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산행 일정 : 10월 2일 7시 40분 출발, 10월 3일 0시 32분 버리미기재 도착, 0시 47분 등산 시작, 10월 3일 17시 28분 조령 3관문 도착.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산행부대장, 경주교도소), 권종훈(산행부대장, 경주월성중학교), 손승락(경주월성중학교)
4. 운전자 : 최병윤
5. 차량 제공 : 권종훈
6. 도움 주신 분들 : 양영자. 손정락
우리의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모든 회원님들 즐거운 추석을 보냈으리라 믿으며 추석연휴인데도 불구하고 어렵게 운전해 주신 최병윤 회원님에게 심심한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리고 통닭까지 사들고 배웅 나오신 손정락 회원님과 종주대를 위해 찬조해 주신 양영자 회원님에게도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연휴 기간이라 차가 많이 막힐 것을 예상하고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길을 나섰지만 다행히 예상과는 달리 소통이 원활했다. 영천으로 해서 의성을 지나 점촌 처가에 도착하니 22시 32분이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과 곡차를 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평소에도 처가집에 가면 아침을 먹고는 바로 배낭메고 산에 가기 때문에 문경일대의 산은 거의 대부분 가 보았기 때문에 처가에서도 산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새벽부터 이렇게 다닌다하니 모두들 놀랠 뿐이다
23시 56분에 처가집을 나와서 0시 32분에 버리미기재에 도착하여 배낭을 정리하여 0시 47분에 출발했다.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떠서 산돌이들의 발길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으며 산길을 접어들자 하얀 억새들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다정히 반기고 있었으며 곧이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 계곡길을 따라 오르는 길과 오른쪽길이 있는데 우리는 오른쪽길을 따라 경사진 오르막을 오르니 첫 바위지대가 나오고 0시 56분이다.
계속해서 경사진 길을 10여분 올라가니 바위지대를 우회하게 되고 다시 3분여를 올라가니 바위 우측으로 돌아서 바위 사이로 올라가게 되는데 표시리본이 매달려 있으며 한참을 더 올라가니 전망좋은 바위가 나오고 시간은 1시 21분을 지나고 있다. 계속하여 오르다 보면 조그만 돌탑이 있는 이름모를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동쪽으로 연결된 능선에는 애기암봉이 이어지고 장성봉까지는 바윗길 능선이며 1시 33분에는 전망좋은 바위에 서니 대야산 주차장과 멀리 희양산의 화강암 바위가 달빛에 반사된 모습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완만하게 오르면 915.3m의 장성봉이며 1시 40분이다. 버리미기재를 출발하여 53분만에 정상에 도착하니 삼각점과 앞에 제단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백두대간 장성봉 915.3m 문경산들모임 단기 4330년 11월 16일 이라 적힌 표지석과 119구조대(043-119) 속리 11-11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는 약간 넓은 공터가 있고 마침 대간 종주자 한분이 텐트를 치고 자고 있길래 우리는 혹시나 자는데 방해가 될까봐 조심해서 사진을 촬영하고 메모를 하고 있는데 텐트속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중년의 산꾼 한분이 나오셨다.
이 깊은 산중에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산봉우리에서 그것도 추석 다음날혼자서 야영을 하고 있다니 대단하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는 야생꽃을 촬영하면서 대간을 다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고 내일까지 이화령에 도착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다 한다.
잠시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지려니까 이 지역은 뱀이 많으니 조심을 하란다. 서로 작별을 하고 장성봉에서 급경사 지대를 내려오면 전망좋은 바위가 있고 길은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오르막으로 올라와야 되며 쌍곡 갈림길에는 2시10분에 도착하였다.
특히 쌍곡갈림길에서는 주의를 요하게 되는데 마침 백두대간 2차 역종주 기념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표언복님이 2001년 4월 14일날 지나가면서 왼쪽으로 쌍곡 1시간 오른쪽으로 은치재 2시간이라는 코팅처리된 표시기가 있으며 장성봉에서 갈림길까지는 철쭉이 상당히 많다.
2시 26분 서쪽으로 계곡이 보이는 전망좋은 바위가 나오고 잠시 후 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2시 44분 바위지대에서 내리막이 나오며 안부로 내려가게 된다. 2시 50분경 다시 전망좋은 바위가 나오고 길은 왼쪽으로 휘어지며 3시 31분에 헬기장이 나오고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3시 34분 바위를 왼쪽에 두고 진행하다 보면 바위 사이로 리본이 있으며 왼쪽 바위사이로 올라가야 되며, 바로 내려가면 길이 없어진다. 3시 54분 악휘봉 갈림길에 도착하였으며 직진하면 악휘봉을 볼 수 있는 바위가 나오고 올라서서 악휘봉을 구경할 수 있다. 845m의 악휘봉은 여기서 충북쪽으로(서쪽) 10여분 거리에 있으며 깨끗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어두운 밤이라 자세히 볼 수가 없으며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서 침묵만 지키고 있다.
장성봉에서 악휘봉 삼거리까지는 봉우리가 많아 진행속도가 느리고 길은 U자처럼 돌아간다. 악휘봉 삼거리에서는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대간길이며 2분후 다시 갈림길에서 왼쪽길은 내리막길이며 오른쪽길을 따라가면 된다. 여기서부터 왼쪽은 급사면을 이루고 오른쪽으로는 완사면을 이룬 능선으로 진행하며 왼쪽으로는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며 바윗길 능선을 조금 오르면 820봉이다.
4시 19분 절벽지대를 통과하게 되고 4시 23분 바위봉우리에서 주위조망을 즐기지만 아직도 밤중이라 보이는 것은 오직 산봉우리 뿐이며 달은 구름이 끼여 흐리며 별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왼쪽으로 가파른 내리막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으며 조심스럽게 내려서니 4시 35분이며 노송들이 많이 있다. 완만하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두번째 바위지대를 4시 40분에 통과하게 되었으며 오른쪽에 돌을 쌓아둔 곳을 지나 봉우리에 오르면 전망이 좋으며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면 520m의 은치재 또는 오봉정고개라 불리는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4시 47분이다.
은치재에서는 왼쪽으로는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로 하산하는 길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봉암사가 있는 봉암용곡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봉암사쪽에는 입산금지 안내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여기는 입산통제 구역입니다.
(문경군 문공 1074-205)봉암사 희양산은 스님들의 수행정진하는 조계종 특별수도원(총무원 제319호)으로서 일반인은 출입을 제한합니다. 이를 위반시는 산림법에 의하여 규제를 받게 되오니 양지 바랍니다. 문경군수와 봉암사 주지라 적혀있다.
두 대원이 물을 꺼내 마시는 동안 간단하게 산행기를 기록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주치봉인 683m봉을 오르기 시작한다. 683m봉까지는 상당히 급경사길이지만 쉼없이 계속 오르니 손승락 회원이 바로 뒤에서 따라 올라오고 최현찬 회원은 약간 간격이 벌어진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제가 가장 자신있는 코스가 바로 오르막 구간이다 보니 장난삼아 빨리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따라 숨소리는 거칠지만 손승락 회원은 잘도 따라온다. 가끔씩 오르막구간에서는 장난기가 발동하면 엄청빠른 속도로 올라가게 되는데(물론 이런 산행은 가급적 하지 말아야 됨. - 체력 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산행시간에 비해 지금까지 오르막구간에서는 훨씬 많은 시간을 단축시켜 왔다.
주치봉에 도착하니 5시 3분이다. 빨리 올라오다보니 모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망가진 헬기장이 있고 왼쪽으로는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휘어지면 앞쪽으로 지능이 이어지고 왼쪽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오른쪽에 희양산 봉암사 출입금지를 알리는 안내문이 또 있다.
직진하여 오르다보면 석인상이 있는 묘가 나오며 바위와 돌길을 지나면 급경사 오르막이 이어지고 오르막을 올라서면 705m봉이다. 바위가 있는 곳을 오르내리다보면 은티마을의 불빛이 보이고 다시 힘들게 오르면 널다란 마당 바위봉에 이르게 되고 은티마을과 구왕봉이 보인다. 5분여를 계속해서 오르면 참나무가 우거진 898m의 구왕봉 정상이다.
생각과는 달리 정상은 참나무 숲으로 인해 특별한 멋과 특징은 없으며 옛날에는 구룡봉이라 했다. 3년전에 처가집에 갔다가 비가오고 운무로 덮혀있는 여름날 혼자 구왕봉에 올랐다가 정상이 어딘지를 몰라 헤멘적이 추억으로 남아 있으며 신라 헌강왕 5년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하기 위해서 희양산 밑에 있는 큰 연못에 사는 용 아홉 마리를 구룡봉으로 쫓아보내고 봉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구왕봉 정상에는 5시 51분에 도착하였으며 지금부터 지름티재까지는 급경사 내리막 구간이다. 구왕봉에서 왼쪽으로 약간 꺾어져 가다보면 전망대가 나오고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서 앞에 있는 화강암 바위산인 희양산이 멋지게 보이고 오른쪽 계곡사이에 그 유명한 봉암사가 보이기 시작하고 왼쪽으로 가파른 내리막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전망대가 나오고 왼쪽으로 내려가는데 왼쪽은 벼랑이라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 바위 사이를 내려서면 가파른 절벽이 나타나고 다시 조심해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650m의 지름티재에 도착하게 되며 오래된 무덤과 돌로 쌓은 제단이 있다.
6시 9분 지름티재에 도착하니 오른쪽으로 봉암사 내려가는 길은 출입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으며 왼쪽으로 뚜렷한 길은 은티마을로 갈수 있다.
지름티재에서부터 희양산까지는 계속되는 오르막 구간으로 바위지대로 오르다보면 미로바위가 나오고 다시 넙적한 큰 바위와 노송이 있는 곳을 지나니 붉은 불덩어리가 구름사이로 동쪽 하늘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잠시 후 나무가 뽑혀져 있는 곳에서부터 길은 갈라지게 되는데 왼쪽길을 택하면 우회길이 되고 대간길은 직진해서 어렵게 올라가면 조금은 위험하지만 세미클라이밍을 해야 하는 구간이 나오고 특히 겨울에 눈과 얼음이 얼었을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할 코스이다.
힘들게 세미클라이밍 지대를 통과하니 6시 40분 희양산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왼쪽으로 가면 대간길이 되고 오른쪽으로 계속해서 오르면 큰바위지대가 나오고 998m의 희양산 정상이다.
6시 45분 희양산 정상에 도착하니 속리산이 멀리서 보이고 앞에는 방금지나온 구왕봉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몇마리의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 다니고 발아래에는 수십길 화강암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봉암사가 아스름하게 내려다 보인다.
아침을 먹으려고 가져간 통닭과 간식을 꺼내지만 차가운 날씨에다 찬바람까지 불어서 음식이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 산의 산정에는 높이 40m 정도의 절벽을 이룬 암봉이 있는데 이것에는 다섯개의 줄이 파여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4만의 원군을 이끌고 온 명나라 이여송이 조선의 흥성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칼로 산맥의 혈도(穴道)를 끊은 자국이라고 한다.
옆에는 용바위가 있는데 그 옛날 비가 안올 때 이 바위 앞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기우제를 지낼때는 살아있는 돼지를 몰고 올라와 이 바위에서 칼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산돼지의 피를 기우제에 이용하는 것은 이 산에 사는 용이 바위에 피가 묻는 것을 싫어해서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낸다고 돼지를 잡으려 하면 먼저 비를 내린다고 믿기 때문이라 한다.
봉암사는 우리나라 절집 가운데 가장 찾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것은 지리적인 원인보다는 1982년부터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돼 참배하러 오는 봉암사 신도 이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일년중 단 하루 사월 초파일만 일반인에게 산문을 공개하는 수도도량이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희양산 남쪽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흰 바위봉우리를 이고 있는 희양산은 옛부터 '절이 들어서지 않으면 도적이 들끓을 자리'로 여겨져 왔다. 이렇게 높은 산 중턱에 터를 잡은 봉암사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로서 불교도들의 선도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헌 지증대사(824~882)가 창건했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국사 비문에 따르면 도헌은 경주사람 김찬양의 아들로 아홉살때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열일곱살에 구족계를 받고 정진에 힘썼으며 스물에 이미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경문왕이 신하를 보내어 입궐하기를 청했으나 가지 않았고 헌강왕이 왕사로 삼으려 했지만 사양했다. 그러던 중에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 봉암사 자리를 대찰 자리로 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연못을 흙으로 메우려 하는데 큰 용이 살고 있는지라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물리치고 "이 땅을 얻었다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승려들이 살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하면서 봉암사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백운곡에 계암(鷄岩)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봉암사를 세울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해서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신라하대의 새로운 사상인 선종의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이 개창되었던 것이다.
그후 지증대사의 문손(門孫)들이 대사의 뒤를 이어 중수하여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후삼국이 대립하게 되면서 이곳 문경은 견훤과 왕건의 격전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봉암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고 극락전만 남게 되었다.
그후 고려초에 정진국사가 주석하게 되어 중창하여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극락전은 목탑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란때 원당(願堂)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이라고 전한다.
중간 사적은 기록을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여러번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순종 원년(1907년)에도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었으며 1956년 4월 7일에도 큰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 남은 당우들에서는 옛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이어서 한때 폐사 위기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중창을 거듭해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대가람 중수 불사가 몇년째 계속되어 1992년 6월 4일에는 대웅보전이 완성되었다. 대웅보전은 108평의 웅장한 건물이며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등 삼존불을 모시고 목각탱화 또한 뛰어난 수작으로 매우 장엄하다.
대웅보전에서 서북쪽 뒤에 자리잡은 봉암사의 창건주인 지증대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는데 둘 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지증대사 부도비는 신라하대의 명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은 유명한 '사산비명'의 하나이다.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비, 만수산 성주사의 낭혜화상 부도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와 더불어 일컬어지는 최치원의 사산비로서 사산비 가운데 가장 늦은 893년 무렵에 글을 지었고 글씨는 분황사의 노승 혜강이 썼는데 비가 세워진 것은 924년의 일이며 지증대사의 행적과 더불어 신라 선종사에도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는 비이다.
봉암사 경내를 지나면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오솔길이 이어지며 700m쯤 올라가면 맑은 물이 거대한 암반 기암괴석을 휘감아 돌며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고 이어 금강산 만폭대와 어깨를 겨룬다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백운대가 있다.
그곳에는 마애불이 있으며 불상 옆 바위에 새겨진 '백운대'라는 글씨는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해오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이외에도 봉암사 입구 버스주차장 너럭바위 아래쪽 단면에는 문짝만한 크기로 '야유암(夜遊岩)'이라 새겨 놓은 글씨가 있으며 취적대(取適臺)라는 글씨도 새겨져 있다.
또 개울 건너편 마을쪽에는 고산유수명월청풍(高山流水明月淸風)이라는 해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모두가 최치원의 글씨라 전해지고 있다.
음식을 간단히 먹은 후 잠시 조망을 즐기다가 7시 15분 희양산 정상을 출발하여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면 지름티재에서 올라왔던 곳과 만나며 여기서 북쪽 능선을 타면 성벽이 나오고 신라 옛 산성이라고 전하는 희양산성이 있다. 생긴 모양 그대로의 돌을 가지고 쌓아 올린 산성이지만 제법 산성다운 면모를 갖추고 그 오랜세월 풍우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어 온 산성인 것 같다.
성벽을 따라 50여m정도 가면 성터를 가로질러 왼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은티마을로 가는 길이다. 직진하여 성터를 따라가면 산죽이 계속되고 로프가 설치된 바위지대를 어렵게 올라선 후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면 성벽이 끝난다.
소나무가 많은 능선을 오르다가 돌길을 가파르게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고 바위길을 올라 봉우리에 이르면 능선이 이어지고 888m봉에 이른다. 내리막에 약간의 경사가 있고 돌길인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시루봉 안부이다.
대간길은 시루봉을 오르지 않고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편평한 길을 타고 오르다 능선으로 접어들며 시루봉과 963m봉 사이에 있는 배너미 평전은 능선상에 분지를 이룬 특이한 곳으로 야영터와 숲 좌측에 계곡이 있고 옛 성터와 집터가 있으며 배너미 평전이란 유래는 옛날 천지개벽을 할 당시 배가 올라 왔었다는 전설이 있다.
배너미평전에는 7시 59분에 도착하였으며, 故 지현옥 산악인을 추모하며 1999년 6월 13일 백두대간 서원대학교 산악부에서 세운 표지목이 안타깝게도 누군가에 의해 뽑힌채 쓰러뜨려져 있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괴산의 명산 시루봉 정상이 10분 걸린다고 적혀있다.
완만하게 오르다 오른쪽으로 꺾어져 길 없는 자갈 비탈을 완만하게 오르면 963m봉이다. 동남방향으로 가면 곧 안부 갈림길에서 직진하게 되며 백두대간은 3번 국도가 지나는 이화령까지 급하게 돌아나가게 되며 대간은 바위(용바위, 마당바위)능선이 많고 이만봉까지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은 거대한 자연성곽처럼 날카롭게 이어져 나간다.
이만봉 119 신고 안내 표지가 있는 제 8지점에는 8시 12분에 통과하였으며 제 7지점에는 8시 22분에 도착하니 급경사의 이만이골 끝부분에는 도막마을의 민가 4 ~ 5채가 보인다. 제 6지점을 8시 30분에 통과하고 계속하여 오르니 제 5지점인 이만봉에는 8시 36분에 도착했다.
이만봉 정상에는 노란색 플라스틱 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괴산의 명산 이만봉(990m)이라 적혀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곳 산골짜기로 2만여 가구가 피난을 들어와서 붙여졌다는 전설과 이만호라는 형제가 이사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이름이라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기념촬영을 하고 산행기를 적는 동안 최현찬, 손승락 회원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먹고 8시 50분 곰틀봉을 향해 출발했다. 조금은 아찔한 절벽과 미끄러지기 쉬운 바위길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고 돌길을 다시 오르면 조금은 이상한(?) 이름을 가진 915.3m의 곰틀봉에 도착하게 되며 정상에는 제 4지점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9시 3분이다.
물론 옛날에는 반달곰이 많이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소시적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허튼 소리를 하면 "곰 *** 소리한다"는 이야기와 곰~틀~봉(?)을 연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곰틀봉에서는 전망이 좋아 북으로는 이화령 고개가 손에 잡힐듯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에는 조령산 줄기가 다가온다. 동쪽으로는 백화산의 줄기가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서 있으며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이만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곰틀봉을 지나 봄에 고사리가 많이 채취된다고 해서 부르게 된 고사리밭등을 통과하면, 첫번째 만나는 안부가 840m의 사다리재로서 북쪽 계곡으로는 분지리 마을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다.
사다리재에는 제 3지점 안내 표지가 있으며 9시 15분에 통과 하여 완만한 능선을 지나 바위지대를 통과하면 가파른 오르막이 나오고 다시 바위지대를 오르면 981m봉이 나오고 9시 47분이며 오른쪽으로는 한실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직진해서 좌회전하면 백화산으로 진행하게 되며 10시 5분에는 평전티에 도착하였는데 이정표에는 백두대간 백화산 50분, 좌측 하산길 분지(안말) 60분 지나온 방향으로는 이만봉, 희양산 등이 표시되어 있다. 바위와 암봉지대를 오르내리는데 단풍나무는 붉고 고운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있으며 급경사 오르막을 오르니 1063.5m의 백화산 정상이다.
희양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백화산까지는 길은 좋지만 길 바닥에 작은 돌들이 많아서 걷기에는 상당히 불편했으며 발바닥이 아플 정도였다.
정상에는 10시 37분에 도착하였으며 백두대간 백화산 1063.5m, 문경산들모임 단기 4327년이라는 표지석이 있으며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고 정상 바로 밑 15m지점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정상에서의 조망은 상당히 뛰어나 동쪽으로는 문경시가 바둑판처럼 뚜렷하게 보인다. 그 너머로는 황소가 엎드린 모양의 운달산이 보이고 지나온 이만봉 시루봉 희양산 등이 낙타등처럼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으며 분지리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화산은 겨울철 산봉우리의 눈 덮힌 모습이 마치 하얀천을 씌운 듯 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괴산군내에서는 최고봉을 자랑하고 있는 산이며 70년대까지도 분지마을의 고냉지 채소 생산지로 각광을 받던 곳이다.
그리고 또 과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으며 70년대 중반까지 분지리 안말과 흰두뫼마을에는 90여 가구의 화전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두 동네를 합쳐도 8가구 밖에 되지 않으며 귀틀집을 짓고 화전민이 살던 시절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먹고 기념촬영을 한 후 헬기장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꺽으면 철재 이정표가 나오는데 마원 옥녀봉, 마원 흰드뫼 황학산, 정상, 희양산 6km, 한실 8km라 적혀 있으며 잠시 후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문경 마원 옥녀봉, 흰드뫼 분지리라 적힌 이정표가 나오고 2분 후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능선은 마원으로 가며 왼쪽 내리막길이 대간길이며 계곡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대간 종주자 두분을 만났다. 오늘 일정은 희양산을 지나 은치재에서 야영을 할려고 한다면서 식수를 구할 때가 있느냐고 묻기에 식수를 구하기는 지름티재가 쉬우니 지금 시간으로 봐서 여유있게 지름티재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고 하고는 서로 헤어졌다.
바위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에 오르면 전망이 좋으며 왼쪽에 904봉이 있다. 곧 오른쪽으로 경사진 초원의 억새밭이 나오고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황학산 안부가 나오고 다시 경사진 오르막을 오르니 11시 33분이며 910m의 황학산 정상에는 돌탑이 있으며 부부 4쌍이 먼저 와서 쉬고 있길래 사진 한장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황학산 삼거리이며 11시 43분이다.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으며 괴산의 명산 백화산 80분, 분지 안말 흰드뫼 50분, 백두대간 이화령이 적혀 있으며 왼쪽으로 가면 흰드뫼 마을이고 직진하면 이화령이다.
소나무 숲을 왼쪽으로 두고 오른쪽에는 낙엽송 숲이 조성되어 있는 산판도로가 나오며, 산판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백두대간 백화산 6.5km 약 2시간 30분, 각서리 1.2km 약 30분, 백두대간 이화령 1.5km 약 40분이라 적혀 있으며 산판도로가 이어지는 오른쪽은 각서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직진하면 헬기장이 나오고 12시 11분이며 군 참호 시설이 곳곳에 있고 다시 또 헬기장이 나오며 12시 14분에 통과하게 되는데 첫번째 헬기장 이후 7-8분 정도 가시덤불 속을 뚫고 지나가면 이후부터 한참 동안 밤나무가 엄청나게 많으며 조그만 토종밤들이 길바닥에 엄청 떨어져 있지만 줍지 않고 그냥 지나치니 조금은 아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어쩌랴! 아직도 가야할 곳(조령 3관문)은 엄청 멀고 배낭의 무게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처지이니...
밤나무 지대를 지나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슴도치 한마리가 길 가운데에 밤송이와 뒤섞여 있는 것을 보고 죽은 줄 알고 혹시나 하고 건드리니 살아서 꿈틀 거린다.
계속해서 완만하게 진행하면 낙엽송 숲이 조성된 임도가 나오고 곧 670m의 조봉에 이르게 된다. 한참 완만하게 진행하다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시멘트 헬기장이 나오고 위쪽으로는 계단이 있다. 하지만 군사 통제지역이라 민간인 출입금지 경고판이 있고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면 등산로 통제구역임을 알리는 681.3m봉에 도착하게 되는데 12시 54분이며 직진할 수가 없다.
오른쪽에 있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의 경사가 있는 사면길을 택하여 우회하면 급경사 내리막이며 다시 헬기장을 한 군데 지나 계단 갈림길에 이르고 직진하는 길에는 오르는 계단이고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서면 3번 국도가 지나는 529m의 이화령이며 시계는 13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다.
3번 국도가 지나는 이화령은 추풍령과 죽령사이의 큰 고개로 옛날에는 이우리고개라 하였으나 1925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이화령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문경새재가 여기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이 고개는 백두대간 종주의 중요한 기점이며 지금은 터널이 개통되어 연풍과 문경을 연결하는데 소요시간을 많이 단축하고 있다.
동쪽 경북쪽에는 표지석과 안내간판이 있으며 표지석에는 영남의 관문 이화령 경상북도 여기는 문경시 입니다라 적혀 있으며 마침 군인들이 군용트럭의 짐을 내리고 있었다.
서쪽 충북지역에는 이화령 휴게소와 이화령 주유소 그리고 이화령 도로 이정표(이화령 529m)등이 있으며 넓은 주차장에서 연풍쪽으로 바라보는 조망도 멋지다.
이화령 휴게소에 들어가 점심을 간단히 먹으면서 곁들여 파전 한접시와 동동주 한병을 시켜 3명이 나누어 마셨다. 모두가 술을 좋아하면서도 종주 도중에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혹시나 취기가 오를까 걱정이 되어서 서로가 많이 마셔라고 양보(?)한다. 당연히 제가 좀더 많이 마셨고(대학 다닐때 가장 즐겨 마시던 것이 막걸리 였으니까) 술맛은 너무 너무 좋았다.
오늘 운전을 하신 최병윤 회원이 생각난다. 혼자서 조령 3관문에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함께 이 자리에서 동동주를 한잔했으면 덜 지루하고 더욱 좋았을텐데...
13시 40분 다시 출발하면서 물을 보충하는데 조령샘에 물을 구할수 있기 때문에 나와 손승락 회원은 무거움을 피하기 위해 식수를 조금씩 밖에 보충하지 않았다. 최현찬 부대장은 만약을 대비해 물을 많이 보충한다. 그것은 우리 두사람은 물을 별로 먹지 않는데 최현찬(금붕어띠도 아닌데 엄청난 물을 마심)부대장은 땀도 많이 흘리고 지금까지 오면서 우리보다 3-4배의 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의 등산로 안내판과 산불감시초소 옆으로 길이 나 있지만 능선이 아닌 9부 능선을 따라 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배는 부르고 술기운으로 인해 걷는 속도가 빠른것 같다. 너덜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759m의 주능선 안부 헬기장이 나오고 14시 1분이다.
헬기장에서의 조망은 충북 연풍과 경북쪽의 탁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소나무 지대를 계속 오르니 조령산 119구조 안내 1지점을 14시 6분에 통과하고 2지점을 14시 17분에 도착하니 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타고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바로 위에 조령샘이 있다.
몇년전 여름 방학 때 등산부 학생들을 데리고 왔을때는 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지금은 날이 가물어서 그런지 샘에는 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령산에 올랐던 등산객들이 많이 내려오면서 물을 찾지만, 샘이 말라 물이 없자 궁시렁 궁시렁~...
조령샘에서 잣나무가 울창하게 덮인 경사길을 올라서면 전망이 뛰어난 990m의 헬기장에 14시 30분 도착하니 남쪽으로는 멀리 속리산 연봉부터 희양산 백화산 등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주흘산의 전경이 멋지게 펼쳐진다.
능선 좌우측에는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터널을 이루고 서로의 미모를 뽐내고 있는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니 조령산 정상이다. 14시 38분에 도착하니 마침 대전서 오신 50대 부부가 늦은 식사를 하다가 같이 먹자고 하지만 사양을 하니, 그러면 포도라도 먹으라면서 주셨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어렵게 여기까지 가져와서 먹으라고 주시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너무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정상 표지석에는 백두대간 조령산 1017m 문경군청 등산회가 세운 것이 있고 옆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이었던 지현옥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故 지현옥 산악인을 추모하며"라는 서원대학교 산악부에서 세운 표지목이 있다.
정상에는 '이곳 조령산 정상에서 제 1관문 용사골 구간은 경사가 매우 심하고 낙석 등 위험 요소가 많아서 등산로 이용을 금하오니 이화령이나 마당바위 등 다른 코스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것과 '조령관(문경 제 3관문)까지는 7km로서 4시간 정도 소요되며 미끄럽고 위험한 암벽 구간이 많아 필요한 장비를 갖추지 않은 분은 이 구간 산행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등산로 이용 안내문이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이 있어 전망은 그리 좋지 않다. 서쪽 아래로는 신풍리와 연풍리 일대가 저 아래로 보이고 북쪽으로는 신선봉과 부봉사이로 월악산이 아득히 보이는 앞 부분이 멋있다,
우리는 음식을 간단히 준비해서 가다보니 남에게 줄 음식이라든지 간식이 별로 없다보니 주로 얻어 먹는 입장이라 포도를 먹고 기념촬영를 하고 산행기도 쓰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좌측길을 따라 조금내려가면 안내표지판이 나오고 이곳에서는 신풍리와 3관문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부터는 곳곳에 세미클라이밍 지대와 급경사지대가 있어 조금은 조심을 해서 내려가야 될 것 같다.
이화령에서 조령산까지는 산행이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면 조령산 이후부터는 거칠고 험한 남성적 코스라 할 수 있다.
15시 37분 사거리 안부에 이르니 3관문 4.0km, 새재주막 2.0km, 신풍 2.9km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서 정면으로 암릉지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칼날 능선과 암봉을 지날때는 바로 발밑으로 천혜의 절벽이 있어 아찔하면서도 스릴을 맛볼 수 있다.
937m의 신선봉을 향해 오르다 뒤돌아 본 조령산과 주위의 산들은 설악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암릉과 조화를 이루어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으며 동쪽에는 태조왕건 촬영세트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선암봉 정상에는 표지석과 표지목은 없었으며 누군가가 937m 신선암봉이라 적은 표지판을 나무에 걸어 두었으며 시간은 1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선암봉에서 내려서는 곳은 급경사지대로 추락에 주의를 하여야 하며 오름길도 계속하여 급경사 지대라 조심을 하여야 한다.
923m봉에서 암릉을 계속하여 오르내리게 되고 문바위봉을 못미쳐서 가파른 급사면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문바위봉에는 16시 43분에 통과하게 되었으며 문바위봉을 지나 마당바위에는 16시 59분에 도착하니 힘든 구간은 완전히 벗어나고 여기서부터 812.5m봉까지는 등산로가 양호한 편이다.
3관문에서 최병윤 회원이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기로 한 시간이 17시 인데 아직도 갈길이 많이 남아 있어 혼자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마당바위에서부터는 최현찬, 손승락 회원에게는 천천히 오라 하고 먼저 가서 최병윤 회원을 만나기로 하고는 이때부터는 뛰기 시작하였다.
먼저 앞에서 뛰어가며 뒤에 두분은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따라서 함께 뛰게 되고 삼각점이 설치된 곳에는 17시 12분에 도착하였으며 30여m를 전진하면 깃대봉 갈림길이 나오고 등산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급사면을 내려서니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대간길은 우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야 되며 이곳부터는 다시 양호한 길이 계속되며 잠시후 3관문쪽으로 내려서게 된다.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던 영남대로에서 가장 큰 고개인 문경새재 정상에 있는 조령 제3관문에 도착하니 조령약수와 산신각이 있으며 조령관 앞에서 최병윤 회원이 우리를 기다리다 반가이 맞이해 준다. 17시 28분이다. 악수를 나누고 다음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을 확인하고 난 후 3관문을 빠져나와 사진 촬영을 하고 내려오니 조선시대 과거길이었던 곳에 갓을 쓴 선비상이 세워져 있다.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그리고 조령약수는 1708년 조령성을 쌓을 때에 발견했다고 전해오며 사철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길손들에게 피로회복제 구실을 하였을까. 또 산신각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
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자 그대로 조정에 보고 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바로 호랑이를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치자 군사 100명이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니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내니 이후 새재에는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새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양을 중심으로 온 나라를 잇는 길의 체계를 만들때 이 길이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어 여섯 대로 가운데 하나이다.
여암 신경준의 '도로고'에 따르면 여섯 대로는 제1로는 중국으로 가는 서울 ~ 의주간 도로이다. 제2로는 북방 경비에 필요하여 함경도로 가는 서울 ~ 경흥간 도로이다. 제3로는 서울 ~ 원주 ~ 대관령을 지나 삼척 ~ 평해에 이르는 동해안 길이다. 제4로는 일본 사행로로 서울 ~ 진천 ~ 충주를 거쳐 새재를 넘어 동래에 이어지는 영남대로이다. 제5로는 서울 ~ 과천 ~ 천안 ~ 공주 ~ 정읍 ~ 해남 ~ 제주에 이르는 길이다. 제6로는 서울 ~ 김포 ~ 강화를 잇는 길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km인 데 비하여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 가면 380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재는 조선시대 내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 등 외지의 사신들과 우마차를 끄는 소들의 발길까지도 묵묵히 받아내며 영남대로의 대동맥 노릇을 하였다.
조선초기에 새재를 열고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과 원을 설치하게 되는데 새재 넘어 첫번째에 있는 가장 큰 역은 유곡이었으며 유곡역의 중요성을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새'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에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새재 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니 만큼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이질 않았으며 그 중 조령성은 임진왜란 후에 공사가 시작되어 숙종 연간에 완공되었다.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진 새재는 임란 전에 왜군에 대비해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다가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게 된다.
왜군은 죽령, 새재, 추풍령 세갈래로 나뉘어 북상하게 되는데 그 중 주력부대는 새재 방면으로 길을 잡았는데 그 험준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방비가 없었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이곳을 통과하게 된다.
만약 새재가 뚫리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에서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의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새재는 한양을 사수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새재에는 관문이 세개가 있는데 옛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을 따라 문경쪽으로부터 수안보를 향해 주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1관문, 조곡관이란 제2관문, 조령관이라 불리는 제3관문이 차례로 들어서 있으며 그 중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제1관문인 주흘관이 가장 제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상태다.
또 한구간을 마쳤다. 그것도 추석 연휴 마지막날 장장 16시간 41분이라는 긴 거리를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친 것이다. 그리고 추석 연휴인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운전을 해 주신 우리의 희망 최병윤 회원님과 양영자, 손정락 회원님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16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걷고도 약속시간이 늦어진다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함께 뛰어준 최현찬, 손승락 회원에게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