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와 사이다
김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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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틀러, 고흐, 헤밍웨이, 다자이 오사무, 커트 코베인, 마야코프
스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 자살한 사람들입니
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관자놀이
에 총알을 박아넣기도 하고 손목을 칼로 긋기도 하고 치사량의 약
을 목구멍에 털어넣기도 합니다. 결국은 심장이 멎어서 죽겠지만
심장을 멎게 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죽는 방법은 하늘의
별자리보다 더 많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저
마다 다르듯 말이죠.
유성이 마른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면 누군가 죽는다고 합니다.
육체에서 이탈한 영혼을 호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담 유성
이 떨어지는 모습도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영혼마다 주파수가 다
를 테니까요. 그런데 자살한 자들의 영혼도 호출을 받을 수 있을까
요? 아무 말도 없이 끊겨버리는 전화를 받고 나면 지금 지구의 어디
에서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거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자살은 대단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자살이 스테이
크 자르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라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을 것입니
다.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집니다. 그러
니 .죽고 사는 문제쯤은 스스로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게임이
불공평하다면,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그 게임에 내던져졌다면 그
것을 스스로 거부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2
레밍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1999년 일본의 게임 개발 업체인
후지히 사에서 출시한 게임입니다.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물론, 이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는 레밍입니다. 쥐처럼 생긴 작은
짐승 있지 않습니까?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바
로 그 불가사의한 녀석들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녀석들
입니다. 갑자기 웬 레밍이냐구요? 보기보단 성미가 꽤 급하시군
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이 녀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까요.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레밍은 이 사건의 모티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레밍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게임은 비교적 단순합
니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피카추
와 너무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건 삶을 권태롭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 게임, 시
시하기는 하지만 여타 게임들과는 다른 나름대로 뭔가...... 네, 독
창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누군가를 구하거나 뭔가를 얻기 위해 모험을
하도록 시나리오가 짜여 있습니다. 외딴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한다
거나 숨겨진 보물이나 절설로만 전해져오는 천하제일검을 찾는다
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절벽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이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자살이지요. 요컨대 죽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해
치우기도 하면서 말이죠.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
기 위해 살아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은 들통 난 불륜만큼이
나 교훈적인 데가 있습니다. 자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를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바로 자살입니다. 죽지 못해
서 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영감을 얻
었습니다. 영감이라는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라고요? 그렇담 사업
아이템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쨌거나 모든 일이 그렇게 시
작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
다. 무작정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죠. 엄연히 시장의 논리라는 것
이 있으니까요. 서비스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 세상
을 뜨는 사람들에게 화폐는 어차피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니까
요. 그리고 요금을 받지 않는다면 의뢰인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을
받게 됩니다. 불필요한 의혹이며 의심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공
짜로 뇌수술을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섣불리 자신의 머리를
맡길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비용이 비쌀수록 그 서
비스의 질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비쌀 수밖에 없
는 이유가 있겠거니 짐작하는 것입니다. 돈은 정직하다고 믿는 것
입니다.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죠.
사업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전망은 긍정적이라고 불 수 있었죠.
세상은 점점 힘들어지고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계속
증가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
들이 잠재적 수요자인 셈입니다. 이보다 더 전망이 밝은 사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업 자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
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업입니다. 너무
나 자본주의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밍스닷
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더블유더블유더블유점레밍스닷컴
www.lemings.com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벤처 사업입
니다. 무한한, 가히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을 지닌 사업입니다. 자
살도 하나의 훌륭한 이벤트 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멋진 자본주의
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윤
이 절차와 동기마저도 정당화시켜주거든요. 번 만큼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저 위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것이 알고 보니 바
로 그런 것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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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과 저는 인연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 계
좌에는 신의 은총이 별반 쌓이지 않았으니까요. 사업 얘기를 하다
말았군요. 특별히 사업 준비 같은 건 필요 없었습니다. 인력이나
기자재 같은 것들도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피시방에 앉아 홈페이
지를 만들었습니다.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걸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너무 간단해서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사유
의 그늘에서 행동은 창백해진다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이 기
억납니다. 대부분의 세상일이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거나 어렵지
는 않습니다 뭐든 일단 실행해보는 것이죠. 홈페이지를 개설하면
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긴 했지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콘텐츠였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레밍스닷
컴에 접속한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내
용들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죽기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마는 사실 죽기
만큼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객이 믿
고 의뢰할 만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수면제
를 먹고 죽으려면 어느 제약 회사의 어떤 약을 몇 알 정도 먹어야
하는지, 손목을 그어서 죽음에 이르려면 어느 부위의 정맥을 얼마
나 절단해서 혈액을 몇 시시 정도 흘려야 하는지 등등. 고객의 믿
음을 사려면 이런 것들까지도 홈페이지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해부학 책부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뒤지면서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종 텔레비전을 통해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 자살 소동을 벌이
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그 많은 한강 다리 중에서 특히 한강철
교에서 자살 소동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유
는 간단명료합니다. 사람들 통행이 많아서 이목을 끌기 쉽고 철교
아치의 폭이 넓어서 발을 헛디딜 염려가 적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죽기 싫은 것입니다. 자살 소동을 벌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위
의 관심을 끌고 싶어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 고객이 될 수 없습
니다. 괜히 소란만 피우게 될뿐더러 비밀 보장이 생명인 이 사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걸
러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수임료를 흥정하려는 사람들과는 계약을
맺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미련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자들
과는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업상의 원칙입니다.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기껏 죽여달라고 해서
목을 조르는데 갑자기 제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복상사가 소원이라는 어떤 노인은 어렵게 여자를 구해주었는데
여자의 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반 자살을 원하는 젊은 남녀를 소개시켜주었더니 계약금
도 떼어먹고 둘이 야반도주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둘이 눈이 맞은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한 뒤부터 고객 선정에 신중해졌습니다. 계약하기
까지 여러 차례 인텨뷰를 합니다. 물론 인텨뷰는 사이버 공간에서
만 이루어집니다. 꾸준한 채팅과 메일 교환을 통해 고객을 선별합
니다. 삶이 권태로운 자들, 고독한 자들, 유미주의자들은 인텨뷰
과정에서 하나 둘씩 탈락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뭔가 신기
한 것이거나 함께 술을 마시며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나눌 친구이
거나 자신과 뜻이 맞는 또 다른 유미주의자이니까요. 고객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죽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말하자면
맥없이 드러난 삶의 동공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죽음이 오히려 유
일한 희망이며 안식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이쯤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인텨뷰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점
검하는 것은 바로 자살에 대한 의지입니다. 확고한 자살 의지를 확
인해야 인터뷰 과정이 끝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가는 레밍처럼 그들은 까다로운 인터뷰 심사를 통
과해야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계약 말이죠. 지루하면서
도 까다로운 인텨뷰가 반복되면서 탈락자가 생깁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거나 죽음이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이죠. 그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
습니다. 당연히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면, 계약이 이루어지려면 확고한 죽음에의 의지가 확인되어야 합
니다.
자살 의지만 확실하면 그 다음은 저의 몫입니다. 자살의 시기는
의뢰인이 정하지만 장소나 방법은 이쪽에서 컨설팅을 합니다. 자
살 의지가 확고한 사람일수록 자살 장소나 방법에 대해 그다지 까
다롭지 않습니다. 자살의 장소나 방법 등에 대해서 의견이 많고 그
선택에 있어서 까다로울수록 자살 가능성이 적은 사람입니다. 죽
을 장소나 방법 따위에 대해서조차도 생각하고 따질 기력이 없을
정도로 삶의 심연에 가라앉은 자만이 저의 고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계약이 이루어진 최초의 고객들이 바로 그들
이었습니다. 한진수(남, 35세)와 강수민(여,17세), 이 두 사람 말
입니다. 물론 저는 이 사람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 필요
도 없었고요.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이 사업의 핵심이기 때
문입니다. 고객의 신상 정보에 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
다. 사업에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진수와 강수민. 평범한 이름들이군요. 저는 그들을 각각 토니
와 사이다라고 불렀습니다. 토니와 사이다는 그들의 아이디입니
다. 저는 물론 고객들도 본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온라인상에
서 저의 이름은 레밍이었습니다. 모든 채팅과 메일 교환은 아이디
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토니와 사이다는 자살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서울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바다가 보이
는 곳에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다를 연상하곤 합니다. 산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저는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믿게 됩니
다. 인간의 아주 먼 조상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았을 것
입니다. 말하자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미드나이트 카우보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더스틴 호프만
의 앳된 얼굴을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대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행려자인 주인공은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은 육신을 이끌고
플로리다로 떠납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 시끌벅적했던 그 플로리
다로 버스를 타고 끝없이 달려갑니다. 플로리다에는 무엇이 있습
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다가 있습니다. 야자수가 있기도 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대서양의 비린내를 맡으며, 플로리다의 햇살을 받
으며 버스 안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절친한 친구의 품에 안긴
채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행려자인 주인공에게는 자신을 무
조건 이해해주고 감싸준 친구의 따뜻한 품이야말로 진짜 플로리다
가 아니었나 싶군요.
어쟀건, 토니와 사이다, 아 한진수와 강수민이라고 했었군요. 부
디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래도 본명보다는 아이디가 더 익
숙하군요. 편의상 토니와 사이다라고 부르겠습니다. 네, 그렇습니
다. 토니가 바로 그 한진수라는 남자고 사이다는 강수민이라는 여
자입니다. 어디까지 했더라...... 네, 그래서 토니와 사이다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이렇게 셋이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자살
여행이었죠. 목적지는 동해안이었습니다. 플로리다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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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아니 동해안으로 떠나기 위해 세 사람이 서울 역 광장
에서 만났습니다.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날리더
군요. 일기 예보를 들으니 대설 주의보가 발령되었더군요. 살을 에
는 듯한 추위에 눈까지 쏟아지다니 정말 플로리다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시계탑 밑에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토니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검은색 코트 차림이었습니다. 넥타이까지 말쑥
하게 매고 있었습니다. 여의도나 테헤란로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그런 차림이었습니다. 회사에 막 출근하려는 사람 같았지요. 죽
으러 가려는 사람 치고는 아주 단정한 매무새였습니다. 영화에 나
오는 마피아처럼 잘 차려입었더군요. 지나친 단정함이 오히려 섬
뜩한 기분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듣자 하니 강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
고 물에 뛰어든다더군요. 그런 면에서자살은 질서 지향적인 강박
증인지도 모릅니다. 질서에 대한 강박증이죠. 절벽에서 뛰어내리
는 레밍떼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질서정연합니까? 오와 열을 절
대로 흩뜨리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암
만 생각해도 신기한 녀석들입니다.
토니는 저를 보더니 생각보다 젊다고 하더군요. 저는 아무런 대
꾸도 하지 않고 웃어 보였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치아가 살짝 드
러나도록 웃어주었지요. 그는 아마 저승사자라도 기다리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니와 저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러
다 제가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미간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신
의 의지가 결연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한 행동처럼 보였습니
다. 실제로도 그랬겠지요.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
었지만 그 정도 확인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따지고
보면 우스운 질문이었습니다. 자살을 하러 떠나려는 사람이 괜찮
을 리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 토니의 표정은 너
무나 평온해 보였습니다. 마치 일요일 아침 고해성사를 마치고 성
당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토니라는 아이디에 대해 내가 물었습니다. 대답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그냥 물었던 것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서 있
기가 뭣해서 말입니다. 뭐랄까, 자살하겠다는 젊은 남자와 그리고
자살을 도와주겠다는 또 다른 사내, 이 두 명의 짝패가 진눈깨비
같은 눈을 맞으며 텅 빈 서울 역 광장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 있
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회
가 먹고 싶어지더군요. 물에서 막 건져올린 싱싱한 녀석으로 말입
니다. 토니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면 회가 먹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스카페이스>라는 영화 보셨소?"
그 영화라면 예전에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알 파치노가 갱으로 나
오는 영화였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 영화 주인공 이름이 토니였
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아닐 수도 있
겠죠. 대화는 다시 끊겼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는 표정이
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발밑에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오래전 보았던 그 갱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았을 테지요. 전 원래 그런 것
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니까요. 주인공이 죽었는지 살았는
지,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는지 따위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곰곰
이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보았던 그 영화, 해피엔드는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사이다가 나타난 것은 토니를 만난지 10분쯤 되었을 때입니다.
사이다는 작은 아이였습니다. 키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키뿐만 아
니라 체격도 작은 아이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유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변명처럼 말하더군요. 그러나 얼굴에는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버린 듯한 표정이 주름살처럼 박혀 있었습
니다. 체납된 전기 요금 독촉장처럼 완강한 표정이었습니다. 일행
을 보자마자 대뜸 자신은 열일곱 살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습
니다. 저는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어린 것 같기
도 하고 그보다 더 들어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이제 보니 그 여자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군요. 하긴, 죽으러 가는 마당에 나
이 따위를 속이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군요.
토니의 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기차나 버스 같은 대중교
통 수단을 이용하자면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목적지를 정해야 했
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습니다. 그저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토니의 차는 은빛 스포츠카였습
니다 1998년형 재규어라고 하더군요. 스페인산 종마처럼 나주 잘
빠진 놈이었습니다. 사이다는 차를 보더니 휘파람을 날리더군요.
어쩐지 그 휘파람 소리,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라디오 스튜디
오에서 만들어낸 효과음처럼 말입니다. 뭐랄까, 인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토니가 운전석에 앉고 저는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사이다는 잠
시 망설이더니 뒷자리, 그러니까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교통사
고가 나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죽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말
하더군요. 토니와 내가 쿡쿡, 웃었습니다. 두 남자가 웃자 사이다
는 흐흥, 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서울 역 역사에서 새
어나온 불빛이 사이다의 얼굴 위로 흐릿하게 흘러내렸습니다. 귓
불이 붉게 물들어 있는 듯했지요. 그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 아이는
살아서 이 도시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
나 불빛 때문에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사이다는 결국 살아서 돌아
오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5
사이다는 사이다만 마시더군요. 물을 마시지 않았어요. 휴게실
에 들렀을 때도 사이다는 사이다 캔을 세 개나 사더군요. 왜 그렇
메 많이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 번 사기 귀찮으니까, 라고 대
답하더군요. 사이다를 물처럼 마셨습니다. 꼭 사이다만 마셔야 되
느냐고 물었더니 콜라 따위는 마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이다와 콜라를 제외하고
도 세상에는 많은 음료수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따지지는 않았
습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특이한 취
향을 존중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미소까지 지어가며 재차 물
었습니다.
"콜라는 왜 마시지 않는 거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토니가 룸 미러를 통해 사이다를 흘깃 쳐다
보더군요.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습니다.
"너저분하거든."
사이다는 빨대로 사이다를 빨아 먹으며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습
니다. 저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습
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굳이 의뢰인의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녀는 사이다만을 고집할 이유
가 있었습니다.
당돌한 어린 의뢰인에 대해 좀더 소개해보기로 하죠. 사이다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사이다가 그러더군요. 이 세상에서 제일 구
역질나고 비참한 계급이 바로 고딩이라고 말입니다. 사이다의 말
을 여전히 저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화법은 미
술 전시관에 설치된 변기처럼 돌발적이면서 불친절했으니 말입니
다.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이 모두 알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애당초 다른 사람의 이해 같은 건 안중
에도 없다고 여기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사이다에게는 양친이 모두 있었습니다. 부친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전자 회사의 이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친은 압
구정동에 부티크를 경영한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잘나가는 집안
의 아이였습니다. 물론 사이다의 말을 100퍼센트 믿지는 않았습니
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이런저런 거짓말을 꾸며대
기도 하거든요. 나이를 속이지 않은 걸 보니 어쩌면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사이다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그 아이는
부족한 것 없는 아이였던 셈입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말입니
다. 그러나 사이다라는 아이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
는 아이 같았습니다.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고로 말하
자면 사이다는 자신의 부모를 그 남자 그 여자라고 하더군요. 도
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토니가 에이에프케이엔 라디오 방송을
계속 틀어놓은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
국 말과 외국 노래를 계속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
까? 차는 토니의 것이었고 운전도 그가 하고 있었는걸요.
토니와 사이다는 말을 거의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어쩐 일인지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만간 죽으려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타인에 대한 관심조차 잃어버렸는지도 모르지요. 결과적으로
차 안은 적막했습니다. 창밖으로 스치는 겨울 들판의 풍경만큼이
나 말이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낮게 내려앉은 잿빛
구름이 거대한 진드기처럼 지평선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차 유
리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렸습니다. 사이다는 창에 서린 김을 손바
닥으로 닦아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대관령을 넘어갈 무렵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설국, 눈의 나라였
지요. 차들은 전조등을 최대로 밝힌 채 시속 10킬로미터 이하로 대
관령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정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주위는 오
히려 환해진 듯했습니다. 늘어선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천지를 뒤
덮은 눈에 반사되어 차창으로 밀려들었습니다. 극지방의 오로라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답니다. 갑자기 타이어가 공회전하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토니가 "빌어먹을"이라고 외마디 소리를
내뱉더군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차가 제자리에 맴돌 뿐 앞으
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토니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별반 소용이 없었습니다. 속도를 높일수록 오히려 뒤로 밀리는 것
같았습니다. 눈길에서는, 더구나 언덕길에서는 한번 밀리면 끝장
입니다.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미끄러져내립니다. 상황이 다급했
습니다. 그러나 사이다는 여전히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대
관령의 눈에 묻혀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는 것인지도 몰
랐습니다.
우리나라 10대와 20대의 사망 원인 중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이 무
엇인지 아십니까? 맞습니다. 교통사고입니다. 차에 치어 죽고 찌
그러진 차에 깔려죽고 운전대에 눌려 죽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비율이 높은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살입니다. 10대와 20대가
죽었다 하면 교통사고나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자보다 남자들의 자살이 많습니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
이가 나지만 여자의 자살에 비해 남자의 자살 건수가 두세 배 정도
많습니다. 미국의 경우 거의 다섯 배에 이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
요. 남자들은 자기 인생의 여러 상황들과 대결하고 여자들은 자기
가 맺고 있는 관계들과 대결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대
결하고 있는 상황이 안 좋아지게 되면 굴복하거나 인생 자체를 부
정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하나의 관계에서 좌절을 겪으면 다른
관계를 통해 그것을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죠. 실연을 당했을 때 남
자들은 내가 뭐가 부족해서 저 여자가 나를 떠나갔을까, 라고 생각
하며 술을 마십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그래, 우리는 원래 맞지 않
는 사이였어, 라고 혼잣말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립니다.
대관령의 눈길에서 뒤로 밀리는 재규어에 탔던 세 사람의 반응
도 이런 심리학적 가설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차가 조금
씩 뒤로 밀리는 순간 토니는 죽으러 가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기를 썼습니다. 자살할 때 자
살하더라도 눈앞에 닥친 상황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수컷이니까요. 그러나 사이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사이다 캔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
다. 눈길에 미끄러져 죽건 약물 복용으로 죽건 자신과 죽음의 궁극
적인 관계는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저요?
당연히 차 밖으로 뛰어나가 있는 힘껏 차를 밀었습니다. 저도 수컷
이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의뢰인들이 자신의 뜻대로 죽을 수 있
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계약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민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슬슬 밀
리던 재규어가 서서히 전진하더군요.
눈 때문에 대관령을 넘는 데 꼬박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눈과
안개에 묻힌 대관령을 멀리 쳐다보니 살아서 내려온 것일 신기하
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토니의 노련한 운전 솜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세 번쯤은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그는 예전에
카레이서였다고 했습니다. 지옥의 레이스로 악명이 높은 파리다카
르랠리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적어도 운전 미숙으로
인한 사고로 죽기는 싫었던가 봅니다. 최선을 다해 운전한다는 것
을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까요.
대관령을 넘고 나서 토니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러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전에 비해 말수가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대관령을 넘기 전에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요. 그가 입을 열면서 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는데 제일 먼저 그 알아들을 수 없던
외국어 방송이 멎었습니다. 사실 대관령을 오르던 때부터 그 방송
은 중단되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
다. 기상 정보와 교통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토니가 채널을 바꾸었
던 것이지요. 전국적으로 기상 특보가 발령된 상태였습니다. 전국
적으로 대설 주의보가 내린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저희
일행은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재규어가 대관령을 넘어오자마자
차량 통제가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때 고개에 있던 차들은 내려오
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때로 인간에게
겸손의 미덕을 강요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또 다른 변화는 그동안 서로 시선조차 외면하던 토니와 사이다
가 말문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침묵은 제가 추측했던 것
처럼 저승길 동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그냥 어색함에서 비롯
된 낯가림이었나 봅니다. 토니가 먼저 사이다 부친이 다니는 회사
에 대해 알은체를 했습니다. 그 회사 주식을 사 꽤 큰돈을 벌었다
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쩐지 그 말이 자기 과시를 위한 무용담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낡은 필름을 볼 때처럼 쓸쓸하더군요. 오래
전에 감탄을 하고 열광했던 영화를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 말입니다. 스토리는 엉성하고 마장센은 촌스
럽고 연기는 과장되고...... 그런 영화를 보면서 열광해 마지않았
던 지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어느 한때에 대한 연
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감정의 비약일까요.
토니에게는 너무 일찌감치 성공한 자들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
새가 지독하게 배어 있었던 것 같군요. 자부심과 콤플렉스가 절묘
하게 배합된 냄새 말이죠. 그 영화, <스카페이스>의 주인공도 어린
나이에 조직의 보스가 되었던 것 같군요. 마약을 판매하는 조직이
었을 겁니다. 달러가 든 돈 자루를 차에 싣고 은행으로 달려가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였지요.
토니는 자신이 하루에 주물렀던 돈이 천만 달러였다고 말했습니
다. 천만 달러나니, 저로서는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실감이 나지
않더군요. 길을 가다가 너무 예쁜 여자를 보면 아름답다는 느낌조
차 들지 않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욕망의 대상이란 것은 얻을 수
있는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 있을 때에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
인가 봅니다. 너무 벗어나버리면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거든요. 토
니는 제법 큰돈을 주물렀던 것입니다. 큰물에서 놀았던 것이죠.
토니는 금융 딜러였습니다. 그쪽 방면에 지식이 없는 저로서는
그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달러를 사고판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돈을 사고파는 직
업도 있다는 것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토니를 만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하긴 저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살을 도와주는 사
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테니까 서로 비긴 셈이로군요.
6
바다가 내다보이는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도 눈은 그치지 않았습
니다. 여간해서 멈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속초의 바닷가는 눈 속
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손을 뻩치면 닿을 듯 낮게 걸린 구름과 검
푸른 바다 사이로 망자들의 영혼처럼 눈발이 떠다니고 있었습니
다. 맑은 날씨였다면 일출을 볼 수 있을 시간이었지만 태양은 떠오
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눈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을 테지요. 그러
나 아주 어둡지는 않았습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눈에 반
사되어 사위를 은근히 밝히고 있었으니까요. 인적이 끊긴 해변은
공동묘지처럼 적막했습니다. 겨울 바다는 너무나 고요하고 푸르러
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눈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해변에 세 사람은 말없이 서 있었습니
다. 그저 푸른 바다와 검은 하늘과 하얀 눈발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말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겠지요.
토니와 사이다 그들은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
었을까요?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지나온 삶에 대해
생각했을까요? 저는 우습게도 그때 회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
니다. 저는 원래 회를 먹지 못합니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
다. 날것의 이물감이 비위에 거슬렸기 대문입니다. 몇 번인가 먹어
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입 안에서 오물거리다가 번번이 게워내고
말았습니다. 듯밖에도 그 회가 간절히 먹고 싶어졌습니다. 심지어
입 안에 침이 고이기까지 했습니다. 식욕이란 참으로 변덕스러운
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울증이 심각한 어린 애인처럼 말이죠.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토니가 제안했습니다. 사이다는
여전히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사람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의견 일치
를 본 셈입니다. 토니와 사이다 두 사람의 표정은 우려했던 것보다
어둡지 않았습니다. 묘지를 고르는 노인들처럼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자신들의 묘지로 선택했는지도 모릅니
다. 눈이 내리는 겨울 바다를 보면서 말이죠.
호텔 바는 한산했습니다. 손님이라곤 밤을 샌 것처럼 보이는 젊
은 한 쌍이 전부였습니다. 남자의 머리가 짧게 깎여 있었습니다.
입영 전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연인은 두 손을 잡고서 나
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힘도 그들
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안한 미래 때문이었을
까요? 남자의 표정은 연인과 밀어를 나누는 젊은이의 표정 치고는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더군요.
일행은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잡았습니다. 다리가 긴 의자
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곳에 걸터앉았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거
북했던 것입니다. 일행은 바에 들어설 때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
럼 아무 말 없이 착석했습니다. 사이다가 먼저 앉고 그 옆에 제가
앉았습니다. 차를 주차시키느라 늦게 들어온 토니가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토니는 위스키 한 잔을, 저는 포도주를, 사이다는 사
이다와 진토닉을 각각 주문했습니다.
바에는 곡명을 알 수 없는 재즈넘버가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음색으로 봐서 사라 본 같기도 했습니다. 토니가 고개를 끄덕였습
니다. <무지개 너머>라는 곡이라고 말하더군요. 곡명을 말하는 그
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내에게 청혼할 때 틀었던 곡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무심코 물었습니다. 실수를
한 것입니다. 토니는 위스키를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두번째 잔
을 비울때까지 그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낮
은 목소리로 "무지개 너머에 있겠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환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입술은 거
의 달싹거리지도 않았으니 말입니다.
사이다는 진토닉과 사이다를 섞더군요. 그것을 빨대로 조금씩
마셨습니다. 사이다 칵테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름까지 붙여놓은
것을 보니 전에도 그렇게 마셔본 것 같았습니다. 토니는 얼음도 넣
지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더군요. 토니가 입을 다물면서 분위기
가 다시 무거워졌습니다. 세 사람은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자
신의 내면으로 한없이 깊이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사이다의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아니었다면 세 사람은 영원히 그 자리에 말없이 앉
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이다는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몇 마디 듣다가 그냥 끊더군
요. 중년 남자의 굵은 목소리였습니다. 잠시 후 벨 소리가 울렸습
니다. 사이다는 한참 동안 벨 소리를 무시하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폴더를 열고 "아저씨 이젠 정신 차려야지"라고 소리 지르고 전화
를 끊었습니다. 그 중년의 남자가 아버지는 아니었나 봅니다. 사이
다는 휴대 전화의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정말 지겨워"라고 사이
다가 말했습니다. 사이다는 무슨 일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당당
할 것처럼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 짧은 말조차 너무나 당당하게
들렸던 것입니다. 사이다의 당당함이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그
리고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포도주를 두 잔 더 주문해서 마셨습니다. 뒷맛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포도주였습니다.
7
세번째 포도주 잔을 비울 무렵 토니가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잠깐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에 먼저 다녀오겠다고 말했습
니다.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토니는 이미 바에 없었습니다. 사이
다는 휴대 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사이다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습니다. 밖은 몹시 추웠습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이 시릴
정도였습니다. 토니는 재규어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저도 차에 탔
습니다. 제가 차에 올라타자 토니는 기어를 넣고 출발했습니다. 어
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차는 멀리 가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재규어는 멈추었습니다. 그곳은 마치 세상의 끝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압도적
인 황량함이었습니다.
차를 세웠지만 토니는 시동을 끄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히터 때
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트 밑에서 플라스틱 호스
를 꺼내는 것을 보고 단순히 히터 때문에 시동을 끄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자네가 나를 진짜로 돠와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토니는 코트 주머니에서 알약과 도금이 된 작은 술병을 꺼냈습
니다. 알약은 수면제였습니다. 수면제를 입에 넣고 술병을 입으
로 기울이더군요. 그리고 카오디오를 작동시켰습니다. 호텔 바에서
들었던 바로 그 재즈 곡이었습니다. 무지개 어쩌고저쩌고하던.
"이 곡은 아내가 손목을 그으면서 들었던 노래이기도 하지."
저는 토니의 아내가 왜 손목을 그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
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토니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면제를 먹은 토니는 차 안
에서 잠이 듭니다.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호스를 배기통에 연
결합니다. 이제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재즈넘버가 채 끝나기
전에 토니는 잠들었습니다. 저는 호스를 한 손에 들고 은빛 재규어
에서 내렸습니다. 타이어 자국이 지문처럼 눈앞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끝을 향해서 말입니다.
8
사이다는 호텔 앞에 서 있었습니다. 밖에 왜 나와 있느냐고 물었
더니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더군요. 바의 불빛이 꺼져 있었습니다.
영업이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산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토니가 나가면서 미리 치렀다고 말했습니다. 사이다는 제게 왜 혼
자 돌아왔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물었다면 대답하기 곤란했
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건네며 멀리 던져달라고 했
습니다. "더러운 물건"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 작은 물건을 힘
껏 허공으로 던졌습니다. 그 작은 물건은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 저
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한 잔 더 할까?"
사이다에게 물었습니다. 사이다는 도리질을 쳤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젠 자기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까이에
서 보니 사이다의 얼굴에는 여드름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여드름
때문이었는지 사이다가 더욱 작아 보였습니다.
사이다는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떨고 있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가 말했습니다. 사이다가 앞장을 서더군요. 호텔 건
물 옆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녀의 뒤를 따랐습니다. 호텔 모퉁
이를 돌아가니 작은 부속 건물이 보였습니다. 2층 높이의 그 건물
옥상에는 거대한 굴뚝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보일러실과 세탁실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이다는 언
제 그곳을 봐두었을까요? 그녀는 전에 와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어
둠 속을 지나 그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었습
니다. 저는 라이터를 켰습니다. 세탁실에는 호텔 룸에서 수거해온
침대 시트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사이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둠의 한구석을 말없이 응시
했습니다. 그곳에는 대형 세탁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세탁기
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네 세탁소에서 보았던 것보다 휠씬 컸습
니다. 세탁기의 여닫이문이 선실의 그것 같더군요. 둥근 유리창 너
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이다가 물끄러미 그 유리창을 쳐
다보다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중얼거려보았습니다.
"설마......"
사이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렇게 말해보았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겠어?"
이번에도 사이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심지어 사이다는 제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습니다. 저는 그만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쏟아지는 눈이 세상의 모든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습
니다. 그 순간 어깨 너머로 세탁기의 문이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젠 저도 회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그런데 회는 고추냉이 소스를 발라 먹어야 제격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형사 양반?
- 소설집『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