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유골은 1997년 일본 전통예식에 따라 화장돼 도쿄(東京) 인근 후추(府中)시 가톨릭 묘지에 모셔져 있으며 이번에 그 일부를 우리나라에 가져와 안장한 것이다.(1998년 8월 29일 연합뉴스)
1970년 벽제에 설치되었던 '무명일본인유골합사대(無名日本人遺骨合祀台)'에 관해 조사하던 중 그 위령비 건립에 깊이 관여하였던 당시 주한 일본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의 묘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서면씨 가묘 옆에 안장했다는 그의 묘를 찾던 중 조선일보 기사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파주에 있는 기독교 묘지 다른 곳을 갔다가 헛걸음 할 뻔한 생각에 아찔했다.
< 가나야마 마사히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하늘묘원에 모셨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확인했기에 가는 길을 재차 확인하고는 파주로 가기위해 서울역에서 경의선 전철로 바꿔타야했는데 1시 50분 출발이어서 시간 여유가 있어 김밥천국으로 가서 김밥 2줄을 샀다. 전철을 타니 서울역이 출발역이어서 열차가 비어있어서 거의 한칸을 내가 전세낸 것처럼 출발했기에 김밥을 펼쳐서 먹었다.
금촌역에 내렸는데 뇌조리 삼거리로 가는 버스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 13번 버스가 가는 걸로 알고 왔는데 333번 버스도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1212부대가 보였다. 그제서야 떠나기 전에 보았지만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지도가 이해가 되었다. 뇌조리 삼거리 정류소에서 내렸고 버스가 가는 56번 국도가 아닌 78번 국도로 걸어갔다. 하늘묘원의 안내판은 못보았지만 하늘묘원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문화기업 1km라는 안내판을 보고는 25분 정도를 예상하고 걸었다.
버스는 이길로 다니지 않았으며 온통 덤프트럭이 대세였다. 큰차가 지나칠 때면 옆으로 비켜서는데도 막무가내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대진E/S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었으나 안내 팻말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계속 올라가다 시간이 많이 경과가 된 것 같았고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택시가 주차해있는 길 옆에 있는 컨테이너를 두드렸다. 눈에 잠이 가득한 사람이 나와서 대답을 하는데 하늘묘원은 대진E/S 옆길로 들어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돌아섰다. 오며 가며 20분은 손해본 것 같았다. 대진E/S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디케이산업, 문화기업이 보인다.
조금 후에 하늘묘원 안내판이 나왔다. 관리사무소에는 사람이 없었고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는데 용무가 있는 사람은 전화를 하라고 적혀있었다. 무시하고 조금 올라가다가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관리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다른 볼 일 때문에 근처에 없다면서 가나야마 대사의 묘가 있는 곳을 대충 알려주었다. 가르쳐 준대로 올라가서 한참을 찾아봐도 찾을 길이 없어서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 화장실 옆 길로 올라가라고 해서그길로 들어섰는데 곧 가나야마 대사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잘 단장이 되어 있었고 누군가 다녀갔는지 꽃다발이 묘 앞에 놓여있었다.
구상선생의 글과 김단희선생의 글씨로 된 그의 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무덤의 주인공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님은 1909년 1월 24일 일본국 도쿄도 세다가야구(日本國 東京都 世田谷區)에서 육군장성의 자제로 태어났다. 일찍이 국립동경대학 정치학과에 재학 중 가톨릭에 귀의하여 그의 천성이라고도할 박애주의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34년 학업을 마치고 같은 해 국가공무원 상급 시험 외교과에 합격하여 바로 외교관으로 출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주재공관의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42년 주 바티칸 일본사절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그는 세계 제2차대전 중과 종전 후를 합쳐 10년간이나 바티칸에 머물면서 그의 독실한 신앙생활과 성실한 인간성으로 교황 바오로 12세를 비롯한 성청 내 여러 성직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사서 전후 일본의 전범처리와 평화재건문제 등에 전폭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크게 공헌한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52년에는 대리공사로 임명되었고 곧 다시 연합군의 일본 전범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필리핀 마닐라 주재 참사관으로 전보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바티칸의 엄호로써 전범 석방에 혼신 노력하여 53년 필리핀 독립기념일에는 전원 사면과 석방이라는 특사를 얻어내어 국내외에 경탄과 칭송을 받았다. 그 뒤로 이어서 미국 호놀룰루 총영사, 외무성 유럽아시아 국장, 뉴욕 총영사, 칠레, 폴란드 대사 등으로 활약하다가 68년 한국대사로 전임되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정권의 국가재건추진계획의 초기였는데 그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그 정황을 소상히 파악한 후 한국 산업 근대화에 국교적 차원을 초월하여 협력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의 각계 각층의 인사와 인간적 친화를 통해 신뢰와 우애를 다져 나아갔다. 72년에는 4년간에 이르는 한국 주재를 마치게 되었는데 그는 귀국 후 파리주재 일본관장 등의 직책을 제의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면서 "나는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일한 양국 친선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아 앞으로 죽는 날까지 그 일에 헌신할 것이다." 라고 하고 이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의 실천으로 73년 동경 한국연구원 최서면(崔書勉)원장을 찾아서 참여를 자원하여 동 원의 이사로 취임함과 더불어 국제공동연구소를 병설하여 그 초대 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한일관계의 친화를 굳히는데 힘을 기울이고 아울러 한국의 국제적 선양에 이바지하였다. 이렇듯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여 마지 않던 그가 97년 11월 1일 이승을 떠나니 향년 88세였다. 평생에 추구하고 실천한 가톨릭적 박애주의의 완수 그것이 곧 그의 생애이었다.
가나야마 대사의 묘를 돌아나오면서 최서면씨 가묘는 어디 있을까 궁금했으나 표시가 없기에 근처에 묘비가 없는 것을 추정했으나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그 옆에 무인석도 있고 잘 구성된 묘를 찾아갔더니 최서면씨 부모님의 묘였다. 그리고 그 아래는 안사영박사 내외분 묘가 있었는데 그옆의 묘가 최서면씨 가묘라는 확신이 들었다. 길을 돌아 나왔다. 오늘 제대로 목적을 이루어서 너무 기뻤다. 관리인과 처음 통화할 때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마음으로 다시 또 와야 하나라는 생각이었는데 묘지를 제대로 찾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84) 박사는 안중근 의사와 독도에 관한 연구를 비롯, 한일관계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연구해 왔다. 그는 1926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문과를 수료했다. 한동안 언론계에 몸담았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7년 도일, 1969년 동경 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여년 간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안중근 평전(安重根 評傳)」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명지대 석좌교수 역임.
최서면 체일30년 기념문집으로 나온 「최서면과 나(崔書勉と私)」에 '묘도 서로 이웃이다'라는 가나야마 대사의 글에 최서면씨 가묘 옆에 가나야마대사의 가묘를 쓴 사실이 나와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한대사를 최후로 외무성을 퇴직한 것은 1972년 이었으며 한국연구원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였었다. 나는 대사로서 최후의 임지인 한국에서 지낸 4년간은 한일관계가 일본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졌었고 나 자신이 제2의 인생을 한일친선을 위해 헌신하기로 은밀히 결의하였다. 당시 내 주변에서는 내가 퇴직한 후의 자리로 유럽의 일본관 관장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관 관장의 지위는 당시 공사급이었던 것을 특별히 나 때문에 대사급으로 격상하려고 하는 사전 준비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고마운 이야기였다. 이 소중한 호의를 받아들여 유럽으로 갔다가 귀국한 후에 한일친선사업에 종사하려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것은 왠지 모르게 미안한 기분이어서 떨쳐내고 말았다. 장황한 가운데 도쿄에 한국연구원이 있는 것을 알게되어 방문하였다. 나는 사적으로 최서면원장을 만난 것이 이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이이쿠라(飯倉)에 있던 연구원은 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딸의 집으로 유서 깊은 건물이며 연구소로서 잘 어울리는 곳이었으나 아무래도 증축을 계속하는 한편 도서의 수용과 화재시에 대응을 고려하여 현재의 미타(三田)로 이전한 것이었다. 이이쿠라 시대에는 책상, 의자, 서가 등의 설비는 전부 원장이 손수 차를 운전하여 에비수(恵比寿)의 중고가구센터로부터 산 중고품이었다. 그 중에 원장이 처음으로 새 물건을 산 것은 내 책상이었다. "대사로 근무한 가나야마(金山)씨에게 중고품은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라고 하였다. 좋은 것, 좋은 가게라면 당시의 원장의 상식으로는 미쯔꼬시(三越)였기에 그 곳에 가서 내가 사용할 책상과 의자를 구입해 온 것이었다.
원장이 나를 맞이했을 때 "큰일났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대사 경험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사장 목내신윤(木內信胤)씨에게 즉시 전화했다고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천악사(泉岳寺)에 있던 코리아하우스라는 요정에서 급히 세 사람이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연구원의 미래를 밤 늦게까지 의논하였다. 가나야마를 이사로 맞이할 것을 목내씨가 제안하였다. 그래서 실질적인 활동을 할 각오를 피력하고 상무이사라는 직위를 수여받았다.
<교황 바오로 6세(1963.6.21~1978.8.6)와 함께한 가나야마 대사와 최서면씨>
그로부터 또 세월이 경과하여 72년 11월에는 연구원의 사회과학 부문 연구기관으로서 국제관계 공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의 자리에 앉게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원장과는 가족과 같은 관계로 15년을 계속지냈다. 가족이라면서 원장은 나의 가묘까지 만들어 주었다. 서울의 최씨네 묘지에 있는 원장의 가묘에 이웃하여 내 가묘를 만들어 주었으며 나는 스스로 자신의 가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며 나도 건강하여 70세 초반까지 지나 왔다. 이 가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나 몸이 좋지 않아서 최근 수년동안 2회 정도 입원한 적도 있었다. 이때 원장은 내 자식에게 "만일의 경우에는 한국에 만들어 둔 가묘에 매장하는 것이 적절하다. 가족의 동의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새끼손가락 정도라도 분골해 달라"고 말해왔었다. 이것은 내가 한국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만들게 하려는 최원장의 우정일 것이다.
참조: 최서면과 나(崔書勉と私)」,최서면체일30년기념문집간행회, 1988
日韓新時代の夢, 金山政英,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