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소에서 머문 시간
아름다운 여수에 있는 가막만과 여자만 사이, 이승과 저승의 사이처럼 그 가운데에 있는 화양반도의 끝자락 백야도를 둘러보고 다시 세포리와 나폴리가 아닌 나진리를 지나면서 찬바람의 밤바다에 60촉 백열등 켜놓고, 식은 밥에 컵라면으로 배를 불린 체 주낙을 걷어 올렸던 배와 어부들이 잠든 어촌마을을 지나면 소호라는 곳이 나온다. 리조트가 있고 닻을 내린 요트들이 즐비하다. 그 요트들은 60촉 백열등을 켜놓고 요리저리 흔들거리는 배가 아니라 바람을 타며 바다를 가르는 신분이 다른 배인 것이다. 달리 조금 있다는 가난한 부자들이 말하는 골프나 고급 승용차 따위는 한물가고 이제는 요트 한 척 정도는 있어야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는 그 따위들의 기름기 낀 생각에 풋 웃음이 나온다. 나에게는 그까짓 요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권의 책과 한 줄의 문장이 더 중요한데......,
사람마다의 가치의 기준이 다르지만 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별 볼일 없다는 생각에 풋 웃음을 지으며 해무가 짙게 내려앉은 바다는 어찌 보면 꿈을 꾸는 것처럼 몽환적인 것으로 갑자기 전설의 섬 이어도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착각에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보니 소호의 거리는 찻집과 횟집들이 즐비하다. 그러니까 모퉁이 하나를 돌아선 것뿐인데 주변의 풍경이나 환경은 낮과 밤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하다. 그 모퉁이의 이쪽은 삶의 바다이고 모퉁이의 저쪽은 즐기는 바다다. 하지만 여행자에게 있어서의 바다는 그냥 바다라는 의미로 멀리서 바라만 봐도 부질없는 사람들의 욕심을 잠재워줄 것 같은 그런 의미로서의 바다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부산의 바다와 여수의 바다가 같겠지만 깊이 뜯어보면 그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은근한 멋이나 삶의 질박함에서 또 다른 바다를 느낄 수가 있다.
가막만의 가장 깊숙한 바다 소호를 끼고 돌면서 산자락 아래, 인근 바다의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보이지 않는 곳, 적의 관측으로부터 은폐 엄폐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은 요즈음 어디를 가나 요란한 아파트나 건물들이 들어차는 개발의 재앙으로 부터 벗어나 있는, 마치 현재로 부터 벗어나 과거로의 여행의 길목과 같은 곳으로 항간에 이도다완이나 황도 등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임진왜란으로 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는 것에 일조를 했다고 봐도 무난한 곳의 그 이름은 '선소'다. 그래서 차라리 역사를 거슬러 시간여행을 떠나듯 저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다고 말하는 이충무공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선소유적지에 들어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 내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전함은 적다하나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내가 임금이 아니어도 이순신의 이 말이 들려오는 듯 동박새소리 들리는 선소의 입구에는 붉은 홑 동백이 나무마다 두세 개씩, 대여섯 개씩 피어있고 썰물의 낮은 바닷가엔 청둥오리 무리들이 날개를 접고 한가로이 쉬고 있는 가운데 해오라기 한 마리가 먹이 찾기에 분주하고 오래된 노거수 팽나무가 잎사귀를 버리고 앙상한 가지로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온 몇 그루의 품새가 대단하다.
선소라는 명소는 그리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곳으로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국가 사적지로 이순신 장군께서 뛰어난 조선 기술을 지닌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북선은 여수지역에 있던 본영 선소와 순천부 선소 및 돌산의 방답진 선소 등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여수 선소에 들어서면 만나는 곳이 굴강인데 굴강은 원형으로 축대를 쌓아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수리 건조하던 곳으로 들리는 바에 의하면 1930년경 선소 앞 간척지 제방 공사를 하면서 선소창의 해체와 함께 주춧돌을 비롯해서 유허비, 공덕비 등 충무공과 관련한 유물들을 바다에 넣고 그 위에 제방을 쌓았다고 하니 당시 일제가 충무공의 유적과 관련해서 그 유물들을 가만히 놔두었을지 만무하다.
그나마 지금 옛 모습은 아니더라도 창과 칼을 만들고 수리하던 풀무간이나 세검정, 계선주 등을 볼 수 있었는데 계선주 주변으로는 바다고둥이 지천이고 양식용 굴이 아닌 자생종 석화를 캐서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재미 속에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께서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어떻게 거북선을 만들 것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결심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실제의 거북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이곳에서 거북선을 제작하고 그 제작된 거북선을 시전앞 바다에 띄우고 흥청대기 보다는 이 조선의 바다는 내가 지키겠다는 큰 결심이 12척만의 판옥선으로도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12척을 이용하여 명량(울돌목)해전에서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어 임진왜란의 또 다른 변환 점을 만들고 "곡창 호남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승리할 수 없었다."는 장군의 말씀을 상기하다보니 또 이런 말씀이 생각난다. "전라도 사람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임란 때 전라도 의병들은 경상도 땅 진주대첩에까지 나가 싸울 만큼 그 용맹이 삼남에 이름을 떨쳤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동학농민운동이나 광주학생항일운동, 5. 18 민주화운동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고개 숙이라면 숙이고, 쭈그리라면 쭈그리고, 죽으라면 죽는 그런 소인배적 기질이 아니라 아닌 것은 아닌 것에 분명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호남사람이다. 똥구멍으로 호박씨 까고 남의 뒤 소리나 하는 그런 호남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기차통학을 하던 중 송정리역 즈음에서 게다짝의 쪽발이 학생들이 우리나라 여학생에게 조센징 어쩌고 모욕적인 말을 했을 것이다. 이에 보지 못한 우리 남학생들이 격분해 싸웠고 곧이어 경찰은 우리학생들에게만 일방적인 책임을 물었다. 그때 광주지역의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그 학생들의 석방과 민족차별 철폐 및 약소민족의 해방, 제국주의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고 이 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져 전국에 걸쳐 근 200여 학교의 학생들이 참가한 이른바 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5. 18 민주화 운동도 그렇다. 전남대에서, 조선대에서,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도청에서, 광주시내 곳곳에서 대학생이 그랬고, 청바지 입은 청년이 그랬고, 갈래머리 묶은 여학생이 그랬고, 양동시장의 생선 파는 아줌마가 그랬고, 황금동에 술집 아가씨가 그랬고, 광주시민 모두가 공수부대의 총칼 앞에 숙이지 않았고, 쭈그리지 않았고 다만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을 뿐이다.
4. 19로 이룬 민주화는 군화발이 깡그리 짓밟았지만 5. 18은 민주화를 앞당겼다. 그 정점에 호남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순신이 호남이 없었다면, 전라도 사람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승리할 수도, 나도 없었다는 그 말씀을 떠올리며, 한때 광화문 앞 세종로를 걸으며 왜, 이순신의 동상은 눈이 찢어지고 무섭도록 험상궂지 생각했고 어릴 적 위인전에서나 읽고 그 후 별반 존경하는 위인은 아니었는데 요즘 이지즈함이니, 첨단 레이더니, 함선탑제미사일이니 그런 현대식 무기가 없었어도 겨우 판옥선 12척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정신을 생각해 보니 동안 충무공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자신을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앞으로 남해에 가면 장군이 적의 총탄에 쓰러진 전몰지 이락사를 찾아봐야겠다.
어느 곳 어느 장소든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고 느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충무공의 사적지 선소는 역사적으로 무지한 나에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것 같은 그런 선소를 떠나면서 느끼는 것은 그저 단지 배나 만들고 수리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소 앞 가막만의 소호동 요트계류장의 요트들을 다시 본다. 저들은 충무공이 죽음으로 지켜낸 이 바다를 어떻게 생각하고 즐기는지? 그저 삼페인이나 들며 이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것에만 만족하는지? 이유야 어떻든 선소를 돌아보며 동안 관심밖에 있었던 충무공의 정신을 상기시킨 뜻 깊은 여행지의 선소였다.
선소의 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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