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김해김씨(金海金氏) 【인구】4,124,934명 (2000년 현재) 【주요파】▲경파(김녕군파)…참판공파. 횡성공파. 안경공파. 석성공파. 호참공파. 참찬공파. 봉상공파. 밀직사공파. 문간공파. 밀직공파. 평장사공파 ▲사군파(감무공파)…생원공련파. 도총관공파. 생원공록파. 찬성공파. 상서공파. 공간공파 ▲삼현파(판도판서공파)…군수공파. 집의공파. 한림공파. 진사공파. 녹사공파. 진의공파. 판서공파. 부호군공파. 판서공유공파.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다. 4백만명을 넘는 유일한 성으로 서울 인구의 절반 가량에 이른다. 웬만한 시. 도의 인구보다 많다. 시조는 가락국의 시조왕 김수로다. 가락국은 고대 낙동강 하류에서 일어난 나라다. 가야 혹은 6가야라고도 하며 오늘날 김해 일대에 해당된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후 500여년 동안 계속되다가 후에 신라에 합병된다. 김해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가락국의 터전이 김해였기 때문이다. 한편 가락국의 창업주 김수로왕의 탄생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온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의 땅에는 왕은 물론 나라의 이름도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의 아홉 촌장(村長)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다. 서기 42년 어느 날 촌장들이 인근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나라를 다스릴 왕을 얻기 위해 의식을 올린다. 이 때 하늘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달려가 보니 금그릇 안에 여섯 개의 알이 있었다. 다음날 그 알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온다.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라 하고 금그릇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했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왕 김수로다. 나머지 다섯 동자는 5가야의 수장으로 각각 삼았다. 뒤에 수로왕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아 열명의 왕자와 두명의 공주를 두었다. 왕자 중 맏이인 거등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왕자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한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김씨다. 김해김씨는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수로왕의 13세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그 뒤에 148파로 갈라진다. 그 중에서 고려 때의 ▲김목경을 1세조로 하는 경파와 그의 아우 ▲김익경을 1세조로 하는 사군파, 그리고 ▲김관을 1세조로 하는 삼현파가 주종을 이룬다. 김해김씨는 김수로왕 이후 11世 김무력(金武力)의 대부터 크게 번창한다. 김해김씨의 中祖라 할 수 있는 흥무왕 김유신이 김무력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김무력은 신라조에 각간(角干)의 벼슬을 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무장이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의 조카딸과 혼인함으로써 신라의 宗姓과 인척을 맺고 가락국을 신라와 합병했다.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신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창한 만큼 후손들의 분파도 무려 1백48개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분파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의 직계종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京派(金寧君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四君派(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三賢派(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다. 삼현파의 삼현은 김극일(金克一),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를 가리킨다. 수로왕을 1세로 하여 56세조 김유공(金維公)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51세조 김지서(金之瑞)의 후손이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김평(金平)의 후손이 ▲양의공파(襄毅公派)다. 40세조 김명해(金命海)의 후손인 김명택(金明澤)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 김불비(金不比)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김만희(金萬希)의 후손이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김종정(金宗貞)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천익(金天翼)의 후손이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김을동(金乙棟)의 후손이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김문(金汶)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이장(金以章)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다. 김해김씨의 중시조 김유신은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로 신라 왕실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 어머니이다. 진평왕 31년 화랑이 되어 향도를 거느리면서 심신을 수련했다. 654년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김춘추를 무열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튼튼히 했다. 김유신을 정점으로 하여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김해김씨는 그 이후 그만한 가세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名臣과 功臣 10여명,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서 김해김씨의 꽃은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에게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김극일은 삼현파(三賢派)의 派祖인 김관(金管)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金孟)이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孟의 세 아들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라 김씨삼주(金氏三珠)란 호칭을 들었다. 김준손은 직제학에 이르렀고 김기손은 이조정랑을 지냈으나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 김일손은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직필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다. 결국 전라관찰사 이극돈에 대한 사초가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그 때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말썽이 되었다. 이는 옛날 항우가 楚 양왕(壤王)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들고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일족은 참수당하거나 유배되고 만다. 탁영(濯纓) 김일손은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탁영집(濯纓集)이 전한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형 김준손은 호남에 유배되었다. 김준손의 아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는 무오사화로 숙부 김일손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나왔다. 삼현파의 삼현은 바로 김극일과 그의 손자 김일손, 그리고 증손자인 김대유를 가리킨다. 이들이 오늘날 삼현파의 先代들인 셈이다. 조선조 화단의 최고봉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도 김해김씨 문중이다. 만호(萬戶) 김진창(金震昌)의 증손으로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된 뒤 어진화사로 정조의 얼굴을 그렸다. 다음해 왕명으로 용주사(龍珠寺)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와 판화를 그렸다. 강열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 산수, 인물, 화초 등 그의 뛰어난 필치는 유명하다. 특히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담았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 용인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은 1839년 기해사옥 때 순교, 중국인 신부를 따라가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김대건은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려다가 등산진(登山鎭)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하고 순교했다. 로마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7월5일 그를 복자위(福者位)에 올렸다. 낭산(郎山) 김준연(金俊淵)은 일제시대에서 광복 후에 걸쳐 활동했던 인물이다. 가져온 곳: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글쓴이: 정복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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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원문보기 글쓴이: 정복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