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연표
*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는 70년을 앞두고 있다.
1. 첫 조선 재속 3회
*1592년 이후 일본으로 끌려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회원의 전교로 재속 3회원이 됨.
*1597.2.6. ~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 그 중 대부분이 프란치스칸임. 17명의 프란치스칸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중 3명이 조선인.
*1627년 순교한 프란치스칸이 시복되었음.
*1862.6.8.~ 비오 9세에 의해 이들이 시성됨.
2.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역사
1) 초기
ㄱ. 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이전의 한국 재속 프란치스칸
*1921. 한국의 첫 프란치스칸 장며(요한)과 장 발(루도비꼬) 두 형제 입회.
*1922.9.24. 장면은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
*1923.12.30. 장 발(루도비코)은 가브리엘을 수도명으로 서약
ㄴ. 첫 입회식과 서울 형제회 탄생
*1937.9.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 2명 우리나라에 파견
*1937.12.25. 장면등 28명이 혜화동 성전에서 착의식(지금의 입회식)
*1939.1.3. 서울형제회 한국에서 첫 탄생
2) 시련기(1941~1953)
ㄱ. 박해
*1941.12.8. 2차대전 발발로 일본의 탄압에 의해 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체포및 감금됨.
*1942. 2.15. 오기선 신부까지 신의주본당으로 가게되어 형제회가 뿔뿔이 흩어져 집회를 갖지 못함.
ㄴ. 노기남 교구장 착좌
*1942.1.18. 명동성당에서 노기남신부가 경성 교구장과 평양, 춘천 교구장으로 착좌.
ㄷ. '평화와 행복' 회보와 수도 공동체의 좌절
ㄹ. 오기선 신부의 대전본당 부임과 8.15광복
*1944. 오기선 신부가 대전본당으로 부임. 해방과 더불어 파괴된 수도원 정비등 제3회의 재건에 주력.
ㅁ. 광복후의 형제회와 6.25동란
*1946. 조종국(마르꼬) 서울형제회 회장직 맡음.
ㅂ. 1950.10.8. 이광재(디모테오)신부가 6.25동란으로 총살됨. 이와함께 명망있는 회원들이 납북되었다. 이후 1960년까
지 형제회 집회가 거의 중단됨.
3) 회복기 (1953~1972년)
ㄱ. 시련을 딛고 다시 시작
* 1950~60년대 이 시기에 조직된 형제회는 대부분 충남지역. 한국에 새로 입국한 공 안드레아 신부는 오기선 신부와
함께 적극적으로 3회를 도움.
* 1958.12.10. 대흥동형제회가 두번째 형제회로 조직되고 이와함께 당진과 부산에서도 형제회 창설 움직임이 일어났다
ㄴ. 첫 전국대회와 그 영향
* 1962.9월 대전 목동 수도원 강당에서 한구진출 25주년 첫 전국대회가 열렸고 이 모임으로 여러 형제회의 탄생에
활기를 주었고 잡지 '발자취'가 창간되고 3회원을 표시하는 휘장도 만들어짐.
ㄷ. 한국 연합회 발족과 초대 연합회
* 1963년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제2차 전국대회 열림. 이때 한국 연합회가 발족됨. 초대 공 안드레아ofm신부
초대회장 장면(요한)
* 1964.9월 대전에서 전국대회. 재2대 지도신부 최근성(베드로) ofm 신부.
* 1965. 안선호(베다) ofm 신부가 3대 지도신부로 부임.
* 1965.9월 제4차 전국대회
* 1966.6.4. 초대회장 장면이 67세로 선종. 연합회는 그 후 6년간 공백상태에 머무르게됨.
* 1958.10.6.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국내에 진출. 제3회를 조직하고 지도함.
* 1969. 대구시 범어동 본당을 중심으로 3회가 창설됨.
4) 재건기(1972~1978년)
ㄱ. 연합회의 재기
* 1972.8.~1975.8. 제2기 한국연합회
* 1972. 제6차 전국대회. 단독회원제와 수도명을 폐지. 성프란치스코 재속3회를 '성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
회'로 변경.
* 1972.9. 연합회 월보 발행. 입회식에서 성의와 띠를 착용하던 것을 뱃지로 바꿈.
* 1973. 제7차 전국대회. 꼰벨뚜알 프란치스코 3회원들과 함께한 의미있는 대회임.
ㄴ. 월보 '평회의 사도'와 간행물
* 1963. 3회원을 위한 교재로 '발자취'발간
ㄷ. 제3대 연합회(1975.8.~1978.8.)
* 대구 꼰벨뚜알 수도원에서 제9차 전국대회. 이순석(바오로)를 회장으로 제3대 연합회 출범.
* 1976. 최정오(마리노)신부가 3회 지도신부로 부임. 사부님 서거 750주년 기념식과 전국대회를 전주에서
개최함.
5) 성장기 (1978년 부터)
ㄱ. 제4대 연합회 (1978.8.~1981.10.)
* 3회에 큰 전환점이 됨. 개정된 회칙이 인가를 받고 명칭도 '재속프란치스코회'로 변경됨.
청년프란치스칸에 많은 관심을 가짐.
ㄴ. 제5대 연합회 (1981.10.~ 1984.9.)
* 1982.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탄생 800주년을 기리기 위하여 출판사업과 회관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힘씀.
* 1980.8.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영적보조를 받는 부산과 대구의 형제들이 '꼰벤뚜알 성프란치스코회
재속형제회 한국연합회'를 만들어 형제회를 지도하기 시작함.
ㄷ. 제6대 연합회 (1984.9.~1987.10)
*박상배(마태오)회장 부임. 지도신부 김창재 ofm 신부 임명. 형제회 활성화와 양성에 주력함.
* 1987. 한국진출 50주년 기념 전국대회가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림.
ㄹ. 제7대 연합회 (1987.10.~1990.10)
* 박상배 회장 유임.
* 1988.1. 국제 지도 신부인 칼 세이퍼 신부의 권고에 따라 전국평의회에서 수도복 폐지를 결정함.
ㅁ. 제8대 연합회 (1990.11.~ 1993.11.)
* 1992.1.전국연례회의에서 새회헌이 발효되어 명칭이 변경됨. 한국연합회는 '한국국가형제회'로,
지구협의회는 ''지구형제회'로, 지도신부는 '영적보조자'로 변경됨.
* 1992.10. 과거 포켓판의 지침서를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로 변경 발행.
ㅂ. 제9대 국가형제회 (1993.11.~ 1996.11)
* 1995.4. 영남지구형제회가 구성되고 그 해 6~7월에 양성교재 1,2권이 출판됨.
ㅅ. 제10대 국가형제회 (1996.11.~1999.11.)
* 1999.1.15.~17. 국가연례회의및 회칙반포 20주년 기념 세미나 개최.
ㅇ. 제11대 국가형제회 (1999.11.~2003.1.)
* 1999.11. 제19차 국제형제회 총회에서 제11대 국가평의회가 구성됨.
* 2001. 3. 국가형제회 홈페이지가 개설됨.
* 2001. 9. 회칙의 개정에 따라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를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이름으로개정 발행함.
ㅈ. 제12대 국가형제회 (2003.1.~현재)
* 2003.1. 제 20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2대 국가평의회(회장 한영숙)가 구성됨.
* 2003.5. 국가 규정을 평의회로부터 인준 받음.
* 2003.6.29. 회칙반포 25주년 및 국가규정 인준 기념 행사 개최.
* 2003.10. 재단법인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설립 인가 받음. 양성교재 '아씨시'와 '폰테 콜롬보' 발간.
* 2004.1. '평화의 사도'를 혁신하여 잡지형태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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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추모...작성 중인 것 같습니다. 이 후에 여유가 있으면 계속 보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