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은 범고려권 229명 + 태봉 73명 + 백제89명 + 신라 64명 + 호족 121명 + 승려 20명 = 596명 총 596명 입니다. 이 인물들은 99%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열전은 우선 고려사,고려사절요,삼국유사,삼국사기,삼국사절요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아 정리했으며, 여기에 네이버,다음,엠파스,야후등의 검색사이트도 참고했으며, 각종 가문의 족보, 비문, 문화재, 도서관 서적등을 참고로 하여 제맘대로 정리하였습니다.^^
열전은 웹검색을 통해 1/3을 작성했고, 1/3은 각종 족보의 내용을, 나머지 1/3은 사서를 참고해 제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열전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잘못 알려져 있는 여러 사실들도 알게 되었고, 오류가 있는 부분도 찾아내는등의 나름대로 역사공부에 대한 재미를 톡톡히 즐기며 작업했습니다.
벼락치기로 열전을 작성하는 바람에 잘못된 점이라든지, 오류가 분명히 있을터이니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또 삼한공신에 책록된 이중 확실한 기록이 없는 <이견원,안락,김지,김래,오금길,이부율,윤신복,궁열,장원지,최정헌,이극인,이서,조정,방수홍,유덕용,영장> 은 제외하였습니다. 이 인물들에 대해 혹 알고 계신분이 계시면 답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인물마다 능력치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역시 제 마음대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수정요청이 있을경우 수정가능합니다.
등급은 SS>S>A>B>C>D 이며 SS는 몇 없습니다. 주로 A~D에서 평가되었습니다. 육전 : 지상에서의 군사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수전 : 수상전에서 군사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사서에 기록된 수상전에 참여한 무장들은 높게 책정했습니다. 정치 : 백성들을 잘 다스리느냐의 능력을 뜻합니다. 처세술과는 상관없습니다. 모략 : 후삼국시대에서의 외교술, 군사적인 책략, 호족들을 포섭하는 모략등을 뜻합니다. 명성 : 주로 왕족이나 승려, 유명한 장수들이 높게 책정되었습니다. 축성 : 사서에 기록된 축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높게 책정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이정도로 후삼국 인물을 짜집기하고 모아논 자료는 없을것으로 판단됩니다. 관심 있으신분께 유용한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구요. 덧붙여서 유독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 역사 인물에 관한 카페는 굉장히 많고 볼만한 정보공유도 쉽게쉽게 되는 편인데 반해, 정작 우리역사에 인물들에 관한 것들은 활성화가 안되어 있는듯 싶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특히나 16세기 전국시대 인물들을 소설,게임,영화,드라마등을 통해서 쉽게 접하고, 정보공유도 쉽게 되는 것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확실한 사서가 있는것도 아니고, 각가문의 기록이나 서신,비문등을 토대로 소설,TV등을 통해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보면, 혹 우리나라는 고려사부터 시작하여 조선왕조실록까지 1천여년간의 너무나 완벽한 사서로 인해, 상상의 나래의 싹을 스스로 제한하는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서점에 가면 품격있는 우리나라 역사소설이 많이 나왔으면, 게임매장에 가면 우리나라 역사게임이 너무 재밌고 많아서, 꼭 돈주고 사서 즐기고 싶은 그런 때가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
많은 답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4월28일 막국수-
범고려권
왕건(王建) 고려 육전(A)수전(A)정치(S)모략(B)명성(SS)축성(A)
왕융(王隆)/용건(龍建)/용융(龍隆) 태봉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B) (?~897) 고려사 세계에 따르면 작제건(作帝建/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아들로 모(母)는 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이다. 초명은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후에 융(隆)으로 바꿨다. 송악의 호족이었는데, 젊을때 송악 영안성(永安城)을 거닐다 한 몽부인(夢夫人)을 만나 혼인하였다. 후에 삼한의 어머니라 하여 성을 한씨로 하고 위숙 왕후(威肅王后)로 추증하였다. 개성(開城)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궁예가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P.S>왕건의 가계도 <1.강효경→2.강충→3.강보육>신천강씨 → 진의(강보육의 딸)+당선종→<작제건→용건/용륭(왕륭)→왕건>개성왕씨
유금필(庾黔弼) 고려 육전(SS)수전(A)정치(C)모략(C)명성(S)축성(S)
홍유(洪儒)/홍은열(洪殷悅) 고려 육전(S)수전(C)정치(B)모략(C)명성(A)축성(B)
배현경(裵玄慶) 고려 육전(S)수전(C)정치(D)모략(C)명성(A)축성(C)
왕만세(王萬歲) 고려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B)축성(C)
능길(能吉)/신길(申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박술희(朴述熙/朴述希) 고려 육전(S)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C)
복지겸(卜智謙)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B)
염상(廉湘)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A)축성(SS)
전이갑(全以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전의갑(全義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
전락(全樂) 고려(정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호의(扈義)/호원보(扈元甫)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금강(黔剛)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고려의 문신, 한찬으로 태조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고, 태조원년 918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되었다. 내봉성은 황명을 시행하는 관청이다.
염장(閻萇)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원년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직에 있었는데, 이흔암이 웅주를 버리고 황도로 올라오자,
태조원년 618년 6월 인사에서 한찬 도항사령(都航司令)을 제수받았다. 도항사는 수군의 함대를 건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손형(孫逈)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본관은 밀양으로 시호는 문렬(文烈), 태조원년 618년 한찬으로 물장성령(物藏省令)을 제수받고 후에 대상(大相)을 지냈다. 물장성은 나라의 보물을 맡아 관리하는 관청이다.
진경(秦頸)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태조원년 618년 소판(蘇判)으로 6월 인사에서 내천부령(內泉部令)을 제수받았다.
왕유(王裕) 고려(왕족)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양능길(梁能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고려 건국때의 무인이며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타고난 품격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육체적인 힘도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장상이 될 재능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대장군이 되어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그 공훈이 일세에 빛나므로 예성군에 봉하고 예성(충주)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최영휴(崔英休)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충주인으로 고려 건국시 삼한공신으로 삼한공신증태위(三韓功臣贈太尉)으로 추증되었다.
신정 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능식(能式) 고려 육전(B)수전(A)정치(C)모략(C)명성(B)축성(C)
능식(能寔)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D)
능식(能植)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
견권(堅權) 고려 육전(S)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장군. 왕건(王建)과 함께 궁예(弓裔)의 막하에서 활동하였으며, 918년 왕건을 도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이 컸다. 이 공으로 태조 즉위 후의 논공행상에서 능식(能寔)·염상(廉相)·김낙(金樂) 등과 더불어 이등공신이 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의 개국공신.
김락(金樂) 고려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A)축성(C)
김철(金鐵)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 벼슬은 대상으로 홍유, 수향(守鄕),왕순(王順),준량(俊良)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을 맡았다.
김철(金哲) 고려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수향(守鄕)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왕순(王順)/왕삼순(王三順)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길강충(吉康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흔계(昕繼)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연주(連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
구진(具鎭)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인.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918년(태조 1)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전왕(前王) 궁예(弓裔)에게 오랜 노고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유권열(柳權說)이 징계해야 함을 주장하고, 또 태조가 노하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취임하였다.
구족달(仇足達)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고려 태조 때의 서가(書家). 특히 구법(歐法)의 대가이다. 벼슬은 사찬(沙粲)·흥문감경(興文監卿)을 지냈다. 충주(忠州) 정토사(淨土寺)의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와 강릉 보현사(普賢寺)의 낭원대사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는 그의 필적이며, 후자에는 북조(北朝)의 서풍이 보인다. 보현사는 낭원대사를 기리기 위해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은 구법의 대가인 구족달이 썼다.
유권열(劉權說) 고려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왕식렴(王式廉) 고려(왕족) 육전(B)수전(C)정치(A)모략(S)명성(A)축성(SS)
애선(哀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B)
혜종(惠宗) 고려(왕족) 육전(S)수전(B)정치(B)모략(C)명성(SS)축성(B)
왕충(王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B)축성(C)
영창(英昌) 고려 육전(B)수전(A)정치(D)모략(C)명성(B)축성(C)
공훤(公萱)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색상(索湘)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김상(金相)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C)
직량(直良) 고려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홍경(洪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능선(能宣)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향예(香乂)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935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그해 6월에 수로로 견훤이 고려로 귀부를 청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유금필, 왕만세, 오담, 능선, 충질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오염(吳琰)/오담(吳淡)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D)축성(D)
낙랑공주(樂浪公主)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A)축성(D)
준량(俊良)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
김극종(金克宗)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김길(金吉)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최언위(崔彦僞) 고려 육전(D)수전(D)정치(S)모략(S)명성(A)축성(C)
능윤(能允)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순필(荀弼)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직예(職預)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진경(珍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유문(有文)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진경(進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진정(秦靖)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진원(陳原)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마란(麻煖)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D)
훤식(萱寔) 고려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유문률(楡問律)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주선길(朱瑄吉)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길환(吉奐)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또한 3대 황제 광종의 황권강화정책을 지지하여 손소(孫紹), 최행귀(崔行歸)와 더불어 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965년(광종 16)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鳳巖寺)의〈정진대사원오탑비 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의하면, 광종 4년(953)에 관등은 태상(太相), 관직은 수병부령(守兵部令)으로서 광종의 조서를 받들어 윤제(綸制)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876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던 김악(金渥)과는 연대상으로 다른인물이며, 백제의 김악(金渥)과도 역시 다른 인물이다. 백제의 김악이 고려에 사로잡힌 때는 태조 13년인데, 삼국사절요에 보면 태조 7년 고려의 사신으로 후당에 간것으로 되어 있다.
왕신(王信)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
왕육(王育)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 광종때에는 정광(正匡)에 임명되었다. 황족으로써 대우를 받아 저택이 크고 아름다웠는데, 광종 12년 961년 4월에는 송악에 큰 홍수가 생겨 궁궐이 피해를 당하자, 궁궐을 수영(修營=고치는)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광종은 임시로 왕육(王育)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행훈(行訓)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찬행(撰行)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재충(在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D)
손행(孫幸)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능강(能康)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A)
박권(朴權)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양지(楊志)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명식(明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충인(忠仁)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
흔평(昕平)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
제선(제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B)
공선(公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서필(徐弼)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A)명성(B)축성(C)
윤봉(尹逢)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C)
최준옹(崔俊邕)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이욱(李煜)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태안이씨(泰安李氏)의 시조로 본시 중국 송(宋)나라 사람이다. 925년(태조8년) 난을 피해 고려(高麗) 들어와 농서공(瀧西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7세손인 기(奇)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태안(泰安)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후손 이천(李蕆)이 태안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태안(泰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금용식(琴容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김훤술(金萱術) 고려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C)
방계홍(房係弘)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김홍술(金弘述)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동국여지승람 제25권에 김홍술(金弘述)에 대해서 적혀있길 모사태조(貌似太祖)라 하여 태조와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였다고 쓰여있고 태조를 대신해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팔공신중 한명이 아닐까 추측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팔공신은 전이갑,전의갑,전락,호의,김락,신숭겸등 6인이다. 진보성 성주 홍술(洪術)과 고려 마군장군 홍술(洪述/홍유(洪儒)의 초명)과는 다른 인물이며, 또한 의성김씨의 시조(김석/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아들)로 잘못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길권(李吉卷) 고려(용구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시조로 용구(龍駒 용인)의 토호(土豪)였고, 태조의 역성혁명을 부터 같이 하였으며, 특히 북쪽지역 옛 동예(東濊)지역(현 강원북부~함경남도)의 고부이오환(古扶伊梧桓)등을 정복하였다. 공으로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고 만력년간고적(萬曆年間古蹟)에 전해진다. 삼한통일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에 임명되었으며, 구성백(駒城伯용인)에 봉작되었다.
조맹(趙孟)/조암(趙岩)/조바우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C)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로 원명은 조암(趙岩)이다.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다. 당시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는 고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태조 왕건이 영해지방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후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백제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리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했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장금용(張金用)/(長金用)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정예(鄭藝) 고려(강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강화이씨(江華李氏)의 시조로 고려의 무장이다. 중랑장(中郞將)과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였으며 일리천 전투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하음(河陰 강화)에 정착 세거(定著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가 후손이다.
홍규(洪規) 고려(홍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로 홍주(홍성)호족이다. 태조 17년 934년 9월 운주전투에서 백제가 예상을 깨고 대패하자,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모조리 고려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때 가장 큰 세력인 홍성도 고려에 귀부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역전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홍규의 딸을 비로 삼으니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다. 홍규는 삼한통일후 삼한삼중대광 벽상익찬공신(森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에 책록되었고,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홍유후(洪儒厚) 고려(홍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홍주호족으로 홍규의 아들이다. 934년 고려에 귀부한이후 태사익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아들 홍욱(洪旭)은 문하시중 평장사까지 역임했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조의 제12비로 홍주호족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로 태자(太子) 왕직(王稷)과 공주(公主) 일후(一後)를 낳았다.
배은우(裵殷祐)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삼한1등공신 배현경(裵玄慶)의 아들로, 태조19년(936년) 배현경이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나가자 죽었다. 태조가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이후로 배은우는 높은 벼슬을 얻고 역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최지몽(崔知夢)/최총진(崔聰進) 고려 육전(D)수전(D)정치(SS)모략(S)명성(A)축성(C) 907~987, 초명은 최총진(崔聰進)이며 아버지는 영암호족 원보 최상흔(崔相昕)이며, 천성이 총명,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대광 현일(玄一)에게서 유학과 역사를 배웠으며 천문과 점복(占卜)에도 능하였다. 태조(太祖) 7년(924) 18세의 나이로 태조에게 불리워 태조의 꿈에 대해 장차 삼한(三韓)을 통일 하게될 징조라고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태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다. 혜종(惠宗) 대에는 사천대 공봉(供奉)의 직으로서 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 정종(定宗), 광종(光宗)으로부터도 후대를 받았으나 왕권강화를 적극 추구하던 광종 말년에는 미움을 받아 한동안 폄출(貶黜)되기도 하였다. 경종(景宗) 5년(980) 내의령(內議令)의 직으로 복귀하고 성종(成宗) 원년 좌집정(左執政) 수내사령(守內史令)의 직위와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호와 함께 왕의 지극한 존숭을 받았다. 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출신의 대표적 문신 관료이며 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왕평달(王平達) 고려(왕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B) 개성왕씨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둘째 아들로 母 민의(旻義)/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는 왕평달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형 용건(龍建)/용륭(龍隆)/왕륭(王隆)과 더불어 송악의 호족이였으며, 이어 태봉때까지 조카 왕건을 보필했다. 아들로는 왕식렴,왕신,왕육 3형제가 있었다. 삼한통일후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임명되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제궁(帝弓)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고려 개국 2등 공신으로 태조 13년 925년에 대상(大相) 벼슬로 조물군(曹物郡) 전투당시 고려군의 상군(上軍)을 지휘하였으나 백제군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하군(下軍)을 지휘하던 박수경의 활약으로 고려군은 승리하였다. 그해 8월엔 천안부도독(天安府 都督)으로 임명되었다.
은녕(殷寧)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3년 925년 조물군에서 백제군과 큰 전투가 벌어졌을때 박수경과 함께 하군(下軍)을 지휘했다. 제궁의 상군과 왕충의 중군은 백제군에게 무너졌으나 하군만이 독전하여 결국 승리를 하여 전공을 세웠다.
사도귀(思道貴)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벽진군호족 이총언이 고려로 귀부할 마음을 품고 아들 이영(李永)을 고려로 보냈는데, 왕건이 크게 기뻐하며 당시 대광(大匡) 벼슬이던 사도귀의 딸과 이영을 혼인시켰다. 이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을 지냈다.
영준(英俊)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 원년 918년 병부경(兵部卿)에 제수되었다.
조정(趙鼎) 고려(고창군) 육전(A)수전(C)정치(D)모략(C)명성(C)축성(C)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로 본시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왕 6년에 두 동생 조부(趙釜)와 조당(趙當) 그리고 절강성 사람인 장길(안동장씨 시조) 부자와 함께 신라로 넘어와 안동에 터를 잡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장길의 휘하무장으로 출전하여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워 고려 조정에 무관으로 출사하였으며, 대장군에 오르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조부(趙釜)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동생 조당과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조당(趙當)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조부와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배운태(裵運泰)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태조가 역성혁명을 성공하고 고려를 개창한 태조 원년에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배현경과 일족으로 추측한다.
엄식(嚴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태조13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가 대목군(大木郡)을 행차하여 동서 두솔(東西兜率)을 합쳐서 천안부도독(天安府都督)에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사(使)로 하고 엄식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삼았다. 사(使)는 지방관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흔행(昕幸)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B) 태조 13년에 정조(正朝)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이름했으며, 흔행을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선규(善規)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4년에 보윤(甫尹 8품) 벼슬에 있었는데 8월에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신라왕에게는 안장을 얹은 말과 능라(綾羅), 채금(綵錦)을 선사하고, 아울러 신라 백관에게는 채백(綵帛)을 내려 주며, 군인과 민간인에게는 차(茶)와 복두(복頭)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평환(平喚)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4년 원윤(元尹)직에 있었는데 11월에 태조가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주진을 순시하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이어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으니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마음두고 배반함이 일정하지 않다. 마땅히 지나가는 주(州),진(鎭)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명한후 안북부(安北府)와 강덕진(剛德鎭)을 설치하고 평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태조 15년에 대상벼슬에 있었는데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재훤(才萱)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7년 원보(元甫) 벼슬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통해진(通海鎭 평남 평원)에 성을 쌓게 한후 재훤으로 하여금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왕철(王鐵)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태조 18년에 섭시중(攝侍中)이었는데, 그해 10월 임술일에 신라왕이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항복할뜻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는 왕철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등을 신라로 보냈다. 11월 갑오일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김부가 왕철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와 항복을 청하였다.
한헌옹(韓憲邕)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8년에 시랑(侍朗)직에 있었는데 10월 신라왕이 항복을 청하니, 태조가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에게 명하여 신라로 회답하는 국서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 11월에 신라왕 김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형순(邢順)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진주형씨(晉州邢氏)의 시조로, 태조 18년(935년)에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되었다. 태조20년(937년)에는 석경당(石敬瑭)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왕규와 함께 축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에 밀직사에 추봉되었다. 석경당의 후진은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고 굴종외교를 펼쳤으나 건국한지 10년만에 94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강유영(康柔英)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9년 원윤(元尹)으로 9월 일리천(一利川) 전투에서 견훤,견권,박술희,황보금산등과 함께 마군(馬軍) 1만 명을 이끌고 좌강(左綱)에 편성되어 백제군을 물리쳤다.
기언(奇言/奇彦)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한순명(韓順明) 고려 육전(A)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C)
흔악(昕岳)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영직(英直)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광세(廣世)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견훤의 요청에 의해 태조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진하였다. 광세(廣世)는 지천군장군(支天軍大將軍) 겸 정조(正朝)로 능달,기언,한순명,흔악의 휘하에서 영직과 함께 좌군 1만을 지휘했다.
태조19년 936년 9월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원윤(元尹) 겸 마군장군으로 김철,홍유,박수경,연주의 휘하에서 마군(馬軍) 1만을 지휘하여 우강(右綱)에 속해 전공을 세웠다.
인일(仁一)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인일은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왕순신,긍준,왕렴,왕예와 더불어 마군 2만을 지휘하였다.
관무(官茂)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으로 대상 유금필의 휘하에서 동생으로 여겨지는 관헌(官憲)과 더불어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肋)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으로 참전했다.
관헌(官憲)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으로 대상 유금필의 휘하에서 형으로 여겨지는 관무(官茂)와 더불어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肋)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으로 참전했다.
정순(貞順)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 겸 우천군대장군(佑天軍大將軍)으로 부장 정조 애진(哀珍)과 함께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애진(哀珍)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정조(正朝) 겸 우천군장군(佑天軍將軍)으로 정순을 보필하여 우천군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종희(宗熙)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 겸 천무군대장군(天武軍大將軍)으로 부장 정조 견훤(見萱)과 함께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견훤(見萱)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정조(正朝) 겸 천무군장군(天武軍將軍)으로 종희을 보필하여 천무군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조간(助杆)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왕함윤(王含允)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장군으로 대장군 대상(大相) 공훤(公萱), 원윤(元尹) 능필(能弼)과 함께 여러 호족들의 군사 1만 5천을 이끌고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으로 참전하였다.
익훤(嫟萱)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20년 5월에 전 신라왕 김부(金傅)가 대대로 신라의 보물이던 허리띠를 바쳤다.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는 20 길이가 10위(圍 뼘)이고, 대구(帶鉤)가 62개이었다. 신라가 보물로 간수하여 오기를 거의 4백년이나 되었으며 , 세상에서 성제대(聖帝帶)라고 일컬은 것이다. 태조가 이것을 받아 원윤(元尹) 익훤(嫟萱)에게 명하고 창고에 간수하게 하였다.
준행(俊行)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 태조 왕건의 인척으로 932년 정조(正朝)직에 있었는데, 백제 매곡성주 공직이 투항하자, 태조의 명에 의해 딸을 공직의 아들 영서에게 시집보냈다.
고려 왕족으로 936년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그해 중국에서는 후당이 무너지고 후진이 들어섰다. 태조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후진과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왕인적을 볼모로 보냈는데, 후진이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고 940년에 왕인적(王仁翟)을 돌려보냈다.
영주(英周)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 14년(931년) 고려 대광(大匡)직에 있었는데, 신라 왕도를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열궁(烈弓), 총희(悤希)와 함께 고울부(경주 인근)로 파견되어, 그곳 호족 능문(能文)과 함께 수비토록 했다.
열궁(烈弓)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총희(悤希)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4년(931년) 고려 대광(大匡)직에 있었는데, 신라 왕도를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영주(英周), 열궁(烈弓)과 함께 고울부(경주 인근)로 파견되어, 그곳 호족 능문(能文)과 함께 수비토록 했다.
진평(陳評)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송회(宋會)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석담(昔淡)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석광(昔光)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개국2등 공신 석담과는 형제지간으로 추측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창(曺昌)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유지방(柳志防)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황승(黃勝)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홍관(洪琯)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임정(林程)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평택 농성호족 임팔급의 일족으로 추측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장개(蔣凱)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아산장씨(牙山將氏)로 추측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염태(廉泰)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파주염씨로 추측되며 고려 최고의 공신 29명에게 책록된 삼한벽상공신에 3등으로 책록되었다. 삼한벽상공신3등 염상, 파주염씨 시조 삼한공신 염형명과는 일족으로 추측된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한후, 최고의 공을 세운 29명을 추스려 공신당에 초상화를 그려넣게 했는데, 평견은 삼한벽상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왕요(王堯)/정종(定宗) 고려(왕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S)축성(C) 923~949.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의 둘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이복형 혜종(惠宗)의 뒤를 이어 945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와 공신 박술희(朴述熙)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교 중흥에 힘썼고, 947년에는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기질이 강인하고 고집이 세었으며, 고구려 고토 회복에 대한 집념이 강했는데, 서경으로 천도하려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왕소(王昭)/광종(光宗)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S)명성(SS)축성(A) 925~975.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넷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함을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먼저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으며,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왕권강화책에 편승하여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줄이어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폐단도 있었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柳)씨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S)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비. 성은 유씨(柳氏). 본관은 정주(貞州).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S)축성(D)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인으로 조부는 오부돈이고 부는 오다련군이다.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았는데 다련군이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에게 장가들어 오씨를 낳았다. 오씨가가 일찍이 꿈에 포(浦)의 용(龍)이 와서 복중(腹中)에 들어가므로 놀라 깨어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는데 얼마 후에 태조가 수군 장군으로서 나주에 출진하여 목포에 배를 머무르고 시내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운기(雲氣)가 있는지라 가서 본즉 오씨가 빨래하고 있었다. 태조가 불러 오씨와 시침하였다. 이에 낳은 아들이 왕무(혜종惠宗)다. 태조가 보아하니 왕무에게 이미 임금될 덕이있음을 알고 장차 그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품었으나 왕무의 세력이 패서세력에 비해 미약함을 걱정하여, 921년에 옷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하사하니, 곧 장화왕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니, 박술희가 태조의 뜻을 알고 정윤(正胤 태자(太子))삼기를 청하였다.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A)명성(S)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3비. 충주유씨(忠州劉氏). 태사 내사령(太師內史令)에 추증된 긍달(兢達)의 딸이다.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A)축성(D) ?∼983(성종 2). 고려 태조의 제4비. 황주 황보씨(皇甫氏). 태위 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이며 충의공(忠義公)에 추증된 제공(悌恭)의 딸이다.태조 즉위 후 두번째로 왕비가 되었다. 비의 고향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浿江鎭)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태조는 이처럼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성왕후(神成王后)/전대량원부인(前大良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5비. 경주김씨(慶州金氏). 잡간(匝干)이었던 억렴(億廉)의 딸이다.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를 환영하면서 한편으로 신라왕실과의 결혼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큰아버지 억렴의 딸이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 태조의 배필됨에 부족함이 없다고 추천하니 왕비로 삼았다.태조는 이러한 결혼을 통하여 양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분혈통적 고귀성을 보장받고, 또 한편으로는 친신라계 호족을 포섭하는 데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신성왕후에 대하여는 신라왕족이 아니고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이씨(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태조와의 사이에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고, 안종은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신성왕태후로 추봉하였으며, 능은 정릉(貞陵)이다.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6비. 정주유씨(貞州柳氏)로, 시중 덕영(德英)의 딸이다.태조가 즉위한 뒤 세번째로 맞아들인 왕비로, 제1비 신혜왕후(神惠王后)와 성과 본향이 같다. 제1비 유씨에게 소생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같은 집안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태조와의 사이에 왕위군(王位君)·인애군(仁愛君)·원장태자(元莊太子) 등의 왕자와 문혜(文惠)·선의(宣義)와 성명미상의 공주를 두었다.이들은 태조의 제3비 신명왕후 유씨(神明王后劉氏)계 및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皇甫氏)계와 상호 연결된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고려 초기의 정치적 변동기에 중요한 왕실세력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7비. 경주 사람으로 좌윤(佐尹) 평준(平俊)의 딸이다. 수명태자(壽命太子)의 어머니이며, 홍덕원군(弘德院君)의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에게 준 칭호 가운데 유일하게 대부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지위가 부인보다는 상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평씨 성은 신라 수도 경주의 왕경인 가운데 육두품에도 포함되는 성이 아니므로 그 신분적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런데도 태조 후비 가운데 제7위의 서열에 위치하였으며, 또 대부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평준이 고려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음을 나타는 것으로서, 아마 신라의 귀부(歸附)를 추진한 막후인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8비.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사람이며,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증직을 받은 왕경(王景)의 딸이며,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의 어머니이다.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지방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명주지방에 대한 관심은 상당하였다. 명주의 성주(城主)이며 장군(將軍)인 왕순식(王順式)을 포섭하기 위하여 고심하였고, 왕순식이 내투시에는 왕성(王姓)을 하사하고 관직과 전택(田宅)을 주어 우대하였다.이때 왕순식을 따라온 부관 가운데 소장(小將) 관경(官景)이 있고 그도 또한 왕씨 성을 받았으므로 이가 곧 왕경일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왕경과 왕순식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둘 다 고려에 와서 왕씨 성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태조가 왕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있는 점에서 두사람을 밀접한 관계로 보아 좋을 것이다.태조는 귀부 호족을 포섭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9비. 평주(平州:지금의 평산)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유금필(庾黔弼)의 딸이다.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조의 제 10비로 고려사 후비열전에는 성씨를 알수 없고, 진주인(鎭州人)이고 대광(大匡) 명필(名必)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진주(鎭州)호족인 임명필(林明弼)을 혼동한듯 싶다. 원녕태자(元寧太子)를 낳았으며 후에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1비. 경주사람으로 태수(太守) 임언(林彦)의 딸이며, 효성태자(孝成太子)·효지태자(孝祗太子)의 어머니이다.927년(태조 10) 4월 임언은 강주(康州:지금의 晋州) 장군 왕봉규(王逢規)의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파견되었고, 같은해 10월 다시 고려 태조를 위하여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이처럼 여러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아 유학과 한학에 조예있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조는 자신을 보필할 문사층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천안부원부인은 출신지가 경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 앞에 천안을 관용하고 있으며, 그 왕자들의 별칭도 천안낭군(天安郞君)이라 불리고 있어 천안과 관련을 가진 인물로, 임언이 천안지방의 태수직을 맡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호족을 숙청하였는데, 그때 천안낭군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복수의 기운이 일어나 광종대의 후생(後生)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천안낭군이 죽임을 당하였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광종의 외가인 충주와 천안낭군의 연고지인 천안이 서로 근접지에 위치하므로, 왕자들 간에도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2비. 홍주(洪州 : 지금의 洪城) 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다.홍규의 활약상을 알 수는 없지만, 홍주지방은 934년(태조 17)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싸움에서 전취한 지점으로, 이로 인하여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자진 내항할 정도로 후백제와의 겨룸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이곳은 또한 충청도에서 서해로 나가는 출구로서 중국사신의 접대와 영송(迎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는 중요지점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아들은 태자 직(稷)인데 후손이 없었고, 실명(失名)의 공주는 태조의 제 3비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 태자 태(泰)에게 출가하여 이복남매간의 근친혼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신명왕후의 둘째 아들인 정종, 셋째 아들인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기록된 태자 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3비. 합주(陜州:지금의 陜川) 사람이며 대광(大匡) 이원(李元)의 딸이다. 부인의 이름에 붙은 대량은 신라말·고려초의 합천지방 이름 이므로 출신지 명을 따서 왕비의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이름자 첫머리에 후(後)가 붙어 있으며, 이는 선(先)·전(前)에 대칭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태조 후비 가운데 그에 합당한 인 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선(전)대량원부인의 이름을 가진 태조 후비는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이름은 다르더라도 대량지방과 관계있는 인물을 찾아보면, 태조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聖王 后金氏)가 있다.신성왕후에 대해서는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라는 《삼국유사》 보주와 신라 경순왕의 종매라는 《삼국사기》 설의 두 설이 있지만,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이 대량주 태수를 역임한 일이 있으므로 후설의 경우에도 대량지방과 관계가 있다.그러므로 대량원부인은 태조비 신성왕후와 비견되어 후대량원부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대량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관문이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해인사 승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만회한 접전지였다. 이러한 전투 요충지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태조는 자신의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4비.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사람이며 내사령(內史令)의 증직을 받은 왕예(王乂)의 딸이다.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5비.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다.왕규는 두 딸을 태조에게, 한 딸은 혜종에게 혼인시켜 왕실과 삼중혼인을 하였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 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그런데 왕규는 학문적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인 듯하다. 중국의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태조의 유언을 한문으로 받아 적기도 하는 등 태조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그러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태조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소생)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을 시해하고자 하기도 하였고, 혜종이 죽은 뒤에는 태조의 셋째 아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으므로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6비. 경기도 광주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며 광주원군(廣州院君)의 어머니이다.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 17 후비(后妃). 성은 박씨, 본관은 승주(昇州).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영규(朴英規)의 딸이다.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18비로 춘주인(春州人)이니 대광(大匡) 박유(朴柔)/왕유(王柔)의 딸이다.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9비. 동주(洞州 : 지금의 瑞興)사람이며 대광(大匡) 김행파(金行波)의 딸이다.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0비로 동주인(洞州人)이니 대광(大匡) 김행파(金行波)의 딸이다. 김행파(金行波)는 활 쏘고 말타기를 잘하였으므로 태조(太祖)가 김(金)이라 사성(賜性)하였다. 태조(太祖)가 서경(西京)에 행차(行次)하매 김행파(金行波)가 사냥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길에서 배알(拜謁)하고 청하여 그 집에 이르러 이틀 밤[信宿]을 머물게 하고 두 딸로써 각각 하룻밤씩 모시게 하였다. 그 뒤에 다시 행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두 딸이 다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었다. 태조(太祖)가 이를 불쌍히 여겨 불러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출가(出家)하였으니 뜻을 가히 빼앗지 못하겠다."하고 서경(西京)에 명(命)하여 성중(城中)에 대소서원(大小西院) 양사(兩寺)를 지어 전민(田民)을 두고 각기 살게 하였으므로 대소서 원부인(大小西院夫人)이라 칭하였다.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1비로 사(史)에 그 씨족이 유실(遺失)되어 알수 없다.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康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2비. 신주(信州 지금의 信川)사람이며, 아찬(阿飧) 강기주(康起珠)의 딸이다.강기주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상 남겨진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신주는 평주(平州)·황주(黃州)와 함께 신라의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었던 곳이며, 패강진은 신라의 북방 국경을 지키는 군병력의 집결지였다.그러므로 태조는 이 지역 군사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후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는데, 신주원부인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태조와의 사이에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광종을 길러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광종이 황주 황보씨(皇甫氏)를 외가로 하는 태조의 공주와 혼인하였는데 신주원부인의 출신지가 황주와 접경하여 있으므로 이들의 혼인에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광종은 그 과정에서 다시 패강진지역의 군사적 후원을 얻게 되어 왕위에 즉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3비. 대광(大匡) 영장(英章)의 딸이다.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4비로 원보(元甫) 순행(順行)의 딸로 사(史)에 성씨(姓氏)를 잃었다.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5비로 평주인(平州人)이니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지윤(朴智胤)의 딸로 효제(孝悌) 효명(孝明) 두 태자(太子)와 법등(法燈) 자리(資利) 두 군(君)을 낳았다.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6비로 홍씨(洪氏)는 의성부(義城府) 사람이니 홍술(洪術)의 딸로 의성 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을 낳았다. 의성부원대군은 태조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 소생의 공주와 혼인하여 이복남매간 혼인을 한 몇 안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7비. 평주(平州, 지금의 平山)사람이며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수문(朴守文)의 딸이다.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8비. 평주(平州 : 지금의 平山)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수경(朴守卿)의 딸이다.평주지방은 신라의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었던 곳으로서 육군력의 집결지였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 지역 군사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후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는데, 특히 박씨가문에서만 3명의 후비를 맞아들이고 있다.그만큼 평주박씨가문의 지원이 태조에게는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수경은 지모가 뛰어나 전쟁에 나가면 매번 승리하였고, 견훤(甄萱)과의 싸움에 참전하여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고전을 치를 때 위기에서 구출해냄으로써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3대에 걸쳐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되었고, 태조가 신하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역분전(役分田)을 지급할 때 박수경에게는 특별히 전(田) 200결을 특사하였다고 하니, 그의 군사적 지원이 태조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박수경일가는 정종 즉위에도 공을 세우는 등 광종 즉위 때 까지 그 세력이 건재하였다.그러나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도를 개편하고 호족세력을 숙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박수경의 아들 삼형제가 투옥되었으므로 박수경은 화병이 나서 죽었다.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9비. 해평(海平 : 지금의 善山) 사람이며 대광(大匡) 선필(宣必)의 딸이다. 기록의 누락으로 성씨는 알 수 없다.이름의 음이 같은 사람으로는 재암성 장군 선필(善弼)이 있다. 선필은 신라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태조를 도와 고려사신의 신라내왕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930년(태조 13)에 고려에 귀부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그를 상보(尙父)로 삼고 특별히 우대하였다고 한다.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제1비. 진주임씨(鎭州林氏)로 대광(大匡) 희(曦)의 딸이다.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혜종의 제2비.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다.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혜종의 제3비. 청주사람으로 원보(元甫) 김긍률(金兢律)의 딸이며 정종의 제3비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과 자매간이다.청주는 신라 오소경 가운데 서원경(西原京)이 있던 곳으로 일찍부터 지방관부와 학교를 따로 설치, 운영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 지방세력이 그 기반을 구축하여왔던 곳이었다.그리고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직후 청주인의 반란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태조는 여러 차례 청주에 행차하여 이 지역의 민심수습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청주지방 호족의 딸이 왕실과 혼인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태조의 노력이 결실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처제를 동생인 요(堯:정종)와 혼인시켰는데, 이는 당시의 정국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혜종대에는 왕권이 미약하여 왕규(王規)와 아우들이 왕위계승경쟁을 벌였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혜종은 자신의 처제를 동생의 배필로 삼게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애이주(哀伊主)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혜종의 비로 경주인(慶州人)이니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로 태자(太子) 왕제(王齊)와 명혜 부인(明惠夫人)을 낳았다.
황보능장(皇甫能長) 고려(골화현호족)→고려(영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의 시조로, 신라말에 영천 골화현에 금강성(金剛城)을 축조하고 장군이라 칭하였다. 고려의 세력이 강성하자, 골화현 일대의 4현을 규합하여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골화현외 3현을 합쳐서 영천이라 이름짓고, 황보능장에게 영천부원군으로 임명하고 영천을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공산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벼슬은 좌승지에 이르렀다.
황보선장(皇甫善長) 고려(골화현))→고려(영천)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골화현호족 황보능장(皇甫能長)의 동생으로 추측되며 고려 개국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박암(朴巖) 오월국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대광현(大光顯) 발해 육전(B)수전(C)정치(B)모략(D)명성(A)축성(C)
대화균(大和鈞) 발해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대복예(大福譽) 발해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재웅(載雄) 발해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김신(金神) 발해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대유범(大儒範) 발해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
홍견(洪見) 발해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진림(陳林) 발해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박승(朴昇) 발해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D)
신덕(申德) 발해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대원균(大元鈞) 발해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대심리(大審理) 발해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
오흥(吳興) 발해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고자라(高子羅) 여진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마후라(摩睺羅) 천축국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태조는 마후라를 위해 구산사(龜山寺 황해도 개성시 소격전(昭格殿) 동쪽에 있었던 절)를 창건하여 그를 머물게 하였다.
태봉국[泰封國]
궁예 [弓裔, ?~918] 태봉(왕족) 육전(A)수전(B)정치(B)모략(B)명성(SS)축성(B) 성은 김.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竹州:현 永同)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또한 평산(平山)의 호족이던 박지윤(朴遲胤)의 귀부와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王建家)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게된다.이러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王建)과 제휴하여 진도(珍島)·나주(羅州)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여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강씨황후(康氏皇后) 태봉(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패강진 신천(信川)호족 강씨가문의 딸로 부는 신천강씨(信川康氏)5대손 강연창이라 추측한다. 본시 신천강씨의 시조 강효경(康虎景)은 태조 왕건의 외가측 6대 조상이기도 하다. 궁예의 정실부인이 되어 황후가 되었고, 청광,신광 두아들을 두었다. 915년 3월에 태봉주 궁예가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하여 정색을 하고 간하였으나, 궁예가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고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궁예가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임을 당했다. 학계에서는 패서세력과 청주세력간의 알력에서 벌어진 참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궁예가 청주세력의 참소를 믿고, 혹 패서세력이 궁예를 폐하고 태자를 옹립한다고 의심해 죽였다는 설이다.
청광(靑光) 태봉(왕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D)명성(A)축성(C)
신광(神光) 태봉(왕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D)명성(A)축성(C) 태봉국주 궁예의 둘째 아들로, 강씨(康氏)부인 소생이다. 신광보살(神光菩薩)은 아미타불을 뜻한다. 915년 모 강씨황후와 함께 부 궁예에게 처형되었다. 광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신광의 아들이 광산이씨의 시조 김경(金敬)이다고 적혀있다.
궁경(弓敬)/김경(金敬) 태봉(왕족)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궁예의 증손자로 광산이씨(光産李氏)의 족보에 따르면 고려태조 23년(940년) 태봉주 궁예의 증손(增孫) 경(敬)이 태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산군(光産郡)으로 피거(避居=피신)하였다. 궁경은 본시 궁예의 본성인 김(金)을 썼다는 설도 있다. 궁경의 아들 궁구(弓球)가 광주호장(光州戶長)을 지냈으며 광산호족인 이씨가문의 사위가 되어 광산이씨의 시조 종금(宗金)을 낳았다. 종금은 거란침입시 강감찬의 휘하로 공을 세워 현종으로 부터 이씨성을 하사받고 광산이씨를 세웠다.
종간(宗侃) 태봉 육전(C)수전(C)정치(A)모략(S)명성(B)축성(C)
은부(狺鈇) 태봉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C) ?∼918(태조 1). 태봉 궁예(弓裔)때의 무장. 어려서부터 남의 집 하인으로서 간사한 말로 아첨을 잘 함으로써 궁예에게 총애를 받아 내군장군(內軍將軍)이 되었다. 궁예는 말년에 흉폭 잔인하여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이때 궁예의 신임을 믿고 소판(蘇判) 종간(宗侃)과 더불어 간사하고 아첨함으로써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많이 참소하여 해쳤기 때문에, 918년 6월에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王建)이 즉위하자 곧 죽음을 당하였다.
종회 태봉 육전(C)수전(A)정치(C)모략(D)명성(C)축성(C) 후고구려의 알찬으로 왕건의 금성(나주)를 공략전때 부장으로 참전했다.
김언[金言, ?~?] 태봉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B)축성(C) 후삼국시대 태봉(泰封)의 수군장(水軍將). 909년(효공왕13) 궁예의 명으로 종희(宗希)와 함께 왕건의 부장(副將)이 되어 수군(水軍)을 인솔하고 진도(珍島)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이어 나주 포구(羅州浦口)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대파하여 호남지방을 거의 태봉의 판도에 넣었다. 그 공으로 왕건이 시중(侍中)이 되자 그 뒤를 이어 수군장이 되었다
송함홍(宋含弘)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본래 궁예(弓裔) 태봉(泰封)의 신하로 있으면서 문사(文事)를 관장하였는데, 궁예가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바친 거울에 쓰인 글자를 해독하게 하자 장차 왕건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내용을 사실대로 알리면 왕건(王建)과 자신이 살해될까 두려워 거짓으로 꾸며서 말하였다. 뒤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대상(大相)이 되었다.
백탁(白卓) 태봉(수원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생몰년 미상. 수원백씨로 백창직(白昌稷)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성지(聖之). 태봉의 문인이었는데, 918년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철원(鐵圓)의 시전(市廛)에서 살았는데, 어떤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오래된 거울을 샀다고 한다. 그 거울에는 고시가 새겨져 있었다. 왕창근이 이를 궁예에게 보고하니, 궁예는 백탁 등의 문인에게 해석하게 하였다. 그 고시는 참언으로서, 당시 궁예 밑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있던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백탁 등은 사실대로 보고하다가는 왕건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적당히 꾸며서 거짓 보고하였다. 후에 고려의 병부시랑을 지내고, 아들로 백사청(白思淸), 백사렴(白思淸)이 있다.
백길(白吉) 태봉(수원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수원백씨로 수원(水原)호족 백창직(白昌稷)과 평택농성호족 임씨부인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태초(太初)이며, 태봉때 군에 투신하여 교위(校尉)를 지냈고, 고려 태조 때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하였고 문화시중으로 증직되었다. 혜종, 정종에 이르기까지 3대(代)를 섬겼다. 부인은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이며 아들로 백사유(白思柔), 백사홍(白思弘)이 있다.
허원(許原)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환선길(桓宣吉) 태봉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향식(香寔) 태봉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고려 마군장군 환선길의 동생으로 형 환선길과 역모를 꾀하다 참수당했다.
이흔암(伊昕巖)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A)명성(B)축성(C) 또 일설에는 이흔암의 죽음이 웅주의 배반보다 앞서므로 이흔암의 죽음에 관한 반역열전에 실린 내용은 이흔암의 처형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분명 이흔암은 918년 6월 기사일에 엽시당했고, 918년 8월 계해일에 김행도를 동남도초토사(東南道招討使)·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 삼았고, 그 이후 웅주,운주의 모반을 진압케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 웅주에 관한 기록은 926년에 운주성주 긍준이 고려군에 의해 포위되어 항복하자, 웅주이북의 30여성이 항복했는데 웅주는 주위의 모든성이 고려로 항복하는데도, 항복하지 않았다. 927년 4월에는 태조가 친정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토록 강력하게 저항한것을 보면, 분명히 이흔암의 죽음과 웅주호족들과의 연관성을 부정할수가 없다. 다만 반역열전의 내용을 인정한다고 하면 <6월 을묘일에 역성혁명이 일어나고, 경신일에 환선길이 죽고, 몇일후 이흔암이 부하들하고 상경하자 웅주의 호족은 고려를 배반하고, 계사일에 이흔암이 처단당한다. 안밖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8월 계해일에 이르러서야 김행도를 초토사로 삼아 반란지역을 토벌케 한다.>는 시나리오도 성립가능하지만, 역시 웅주호족이 몇일사이에 배반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흔암의 반역사실 또한 분명치 않음으로 전자의 가능성이 유력하다.
모흔(毛昕)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장군. 궁예(弓裔)의 부장(副長)이다.
생몰년 미상. 후삼국시대 궁예(弓裔)의 부하 장수.
김대검(金大黔)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궁예(弓裔)의 부장(副長)이다. 궁예가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투탁하였다가 다음해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맡겼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궁예는 주천(酒泉:지금의 영월)·울오(鬱烏)·어진(御珍) 등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그 다음해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들어가니 군사가 3천5백여명이 되어 이를 14개의 부대로 나누어 김대금(金大黔)·모흔·장귀평(長貴平)·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 즉 각 부대의 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귀평(長貴平)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능률(能律) 태봉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직예(職預)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유척량(柳陟良)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현율(玄律)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박유(朴儒)/왕유(王儒) 태봉 육전(D)수전(D)정치(S)모략(A)명성(A)축성(D)
능범(能梵) 태봉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C)
곡긍회(曲矜會) 태봉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후당 용천(龍川)사람으로 태봉에서 내봉사(內奉史)직에 있었는데 태조 원년 첫개각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고 평찰(評察)에 임명되었다.
국현(國鉉)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고려 태조 원년(大祖元年)에 원외랑(員外郞)에 제수되었으며,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원외랑은 상서성의 정6품 벼슬이다.
기달(箕達) 태봉 육전(B)수전(C)정치(D)모략(C)명성(D)축성(D) 태봉의 마군(馬軍)으로 청주호족 경종과 친분이 있었다. 918년 태조가 패서지역 호족과 군부의 추대로 역성혁명을 성공한 직후 친궁예파로 분류되던 청주세력은 큰위기를 맞게 된다. 이중 청주호족 경종(景琮)은 매곡성주 공직의 매제였는데, 임춘길등과 백제로의 전향을 모의하면서 친분이 있던 기달에게 자신의 조카가 인질로 황도에 있어 애처롭다. 기회를 보아 애를 데리고 도망쳐 청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는데, 기달은 이 사실을 마군 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에게 고하니, 연루된 경종 이하 재경 청주세력들이 처형을 당했다.
적의적(赤衣賊) 태봉(증성의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신라말 증성(甑城)(평남 안변)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란 농민군으로 온통 빨간옷을 입어 적의적이라 불리웠다. 우두머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905년에 황의적 명귀와 함께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명귀(明貴) 태봉(증성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신라말 증성(甑城)(평남 안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 황의적(黃衣賊)의 두목으로, 온통 노란옷을 입어 황의적이라 불리웠다. 905년에 적의적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한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홍기(弘奇) 태봉(공주호족)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공주(公州)호족으로, 904년 7월에 태봉군이 상주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자, 공주호족 홍기도 태봉에게 귀부하였다. 이로써 궁예의 세력권이 금강 유역에까지 미치었다.
박득의(朴得宜) 태봉 육전(D)수전(B)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상조로, 신라 제 5대왕 파사왕의 21세손이다. 태봉국에서 대승(大丞 정2품)을 지냈다. 아들 박술희(朴述熙)는 고려 태조의 개국공신으로 면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면천으로 하였다.
금식(黔式)/검식(黔式) 태봉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봉의 정기장군(精騎將軍)으로 906년 4월 궁예의 명을 받아 왕건과 함께 군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甄萱)과 더불어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에서 싸웠는데 여러 번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능준(能駿)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의 수순군부경(守徇軍部卿)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권식(權寔)과 함께 내봉경(內奉卿)에 임명되었다.
권식(權寔)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봉국의 창부경(倉部卿)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능준(能駿)과 함께 내봉경(內奉卿)에 임명되었다.
김인(金堙) 태봉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영준(英俊)과 함께 병부경(兵部卿)에 임명되었다.
영준(英俊) 태봉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김인(金堙)과 함께 병부경(兵部卿)에 임명되었다.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견술(堅術)과 함께 창부경(倉部卿)에 임명되었다.
견술(堅術)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천령인(川寧人)으로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최문(崔汶)과 함께 창부경(倉部卿)에 임명되었다. 천령견씨의 시조 견권(堅權)이라는 설도 있다.
박인원(朴仁遠)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봉국의 일길찬(一吉飡)직에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김언규(金言規)와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김언규(金言規)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재경 청주인으로 태봉의 일길찬(一吉飡)직에 있으면서 태조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태조 원년 조정 개편에서 박인원(朴仁遠)과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요인휘(姚仁暉)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조원년(918년)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향남(香南)과 함께 물장경(物藏卿)에 임명되었다.
향남(香南)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조원년(918년)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요인휘(姚仁暉)와 함께 물장경(物藏卿)에 임명되었다.
능혜(能惠) 태봉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직후 벌어진 조정개각에서 희필(曦弼)과 함께 내군경(內軍卿)에 임명되었다.
희필(曦弼) 태봉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직후 벌어진 조정개각에서 능혜(能惠)와 함께 내군경(內軍卿)에 임명되었다.
강윤행(康允珩) 태봉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A) 태조2년 10월에는 평양성 축성을 명받아 이를 완성했다.
예언(倪言)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의 광평사(廣評史)로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내봉이결(內奉理決)에 임명되었다.
유길권(劉吉權) 태봉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태종국의 내봉사(內奉史)로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간된 조정에서 순군낭중(徇軍郎中)에 임명 되었다. 태조 14년 931년 유금필이 참소를 입었을때 순군부령으로 유금필을 압송했다.
박질영(朴質榮) 태봉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A) 태봉국의 한찬(韓粲) 및 의형대령(爲義刑臺)이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단행된 조정개각에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922년 11월에는 김행파와 더불어 서경(평양) 개척에 투입되어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는 태자 왕무의 정윤 책봉을 반대했다.
윤행(尹珩)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내봉원외랑(內奉員外郞)직에 있을 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내봉낭중(內奉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이긍회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내봉사(內奉史)직에 있을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내봉원외랑(內奉員外郞)으로 임명되었다.
직성(直晟)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백서성(白書省)의 공목(孔目)직에 있을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백서낭중(廣評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민강(閔剛) 태봉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D) 태봉의 순군낭중(徇軍郎中)으로 태조가 궁예를 쫒고 역성혁명을 일으켰을때 공을 세워, 고려 개국후 내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노강필(盧康弼)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교하노씨(交河盧氏)의 시조로 본시 기계(杞溪 포항)사람으로 신라말 나라가 어지러울때 본관(本貫)을 장산(章山 경북 경산)으로 옮겼다가, 태봉국이 들어서자 철원으로 옮겨 태봉조정에 출사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태조 왕건과 교분을 텨, 태조의 역성혁명 당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그후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한후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 옛 선조가 정착했던 교하(交河 파주)를 받아 그후 후손들이 정착해 살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교하노씨다.
임춘길(林春吉) 태봉(재경청주)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배총규(裵悤規) 태봉(재경청주)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
관서(寬舒)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입전(笠全)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신방(辛方)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강길(康吉)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
아차귀(阿次貴)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
총일(聰逸)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C) 청주 호족 출신으로 한찬(韓粲) 벼슬에 있었다. 918년 왕건이 청주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궁예가 벌을 내린 윤전,애견등을 구원하라 명하였다. 고려 개국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윤전(尹全) 태봉(청주)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애견(愛堅) 태봉(청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
경종(景琮) 태봉(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C)
진선(陣瑄) 태봉(청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 태봉국 청주호족의 대표격으로 파진찬 벼슬에 있었다. 재경청주세력인 임춘길등이 역성혁명 직후 제거당하자, 한달후인 918년 10월에 동생 선장(宣長)과 더불어 청주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해 죽었다.
선장(宣長) 태봉(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금용 (黔用) 태봉(평양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D)명성(C)축성(D)
왕창근(王昌瑾) 당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D)축성(D) 당나라 상인으로 태봉국 철원에서 교역중 918년 3월에 문득 시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얼굴 생김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쓰고 거사복을 하고, 왼 손에는 바리 세 개를 들고 오른 손에는 사방 1자나 되는 옛날 거울 하나를 들고 있었다.
범백제권
견훤(甄萱, 867~936) 백제 육전(SS)수전(B)정치(B)모략(C)명성(SS)축성(B) 전주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優位)를 유지했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여 친려(親麗)정책을 쓰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한 후, 효종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경순왕 역시 친려(親麗)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신라의 민심은 고려의 왕건에게 기울어져갔다. 929년 고창(古昌: 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군현,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했으나 탈출하였다. 그리고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신검 등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黃山:충남 논산시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명길(明吉)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
민극(閔筐)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918년 6월 궁예(弓裔)가 몰락하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甄萱)은 그해 8월 일길찬(一吉飡) 민극을 고려에 보내어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광평시랑(廣平侍郎) 한신일(韓信一) 등이 감미현(甘彌縣)에서 민극 일행을 맞이하고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왕건즉위 축하사신인 민극편에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에서 나는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고 하였으나, 《고려사》에는 920년(태조 3) 9월 견훤이 아찬(阿飡) 공달(功達)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竹箭)을 왕건에게 바쳤다고 하여 두 책간에는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진호(眞虎)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신덕(新德) 백제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B)
흥달(興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웅달(雄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옥달(玉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관흔(官昕) 백제 육전(SS)수전(B)정치(B)모략(A)명성(A)축성(A)
상귀(相貴) 백제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A)축성(D)
종훈(宗訓)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S)명성(A)축성(B)
훈겸(訓謙)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
신검(神劍)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S)축성(B)
금강(金剛) 백제 육전(A)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C) 견훤의 넷째 아들로 견훤의 첩 고비 소생이다. 본시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히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제가기에서는 태사 총지라고 한다.
종우(宗祐) 백제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수미강(須彌康) 백제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
위흥(位興)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
청구(靑丘)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 견훤에 대해 자세히 나왔다던 이제가기에는 견훤의 8남으로 벼슬은 태사라 한다.
월광(月光) 백제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능예(能乂) 백제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
능예남(能乂男) 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D)축성(D)
신강(信康) 백제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C)축성(D)
최필(崔弼) 백제 육전(S)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
효봉(孝奉) 백제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최견(崔堅) 백제 육전(B)수전(B)정치(C)모략(D)명성(B)축성(C)
최승우(崔承祐) 백제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S)명성(S)축성(S)
공달(功達)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김악(金渥) 백제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
김총(金摠)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일설에는 김총은 태봉국 황손으로 태봉국 태자 청광의 아들이며, 고려 개국후 백제로 왔다고 한다. 1887년 편찬된 신라김씨선원록서(新羅金氏璿源錄序)와 또 1988년 발간된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서는 <김총(金摠)은 태봉국 태자 청광보살(靑光菩薩, 관세음보살)의 아들로 궁예(弓裔)의 장손(長孫)이다>궁예는 신라왕족 김알지의 후손이며 본성은 김씨다. 또한 궁예의 왕후 강씨부인은 신천강씨 강연창의 딸로, 태조 왕건의 송악가문과는 그 뿌리가 같다. <태조 왕건의 증조모가 신천강씨로, 신천강씨 3대손 강보육의 딸이다. 왕건의 가문은 증조모부터 시작된다. 증조부는 고려사세계에는 당나라 선종이라 적혀있다. 그럼으로 강보육은 태조에 의해 제1대 선제로, 국조 원덕 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추존되기도 한 인물이다.> 이렇듯 강씨부인과 왕건가문은 피로 맺어진 혈족임으로 914년 왕건이 나주에서 소환되어 죽음직전까지 같던 사건하고, 915년 강씨왕후와 두태자의 죽음은 연관성이 있을것이다. 궁예가 만약 군부의 왕건이 왕후로 대표되던 패서지역과 손을 잡고 궁예를 폐하고 태자를 옹립할려고 한다는 의심을 하였다면 이 두사건은 설명이 된다. 또한 김총이 궁예 때 출생했다면, 꺼림직한 두 태자를 제거하고, 총을 후계로 삼으려 했다는 가설도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역성혁명이 성공하고 왕건은 자신의 외척인 강씨왕후,청광,신광을 동정하였을 것이며, 그 후생도 살려줬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실제로 신광태자의 아들은 살아 남아, 본성인 김씨로 돌아갔으며 김경을 낳아 광산이씨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광산이씨는 이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순천김씨는 김총이 궁예의 후손이란 것을 인정하는 곳과 인정하지 않는 곳이 있어, 확실치는 않다.
덕술(德述)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D)
염흔(廉欣)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지훤(池萱) 백제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C)
견달(見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부달(富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흔강(昕康)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영식(令式)/금식(今式)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시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우봉(又奉)등과 함께 고려군에 사로잡히었다.
은술(殷述)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시 흔강(昕康), 견달(見達), 영식(令式), 우봉(又奉)등과 함께 고려군에 사로잡히었다.
겸악(兼岳)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C)
유법반(柳法攀) 백제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
김훤(金萱)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한문(漢文)/한장(漢丈)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 백제의 장군으로 태조 11년 7월에 왕건이 친정하여 삼년성성(三年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청주로 후퇴했는데, 견훤이 이를 알고 한문(漢文)에게 명하여 김훤(金萱), 애식(哀式)과 함께 군사 3천을 이끌고 청주로 침공하여 왕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때 탕중군에서 성을 쌓고 있던 유금필이 급히 구원을 해와 백제군은 독기진(禿岐鎭)까지 패퇴하였다.
애식(哀式) 백제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파달(巴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길환(吉奐)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B)
금달(今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환궁(奐弓)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궁창(宮昌)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D)
명권(明權)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D)
상국진(尙國珍)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소달(小達)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수오(隨晤)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C)
영순(英順) 백제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C) 윤빈(尹卿) 백제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D)축성(C)
장언징(張彦澄)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
휘암(輝巖)/휘함(輝函)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
직심(直心)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형적(邢積)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
김긍율(金兢律) 백제(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A)명성(B)축성(C) 후삼국 말기 청주호족으로 본시 백제편이였다. 그러나 일리천 전투 직전 고려로 돌아선것으로 보이며 공으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고 원보(元甫)에 임명되었다. 김긍률은 고려초기 외척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두딸을 혜종,정종에게 시집보냈다. 2대 황제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3대 황제 정종의 제3비인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김씨가 그들이다.
전남 영암일대를 다스리던 호족으로 원래는 백제였으나, 왕건의 금성(나주) 점령이후 고려에 귀부하여 원보직을 제수받았다. 아들 최총진(최지몽)이 어린나이에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애복(哀福)/쇠복(衰福) 백제(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 견훤의 딸로 935년 견훤이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을때 견훤을 보양했다. 그해 6월에 고려로 가기 위해 기지를 발휘 파달들 30여명의 장사들에게 약을 탄 술을 먹임으로써 수로를 통해 안전하게 견훤을 고려로 모시는데 성공하였다. 박영규(朴英規)의 부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애복이 견훤과 고려로 망명한것이 935년이고 박영규는 936년에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음으로, 정황상 맞지 않는다.
오다련군(吳多憐君) 백제(나주호족) 육전(D)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 나주의 호족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항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궁예5년 서기 905년 궁예의 명을 받아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백제땅 나주를 침공하였을때 협조하여,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니, 이가 고려 제2왕후 장화 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오씨가 신분이 미천하다, 왕건이 침석(寢席)에 사정하였는데 오씨가 곧 이를 흡입하여 혜종을 낳았다, 돗자리에 사정한후 낳은 아들이라 얼굴에 돗자리 자국이 있었다는 식의 악평이 들어 있는데, 이는 패서세력의 힘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정종과 광종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어느 누가 태조의 침실 사생활을 보고 기록할수 있었겠으며, 2대 황위를 물려받은 혜종에 대해 감히 이런 말을 쓸수 있었겠는가?
왕봉규(王逢規) 백제(강주호족) 육전(B)수전(A)정치(B)모략(B)명성(B)축성(B)
본시 천주(泉州 의령)호족으로 신라말 세력확장에 나서 920년 강주호족 윤웅(閏雄)이 고려에 투항하자, 윤웅을 몰아내고 강주(康州 진주)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왕봉규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924년엔 후당에 조공하여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로 임명받았으며, 927년 3월에는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을 제수받았다. 후당과의 외교를 통해 근접한 백제와도 화친할수 있었고 고려에는 적대적이였다. 그러나 927년 4월에 고려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능식(能式)이 이끄는 수군(水軍)의 공격을 받고 왕봉규의 세력은 몰락하고 만다. 왕봉규의 세력이 일소된 이해 8월엔 태조가 친히 강주에 순행을 오기도 했다.
능애(能哀) 백제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삼국유사 이제가기에 관한 언급을 보면 아자개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셋째부터는 ~개(盖)로 끝나는 것으로 미루어 아자개의 첫째부인이자 견훤의 생모인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아들로 추측한다. 능애에 관한 기록은 더이상 발견되지 않아 자세한것은 알수없다.
국대부인(國大夫人) 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나총례(羅聰禮) 백제(나주/금성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
구족달(具足達) 백제(능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능성구씨(綾城具氏)로 서예에 능했다.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943년(고려 태조 26)에 송악에 현화사 7층 석탑을 건축했는데, 최언호(崔彦鎬)가 비문을 짓고 구족달(具足達)이 글씨를 썼으며 승려 4명이 각자(刻宇)하였다.
구존유(具存裕) 백제(능성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 능성(綾城 현 전남 능주)호족으로 고려 태조의 금성(나주) 공략시 협조한것으로 보인다. 삼한통일후 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아들로는 서예에 능해 송악 현화사 7층 석탑에 비문을 썻던 구족달(具足達)이 있다. 일설에는 능성구씨의 시조는 13세기 인물이라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능창(能昌) 백제(압해현호족) 육전(B)수전(SS)정치(C)모략(D)명성(B)축성(C)
흥종(興宗) 초팔성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B) 태조11년 928년 강주(康州)를 구원코자 원군으로 가던 김상,직량등의 고려군을 공격하여 김상(金相)을 전사시켰다.
공직 (龔直) 매곡성 육전(S)수전(C)정치(B)모략(A)명성(A)축성(B)
금서(金舒) 매곡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직달(直達) 매곡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영서(英舒) 매곡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긍준(兢俊) 운주성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전종회(田宗會) 백제(무령군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신라 ===================================================================================================
경문왕(景文王) 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헌강왕(憲康王)/김정(金晸)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49대 왕.?~886. 성명 김정(金晸).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78년 당나라에 조공하여 희종(僖宗)에 의해 신라왕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반란을 도모한 일길찬(一吉飡) 신홍(信弘)을 처형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정강왕(定康王)/김황(金晃)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진성여왕(眞聖女王)/김만(金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1대 왕.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효공왕(孝恭王)/김요(金嶢)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2대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寧花夫人)이며,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百官)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王建)은 903년 병선(兵船)을 이끌고 금성(錦城)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失政)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殷影)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죽은 뒤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신덕왕(神德王)/박경휘(朴景暉)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3대 왕.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 본명은 수종(秀宗). 아달라왕의 원손으로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고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懿成王后)이다.슬하에 승영(昇英), 위응(魏膺)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궁예의 부하인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泰封)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竹城: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경명왕(景明王)/박승영(朴昇英)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4대 왕.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懿成,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그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경애왕(景哀王)/박위응(朴魏膺)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5대 왕.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懿成·孝資王后)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義父)라 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라고도 한다.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敬順王)/김부(金傅)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S)축성(C)
김경렴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 태조의 제 5비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의 오빠이며 김억렴(金億廉)의 아들이다. 54대왕 신덕왕(神德王)부터 왕통이 박씨가 되는것을 꺼려하여, 몰래 백제의 견훤과 내통하여 김씨왕인 경순왕(敬順王)을 옹립하였다.
겸용(謙用) 신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김봉휴(金封休)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김악(金渥) 신라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김위홍(金魏弘) 신라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A)
김효종(金孝宗) 신라 육전(A)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출생일 사망일이 전혀 알려지지 않음, 신라말의 문인. 합천(陜川)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몇해 만에 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과 여왕의 남편인 위홍(魏弘)과 3, 4명의 총신(寵臣)이 권세를 휘둘러 정사를 마음대로 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라니(陀羅尼)의 은어인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干于三阿干 鳧伊娑婆詞)라는 구절을 노상에 걸어 두었다. 혹자가 왕에게 "이는 반드시 문인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한 짓일 것입니다. 아마도 합천의 은자인 왕거인인 것 같습니다"라고 아뢰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왕거인은 옥에 갇히자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한재가 들고/추연(鄒衍)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다/지금 나의 갇혀 있는 근심도 옛일과 다름이 없는데/하늘은 말이 없이 다만 창창할 뿐이로다"라는 시를 써서 하늘에 호소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시를 쓰자 곧 옥에 벼락이 떨어져 왕거인이 풀려나왔다고 했으며, '삼국사기'에는 그날 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바람과 천둥이 쳐 우박이 쏟아지므로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왕거인을 풀어주었다고 했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부이'는 부호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2 진성여왕조와 '삼국사기' 권11 진성왕조에 기록이 전한다.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 육전(B)수전(D)정치(B)모략(D)명성(A)축성(C)
김인윤(金仁允) 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의 왕족으로 통일후 삼한공신에 봉해졌다.
유의신(兪義臣) 신라(기계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D)명성(C)축성(D)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이순유(李純由)/이극신(李克臣)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로 신라 경순왕(敬順王 : 제 56대 왕 재위기간 924~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 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建)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이돈유(李敦由)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신라의 문신으로,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의 동생이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자 마의태자와 신라부흥을 위해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던중, 형 이순유가 고려 태조에 의해 경산호장이 되자 경산에 들어가 촌을 이루고 살았다.
최치원(崔致遠) 신라 육전(D)수전(D)정치(S)모략(A)명성(S)축성(C) 자는 고운(孤雲)<또는 해운(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기록의 전함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장차 바다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할 때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 하였다.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학문을 배우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경문왕 14: 874)에 예부시랑 배찬(裴瓚) 아래에서 한번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에 임명되었고 그 치적의 평가에 따라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 무렵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치원을 불러 종사관을 삼고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장·서·계((表狀書啓)가 지금[고려]까지 전한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지자 희종(僖宗)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憲康王 11: 885)에 조칙을 가지고 사신으로 보내었다. [신라 왕이] 붙들어 두려고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로 삼았다.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왕조]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太山郡)[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치원은 부성군(富城郡)[현재의 충남 서산시]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 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 황제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토벌하니 고구려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 지방의 전난 평정에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을 계속 짓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顯慶) 5년(태종 무열왕 7: 660)에 이르어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사와 범선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고 이어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는데 성향이 서로 달라 반란을 일으키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겼습니다. 총장(摠章) 원년(문무왕 원년: 668) 영공(英公) 서적(徐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右)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습니다. [발해는] 개원(開元) 20년(발해 무왕 14: 732)에 중국을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칠 때 저희 왕 김모를 태위(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으나 깊은 겨울 눈이 많이 쌓이고 양국 군대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00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평화로우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유학의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표(表)를 받들고 이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함에 무릇 극도로 간청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태풍을 만나 명주(明州) 해안에 다다랐을 때, 절동(浙東)의 어느 관리가 호송하여 서울에 들어갔고, 중화(中和) 2년(헌강왕 8년: 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은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 마침내 초주(楚州) 해안에서 배를 내려 빙돌아서 양주(楊州)에 이르러 황제가 촉(蜀) 지방에 행차하신 것을 알았는데, 고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보내 서천(西川)에까지 호송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증을 내려 주시고 지방 관서로 하여금 선박과 식사 및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말과 사료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장졸을 파견하여 어전에 이르도록 하여 주십시오.』이 편지 중의 태사 시중이라고 한 사람의 성명을 또한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당나라[大唐]를 섬기다가 동쪽의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면서 스스로 위로하였고,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예컨대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현재의 경남 마산시]의 별장 등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처음 서쪽으로 유학하였을 때 강동의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나은은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함께 합격한 고운(顧雲)과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려 하자 고운(顧雲)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근종(近宗) 신라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신라 경문왕 14년 874년 이찬벼슬에 있었는데, 신라 조정에 불만을 품고 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궁궐을 포위하고 왕을 위협했지만, 궁성을 수비하던 금군(禁軍)들에 의해 결국 토벌되어 거열(車裂)에 처해졌다. 이 반란은 신라 지도층에서 벌어진 최대의 반란사건이었다. 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왕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했다.
평준(平俊)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경주인으로 평준의 딸이 태조의 제7비인 헌목 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이다. 왕후 및 왕태후에 봉해진 부인이 총 6명이고, 나머지 비는 모두 부인이라 불리웠는데, 평씨만 유독 대부인이라 불리웠다. 평준이 신라의 항복를 추진한 막후인물이었다는 가능성이 높아 그 공적을 높이샀다는 설이 있다.
계강(繼康)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신라 효공왕(孝恭王) 2년 898년, 견훤 7년, 궁예 4년 1월 신라조정 개편에서 아찬(阿飡)에서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912년 효공왕 16년에는 이찬(伊飡)직에 있었는데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이원(李元) 신라(합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합주호족으로 합주(陜州)는 지금의 합천(陜川)이고 당시에 백제,신라,고려가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이던 곳이다. 태조 왕건이 대량성(대야성)을 공략한 이후로 이원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가 제7비인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다. 후대량원부인이라 불리운것은 태조의 제 5비인 신성왕후 김씨가 대량태수를 지낸 김억렴의 딸이기 때문이다.
손긍훈(孫兢訓) 신라(추화산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이금서(李金書) 신라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조부 이거명(李居明)은 신라 소판(蘇判), 부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이금서 역시 신라조정에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고려 귀부에 혁혁한 공을 세워 삼한공신에 책록되엇다. 그후 아들, 손자가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각각 병정(兵正),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냈다 한다.
김예겸(金禮謙) 신라(왕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내중령(內中令)에 임명되었다. 경주김씨가 신라왕족 일파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때 공을 세운듯 하다. 경순왕과 죽방부인(先妃 朴氏)의 셋째 아들로 알려진 김명종(金鳴鍾)의 아들인듯 싶지만, 경주김씨 족보엔 김명종의 6세손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시기상으로 고려사학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한 김의진(金義珍(?~1070)이 김예겸의 손자이고, 936~940년 사이에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된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명종의 아들이거나 동시대의 혈족인듯 싶다.
박욱(朴郁) 신라(왕족)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B)축성(C)
박란(朴瀾) 신라(왕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 밀양박씨로 박언의 아들이다. 아버지 박언과 함께 신라의 고려항복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에 책록되었고,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역임했다.
박언침(朴彦沈) 신라(왕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밀양박씨(密陽朴氏)/밀성박씨(密城朴氏)의 시조로 경명왕의 맏아들로 신라의 왕자였으나, 견훤에 의해 경명왕이 자결하자 폐태자되었다. 경애왕이 들어서자 경명왕의 9왕자는 각기 식읍을 받고 분적했다. 박언침은 밀성군을 식읍으로 받고 밀성대군에 봉해졌다.
박윤웅(朴允雄) 신라(계변성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B)
김봉휴(金封休)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신라의 시랑(侍朗)으로 국세가 완전히 기울자, 935년 10월에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로 항복을 청하게 된다. 이때 김봉휴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태조를 뵙고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전달하니, 태조 역시 회부하는 국서를 김봉휴편으로 보냈다. 그 다음달에 경순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으로가 항복을 청하니, 태조가 승락하여 신라는 천년 사직을 내리게 된다.
김율(金律)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신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을때 태조가 묻길 "들으니 신라에 세 가지 큰 보물이 있는데 황룡사의 장륙금상(丈六金像)과 9층탑과 성제대(聖帝帶)라고 한다. 세 가지 보물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 하니 , 탑과 불상(佛像)은 아직 남아 있거니와 성제대도 지금 아직 있느냐"하였다. 김율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성제대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하니, 태조가 웃으며 이르기를, "경(卿)이 귀신(貴臣)이 되어 어찌하여 나라의 큰 보물을 모른단 말인가"하였다. 김율이 부끄러이 여기고 돌아와서 신라왕에게 고하니, 경순왕이 뭇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황룡사(皇龍寺)에 나이 90세가 넘는 중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내가 듣기는 이것은 진평대왕(眞平大王)께서 띠고 계시던 것인데 역대(歷代)에서 이를 전하여 남고(南庫)에 간수해 두었다고 합니다"하였다. 경순왕이 드디어 남고(南庫)를 열자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인데도 컴컴해져서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날을 가려 재계(齋戒)하고 , 제사지낸 후에야 이를 볼 수 있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므로 성제대(聖帝帶)라 일컬었다. 그후로 태조 20년 5월에 전 신라왕 김부는 고려태조에게 이 허리띠를 바쳤다.
박언창(朴彦昌) 신라(왕족)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B) 상주박씨(尙州朴氏)의 시조로 경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명왕은 즉위초 아홉아들에게 각기 식읍을 주고 분적(分籍)시켰다. 박언창은 사벌주(沙伐州)를 식읍으로 받았는데, 사벌주는 태봉,백제 및 각 호족들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는데 박언창은 종종 신라로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신라는 그럴 능력이 있질 않았다. 918년 박언창은 경명왕 2년 918년 스스로 사벌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29년 경순왕 3년 9월 낙동강을 도하해 급습한 후백제군을 맞아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사벌면 화달리에 박언창의 무덤이 있다.
현춘(賢春) 신라해적 육전(B)수전(S)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말 정부의 세금 독촉으로 시작된 전국혼란중에 남해안을 기점으로 해적질을 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현춘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다. 894년 현춘은 배100척과 2천 5백명의 병력으로 대마도를 습격하였다. 그후 현춘은 백제세력으로 흡수된것으로 추측된다. 841년 장보고 사후, 신라와 일본조정의 관계가 냉각되어 신라인의 입국 금지와 무역관계가 폐쇄되고 당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행하여지자 교역에서 소외된 신라 일부 상인들의 해적활동을 기점으로 신라구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신라구의 일본 침탈은 경문왕의 14년 재위 동안에만 일본의 기록만으로도 14차례나 되었으며 해도침입과 인명살상, 공물탈취, 연안침범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신라구들의 침탈로 인하여 일본은 각지마다 신라구들을 막는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반신라적 감정이 팽배해져서 신라상인들을 탄압하고 870년 신라인 입국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심지어는 신라의 일본침공을 우려하기까지 하였다.
왕거인(王巨仁)/은자거인(隱者巨仁)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신라말 대야주(大耶州 합천)에 은거해 있었는데, 신라 하대의 모순으로 사회가 혼란하던 888년(진성여왕 2)에 누군가 왕실을 비난하는 글을 대로에 게시한 사건이 일어나자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이 괘서는 불경주어(佛經呪語)인 다라니어(陀羅尼語)로 쓰여졌는데 진성여왕이 곧 사람을 시켜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어떤 자가 나서서 그것은 뜻을 잃은 문인(文人)이 한 것이니 대야주의 은자(隱者)인 왕거인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진성여왕이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려고 하는데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의 벽에,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날이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도 서리가 내렸다. 지금 이 내 근심도 예나 다름이 없는데 황천(皇天)은 아무 말도 없이 창창할 뿐이로구나”라고 썼다. 그날 저녁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끼고 벼락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으므로, 진성여왕이 두려워하여 풀어주었다고도 하고, 하늘이 감옥에 벼락을 쳐서 풀려나게 되었다고도 한다. 더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6두품(六頭品)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당시 사회모순을 초래한 진골(眞骨)귀족들의 족벌정치(族閥政治)와 골품제도(骨品制度)를 비판하다가 탄압을 받아 축출된 인물이라고 설명된다.
김성(金成)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906년 1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919년 1월 각찬(角飡)으로 임명되었다.
언옹(彦邕)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919년 1월 신라조정의 정계개편에서 국정문란의 책임을 지고 시중(侍中)에서 사찬(沙飡 17관등중 8등급)으로 강등되었다.
김문울(金文蔚)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당나라 유학중 급제(及第)하여 906년 3월 책명사(冊命使)로 임명되어 신라로 왔다. 당초에 김문울은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였고 벼슬길에 올라 벼슬을 역임하여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기왕부 자의참군(沂王府諮議참軍)에 이르렀다.
예겸(乂謙)/예겸(銳謙) 신라 육전(D)수전(D)정치(A)모략(A)명성(B)축성(D) 875년 7월 신라의 대아찬(大阿飡)직에 있었는데 시중으로 발탁되었다. 880년에는 이찬(伊飡) 민공(敏恭)에게 시중자리를 내어주고 사퇴하였다. 그후로 이찬(伊飡) 벼슬을 임명받았으며, 899년에는 효공왕에게 딸이 시집갔다. 또한 53대 왕 신덕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민공(敏恭)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880년 이찬(伊飡) 벼슬에 있었는데 예겸이 시중에서 사퇴하자 민공이 시중에 올랐다. 그해 9월 왕이 좌우의 근신(近臣)과 더불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보니 서울의 민가(民家)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풍악(風樂)과 노래 소리는 연달아 일어났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들은즉 지금 민간(民間)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띠茅]로 덮지 않으며,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 하니 그것이 사실인가?" 하니,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로 음양(陰陽)이 고르고 풍우(風雨)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은 유족(裕足)하며 변경(邊境)은 평안하고 시정(市井)에는 화기(和氣)가 넘치니, 이는 모두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실로 경(卿) 등이 보좌(輔佐)한 힘을 의지한 것이니, 내가 무슨 공덕(功德)이 있겠는가?"하였다.
영기(令奇) 신라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의 내마(奈麻)직에 있었는데 진성여왕 3년 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군(州郡)에서 공물(貢物)과 부세(賦稅)를 바치지 아니하여 국고(國庫)가 탕갈되고 나라의 용도(用度)가 궁핍하여지자, 여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를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사방에서 도적이 벌떼 처럼 일어났다. 마침 사벌주에서 원종(元宗), 애노(哀奴)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雄據)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진성여왕의 명에 의해 내마(奈麻) 영기(令奇)가 토포사(討捕使)로 임명되어 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는데, 영기가 적(賊)의 보루(堡壘)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진격(進擊)하지 못하였다. 이때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반란군과 힘써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진성여왕이 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게 하고 우련의 아들로서 촌주를 승습(承襲)하게 하였으니 나이 겨우 10여 세(歲)였다.
신라말 889년 진성여왕의 세금독촉에 의해 발발된 전국혼란에서 대병부곡촌주(상주시 공성면) 였던 우련은 토벌군으로 온 영기와 함께 사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때 영기는 적의 세력이 두려워 진격하지 못하였지만 우련은 적진으로 사병을 이끌고 진격하여 끝내 전사하였다.
은영(殷影) 신라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신라말 대신(大臣)으로 효공왕 15년(911년) 1월 효공왕이 천첩(賤妾)에 미혹(迷惑)되어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니 은영(殷影)이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은영이 그 첩(妾)을 잡아죽였다. 조선 사관(史官)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된 자는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간(諫)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떠날 뿐이다. 임금이 비록 여색(女色)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더라도 어찌 그 총첩(寵妾)을 죽여 난(亂)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효공왕(孝恭王)이 총첩에 미혹되자 은영(殷影)이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그 첩을 죽였으니, 비록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그 자취는 임금을 협박한 것이다. 대개 이때에 신라의 국운(國運)이 쇠잔하여 권간(權奸)이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결했으니 효공왕은 다만 임금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다음 해에 효공왕이 훙서(薨逝)하고 그 후 22년 만에 멸망했으니 이후의 기록은 궁예와 견훤이 날뛰고 참람한 짓을 한 것뿐이었다."하였다.
적고적(赤袴賊) 신라도적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말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 896년 신라 왕도(경주)의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도적들로, 바지를 붉게 하여 스스로 구별하였는데, 이를 당시 사람들이 적고적이라 불렀다. 적고적은 경주관내의 모량리까지 약탈을 함으로써 왕권이 심히 추락하였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진성여왕은 스스로 왕위를 큰오빠(헌강왕)의 서자 김요(효공왕)에게 물려준다. 적고적의 우두머리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金鎰)/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왕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A)축성(C)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로 생몰년 미상.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935년(경순왕 9)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천년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이상 죽일 수 없다 하여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초식으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명칭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김덕지(金德摯)/김굉(金鍠)/김황(金湟) 신라(왕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로, 울산김씨(蔚山金氏)의 시조이며,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부이다. 휘(諱)는 굉(鍠) 호(號)는 덕지(德摯)이고 학성군(鶴城君)첫째 죽방왕비 박씨 사이에서 2王子로 鶴城(울산)을 식읍으로 하는 최초의 학성군(鶴城君)으로 封君 하여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으나 신라 말대 국운이 다하여 부왕 경순왕이 천년사직(千年社稷)을 고려에 양국하기로 결정하자 마의태자와 함께 그 불가함을 극력 간(諫) 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자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통곡(痛哭)으로 처자(妻子)를 버리고 고려(高麗)에 대한 항전(抗戰)으로 개골산(皆骨山)에 입산하고 후에 해인사(海印寺)에서 승(僧)이 되어 스스로 범공(梵空)이라는 승명(僧名)으로 일생(一生)을 마감했다. 입산 전 김운발(金雲發)이라는 아들이 있어 그 후손이 울산김씨와 나주김(羅州金)씨가 되었는데 일부는 울산김씨로, 일부는 나주김씨로 나뉘었다. 고려조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장자 김운발(金雲發)은 문하시중으로 나주군(羅州君)에 봉하고, 둘째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 그래서 김운발의 후손들은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운발(金雲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로 부는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이다. 경순왕이 고려로 항복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운발은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시중까지 역임하고 나주군에 봉해졌다.
김우발(金雨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아들 김굉의 둘째아들로 안로김씨(安老金氏) 시조인 김지경(金之敬)의 부다. 신라가 패망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우발은 형과 함께 고려 조정에 출사,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나, 아들 김지경이 나주의 속현인 안로에서 살았음을 생각하면, 형과 함께 나주에서 정착한듯 싶다.
김명종(金鳴鐘) 신라(왕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
김은열(金殷說)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김명종과 함께 경주김씨의 시조로서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 사람이다. 김은열에게는 김태화, 김숙승, 김염(→김품언, 김심언)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나오는 손자들이 또 분파를 해나갔기 때문에 많은 성씨가 나오게 된다. 첫째아들 김태화는 김은열의 경주김씨를 이어받으나, 둘째아들 김숙승은 안동김씨(구안동)의 시조가 되며, 셋째아들 김염은 김해김씨(후김)의 시조가 되었다. 김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아들 김품언은 수원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김심언은 영광김씨의 시조가 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에서 대구김씨, 사천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되며, 수원김씨에서는 용담김씨, 용성김씨, 인동김씨, 한남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된다.
김석(金錫)/김중석(金重錫)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5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석은 의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성에 정착하여 살았음으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건(金鍵)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6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건은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강릉김씨(後江陵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金繕)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7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선은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추(金錘)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8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추는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선조가 되었다.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다. 분파로 진주(晋州), 영월(寧越), 경산(慶山 ), 남원(南原), 길안(吉安), 옹진(甕津), 진위(振威), 춘양김씨(春陽金氏) 등 8개 분파(分派)가 있다.
유력호족
북원 =================================================================================================== 양길(梁吉) 북원 육전(A)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B)
청길(淸吉)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원회(元會)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훤(申煊)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원극유(元克猷) 북원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원주원씨(原州 元氏)의 시조다. 원주의 토착호족으로 신라말 양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궁예의 명을 받아 양길의 잔당 척결을 위해 출진한 왕건이 충주,청주,괴산에서 청길,신훤의 항복을 받아 대탑협이 이루어지자, 자연스럽게 원극유의 세력도 태봉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918년 태조의 역성혁명이후 많은 군현이 고려에게 등을 돌렸는데, 원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씨가문내에서도 원길견(지광국사 해린의 조부)의 경우는 크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원극유는 가문의 내분을 종결시키고 북원경을 태조에게 받침으로써 태조로부터 삼한공신에 책록되고 공신당(功臣堂)에 화상을 걸게 하였으며, 병부령에 임명되었다.
원극부(元克富) 북원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원주 토착호족이고 원주원씨의 시조 원극유와는 형제지간이다.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원극유와 더불어 북원의 내분을 종결시키고 북원을 태조에게 받치는데 일조를 하였다. 호장으로 임명되었다.
원길견 북원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D)축성(D) 원주의 토착호족으로 고려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크게 반발하고 고려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세력을 꾸리려 하였으나 동족 원극유와 원극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아들은 원휴(元休)이고 손자는 고려 문종때 국사 지광국사 해린이다. ===================================================================================================
명주 신라(명주자치)→태봉→자치→고려 =================================================================================================== 왕순식(王順式)/김순식(金王順) 명주 육전(A)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B)
왕관경(王官景)/관경(官景) 명주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
수원(守元) 명주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김극렴(金克廉) 명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김예(金乂)/왕예(王乂) 고려(명주호족)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최필달(崔必達) 고려(명주)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D)
최흔봉(崔欣奉) 고려(명주) 육전(C)수전(C)정치(B)모략(D)명성(C)축성(D) ===================================================================================================
평주 평주자치→태봉→고려 =================================================================================================== 박직윤(朴直胤) 평주 육전(A)수전(A)정치(S)모략(A)명성(A)축성(S)
박지윤(朴遲胤/朴智胤)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A)명성(A)축성(A)
박수문(朴守文)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A)
박수경(朴守卿) 고려 육전(A)수전(B)정치(C)모략(C)명성(A)축성(B)
박승위(朴承位)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박승경(朴承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박승례(朴承禮)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
상주 상주자치→고려 =================================================================================================== 아자개(阿玆蓋) 상주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C)
상원부인(上院夫人) 상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남원부인(南院夫人) 상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용개(龍盖) 상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보개(寶盖) 상주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소개(小盖) 상주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대주도금(大主刀金) 상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
황주 황주자치→태봉→고려 =================================================================================================== 황보제공(皇甫悌恭) 고려(황주)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B)
황보금산(皇甫金山) 고려(황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C)
황보광겸(皇甫光謙) 고려(황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A)모략(B)명성(B)축성(D)
황보위광(皇甫魏光) 고려(황주호족)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
진주 태봉(농성/진주)→고려 =================================================================================================== 임팔급(林八及)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임양저(林良貯) 신라(평택 농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임언(林彦) 고려(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임희(林曦) 고려(진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
임명필(林明弼) 고려(진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B) 진주(鎭州) 호족세력이자 한찬으로 농성성주 임팔급의 네번째 아들이다. 고려건국에 공을 세워 태조원년 918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딸은 숙부인 임씨(潚夫人 林氏)로 왕건의 비가 되어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신명왕후의 소생으로는 원녕태자(元寧太子)가 있다.
임적여(林積璵)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임팔급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사무에 통달하고 공직(公職)에 종사함에 태만함이 없으며, 처결하는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하였다 하여 알찬직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받았다.
임상난(林湘煖)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B)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평택호족 임팔급의 여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도항사향(都航司鄕)을 제수받았다.
임식(林寔)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평택호족 임팔급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郎中)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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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 염주자치→패망/태봉/골암성→고려 =================================================================================================== 유긍순(柳矜順) 염주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
윤선(尹瑄) 고려(염주→태봉→골암성→고려) 육전(S)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A)
태평(泰評) 고려(염주) 육전(B)수전(B)정치(A)모략(S)명성(B)축성(A) ===================================================================================================
청주(고려) =================================================================================================== 견금(堅金)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
연익(連翌)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흥연(興鉉)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
936년 태조19년 일리천전투에서 지천군 대장군 원윤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좌익을 담당했다.
명길(明吉) 고려(청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이능희(李能希)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이희능(李希能)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이겸의(李謙宜)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
한란(韓蘭)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D)축성(D)
문식(文植)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명길(明吉)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김근겸(金勤謙)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관준(寬駿)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김언규(金言規) 고려(재경청주)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
김행파(金行波) 고려(서경호족)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A)
염형명(廉邢明)/염나명(廉那明) 고려(봉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파주의 옛이름인 봉성염씨(峯城廉氏), 서원염씨(瑞原廉氏)라 부르기도 한다.
유긍달(劉兢達) 고려(충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윤신달(尹辛達)/(尹莘達) 고려(파평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C)
이배환(李盃換) 고려(단산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시조로 단산(丹山 단양)호족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능필(李能弼)/이능(李能)/이능일(李能一) 고려(경산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시조로 선조(先朝)는 누대(累代)에 걸쳐 경산(京山 성주) 본피현(本彼縣) 지방(地方)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해 온 사족(士族)이었다. 초명은 이능필(李能弼)/이능(李能)으로 924년 태조에게 최언(崔彦)과 함께 사병 6백명을 이끌고 귀부하였다. 그후 일리천 전투에는 원윤(元尹)으로 공훤(公萱), 능필(能弼), 왕함윤(王含允)과 함께 1만5천의 원병을 이끌고 참전해서 공을 세워 태조(太祖)로부터 삼한통일(三韓統一)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이능일(李能一)로 사명(賜名)받았으며,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에 녹훈되어 대광사공(大匡司功)에 봉해졌다. 태조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淨順宮州)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성산백에 봉해 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견웅(李堅雄) 고려(경산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강기주(康起珠) 고려(신천호족)육전(D)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이희목(李希穆) 고려(장제군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김선궁(金宣弓)/김선(金宣) 고려(숭선호족)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김봉술(金奉術) 고려(숭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김봉문(金奉文) 고려(숭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이치(李齒)/이도(李棹) 고려(공주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
허선문(許宣文) 고려(공암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허현(許玄) 고려(공암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왕유(王柔) 고려(춘주호족)
왕규(王規) 고려(광주廣州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D)
함규(咸規) 고려(광주廣州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D)
박기오(朴奇悟) 고려(연창군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이희목(李希穆) 고려(수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유차달(柳車達)/차달(車達) 고려(유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유천궁(柳天弓) 고려(정주호족) 육전(C)수전(A)정치(B)모략(B)명성(B)축성(B) 정주(貞州, 승천, 풍덕)의 대호족으로 정주항을 무대로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읍인(邑人)이 유천궁을 장자(長者)라 칭하였다. 궁예의 명을 받아 897년 왕건은 공암(강서구 가양동), 검포(김포), 혈구(강화)등의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출전했는데, 왕건이 정주에 도착했을때 유천궁이 군사들을 아주 풍족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딸에게 왕건과 시침케했다. 왕건이 떠난후 딸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다. 후에 왕건이 이소식을 듣고 부인으로 삼으니 바로 신혜왕후다. 유천궁은 군사뿐 아니라 해상무역을 통해 얻은 선박기술과 수로정보,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주변호족(공암호족 허선문등)들까지 포섭해주며 왕건을 돕는다. 그후 정주항은 왕건이 수군대장군이 되어 금성(나주)를 정벌하기 위해, 선박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던 수군 전초기지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한후에는 삼중대광에 올랐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정주유씨가문은 태조의 제1,제6 왕후를 배출함으로써 고려초 최고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유덕영 고려(정주호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 태조의 제6왕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의 아버지로,신혜왕후 유씨를 낳은 삼중대광 유천궁의 일족으로 정주 유씨 세력들은 서해 해상세력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중앙에 진출한 후에는 문벌귀족화했다. 숙종의 비인 명의 태후도 이들 가문 출신이었다. 아울러 문종대의 내사령 유윤부, 평장사 유소도 이들 가문의 출신으로 이른바 정주 유씨 문벌가문을 형성했다.
박연윤(朴遲胤) 고려(우죽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
강여청(姜餘淸) 고려(금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강궁진(姜弓珍) 고려(금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원봉(元奉) 고려(하지현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호족.
이달(伊達) 고려(명지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명지성장군 성달의 동생으로 923년 3월에 성달,서림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다.
서림(瑞林) 고려(명지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명지성장군 성달의 동생으로 923년 3월에 성달, 이달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총언(李悤言) 고려(벽진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C)
이영(李永) 고려(벽진군 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양문(良文) 고려(벽진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경산부(京山府:지금의 경상북도 星州) 지역의 지방호족.《삼국사기》에는 923년(경명왕 7) 7월에 “명지성(命旨城)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 장군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같은해에 해당하는 《고려사》 태조 6년 8월조에는 “벽진군(碧珍郡) 장군 양문이 그 생질 규환(圭奐)을 보내와서 항복하니 규환을 원윤(元尹)으로 제배하였다.”고 하였다. 경산부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신안(新安)이라 하고 경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뒤에 벽진군이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다시 경산부로 고쳤다.”고 하였다.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벽진군이라 하고, 《고려사》에서는 경산부로 해야 할 것을 바꿔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달을 《삼국사기》에서는 7월이라 하고, 《고려사》에서는 8월이라 하여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양문이 생질 규환을 7월에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항복할 뜻을 전하고 8월에 항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규환(圭奐) 고려(벽진군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C)
홍술(洪術) 고려(진보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B) 태조는 후에 홍술의 순사(殉死)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이곳을 「의(義)로운 성(城)」곧 의성이라 명명(命名)하였다고 전해진다.
말로(末老)/고말로(高末老) 탐라국 육전(C)수전(A)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선필(善弼) 고려(재암성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능현(能玄) 고려(매조성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배근(盃近) 신라(고울부)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대감(大監) 신라(고울부)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윤웅(閏雄) 신라(강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윤일강(閏一康) 신라(강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C)
장길(張吉)/장정필(張貞弼) 신라(고창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김선평(金宣平) 신라(고창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안동김씨의 시조이며 고창군(안동)의 3호족중 한세력을 이끌었다. 고창군 전투에서 고려의 원군이 올때까지 결사항전해 고려의 승리에 기여했다. 공으로 3태사라 칭해졌으며, 통일후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다. 뒤에 벼슬이 아부(亞父)에 이르렀다.
권행(權幸)/김행(金幸) 신라(고창군호족)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안동권씨의 시조이며 고창군(안동)의 3호족중 한세력을 이끌었다. 김선평,장길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설도 있다. 본시 성(姓)은 신라 종성(宗姓) 김씨(金氏)이다. 929년 백제군이 고창군을 포위했을때 고창군 병산에 영채를 치고 주둔하면서 백제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승전후 태조가 이르길 "공은 능히 기미(畿微)에 밝아 귀순하고 권도(權道)와 의행(宜行)을 알아 통달했으니 가히 권형(權衡)이 있다 하겠노라." 이에 권(權)으로 성(姓)을 내리고 대상(大相)을 배(拜)하였다. 통일후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태사(三韓 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에 임명되었다.
소율희(蘇律熙)/김율희(金律熙)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B)
소충자(蘇忠子)/소충지(蘇忠至)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김인광(金仁匡)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S)
기훤(箕萱) 죽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백길(白吉) 우릉도 육전(D)수전(B)정치(D)모략(C)명성(D)축성(D) 우릉도(芋陵島 울룽도) 사람으로 태조 13년 8월에 우릉도주 토두의 사신으로 고려에 공물을 바쳤다. 태조가 백길을 정위(正位)로 임명했다. 정위(正位)는 지방직 7품하 벼슬이다.
토두(土豆) 우릉도주 육전(D)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우릉도(芋陵島 울룽도)주로 토두가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태조 13년 8월에 고려에 백길(白吉)이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이공으로 정조(正朝)로 임명되었다. 정조(正朝)는 지방직 7품상 벼슬이다.
애노(哀奴) 상주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889년 진성여왕 3년에 나라의 국고가 비게되자 진성여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상주에서는 애노(哀奴)가 원종(元宗)과 더불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애노의 세력은 얼마안가 아자개등의 신진 호족들에게 흡수된것으로 보인다.
원종(元宗) 상주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889년 진성여왕 3년에 나라의 국고가 비게되자 진성여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상주에서는 원종(元宗)이 애노(哀奴)와 더불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원종의 세력은 얼마안가 아자개등의 신진 호족들에게 흡수된것으로 보인다.
훤달은 북미질부(영일) 성주(北彌秩夫城主)였는데, 태조 13년 서기 930년 1월에 고창전투에서 백제군이 전사자만 8천이 넘는 대패를 하자,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안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1백 십여 성(城)이 한꺼번에 고려에 항복을 하였는데, 이때 훤달은 남미질부(南彌秩夫) 성주와 함께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에 태조는 두 미질부(彌秩夫)를 합쳐서 흥해군(興海郡)을 삼았다.
사고(娑姑) 거란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D)축성(D) 백제는 오월국 및 거란, 왜와 일찍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고려는 후당 및 신라와 친선관계로 거란과는 매우 사이가 좋질 않았다.927년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麻饉)등 35인이 백제에 사신으로 왔는데, 견훤은 크게 기뻐하며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그들을 환영했다. 용무를 마치고 거란에 돌아가기 위해 배길에 나선 이들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 이르렀는데 모두 잡혀 죽었다. 백제는 925년엔 오월국, 927년엔 거란, 929년엔 왜와 외교협상을 벌렸다.
마돌(麻饉) 거란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D)축성(D) 백제는 오월국 및 거란, 왜와 일찍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고려는 후당 및 신라와 친선관계로 거란과는 매우 사이가 좋질 않았다.927년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麻饉)등 35인이 백제에 사신으로 왔는데, 견훤은 크게 기뻐하며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그들을 환영했다. 용무를 마치고 거란에 돌아가기 위해 배길에 나선 이들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 이르렀는데 모두 잡혀 죽었다. 백제는 925년엔 오월국, 927년엔 거란, 929년엔 왜와 외교협상을 벌렸다.
===================================================================================================================== 승려
도선(道詵) 승려(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S)축성(SS) 통일 신라 말기의 중. 풍수지리설의 대가(827~898). 속성은 김(金). 혜철 대사에게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달았으며, 참선 삼매의 불도를 닦았다.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 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도선비기》가 있다.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 성은 김씨(金氏).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비58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고 하였다.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 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 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석총(釋聰) 승려(태봉)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법경(法鏡大師)/이현휘(李玄暉)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법경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승으로 비문에 의하면 이름 현휘(玄暉), 속성은 이씨(李氏)이다. 879년(신라 헌강왕 5) 출생, 영각산사(靈覺山寺)의 심광(深光)에게 사사하였다. 906년(효공왕 10) 당나라에 유학하고 924년 귀국하여 국사(國師)로 존경받았다. 정토사 주지가 되기를 청하여 대중교화에 힘쓰다가 941년(태조 24)에 좌멸(坐滅)하였다.
835~930 통일신라시대 말 사굴산문의 선승(禪僧). 속성 김(金). 경주(慶州) 출생. 유차(有車)의 아들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화엄사(華嚴寺)의 정행(正行)에게 배우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고 선(禪)을 익혔다. 후에 사굴산문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았다. 889년 범일이 죽자 제자인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청함을 받고,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전(殿)과 탑(塔)을 세우고 도로를 개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경애왕은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사신을 보내 국사(國師)의 예를 표하였다. 나이 96세, 법랍 72세로 보현사에서 죽었다. 고려 태조가 낭원대사(朗圓大師)라 시호하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세운 비가 강원 강릉의 개청사(開淸寺)터에 있다.
충담(忠湛)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경보(慶甫)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편운화상(片雲和尙)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수철(秀澈)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17∼893. 속성이 김(金)씨인데 진골 출신으로 그 증조부가 소판(蘇判; 신라 제3위 관등)이었다 한다. 편운화상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어려서 고아가 되어 출가했고 흥덕왕 10년(835)경에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洪陟)선사에게 입문하여 그 법통을 이은 인물이다.경문왕 7년(867)에 경문왕의 초청으로 왕도로 가서 교(敎)와 선(禪)의 차이를 묻는 경문왕에게 명쾌한 대답을 하여 경문왕으로 하여금 선종을 이해하게 하고 왕사가 되었다 한다. 이어서 헌강왕도 왕사로 대접하여 지리산 심원사(深源寺; 실상사 부근에 있었을 듯)에 머물게 했는데 견훤이 진성여왕 6년(892)에 이 일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다. 893년 심원사에서 77세로 열반에 들었는데 후백제는 수철(秀澈)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이라는 탑을 건립했는데, 최승우의 입김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허월(許越) 승려(명주)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그러나 후삼국의 격변기 속에 승려가 되어 고려의 수도 개경의 내원(內院)에 거처하였다.
현준(賢俊) 승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최치원의 친형으로 강릉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법을 잇고 다시 당나라에 가서 청원(靑原) 행사(行思, ?∼740년)의 법현손(法玄孫)인 석상(石霜) 경저(慶諸, 807∼888년)화상의 인가를 받고 돌아와서 해인사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최치원은 말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해인사를 종종 찾아와 형 현준과 정현(定玄)과 더불어 시를 주고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냈다.
낭공(朗空)/행적(行寂)/최경만(崔京萬) 승려(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세속이름은 최경만이고 하남(河南 하동)사람이다. 사미 시절엔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배웠고, 해인사 승려였던 최치원의 친형 현준대사와의 인연으로 최치원을 만나게 되고, 최치원은 낭공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870년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으며 885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해서는 다시 범일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시봉하다가 889년 범일대사가 열반에 들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삭주(朔州) 건자암(建子庵)에 머문다. 그러나 894년 궁예가 강릉을 점령하자 난을 피해 경주로 내려갔다. 이후 강릉 일대가 안정되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900년경에 다시 강릉으로 갔다가 효공왕 10년(906) 9월 초에 효공왕의 초빙으로 다시 경주로 올라와 국사의 예우를 받는다. 김해의 소율희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907년에 김해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각처에서 찾아온 선지식들과 함께 지부 소율희의 각별한 외호를 받으며 8년을 보내고 신덕왕 4년(915) 봄에 왕의 초빙을 받아 다시 신라 왕경으로 올라와서 왕사가 되어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른다. 이때 여제자인 명요(明瑤)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 경북 영일군 장기면 방산리에 터만 남아 있음)를 기증하여 이곳을 열반처로 삼고 머물다가 신덕왕 5년(916) 2월12일에 이곳에서 85세로 열반한다. 그 다음해(917) 11월 중에 석실에 이장하고 신종(信宗)선사 등 제자 500여 명이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워주기를 조정에 청하니,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한다.
진경(眞鏡)/심희(審希) 승려(김해)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55∼923. 김해 김씨로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의 먼 후손이었다 한다. 그는 경문왕 3년(863)에 9세로 경기도 여주 혜목산(慧目山)의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787∼868년)에게 출가하였다. 원감선사는 일찍이 헌덕왕 16년(824)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강서(江西) 도일(道一, 709∼788년)의 제자인 장경(章敬) 회휘(懷暉, 754∼829년)의 인가를 받고 희강왕 2년(837) 9월12일에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남악(南岳;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러 살면서 민애왕과 신무왕·문성왕·헌강왕의 귀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수철화상보다 30년 선배이나 실상사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함께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수철화상이 19세로 835년경에 실상사의 홍척선사에게 입문하기 때문이다. 원감선사는 실상사에서 10년을 머문 다음 문성왕 8년(846)에 여주 혜목산으로 옮겨 초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861년경에 고달사(高達寺)를 짓고 혜목산문(慧目山門)을 개설한다.이 직후에 진경대사 심희가 9세 동자로 출가해 왔던 것이다. 심희는 14세 때 82세로 돌아가는 원감선사로부터 임종시에 인가를 얻고 산문의 책임을 부탁받는다. 그래서 원감선사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자부심으로 당나라 유학을 거부하고 전남 강진 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주석하는 등 수행을 계속하여 30대에 벌써 명성을 크게 떨친다. 그리고 진성여왕(재위 887∼896년)이 초빙해도 응하지 않는 기개를 보이다가 김해부(金海府) 진례성(進禮城, 경남 창원) 제군사(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선종을 보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의 외호를 받아 이곳 봉림사에 머물면서 봉림(鳳林)산문을 개설한다. 이때 김해부 진례성 제군사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도 정성으로 외호했다 하는데 이들은 모두 가야 왕손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호족이었을 것이다.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는 다시 경명왕 2년(918) 12월4일에 경명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 왕도로 올라가 왕사가 된 다음 법응대사(法膺大師) 존호를 받고 돌아오는데, 이해 6월14일에 고려 태조 왕건이 등극하였다. 신라 조정은 아마 고려 태조와 관계가 깊은 혜목산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두기 위해 이런 포석을 깔았을 것이다.심희는 곧 창원 봉림사로 돌아와 경명왕 7년(923) 4월24일에 70세로 봉림사 봉림선당에서 열반한다.
여엄(麗嚴)/대경(大鏡)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62∼930.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해동사무외대사는 운거 문하 1500명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4명의 우리나라 출신 선사를 말하며 선각대사 형미, 진철대사 이엄, 법경대사 경유, 대경대사 여엄을 지칭한다. 태봉국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고 나주를 정복하자, 여엄은 나주로 귀국하여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고려가 개창되자 왕건은 자주 대경국사에게 국정을 자문하기도 하였다. 923년엔 여엄은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사나사(舍那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경유(慶猷)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71∼921.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조동종의 선풍을 전한 신라 말 선승. 속성(俗姓)은 장(張). 탑호(塔號)는 보조 혜광(普照慧光). 남양 출생. 15세에 승려가 되어 근도사의 영종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88년 당나라에 건너가 도응화상(道膺和尙)에게 법요를 배우고, 형미, 여엄, 이엄 등과 함께 해동사무외라는 호칭을 받고, 908년 귀국하였다. 이후 구산선문(九山禪門)중의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를 이끌었다. 왕건이 나주를 정벌할 때 왕건의 요청으로 만나 연결되었고 태조 즉위 후 왕사(王師)가 되었다가 나이 50세, 법랍 36세로 일월사에서 입적하였다.
이엄대사(利嚴大師)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70∼936.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선종구산(禪宗九山)가운데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이엄은 법명(法明). 소태(蘇泰: 지금의 서산군 태안)출신. 그의 조상은 계림(鷄林)사람으로 낙향하여 충청남도 서산지방인 부성(富城)에 정착하였다.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여 덕량(德良)을 스승으로 득도하고, 삼장(三藏)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886년(정강왕 1) 도견율사(道堅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입절사(入浙使) 최예희(崔藝熙)를 만나 서해항로로 중국에 갔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의 제자 도응(道膺)의 선문(禪門)에서 수도한 지 6년 만에 도응의 인가를 받았다.그뒤 중국의 여러 곳을 널리 찾아다니면서 고승들을 만나보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였다.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 소율희(蘇律熙) 가 승광산(勝光山)에 당우를 짓고 청하였으므로 4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다가, 영동군 남쪽 영각산(靈覺山)으로 옮겼다. 그때 소문을 들은 승속(僧俗)들이 찾아와서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명성을 크게 떨치자 고려 태조는 시중(侍中)을 지낸 권설(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개경으로 초청하여 사나내원(舍那內院)에 맞아들이고 궁중으로 청하여 사자(師資)의 예로 대우하였다.932년(태조 15) 태조는 해주(海州)의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짓고 머무르게 하였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936년에 자신의 세상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제자들을 불러 부처의 엄계(嚴誡)를 지키며 정진할 것을 당부한 뒤 법당에서 입적하였다.
형미(泂微)/선각(先覺) 승려(태봉)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64~917.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광주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가지산문의 사실상 개창조인 3대 조사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년)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 ?∼902년)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형미는 운거 문하 1500명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4명의 우리나라 출신 선사, 즉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중 첫번째 인물이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궁예가 왕건을 죽이려 하자 왕건을 두둔하였는데 그것이 궁예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무위사에 946년에 부도비(보물 507호 선각대사 편광탑비)가 세워졌다.
탄문(坦文)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900~975. 신라 말기 고려 초기 승려. 자(字)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高)씨. 광주(廣州)고봉(高熢)사람. 화엄학에 밝았다. 5세에 출가할 뜻을 두었으며, 원효(元曉)가 살던 향성산(鄕聖山)의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간 수도한 후, 북한산 장의사(莊義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914년(신덕왕 3년)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어린 그의 명성이 사방에 떨쳐 성사미(聖沙彌)라 별호했으며, 나중에 고려 태조는 그를 별화상(別和尙)이라하여 특별한 존경을 표하였고, 왕후가 태자를 잉태하자 태조가 그의 법력을 빌어 광종을 낳으매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구룡사(구룡사)에서 화엄을 강의할 때에는 새가 날아들어 그 방을 둘러싸고, 산토끼들이 뜰에 엎드리는 일이 있었다 하여 별대덕(別大德)으로 불리웠다. 942년 염주(鹽州)와 백주(白州)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롭게 하므로 스님이 대반야경을 강의하니 벌레가 없어져 풍년이 들었다 한다. 혜종과 광종이 지극히 공경하고, 광종은 19년(968년) 귀법사(歸法寺) 주지를 맏겼으며, 같은 해에 홍도삼중대사(弘道三重大師)의 호를 내리고 왕사(王師)로 삼았다. 광종 25년(974) 국사(國師)가 되었는데, 노환으로 서산 보원사(普願寺)로 되돌아 갔다가 다음해 3월 19일 76세로 가부좌의 자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법인(法印)이며, 탑호는 보승(寶乘).
찬유(璨幽)/원종(元宗)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69~958. 법명이 찬유(璨幽)로서 881년에 출가하여 봉림사 진경대사의 제자인 융체(融諦)에게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융체가 "해목산의 심희에게 가서 섬기라"고 하여 심희에게서 공부하다가 890년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892년 당나라로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 希遷)의 법손이 되는 대동(大同)에게서 법을 얻고 921년 귀국하여 봉림사의 심희를 찾아 인사한후 고려 태조의 청으로 천왕사 주지로 있었다. 뒤에 해목산 고달사로 옮겨 대선림을 이루었다. 계보로 보아 원종대사는 선문의 9산문 중 봉림산문의 3대조인 셈이다. 958년 광종9년에 입적하자 광종이 원종대사로 시호하고 탑호를 혜진이라고 하였다. 원종대사 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 보물 제6호)
긍양(兢讓)/정진(靜眞)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중(878~956). 시호는 정진 국사(靜眞國師). 존호는 증공 대사(證空大師). 통일 신라 효공왕 때에 당나라에 가서 도연(道緣)에게 법을 배우고, 24년 만에 귀국하였다. 귀국후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曦陽)산문을 실질적으로 개창하였으며, 고려 광종은 그에게 정도(正道)를 자문하기도 하였다. |
출처: happy Day 生きて行く理由 원문보기 글쓴이: 지루하루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