복 섬으로 피신한다.
서부 자바의 빠자자란 왕국의 수도는 순다끌라빠(Sunda Kelapa)인데, 현재의 수도 자카르타의 옛 지명이다. 1527년 순다끌라빠는 데막 술탄의 회교 군대 사령관인 파라테한(Falatehan)의 의해 정복되었다. 정복된 후, 순다끌라빠는 자야 카르타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로 개명되었는데, 현재의 이름인 Jakarta의 기원이다. 팔라테한은 이 도시를 점령하려는 포르투칼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포르투칼의 침입
향료를 찾기 위하여, 포르투칼은 1511년에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고, 말레이 반도에 있는 말라카의 회교 왕국을 정복하였다. 뒤이어 스페인이 뒤따라 왔다. 이 둘은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몰룩까스로 알려져 있는 말루쿠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네델란드 식민주의 시대
유럽 시장에 향료를 더 비싼 이윤에 팔기위한 목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찾아온 네델란드는 1602년에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 VOC)를 세우게 된다.
1605년 몰룩까스(Moluccas)에 있는 암본과 1623년 반다(Banda)섬의 점령 이후, 네델란드는 향료 섬들의 독점 매매를 한다. 이 당시에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그들 무역의 중개인으로 사용하기 위해여 중국에 대해여 개방 정책을 사용한다.
1799년 VOC를 국가화한 이후에, 네델란드 정부는 군도의 전 영토를 장악하였고, 원주민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네델란드 상인들에게 넘기도록 강매당한다. 이것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델란드 식민 지배의 시작이다. 순다끌라빠는 바따비아로 개명된다.
네델란드를 향한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마따람 힌두 왕국을 정복한 회교도 술탄인 아궁 안요크로쿠스모(Agung Hanyokrokusumo)는 1629년 바따비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그의 군대를 파견했지만, 잔 피체르존 쿤(Jan Pieterszoon Khun) 장군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고 만다. 1666년 네델란드를 대항하여 봉기한 고아(Goa)의 술탄 하사누딘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1667년 붕가야 (Bunggaya)조약으로 인하여 VOC의 봉신이 된다. 마두라(Madura)의 뜨루노죠요(Trunojoyo)는 1680년 전투에서 졌고, 살해 된다.
1740년에는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중극인 반란--나중에 내국인들도 가세--을 진압하였고, 이때 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한다.
1799년 12월 31일, VOC는 경영 미숙과 부패로 파산하고, 인도네시아의 전 영역은 바따비아(자카르타)에 있는 네델란드 식민 정부로 넘어간다.
영국 통치 시대
나폴레온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겼을 때, 네델란드는 프랑스에 점령되었고, 인도네시아는 잠시 동안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1811-1816). 1814년, 영국은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였고 수마트라섬 서쪽에 있는 벙쿨루(Bengkulu)에 요크 항을 건설한다. 토마스 스탠포드 래플스(Tomas Stanford Raffles)이 자바섬과 속국의 통치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보로부드르 및 여러 고대 사원들이 발견되었고, 회복되었다. 그후, 그는 자바의 높은 문명과 문화에 대하여 기술한 '자바의 역사'(The History of Java)라는 유명한 책을 쓰게 된다.
나폴레온의 몰락 이후, 네델란드에 대한 프랑스의 점령이 끝났고, 네델란드는 1814년 8월 13일 런던에서 영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1803년 이전에 네델란드가 점령한 식민지에 대하여 인정을 받았고, 되돌려 받게 된다. 이리하여 인도네시아 군도는 1815년에 영국에서 네델란드로 넘어갔다.
네델란드 통치의 계속
네델란드가 식민 통치를 강압적 정책으로 계속함으로 인하여,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군도의 원주민들에 의해여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되지만, 식민 군대의 의해여 하나씩 진압되고 만다. 빠띠무라(Pattimura)에 의한 몰룩까스 전투(1816-1818), 마따람의 디포네고로(Diponegoro) 왕자에 의한 자바 전투(1825-1830), 뚜안쿠 이맘 본죨(Tuanku Imam Bonjol)에 의한 서부 수마트라의 빠드리(Padri) 전투(1873-1903)등이 있다.
민족주의 운동(Nationalist Movement)
모든 이러한 지역에서 발생한 독립 전쟁이 실패하였을 때,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네델란드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인 투쟁을 모색하게 된다. 이 운동은 1908년 5월 20일, '고귀한 행동'(Boedi Oetomo)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처음에는 교욱적인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지만 점차로 정치 기구화하였다. 1901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하여 크게 고무되었고, 이는 인도네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도록 자극을 주었다. "Boedi Oetomo"의 설립자는 당시 STOVIA의 학생인 Dr.Soetomo였다.
1912년 하지 나만후디(Haji Namanhudi)와 여러 사람들의 의해 '회교상업 연합(Sarekat Dagang Islam)'이 설립되었다. 그 목적은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인도네시아인 사업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12년 이 조직은 H.O.S.Tjokroaminoto, Haji Agoes Salim과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정치 기구화 하였고, '회교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1912년 진취적인 회교 조직인 Muhammadiyah가 사회 및 경제 개혁을 위하여 K.H.Akhmad Dahlan에 의해 족자카르타에서 설립되었다. 같은해 12월에 인도네시아 당이 Douwes와 Dr. Tjipto, Ki Hajar Dewantoro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정당의 목적은 인도네시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이 세명의 지도자들은 1913년에 식민정부 당국에 의하여 추방된다. 1920년 5월에 '회교 연합(Sarikat Islam)'은 좌우파로 나누어지는데, 후에 죄파는 Semaun, Darsono, Alimin, Muso 등의 지도력 하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되었다.
힘없는 국민 협의회(Volksraad)
1916년 Sarikat Islam은 반둥에서 첫 번째 회의를 하였고 네델란드와 협동하여 인도네시아를 위한 자치 정부의 요구를 결의하였다. Sarikat Islam에서 입법권을 요구하였을 때, 식민정부는 1918년에 아무런 힘이 없는 국민 협의회를 설립했다.
인도네시아인 대표부는 지역 협의회로부터 간접적으로 선출되었고, 다른 회원들은 식민정부 관리에 의해 지명되었다. 후에 Volksraad는 반입법 기구화 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네델란드 안에 사회적 불안정의 압력으로 인하여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자치정부를 줄 것을 약속하였지만, 지켜지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인 기구들의 성장
1922년 7월 3일, Ki Hajar는 "Taman Siswa"(학생 공원) 라는 기구를 설립하여 국가교육을 증흥하기 위하여 힘썼다. 1924년 인도네시아 학생조직인 "Perhimpunan Mahasiswa Indonesia"(인도네시아 대학생 모임)이 Drs. Mohammad Hatta, Dr. Sukiman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 조직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가속시켰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26년, 서부 수마타라에서 식민정부를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이 진압된 후에, 식민정부는 비공산주의 계열의 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이리얀자야의 Tanah Merah로 추방하였다. 1927년 7월에 Soekarno, Sartono가 중심이 되어 인도네시아 국가주의당(Indonesia Nationalist Party, PNI)을 설립하였고,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를 공식어로 채택하였다. 이 당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네델란드 식민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문재의 결과로서 정부와의 비협조적인 투쟁 정책을 세웠다. 1929년 수카르노는 체포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국에서 광범위한 반란운동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수카르노는 풀려났지만, 1933년 다시 체포되었고 1942년 일본의 공격이 있을 때까지 감금되었다.
1931년 1월 Dr. Soetomo가 Persatuan Bangsa Indonesia(인도네시아 민족 연합)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여 인도네시아 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같은 해 4월에 PNI는 해체되었고, 새로운 당인 Partai Indonesia(인도네시아 당)이 Sartono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근본은 민족주의이며 목표는 독립이었다.
Sutan Syahrir가 같은 해에 Pendidikan Nasional Indonesia(인도네시아 국가 교육)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국가교육에 힘썼고, Mohammad Hatta도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1933년 이 둘은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1942년 까지 추방되었다.
1935년 Soetomo는 Persatuan Bangsa Indonesia와 Boedi Oetomo를 연합하여 Partai Indonesia Raya(위대한 인도네시아 당)을 결성하였다.
1939년 All Indonesia Political Federation, GAPI(인도네시아 정치 연합)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도네시아인 의회의 구성을 요구하였지만, 이 제의는 1940넌 식민당국에 의하여 거절당하였다. GAPI는 또한 전쟁 중에 인도네시아의 보호를 위해 인도네시아인 군대 창설을 요구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임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제의는 거절당하였다.
일본 점령 시대
진주만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한 일본은 싱가폴 함락 후에, 1942년 3월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그들의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일본은 '위대한 동아시아 공영(Great East Asia Co-prosperity)'을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인들은 네델란드 식민지배를 대신할 일본 제국주의의 구호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협력에 나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도네사이 민족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었고, 동부 자바의 Blitar, 서부 자바의 Tasikmalaya, Indramayu, 수마트라, 깔리만탄 등지에서 폭동을 배후 조종하였다. 계속되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은 증가하는 인도네시아인 폭동의 압력속에서 인도네시아 국기, 인도네시아 국어, Indonesia Raya(위대한 인도네시아)라는 국가 표어 사용을 허락하였다. 또한 일본은 마침내 인도네시아인들의 손에 국가 행정을 맡기는 것을 동의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인도네시아 독립 선포를 준비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공화국의 탄생
일본은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1945년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빤짜실라(Pancasila)가 공화국의 기본 철학이자 이념이 되었고, 1945년 8월 18일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 조항에 의하여 국가는 대통령에 의하여 통치되며, 대통령은 행정수반을 겸하고, 부통령과 여러 각료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 및 행정 수반이 되었고, 모하멧 하타가 부통령이 되었다. 1945년 9월 5일, 첫 내각이 구성되었다.
독립전쟁
그러나, 갓 탄생한 공화국은 곧바로 커다란 군사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영국 군대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삼아 연합군의 파견군으로서 인도네시아에 상륙하였다. 네델란드 군대 또한 인도네시아룰 다시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사실 영국 군대는 연합군 포로와 전쟁 억류자를 본국 귀환이라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지만, 영국의 인도네시아 지배욕을 눈치챈 인도네시아 자유 군대와 1945년 11월 10일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영국은 육해공군을 총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쳤고, 인도네시아 군은 상대적인 열세로 인하여 도시 전투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게릴라 전을 펼쳤다. 연합군을 대리한다는 핑계를 가지고 네델란드는 인도네사이인 거점을 공격하기 위하여 많은 군대를 보냈고, 1945년과 1949년 사이에 두차례의 군사 행동을 시도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Sutan Syahrir가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 22일 에 그는 25,000명의 일본군대를 무장 해제를 위한 영국의 제안에 대하여 승인을 하였다.
이 임무는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1946년 4월 28일 일본 군대는 본국 송환을 시작하였다. 1946년 1월 4일 네델란드 군대와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공화국 수도는 자카르타에서 족자카르타로 옮겨졌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전쟁은 국제 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되었고, 독립을 위한 인도네시아의 질의가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이어서 1946년 2월 10일에 UN의 중재 하에 인도제시아와 네델란드는 첫 공식회담을 하였다. 네델란드의 계속적인 침략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1949년 12월 27일 네델란드 동인도 제도는 종지부를 찍었고, 인도네시아 주권 연합 공화국이 되었다. 1950년 2월 28일에 인도네시아는 UN의 회원국이 되었다.
독립후,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흥 제국의 리더가 된 수카르노는 천부적인 웅변술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국등과도 관계를 깊게 가지며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정치면에서는 공산당을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60년 중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3백만명의 당원을 포함, 모두 1천 7백만명의 지지자를 갖춘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 조직이 되었다.
그 반면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정치면에서는 신경을 쓰지 못해서, 1960년대 전반에는 국민 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플레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불만도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65년 9월 30일 밤에, 여섯명의 반공주의자 장군들이 납치 및 암살되었다. 공산당과 10년 이상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던 군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좌익분자 소탕작업에 착수했고, 이 작전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군부의 실력자이자 육군 전략 예비군 사령관인 '수하르토' 장군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이 소탕 작업에 반대 입장을 보이다가 '9.30'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루머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이후 직접 관여는 부정되었으나, '분 카르노'라는 애칭으로 존경받던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위는 날로 실추되어 갔고, 1966년 5월 수하르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1970년 6월 세상을 떠났다.
1968년 제 2대 대통령에 취임한 수하르토 장군은 집권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을 국가 전복을 노리는 세력, 이슬람 급진주의를 체제 위협 세력으로 정하고, 견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경제 개발 추진을 전면에 내걸고, 미국, 일본, 서구 제국과의 협력 관계를 중심으로한 국가 재건에 나섰다. 그 후, 여섯 번 대통령에 연임한 (약 25년간) 수하르토 정치에 의해 국민 소득의 향상, 쌀의 자급 자족 체제 확립, 중공업 부문의 확대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개발의 혜택을 입은 층과 그것에 소외된 층과의 빈부격차 등의 문제등이 표면화 되어 사회 문제화 되고있다.
C. 정치 및 지방 제도
1. 정치적 배경
인도네시아는 국시인 빤짜실라 (Pancasila : 5가지의 원리)를 기본 이념으로 한 입헌 공화국으로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치체계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양하고 인도네시아의 풍토에 맞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요소를 도입한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 군주의 역할은 군의 정치 개입을 제도화시킨 '이중 기능'(국토 방위와 정치 안정의 기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협의회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으로 재선이 가능하다.
의회는 상원에 해당하는 국민협의회와 하원적인 국민의회로 구성되어 있다.
사법부는 대법원, 고등법원, 지반법원 그리고 행정 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별법원으로서 군사재판소와 종교 문제를 취급하는 최고 법원이 있다.
정당은 현 집권당 (Golkar)와 통일 개발당 (혹은 개발 연합당:P.P.P.), 인도네시아 민주당 (P.D.I)의 두 야당으로 이루어진다. 통일 개발당은 회교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인도네시아 민주당은 비회교계의 5개 정당이 통합되어 구성된 것이다.
국군( ABRI,아브리)은 육군, 공군, 해군, 경찰군의 4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의 외교 정책은 비동맹 중립외교를 추구하며, 아세안 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 개발 추진을 위한 실리 경제 외교와 이슬람 제국과의 협력 강화가 기본 정책이다.
2. 지방 제도
인도네이아에는 쁘로핀시(Provinsi: 1급 자치제, 도)가 27도이다.
도지사는 도의회가 후보자를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현도지사는 대부분 군인 출신이 점유하고 있다.
도의 하부 자치제로서는
Provinsi--Kabupaten--Kotamadya--Kecamatan--Kelurahan--RW--RT
도 군 시 면(읍) 동(리) 통 반
D. 경제 및 사회여건
인도네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1억 8천만에 달하는 많은 인구, 그리고 석유, 목재를 포함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350년에 이른 화란 식민 지배와 근대적인 경제 개발의 역사가 짧아 1인당 국민소득은 약 70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인도네시아 경제의 구조적 특징은 1차 산업과 부존자원에 크게 의존하며, 농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일본이나 중국, 네덜란드, 서구와 같은 외국 자본에 의존하는 경제이며, 경제의 이중구조로 소득 계층과 지역간의 편차가 심한 것을 들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권을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E. 학교 제도
1) 유치원 : TK(Taman Kanak-kanak) --- 2년
2) 초등학교: SD(Sekolah Dasar) --- 6년
3) 중학교 : SMP(Sekolah Menengah Pertama) --- 3년
4) 고교 : SMA(Sekolah Menengah Atas) --- 3년
5) 대학 : PT (Perguruan Tinggi)
So : 전문학교(Akademi) : Fakultas Non Gelar(학위 없음-3년 과정)
Sl : 대학교 : Sarjana Tingkat Pertama(5년에서 7년간)
국립대학 (Universitas Negeri)과 사립대학(Universitas Swasta),
사립단과 대학(Sekolah Tinggi)가 있다.
S2 : 대학원 : Sarjana Tingkat Kedua
S3 : 박사과정: Sarjana Tingkat Ketiga
Tertinggi : Biasanya di Luar Negeri : Profesor
F. 종교
인도네시아의 헌법은 이슬람, 개신교, 카톨릭, 힌두교, 불교의 5개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헌법 제 17조 3항). 다른 종교를 가진 자를 회유하거나 개종시키려는 모든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1978년 종교성 발표 제 70호)
전체 국민의 약 78-80%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자료에 따라 분포도 차이가 남). 12-13세기 초 인도, 페르시아, 아랍의 상인들에 의해 북부 수마트라(1271년)와 빨렘방 지방에 전해졌다. 특히 페르시아 상인들이 회교의 포교에 힘썼는데 오늘날 북부 수마트라를 제외한 전 지역과 자와, 술라웨시의 대부분이 이슬람 지역이다.
이들 이슬람교는 타종교에 비하여 보수성이 강하며, 매일 5번의 기도시간, 매주 금요일의 예배와 많은 종교 관습이 있다.
기독교 선교는 1546년 스페인인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가 말루쿠에서 선교한 것이 시초이다.
개신교는 북부 수마트라, 중부 칼리만탄, 서부 띠모르, 중부 술라웨시, 이리안 자야에 분포되어 있고 소수로서의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의욕적으로 선교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생활, 정치적 진출로 인하여 영향럭이 커지고 있다.
G. 빤쟈실라(PANCASILA)
인도네시아 정부의 종교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 최고 이념인 '빤쟈실라'를 알아야 한다.
1. 원리와 성립 배경
1945년 5월 29일 Rajiman박사를 수반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독립 준비위원회는 다가오는 독립을 앞두고 신생국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독립의 정당성과 근거를 합법화할 모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안중 수카르노가 제창한 다섯가지 원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국제주의 혹은 인도주의, 만장일치를 통한 대중 합의 혹은 민주주의, 사회정의,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수정하여 정신적 요소(종교)를 보다 중요시하여 최우선 순위에 놓고 국제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개념을 '인도네시아 통일'로 바꾸어 6월 22일 '자카르타 헌장'을 선언하였다.
그후 이 원리는 45년 8월 18일 공포된 '45년 헌법'의 전문에 수록되어 인도네시아 건국 이념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빤쟈실리는 수카르노에 의해서 주창되고 이론적 체계가 완성되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가족 중심주의, 협의주의, 상부상조 정신을 근간으로하여 발전하고 구체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빤쟈실라라는 말은 다섯을 뜻하는 ' Panca'와 원리를 뜻하는 'Sila'의 복합어이다.
1) 전지 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심
신의 존재를 인정함을 전제로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은 각자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 신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강요할 수 없도록 헌법에 선언되어 있다.
2) 정의롭고 예의바른 인간성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존엄한 대우를 받는다. 인종이나 가문, 종교, 사회적 지위의 다름에도 누구나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며 동등한 대우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3) 인도네시아의 통일
민족주의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데 국민의 통합을 촉진시키고 국가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애국심을 강조한다. 1928년 서약되고 지켜져 온 원칙인 '한 국가, 한 국민, 한 언어'의 일체감은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을 토대로하여 발전된다고 믿는 것이다.
다양한 민족과 많은 도서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인도네시아를 하나로 뭉치는 데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것이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상인들이 장사를 위해 쓰던 말로서, 말레이어가 그 근본인데, 정부는 국교 의무 교육을 통해 국어 보급에 힘쓰고 있다.
4) 대중합의와 대의 제도를 통한 지혜로운 정책에 의한 민주주의
모든 인도네시아인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함에 있어서 항상 사회와 국가의 중요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반드시 대중 합의에 의해 만장일치로 이루어 져야 한다.
5) 전 인도에시아 국민을 위한 사회정의
국민 복리의 공정한 분배를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천연 자원과 잠재력이 가능한 한 전국민들에게 최대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데 유용되어져야 한다.
2. 빤쟈실라에 의한 정부의 종교 정책
정부는 헌법의 전문에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천명하고 이슬람, 불교,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하여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들 종교를 관장하기 위해 종교극을 두고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며 종교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종교 정책의 한 특성은 정부가 종교를 적극 지원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국가 발달을 위해서이며, 종교들이 사회 관계속에 조화를 이루어 상호간에 관용을 유지토록 하기 위함이다.
헌법상 모든 종교는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상 정부의 종교 정책은 다수파의 종교 위주로 시행되기 마련이다.
***법령 제 70호,77호
1978년 8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긴장이 발생하자, 법령 제 70호, 제 77호를 발표하였다. 이 긴장은 주로 회교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이슬람교에 의해 생긴 것인데. 이들과 타 종교간의 갈등, 인도네시아 고유한 사회 관습과 이슬람 법의 갈등, 이슬람교도와 정치 군부와의 갈등, 무슬림끼리의 신학적 입장차이에 의한 갈등 등이다.
정부는 법령 70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종교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개종 시키려는 시도는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짓고, 소책자 배포, 야외 전도와 시방 전도 등을 공식적으로 금지 시켰다. 그리고 개종 및 전도를 목적으로 한 활동이나 금품 수여, 구호등도 사실상 금하였다.
또 외국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법령 77호에 의해,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을 훈련시켜 그들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정 기간내에 현지인을 훈련시켜 선교사의 사업을 인수케 할 목적으로만 체류 할 수 있게 하였다.
H. 문화와 생활 습관들
인도네시아는 많은 언어와 종족이 함께 어울러져 있는 복합 문화의 나라이며,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관계 중심의 사회이다.
단일 언어와 단일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이질적 복합 문화권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곧잘 문화나 생활 관습을 비교하여 비판의식을 갖기가 쉽다.
이것은 곧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발전하여 문화 충격을 받게 되고,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고립되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으로 이어지며, 필요치 않은 오해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1. 인사
1) 인니인들은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잘 한다. 이럴 때는 같이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좋다.
2) 또 각종 예배나 모임시, 매주 만나는 사람,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도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악수를 할 때는 너무 꽉 쥐거나 흔들지 말고 살며시 잡는 것이 좋다.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한다.
3) 악수 후에 손을 가슴에 대고 내리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는 진정한 마음으로 인사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2. 대화나 행동 가짐
1)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남들과 대화를 할 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한국인들은 큰 소리로 대화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 오해와 불이익을 당할 소지가 있는 대표적인 문화 차이이다. 가급적 인도네시아 사람에게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는 화가 나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물론 화를 내는 것은 금물이다.
상대방의 감정이 한국인에게 극히 좋지 않은데, 화를 낼 경우에는 상해나 어려운 경우를 당할 수도 있음을 알자.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는 이야기를 했다 하더라도, 면전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주먹질을 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대화중 불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상급자에게 말을 하거나, 감정을 어느정도 삭힌 후에, 차근 차근 말을 하는 것이 지혜다.
그러나, 암본 및 바탁 족은 대화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2) 연장자가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관심을 가지고 듣는 것이 예의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해서도 안되며, 다리는 나란히 혹은 겹쳐서 앉는다.
무의식중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는 것은 "나는 화가 나있다"는 표시이다.
앉을 때 발을 겹다리하는 것도 좋은 행동이 아니며,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손으로 턱을 받치거나, 손을 깍지애서 뒷머리에 두는 것도 좋지 않은 자세이다.
이러한 행동은 듣는 이가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표시로 받아들여 진다.
3) 다른 사람의 머리에 손을 대지 말고, 무의식 중에라도 손으로 상대방의 몸을 툭툭치는 것도 좋은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발을 가지고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것도 상대를 화나게 한다. 또 여자가 큰 소리로 웃는 것도 실례가 된다.
3. 초대와 방문
1) 방문 전에 미리 방문 계획이나 시간들을 알리는 것이 좋다. 가급적 밤에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도 실례이다. 그리고 오후 1시에서 4시경에도 방문을 피하는 것이 좋다.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 남의 집 방문시, 내놓은 다과나 음료수는 주인이 몇 차례 권하기 전에 먼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반대로 찾아온 손님에게는 몇차례 권해야 한다.) 식사 시간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비록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해도, 초대 받지 않은 경우에는 진심이 아닌 경우가 있다. 단 머나도와 암본등에서는 응하는 것이 좋다. (지방마다 풍습이 다르다.)
3) 초상집에 가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의무에 속한 일이다. 갈 때는 약간의 돈이나 휜 꽃들을 가져가 가족을 위로하는 것도 의무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누가 죽었기에 위문을 가야 한다고 하면, 가급적 보내어 주어야 한다. 물론 이를 악용하여 속이는 이들도 있다.
4) 만일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면, 참석 여부를 미리 연락해 주는 것이 좋다. 초대에 응할 경우에는 옷차림과 시간 등에 신경을 쓰는 것이 좋으며, 참석치 못할 경우에는 편지나 꽃다발을 보내는 것도 좋은 예의이다.
보통 초대장은 3일 전에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가능한 참석하는 것이 좋다.
5) 손님 접대는 정중하게 앉도록 권유하고 있는대로 차려 놓는다. 손님 앞에서 아떤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비록 집이 좁다 할지라도 언제나 손님이 자고 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는 것이 예의이다. 특히 선교사는 언제든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을 예비해 둘 필요가 있다.
4. 식사와 음식
1)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는 소리를 내지 않고 먹는다.
그러므로 함께 식사할 때, 짭짭 소리 내거나 후르륵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한다.
2) 식사시 꼭 개인 접시를 이용해서 필요한 만큼 덜어서 자기 그릇에 놓고 먹는다. 한국 사람들처럼 여러 사람이 수저로 함께 찌개나 반찬을 먹지 않으며, 다 먹고 난뒤에는 숟가락과 포크를 뒤집어 두어서 다 먹었음을 표시한다.
손으로 먹은 경우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일어서 손을 씻는다. 각자에게 손 씻는 물이 그릇으로 나올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서로 사용한다.
3) 주인은 식사전에 '손을 먼저 씻으시지요'하며, 여러 가지 준비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4) 보통 주인은 식사를 먼저 끝내지 않는다. 주인과 함께 식탁을 뜨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하는 것도 예의다. 음료를 권할 경우에는 마시고 싶은 것을 말하고, 마시고 싶지 않을 경우에는 솔직히 말해서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한다.
5) 회교도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우,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기에 속하는 음식이다.
돼지 고기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별 문제가 없다. 개고기의 경우, 머나도와 바탁족의 경우에는 즐겨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싫어한다. 이런 음식 문화를 잘 알고 있을 때, 상대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경우에는 환경에 따라 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6) 마늘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이로 인해, 이상한 냄새를 주변에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치 인도네시아인들의 몸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는 것과 같다.
5. 복장과 용모
1)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의외로 복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옷도 상하의를 색깔에 맞추어 입으며, 매일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 상황에 따라 옷 차림을 달리한다. (결혼식, 장례식, 파티 등)
전통복장인 "사퉁과 긴팔 바탁 웃옷'이 여기에 속하며, 결혼식이나 기념일에는 전통 복장으로 모여 행사를 한다.
모임이나 이슬람교 예배시 '뻬치'라는 검은 색 전통 모자를 즐겨 쓴다.
2) 관공서나 교회에 갈 때에는 되도록 정장에 속하는 복장을 해야한다.
짧은 반바지, 소매없는 윗도리, 샌달 (조리)를 신으면 실례가 된다. 여자들은 바지보다 치마를 입으며, 구두를 신는다.
3) 설교 초청을 받았을 경우에는, 긴팔 바틱이나 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하면 된다. 교회나 지역에 따라서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4) 대체로 중국계를 제외한 본토 인도네시아 남자들은 콧밑 수염을 기르는데, 이는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어을리지 않아 콧수염을 기르지 않는 이도 있다.
6. 체면과 자존심
1) 인니 사람들에게 체면은 내용보다 휠씬 중요하며, 자기들의 약점, 부족함은 공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잘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기술을 가르쳐 줄 때, 의사소통이 안된 경우에도 '안다'고 대답을 하여, 한국 기술자들이 애를 먹거나, 화를 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럴때는 참는 것이 약이다.)
길을 물을 때도 어렴풋이만 알아도, '안다'고 하면서 가르쳐 준다. 모르는 길을 갈때에는 적어도 세명이상에게 물어서 두 사람의 말이 일치하면 믿어도 좋다.
2) 인도네시아 사람으로부터 진지한 감사의 인사나 사과의 말을 듣는 것은 드문 사례이다. 이들이 어떤 부탁을 남에게 하는 경우에 서신이나 말의 끝에 '사전에 감사를 드립니다.'하는 말을 넣는다. 하지만 감사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은 흔치 않다. 왜냐하면, 자존심 때문이다.
3) 언제나 모임이나 끝날 때나 이별시에 공식적으로 하는 말에 '만약 절못한 것이 있으면 큰 용서를 빕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잘못한 것이 있는 경우에 사과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7. 술과 담배
이곳은 이슬람 문화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대해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담배의 경우에는 한국과 달리,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도 즐겨 피우며, 이에 대해 별 제약이 없다.
8. 사고 발생과 예방
1) 자동차 및 교통사고
대체로 길이 좁고 시내버스인 미니버스와 오토바이, 베짝등이 자주 다녀 사고의 위험이 많다. 길에서 자동차 사고를 내었을 경우에는 신속히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어, 상처가 난 사람을 신속히 병원으로 데려가기 보다는 운전수에게 폭행을 하거나 시비를 걸어 피해를 당할 수도 있고, 차안의 귀중품이나 부속을 훔쳐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차를 탈 경우에 항상 자물쇠를 채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문을 못 열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중국인과 외모가 비슷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이곳 사람들은 중국인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다.)
그리고 먼 여행을 자동차로 할 경우에, 시골 지역이나 호텔이 없는 지역에서 잠을 자야 할 경우에는 경찰서 옆이나, RW, RT에 신고를 하고, 그 근처에서 자는 것이 좋다.
자동차 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차 보험을 들어 두는 것이 좋다. 자동차 보험은 일년을 기준으로 하며, 보험료는 대체로 몇 종류가 있다. 보험에 가입하기 전에, 보험회사가 신용을 잘 지키는 지를 꼭 다른 사람에게 문의 해야 한다.(문의:이 문호 선교사)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사고 직후에 꼭 보험 회사에 연락을 해야 한다. 연락을 하지 않고 먼저 차 수리를 하지 말 것.
2) 불량품 구입시
이곳에서 산 물건들이 -수입품이거나 이나라 제품이거나- 고장난 것 혹은 불량품이 의외로 쉽게 발견이 된다. 살 때, 불량품인지 아닌지를 잘 확인해야 하고, 나중에 불량품일 경우 꼭 변상이나 교환을 해달라는 말을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불량품인 것을 안 순간 즉시 가야지, 며칠 지난 뒤에 가면 바꿔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3) 도난 방지
기차역이나 버스역 주변, 시장에 의외로 불량배들이나 소매치기들이 많다. 가급적 조심을 하고, 돈도 여러 주머니에 분산해서 두는 것이 좋으며, 방심하고 살 때, 좀 도둑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가급적 집을 비우지 않도록 한다. 며칠 간 집을 떠날 때는 믿을 만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도록 부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사간 지역에서는 당분간 Penjaga를 두는 것도 좋다. 밤중에는 바깥 외 등을 켜고 자는 것이 좋고, 현관이나 응접실 전등을 켜고 자는 것이 도난을 막을 수 있다. 개를 키우는 것도 도난 방지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집 안에까지 들어오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4) 잡상인 방문이나 기부금 요청시
가끔 경찰서에서 왔다고 하면서, 책이나 칼렌더 구입을 강요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왔을 때, 이웃이나 집 주인에게 물어보겠으니 다음에 오라고 해서 돌려 보내는 것이 좋다. 계속 귀찮게 굴면, RW, RT이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독립 기념일이나 각종 행사때에 기부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이웃들에게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물어서 주면 된다. 너무 많이 주거나, 안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5) 여행 증명서 (SK-SURAT KETERANGAN JALAN)이용
가급적 자와 섬 외의 섬을 여행해야 할 따는 여행 증명서를 경찰서에서 발급받아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여행 증명서를 휴대하고, 타 지역에 갔을 경우에는 48시간 이내에 그 지역의 경찰서에 신고 해야 한다. 그리고, 자와 내의 지역에도 몇 개월간 체류할 경우에는 이 증명서를 이용해야 사고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9. 뻠반뚜(Pembantu)
1) 인도네시아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 중에 하나가, 뻠반뚜 (집안일을 돕는 남녀)로 인해 일어난다. 뻠반뚜는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사람과 같이 숙식을 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매일 출퇴근 하는 이 보다는 집이 먼 지역에서 온 사람으로 숙식을 하는 이로 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뻠반뚜를 구할 경우에는 믿을 만한 소개인을 통하는 것이 좋다.
2) 뻠반뚜의 월급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경우는 월 10만 루피아('96) 정도를 준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란 신분과 그들이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비용들을 따로 주어야 한다.
3) 회교도를 너무 열심히 믿는 이들은 집에서 기도를 하게 해달라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 가정에서 회교예배나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니, 이럴 때는 안하도록 지혜롭게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열심있는 회교도 뻠반뚜들에게 아기를 맡길 경우, 이들은 아기의 귀에 주문을 하는 이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알라와 모하멧을 믿으라는 주문)
4) 뻠반뚜들에 의해 도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외츨을 할 경우에는 귀중품이나 돈을 잘 보관을 해두어야 한다. 항상 열쇠를 채우되, 뻠반뚜르르 고용하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열쇠를 채우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의심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어 오히려 관계가 불편하게 된다.
5) 가끔 뻠반뚜에게 전도를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수도 있으니, 항상 지혜롭게 해야 하며, 가급적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전도받은 후에 자신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고백을 통하여 주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에 귀중품이나 물건을 훔치는 이도 있으니 역시 조심해야 한다.
6) 집안의 뻠빤뚜 (여자)가 자주 외간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역시 조심하는 것이 좋다. 뻠반뚜와 경비원이 내통하여 물건을 품치는 사건은 흔한 이야기이다.
7) 회교도 명절인 '라마단' 기간중에는 가급적 휴가를 주어야 한다. 이렇때 보름씩이나 휴가를 달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주로 일주일 정도를 준다. 그리고 휴가후에 돌아오지 않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많은 선물과 돈을 주었는데도 오지 않아 정이 많은 한국인들 경우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수도 있다.
10. 언어 관습
1) 현재의 인도네시아 어는 1928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Trade-Malay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2) 이곳은 많은 방언과 족속들로 이루어진곳이라, 자기 민족어로 애기를 해주면 무척 좋아한다. 이들에게 순다어나 자와어 등의 지방어로 인사말 몇마디를 알아 놓고 사용하면 의외로 반갑게 대해 준다.
순다어 인도네시아어 자와어
감사합니다 - 아뚜르누훈(Atur nuhun) - Trima Kasih - Mtuh nuhun
실례합니다 - 분튼(Bunten) - Permisi - Parung
3) 대답시 'Ya(야)', 혹은 ' Lah(라)' 등의 말이, 한국어 어감에서는 명령형이지만 인니어 표현에서는 정중한 말이다. 그리고 가급적 존칭어나 공경어를 뜻하는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호칭할 때, 'Kamu' 보다는 'Anda'라는 말이 훨씬 공경어이다.
4) 이들의 어제(Kemarin)와 내일(Besok) 이란 말에는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란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약속을 할 경우 몇월, 몇일날까지 해줄 것이라는 말이 없이, 단지 베속(내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기약없는 먼 미래를 의미할 수도 있다.
5)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꼭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대개 결혼한 남자는 'Bapak(바빡), 여자는 'Ibu(이부)'라고 부르고, 줄여서 'Pak','Bu' 라고 해도 좋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높여서 불러줄 때 'Mas', 여자는 'Mbak'라고 하면 된다. 지역마다 베짝 운정수, 기사나 점원 등의 호칭이 다르므로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땋게 부르는지를 먼저 배우는 것이 좋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부르는 지를 먼저 배우는 것이 좋다. 자와 등의 지역에서는 중국인이나 외국인 남자어른을 향하여 'Om' 이라고 부른다.
6)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수동태를 즐겨 사용한다. 처음 언어를 배우는 한국 사람들은 주로 능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에 수동태를 즐겨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식 표현에 익숙치 않아 곧 잘 당황한다. "일상생활에서 인도네시아어의 수동태는 영어에 비하여 높다. 이는 행위자보다 행위자에 의해 나타나는 일의 상태나 결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에 기인된다.-손인숙,한국외대
인도네시아어의 수동태는 di-, ku-,kau- 를 붙여 사용하는 기본 수동태와 ter-, ke...an을 사용하는 의미상의 수동태가 있다. di- 수동태는 장소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di(ex,di mana, di sini, di sana) 와 같기에 처음에는 혼돈을 할 수 있으나 언어를 조금 배우고 나면 큰 어려움은 없다.
7) 인도네시아 어에는 동사의 변화가 많다. 처음 언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동사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사전을 찾는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참고로 몇가지 동사 변화 소개한다.
I. 건강 관리
1. 주의 해야 할 질병과 응급처치들
1) 간염을 조심해야 한다. 입국하기 전에 감마글로부리니을 복용하고 들어오면 적어도 석달동안 예방이 된다.(녹십자의 헤파박스 B백신도 좋다.)
2) 인도네시아에 입국한 초기에는 설사 및 배탈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물갈이로 인한 경우의 필요한 약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한다. 아이들의 경우는 아메바성 이질에 잘 걸리는 경우가 있다. 응급조치로 옥수수나 보리차를 먹이는 것이 좋다.
3)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유행성 출혈열을 동반하고, 이는 곧잘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든다. 이럴 때의 응급약은 파파야 잎새를 삶아서 먹는다.(예방 및 치료 효과가 있음)
4) 이곳에서는 티푸스에 잘 걸린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너무 과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티푸스에 걸렸을 경우에, 중국 한약방에 가서 지렁이 말린 것(파칭;CACING)을 사서 푹 고은 물을 마셔서 속히 나은 분들이 있다.
5) 고혈압 환자들과 산부는 염소와 뚜리안을 먹지 않기를 권한다. 몸 내부에 열을 내게 하는 식품들이다.
6) 이곳 병원들의 오진율이 높은 편이다. 큰 질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으면, 다른 큰 병원을 여러 군데 가서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있거든, 종합 진단을 꼭 받고 오는 것이 좋다. 만약 인도네시아 병원에서 치료가 잘 안되는 질병이 있다면 자카르타에 있는 대사관 전용 의사에게 문의해 보는 것도 한 방편이다.
2. 기타 주의할 사항들
1) 얼음이 담긴 음료수는 가급적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물이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과일이나 야채는 깨끗이 씻고, 날것으로 먹을 때는 반드시 깨끗한 물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헹구어 먹는다. 그리고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회충약을 먹어야 한다.
2) 이곳 물은 석회질이 많기 때문에 먹을 때나 양치질을 할 때도 정수한 물을 사용하거나, 파는 물로 하는 것이 좋다. 우물물이나 수돗물을 식수로 이용할 경우 반드시 15분이상 끓인 후에 먹도록 한다. 물에 불소성분이 없기 때문에, 어린이에게는 불소약을 복용케 해야 한다. 그리고 칼슘이 부족하므로, 칼슘약도 함께 복용하도록 한다.
3) 낮잠을 자는 것이 건강을 지키게 한다. 습관이 되지 않았더라도, 이곳에서는 낮잠을 30분 정도 자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