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라스틱 45년 회상(7) 3人 3色의 흥망성쇠(하)
표 민 웅
‘나의 사랑이 그대에게 건낼 수 있는 것은 꽃다발과 눈물과 기억뿐이다.’
-페트라르카도(이태리)-
1979년 3월 3일 드디어 양규모 회장은 한국프라스틱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다. 양 회장은 오래 전부터 PVC를 직접 생산하고자 하는 간절한 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한국프라스틱 설립 작업 중에도 당시 PVC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대한프라스틱에 근무하던 황선성 연구실장(후에 한국포리올 전무이사)과 강성안 기획과장(진양의 한림공업 사장)을 스카웃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는 PVC공장 승인을 불허했다. 전화위복이라할까. 사실 이러한 상공부 조치는 진양으로 하여금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현재의 PU 사업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양은 미래 산업인 폴리우레탄의 주원료인 Polyether Polyol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일본 Sanyo화학의 기술과 일본 종합상사 Tomen과의 합작으로 1만 톤의 Polyether Polyol공장을 1975년 12월 준공하여 국내 폴리우레탄 산업 발전에 전기를 이루게 된다.
꿩 대신 닭이다. 그러나 지금은 봉황(?)이 된 PU사업이 진양을 다시 살리는 효자 사업이 되었다. 어찌했던 양회장은 한국프라스틱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으니 그의 꿈은 이루어 진 듯 하였다. 호사(好事)에는 다마(多魔)인가. 진양에게는 위기기 닥치기 시작했다.
주력산업인 신발 공장의 어려움이 찾아왔다. 사양화되어 가는 신발공장에 계속 투자를 하고 일부 참모진의 안일하고 무모한 경영으로, 또한 해외 건설 산업에 뒤늦게 뛰어 든 바람에 자금 압박이 몰아치게 되었다. 한국프라스틱을 완전히 인수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겠지만 한국화약이라는 대 주주가 존재하는 한 마음대로 그룹회사 간 자금 전용이나 지급보증을 할 수 없는 구조이다. 완전 인수했다면 진양은 부도를 피할 수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산업은행 출신으로 한국 프라스틱 설립의 실무 책임자를 지냈고 합병후 인사관리를 한 필자의 두 번에 걸친 결정적 조언을 외면한 진양은 극도의 자금난으로 1980년 9월 소유주식을 한국화약에 전량 매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1982년 9월 모기업 진양은 부도를 맞게 되고 오랫동안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해 12월 20일 한국화약은 한국프라스틱을 그룹회사로 편입한다. 선친 김종희 회장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더군다나 한국프라스틱을 인수함으로서 PVC원료인 VCM과 PE resin을 생산하는 한양화학도 인수할 수 있었다. 사명(社名)을 (주)한화로 바꾸고 국내 대 회사로 발전하였다. 한국프라스틱의 힘이다.
<참고로 한국화약의 이리역 폭발사고 90억여 원 배상액은 일부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금액은 한국산업은행이 지급 보증하여 분활 상환함으로서 한국화약은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프라스틱을 인수할 수 있었다. 순간의 선택이 대세를 바꾸었다.>
독과점 품목으로 당시 상당한 매출과 현금 흐름은 이 회사로 하여금 IMF 위기를 극복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M&A로 대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뿐 만아니라 1981년 타계한 김종희 회장의 2세 김승연 신임 회장은 유능한 참모진을 믿고 과감히 앞으로 나가는 경영으로 큰 사업을 성취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진양이 잘만했으면 대 기업의 위치에 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PU Major로 등장하지 않았겠는가?(당시 진양은 PO/SM공법의 공장 승인을 상공부로부터 받은 상태였다.) 매우 안타깝다.
한화는 그 후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 한국프라스틱 설립 전부터 라이벌인 한국화약의 김종희와 대한생명의 최성모는 서로 자웅을 겨루듯 보이지 않은 기 싸움을 하였다. 1976년 7월 초 최 회장이 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일부 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알아 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소유 주식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간곡히 말하였다고 한다.
그도 PVC의 한국프라스틱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고, 이 회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알짜배기 한국프라스틱의 경영을 확보함으로써 후계자 최순영이 대한생명 그룹을 안전하게 이끌 수 있게 하는 아버지 최성모의 선견지명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를 인수하기 전 그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안타까운 사건이 23년 후인 1999년에 일어난다. 정치적인 탄압을 받은 최순영 회장의 대한생명그룹은 해체 되고 그룹의 주력 기업인 대한생명과 63빌딩을 한화가 인수하게 된다.
최 회장이 한국프라스틱의 경영권을 확보 했으면 대한 생명 그룹의 운명도 달라 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친이 이룩해 낸 기업을 2세 경영자에 와서 라이벌에게 흡수되는 수모를 겪은 최회장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보통 사람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생전의 최성모 회장은 사회봉사를 많이 한 통 큰 분으로 알려졌다. 고아원을 돕고 사회 그늘진 곳에 따듯한 손길로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영혼 구원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유족이 밝혔다. 그 유지를 받들어 양재동에 횃불 선교회와 이촌동에 온누리 교회를 세었다. 그의 동서인 고 하용조 목사의 인도로 아마 최 회장은 그 아픔을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백수가 된 그는 체납된 37억 원을 장기간 갚지 못하자 서울시는 한국외환은행 63빌딩 지점의 최순영 대여금고를 압류하였으나 그 금고 속은 텅 비어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더군다나 지난 6월 29일 주주총회에서 66년 전통의 “대한생명”의 사명이 ‘한화생명’으로 바꿈에 따라 ‘대한생명’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선친에 대한 죄책감은 그지없을 것이다.
한국프라스틱과 맺은 세 분 주요 인물의 영고 쇠락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누가 최후의 승자일까? 누가 행복할까?
정도(正道)와 불법을 마다 않고 유능한 참모를 잘 활용하여 재계에 우뚝 선 인물일까, 참모진의 판단착오로 다 이길 수 있었던 게임을 놓친 인물일까, 선친의 유언을 잘 받들어 영혼 구원의 터를 마련했지만 이어 받은 기업을 모두 잃은 인물일까?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 속으로 인도할 것인가. (한국프라스틱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