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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바라는 고해성사
가톨릭 신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특권(?)이 있다면 무엇일까. 지은 죄를 고백하고 보속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고해성사일 것이다.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 모습도 각양각색이지만, 성사를 주는 사제의 특성도 다양하다. 그만큼 신자들 반응도 호불호가 갈린다.
고해성사가 신앙생활에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신자에게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마음의 부담' 혹은 '불편함'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본 뒤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또 어떤 고해성사를 원하고 있을까.
신자들은 고해하러 왔다는 그 자체를 사제들이 기꺼이 북돋아 주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본인의 상황을 먼저 공감해 주고 이해한 뒤에 이를 보듬으면서 시작하는 성사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변상진(라우렌시오, 26, 수원 하안본당)씨는 지난해 수도회 피정 중에 본 고해성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던 변씨는 피정 프로그램 가운데 열린 고해성사 시간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리교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일로만 느껴진다"며 "일로 느껴지다 보니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고 학생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베풀지 못하고 있다"고 고해했다.
변씨는 성사를 주는 한 사제의 모습에 감동했다. 훈계하기보다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를 해주며 긴 시간 다양한 사례를 들어 변씨 마음을 다독여 줬다. 변씨는 이 성사를 계기로 교사 자신의 신앙이 충만해져야 학생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윤희(미카엘라, 32, 서울 대치동본당)씨는 주일에 시간이 되지 않아 평일에 고해성사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구씨는 "신부님께서 평일에 성사를 보러 왔다는 자체에 대해 칭찬해 주셨다"며 "'평일에 와서 고해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격려해주셔서 기분이 참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구씨는 "죄를 고하러 갔을 때 자신도 부끄럽고 민망한 경우가 많다"며 "신부님께서 '어디 가서 신자라고 말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 혹은 '신앙심이 계속 유지가 되고는 있느냐'고 반문하시면, 고해성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명 거부감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로 고해성사의 기쁨을 채우지 못하는 신자들도 있다. 김 아녜스(56)씨의 경우도 사제에게 단순히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따뜻한 공감을 통한 다독임을 원하고 있었다.
김씨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아직 냉담하며 성당에 나가지 않는 아들이 걱정"이라며 "가족 간에 생기는 갈등을 반성하며 제 잘못을 뉘우치고 왔다"고 고해했다. 김씨는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죄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곳이 고해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부에게서 돌아온 답은 "그건 고해가 아니고 면담에서나 얘기할 일"이었다.
당황한 김씨는 "무엇을 어느 선까지 고백할 수 있는 것인지 신부님마다 기준이 달라 헷갈린다"며 "성사 후에도 홀가분하지 않고 마음이 불편했다"고 토로했다.
주일학교 교감인 이 마리아(23)씨는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보다가 민망한 경험을 했다. 주일학교 봉사를 하면서 담당 신부와 마주할 일이 많았던 이씨는 고해를 하고 나서 신부의 짓궂은 말투에 당황했다.
본인의 목소리를 알아챈 신부가 이씨에게 "네~ 선생님" 혹은 "응 그래 OO야"라고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다른 곳에 가서 말씀을 안 하신다는 것은 분명 알고는 있지만, 신부님이 제가 주일학교에서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말 못할 힘든 일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매년 판공성사 철이 돌아오면, 손님 신부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성사를 보거나 다른 본당에서 성사를 보고는 한다"며 "같이 일하는 신부님에게는 고해성사를 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고 덧붙였다.
때로는 고해사제의 따끔한 지적과 충고가 '사랑의 채찍'이 돼 고백자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고해사제의 '작은' 배려가 신자들에게는 죄 사함의 의미를 넘어선 일상의 '큰' 위로로 돌아온다. 따뜻한 공감, 포근한 위로,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해성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강성화 기자]
내가 체험한 고해성사/ 신달자 엘리사벳(시인)
1977년 11월 11일 서울 성북동성당에서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모든 것이 위급했으므로 우리는 이마에 울리는 물의 은총에 대해 온전히 믿음을 약속했다. 길이 있다는 것도 은총이었다. 길에 대한 갈등 없이 가기만 하면 되는 생의 축복 또한 큰 은총이었다.
가야 하는 곳이 정해진 길,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젖어왔던 시기였다. 열심히 가려는 은총이 왔다. 그 은총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의심이 없었다. 어디를 갈까 어떻게 갈까 누구와 갈까 어디까지 갈까 이 의문들을 일시에 불식시키는 길이었다는 것은 내 인생에 안정감 있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주님의 길로, 믿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천국까지 가야 한다는 이 한 가지 믿음은 어떤 갈등도 계산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안다. 숨쉬는 것조차도 은총이었던, 너무나 절실하게 찾아왔던 생의 선물에 나는 감읍하였다.
그런데 고해성사는 지금도 늘 우물쭈물한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축복의 은총을 잘 알면서 말이다. 나는 1977년 성탄준비로 첫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다. 떨렸다. 전날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어떤 태도로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들을 해야 하나 나는 떨렸고 울컥하기도 했다. 드디어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고요히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호를 그었고 이어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이라는 말을 너무나 어렵게 발끝이 쥐가 날 정도로 완전히 얼어서 발발 떨면서 겨우겨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겨드랑이에 땀 흐르는 것도 몰랐다. 코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다.
진심이란 원래 뜨겁고 진땀 나는 게 아닌가. 내 생의 가장 처음으로 진심을 입으로 발음하는 것, 그것은 황홀이면서 고문이면서 은총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얼어 우왕좌왕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듯 사람을 바짝 엎드리게 하는 것일까.
입안이 얼었는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성탄 때라 고해소 앞에는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신부님이 내가 벌벌 떤 고해성사에 비해 너무 간단하게 끝을 내셨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나와서 엉엉 울었다. 기억건대 그 울음이 은총 아니었을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으리라. 벙어리가 막 입을 열려는 그런 긴장감, 하느님이 이리 오라! 하고 그 앞으로 가는 그런 긴장감으로 온몸이 얼어버린 그런 순간에 너무나 간단히 끝난 보속이 허탈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긴장감을 지금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의 고해성사는 언제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다시 태어나는 현실감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영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내 영혼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무릇 거대한 축복이라는 점을 나는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기적은 은총이다.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며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고유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위임된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계승됐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지체, 무엇보다도 대죄를 지어 세례 때 받은 은총을 잃고 교회의 친교에 손상을 입힌 사람들을 위해 고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은총을 회복할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준다.
신자들은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 시간을 갖고 지난번 고해성사 후 지은 죄에 대해 생각하고 알아내는 '성찰'을 해야 한다. 성찰 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는 '통회'가 필요하다.
통회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의 고통이자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인데 이는 고백자의 가장 중요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완전하게 통회하지 못했다고 고해성사 보는 것을 자꾸 미루는 신자들이 있는데, 불완전하게 통회했다 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이다. 고백할 때는 성찰을 통해 알아낸 죄를 모두 열거해야 한다. 고백을 마치면 사제의 보속이 이어진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로 인한 모든 폐해를 회복시키진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죄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죄를 갚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보속이다. 보속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해성사가 무효가 되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통회한 사람이라면 보속을 통해 죄를 갚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는 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는 고백자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은 죄 때문에 손상을 입은 교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효과도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고해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한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
고백해야 할 죄의 범위
대부분 신자들은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 고민을 한다. 어디까지가 죄이고, 어디까지가 죄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고해소에서 고백해야 하는 죄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손희송 신부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성찰하고 어긴 부분이 있다면 고해를 해야 한다"면서 "소죄는 미사에 참례해 참회하고 뉘우치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대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죄는 인간적 나약함, 성격상의 문제 등으로 쉽게 범하게 되는 죄를 말한다. 소죄는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진 않지만 소죄를 계속 짓고도 뉘우치지 않으면 점점 대죄를 짓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살인이나 간통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자신이 그 죄의 중대성을 의식하며, 자유의지에 의해 죄를 지었을 때 대죄가 된다. 십계명을 의식하면서 고의로 어겼을 때는 대죄가 된다. 대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
육체적ㆍ정신적 문제로 인해 지은 대죄를 다 기억하지 못해 고백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죄는 간접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나중에 생각이 나면 다시 고백해야 한다.
고백을 하기 전 양심성찰을 할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찰을 잘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사람마다 짓는 죄도 다양하고 양심의 기준도 제각각이어서 몇 가지 잣대로 죄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죄를 짓고도 죄라고 생각해 고백하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성찰을 해도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마음속에 있는 나쁜 감정을 살펴보고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원인을 찾아본 후 나를 빗나가게 하는 것들을 묵상해보자. 또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이 내가 어떻게 변화하길 바라실지 묵상해보면 지은 죄가 조금은 생각날 것이다.
고백자는 고해를 마치면서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는 말 그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뜻하지만 일부러 사소한 죄만을 고백하고 나머지 죄들은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핑계로 뭉뚱그려 용서받으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손 신부는 "죄를 인식했으면서도 일부러 고백하지 않으면 모고해(冒告解)가 돼 또 죄를 짓게 된다"면서 "모고해를 한 사람은 다시 온전히 고해를 해야 죄가 사해지므로 처음부터 성실하게 고백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임영선 기자]
고해성사에 관한 Q&A
고해성사는 치유의 성사다. 고해성사를 보는 이유는 죄로 인해 끊어진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이다. 고해성사의 방법이나 이유 등 한 번쯤 고민해봤을 질문을 엮어봤다.
Q. 왜 굳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나요?
A.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고해성사는 하느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죄 사함을 받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고해소에 들어가면 먼저 사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하고 권고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사제를 통해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Q.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하지 않으면 다시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요?
A. 보속을 하지 않았다고 고해성사가 무효는 아닙니다. 고백자의 통회와 사제의 사죄경으로 죄의 사함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보속을 하지 않거나 성의 없이 해치우면 하느님이 정말 용서하셨을까 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보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양심과 인격에 흔적이 남습니다. 보속의 진정한 역할은 죄의 흉터를 없애는 것입니다.
Q. 고해성사를 성실히 본 후 어떤 죄에 대해 고백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고백해야 하나요?
A. 아닙니다. 고해성사 중 생각나지 않았거나 확실히 기억하지 못해 다시 고백해야 하는 죄는 대죄뿐이며, 의도적으로 고해하지 않았을 경우만 해당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고백하지 못한 모든 죄도 용서하십니다.
Q. 낙태죄를 지었는데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도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 같아 반복적으로 성사를 봅니다.
A. 진심으로 참회하고 고해성사를 보셨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는 마음,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죄책감은 멀리 던져버리십시오.
Q. 전화나 인터넷으로도 고해성사를 볼 수 있나요?
A. 인터넷이나 전화로는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중대한 일인 만큼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인 만남이며, 하느님의 용서는 이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고해사제와 개별적으로, 고해사제에게 직접 봐야 합니다. 물론 고해 비밀은 반드시 지켜집니다.
Q. 외국에 체류 중이거나 유학 중인 경우 외국인 신부에게 한국어로 고해성사를 봐도 되나요?
A. 네, 그렇습니다. 영어든 한국어든 프랑스어든 하느님은 고해하는 사람의 고백을 알아들으십니다.
※ 참고자료 : 손희송 신부의 「열려라 7성사」, 정훈 신부의 「고해성사의 소프트웨어Ⅰ」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이지혜 기자]
전국 상설 고해소
그리스도의 평화가 필요한 때, 내가 편한 시간에 맞춰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상설고해소를 알아보자.
신자들이 원하는 때에 성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서울대교구는 "지구별로 한 곳씩 상설고해소를 설치해 신자들이 자유롭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2003년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성직자 20항)를 통해 발표했다.
이러한 사목지침은 전국적으로 공감대를 이뤘고 현재는 신자들이 편한 시간에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교구 차원에서 상설고해소를 마련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고해소를 운영해 상설고해소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고해소를 개방하고 있다.
카푸친작은형제회 서울 효창동 수도원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에 영어로 성사를 볼 수 있다. 내국인 신자뿐 아니라 외국인도 필요한 때에 고해성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상덕(안나, 74, 서울대교구 녹번동본당)씨는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 명동성당 상설고해소에 들렸다"며 "시간 있을 때 찾을 수 있고 나를 모르는 신부님에게 고백할 수 있어 편하다"고 이용한 소감을 전했다.
하지만 보완할 점도 있다. 우선 이용자가 일부 상설고해소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순서를 기다리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 모처럼 보기로 마음 먹은 고해성사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적지않게 생긴다. 상설고해소를 자주 이용한다는 배광억(그레고리오, 75, 서울대교구 명동본당)씨는 "시간을 못 맞춰 사람이 몰렸을 때는 30~40분을 기다려야 한다"며 "성사보러 왔다가 엄두를 못 내고 돌아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둘째는 상설고해소 이용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많은 상설고해소의 운영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두세 시간에 그친다. 운영시간 또한 대부분 직장인 근무시간과 맞물리는 오후 2시 이후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상설고해소를 이용하려면 신자들이 개방 시간에 맞춰 찾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는다.
현재 전국에는 36개 이상 상설고해소가 운영되고 있다. 상설고해소 이용을 원하는 사람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누리집(www.cbck.or.kr)을 방문하면 상설고해소 장소 및 운영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상설고해소 방문 전 게시된 연락처로 먼저 문의하는 것이 좋다.
이런 노력도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늘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외된 이들이다.
그렇다면 사회 소외층인 노약자와 장애인들은 고해성사를 통한 참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이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어르신 중에는 관절질환으로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노약자들은 고해소에서 무릎을 꿇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게다가 일어설 때 지지할 안전봉이 없어 넘어질 위험도 있다.
서울대교구 가회동본당은 이런 어르신들을 위해 고해소 안에 작은 의자를 마련했다. 본당 신자인 강덕순(데레사, 75)씨는 "의자가 생겨 무릎을 꿇지 않게 됐다"며 "무릎이 아프지 않아 고해성사 볼 때 너무 편하다"고 달라진 고해소에 만족해했다.
장애인이 이용하는 전동 휠체어 크기는 보통 너비 60cm, 길이 1m다. 그렇기 때문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들어가기에 고해소 문은 너무 좁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은 쉽게 넘을 수 있는 문턱도 장애인들에게는 불편한 점 중 하나다.
전동 휠체어를 이용하는 신동숙(마리안나, 48, 서울대교구 개봉동본당)씨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고해소 문이 좁아 들어갈 수 없어 신부님께 따로 부탁해 면담성사를 본다"며 "그 점이 부담스럽고 불편해 고해성사를 잘 안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장애인 신자들의 불편함을 전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지적되면서 최근 노약자와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을 사목적으로 배려하자는 교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지난해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 보장을 위한 시설 설치' 권고문을 발표해 "모든 성당과 그 부속 시설, 수도회 건물과 피정ㆍ교육 센터, 학교 등에서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의 편의 증진 보장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하여 장애인과 노약자, 비장애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집에서 쉼과 위로를 얻게 해야 한다"고 권했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백슬기 기자]
고해성사'를 마무리하며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눈에 보이는 은총의 표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사를 통해 은총을 부여하고, 죄를 용서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0항).
이처럼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고해성사도 다른 여섯 성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로 부르신 초대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본인이 지은 죄를 통회하고 보속하기 위해 자기 의지로 고해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해와 일치'로 초대했다는 것을 깊이 간직해야 한다.
죄는 크게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와 '사람에게 저지르는 죄'로 구분된다. 어떤 형태든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죄를 극복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죄는 오로지 '용서'로만 치유될 수 있다. 이 용서는 복음서 전체를 꿰뚫는 핵심 단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이 용서의 기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바치신 기도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죄는 성찰하고 치유함으로 극복된다. 고해성사는 본인의 잘못과 죄를 객관적으로 보는 성찰에서 시작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성찰을 '예수님의 십자가 신비에로의 초대'라고 정의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대신해 스스로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하는 십자가의 신비가 고해성사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커다란 위로의 선물을 받는다. 그 선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치유됐다는 것,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