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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메이지(明治) 천황이 바쿠후(幕府) 권력을 누르고 열도의 지배자로 나선 1870년대 일본. 천황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대를 총포로 무장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 제도를 폐지한다. 또한 폐도령(廢刀令)과 단발령(斷髮令)을 내려무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길거리에서 촌마게(일본식 상투)를 자르자 사무라이(侍)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줄거리는 태평양 너머 미국에서 시작된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제7기병대 출신의 미군 대위 네이든 알그렌은 총기회사의 선전장에서 사격술 시범이나 보여주면 서술로 소일한다. 그런 그에게 일본 고위관료 오무라가 천황군 교관으로 일해줄 것을 제안한다.
1876년 일본으로 건너온 네이든은 사격술을 가르치며 천황군의 근대화에 힘쓴다.
그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무라는 메이지 유신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사집단 가쓰모토 부대를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네이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련이 제대로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동한 천황군은 가쓰모토 부대에 궤멸되고 네이든은 가쓰모토 부대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검술을 접한 그는 무사정신에 매료된다.
한편 가쓰모토는 천황에게 전가(傳家)의 보검을 바치며 무사정신을 지켜줄 것을 간청하나 오무라를 비롯한 측근의 방해로 자결을 명령받는다. 네이든은 가쓰모토의 부하들과 함께 궁성을 습격해 옥에 갇힌 가쓰모토를 구출해낸 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사무라이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기 10여년 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음을 상기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군 장교가 갑옷 입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엉뚱하게 비쳐질 만도 하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 용기ㆍ희생ㆍ명예 등 군인의 덕목이 사라지자 주인공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도에 빠진다는 설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사무라이들이 칼과 활을 앞세우고 총포로 무장한 천황군과 격돌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 피와 살점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고 전사들의 가쁜 숨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TV 사극 전문배우 와타나베 겐의 열연이 돋보이며 거장 한스 짐머의 음악도 비장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 톰 크루즈의 검술 솜씨와 일본어 실력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지난 4일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는 첫주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 관객으로서는 사무라이 정신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듯한 태도에 거부감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사무라이 최후의 전투 세이난(西南) 전쟁을 일으킨 실존 인물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정계의 풍운아 사이고 다카모리. 에드워드 즈윅 감독도 그의 일대기를 읽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
더욱이 미국의 도움으로 신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이, 미국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군함을 앞세워 우리나라에 개항을 요구하고 결국 한반도를 병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천황군을 조련하러 일본에 온 네이든 대위에게도 호감을 갖기 어렵다.
[연합뉴스]
<라스트 사무라이>는 메이지 유신기의 일본에 머물렀던 한 미국 용병이 진정한 사무라이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야붕과 갑옷과 니뽄도로 총칭되는 근거리 전투 문화를 원격 전투가 가능한 서구식 장총 군문화로 업데이트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온 알그렌(톰 크루즈)은 심신이 지친 상태다. 미국 기병대 시절, 남북 전쟁에서 미군들의 인디언 학살을 경험한 그에게서 군인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남은 것은 이민족 도살자인 자민족에 대한 흉흉한 자괴감뿐이다. 그에게 용병으로의 전직은 위악적인 생존 방식이다.
그런 그가 과도기의 일본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데자부 현상을 겪는다. 인디언: 미군 같은 구도는 아니지만 장총을 지지하는 개혁파와 니뽄도를 고수하는 보수파(사무라이)의 대립은 일방적인 유혈 참상을 예고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알그렌에게 사무라이들은 영적 용맹성 말고는 미군에게 맞설 도리가 없었던 인디언 전사들의 새 버전인 셈이다. 그가‘리틀 빅 혼(Little Big Horn: 1876년 미군의 인디언 토벌전)'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장총파와 사무라이파의 첫 접전에서 사무라이들에게 생포된 후, 별다른 계기 없이 사무라이들에게 완전히 동화되다 못해 스스로를 사무라이로 인식하는 대단원까지의 과정도 자연스럽다.
1876년 - 1877년 사이에 일어난 사무라이 반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는 몇 가지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위반한다. 메이지가 막번 체제를 붕괴 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룬 후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제로의 변혁을 꾀했던 시기라는 점에서 알그렌이 경험하는 일본은 맞다. 맞지 않는 건, 막번 체제를 붕괴시키는 절대 요소인 ‘조총’이 처음으로 수입되었다는 '중요한' 설정이다. 일본 군대는 사무라이의 반란이 일어나기 무려 이백여 년 전에 다량의 조총을 자가 생산해냈다. 이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대립 구도이자 감상적 낭만주의를 발현시키는 사무라이의 신념인 조총:니뽄도의 전투 공식은 그래서 허구다. 스포일러인지 모르겠지만, 최후의 격전에서 홀홀단신 살아남은 알그렌이 설득해 메이지 황제가 개심하게되는 결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메이지의 변혁 정책과 다르다.
일본 무사도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무라이의 오야봉 카츠모토(켄 와타나베)는 무리들 중 가장 개량주의적이고, 알그렌이 사무라이 파의 참모가 되어 작전을 짠 마지막 격전도 사무라이의 허허실실 자폭전에 불과하다. 시비를 걸자면 한도 끝도 없다. 허나 부질없는 시비다. 크루즈와 즈윅에게 있어 정확한 연대기적 서술은 <라스트 사무라이>의 숙원 사업이 아니다. 그들의 숙원은 이국의 야사에 기대 퇴행적 판타지를 영상화하는 것이다.
황홀해 마지않는 이국의 과거로 타임 워프해 과거와 미래, 전통과 기술, 동양과 서양이 충돌하는 과도기적 순간을 취사채집하고, 비장하게 자멸을 택하는 이국 전통 수호자의 우호적 관찰자이자 사가(史家)로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알그렌이 사무라이의 상징적인 리더로, 중개자로, 전술 참모로, 급기야 유일한 생존자 사무라이로 황실과의 불화를 완화하는 외교관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감상적 낭만주의로 점철돼 있다. 이 낭만주의의 전편에 깔리는 건 알그렌이 인디언 킬러에서 사무라이 킬러로, 사무라이의 경배자에서 ‘벽안의 사무라이’로 환골탈태했다는 것. 알그렌의 참회 행동주의는 감동적이다.
행동주의라는 말은 적극적 중재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의 비장한 죽음에 뒤늦게 애통해 하는 메이지가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라고 묻자 알그렌이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크루즈와 즈윅의 판타지는 완성된다(또 하나의 증언자인 사진사가 영화의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예는 부연할 필요도 없다). 평소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무한한 존중심을 품었다는 탐 크루즈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변을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라스트 사무라이>가‘서구 백인들의 동양 판타지'의 충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명약관화하다.
<라스트 사무라이>를 ‘씹는 것은’쉽다. 그 제국주의에서 중층적 책략은 십수 년전에 증발했다. 구세기 말이기만 했어도 이 비판은 유효했을 것이다. 침략자가 ‘말하는’주체가 되어 피해자를 바깥에서 대변한다는 것은 기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콤플렉스를 반성하는 척 하면서, 정작 중요한 역사성을 지워 버리는 것이며 그 결과는 '가진 자의 소영웅주의'일 뿐이라는 비판말이다. 지금은 아니다. 불편한 건 여전하지만 그건 알그렌의 참회 모드만큼이나 묵은 것이다. 유효한 정치적 고려는 한 세기를 건너와 산화돼 버렸다. 남은 건, 양식화된 제스처 뿐이다.
득을 챙기려면 성심있게 일본의 양식미를 재현하는 헐리우드의 기술적 성과나 즐길 일이다. 그 안에서 <라스트 사무라이>는 확실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고동색 유카다나 사무라이의 붉은 갑옷이 제법 잘 어울리는 탐 크루즈가 성심을 다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귀엽다. 개량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카츠모토의 휴머니즘도 귀엽다. 사무라이들의 장중한 검무도 근사하다. 풀세팅한 갑옷과 흐드러진 벚꽃 비 아래에 고적하니 놓인 목조가옥의 양식미는 같은 아시아인임에도 감탄하거나 거리감을 느껴왔던 ‘일본적인’그것의 총화다. 알그렌이 연모하는 기모노 미녀의 대숲 속 목욕 장면도 감질나게 황홀하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연발 조총의 포화 속에서 절멸을 향해 칼을 든 병사들도 제법 비장한 진실의 무게로 다가온다. (★★★)
견우석 kwoosuk@joycine.com
첫댓글 쩝....설득력이 너무나 부족한 영화라죠...서양인에게 사무라이에 대한 잘못된 환상만 또 다시 심어주는 꼴...-.-
사무라이.. 이들도 정말 기사와 같이 명예를 아는 낭만적인 무인이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평생을 검술로 연마한 사무라이들처럼 톰 쿠르즈가 잘싸운다는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사무라이장군이 영어한다는게 말이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