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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rx(4561, 사르크스)
살, 육체 fles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사르크스(Homer 이래)는 인간이나 동물의 '살'을 의미하며,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물고기나 작은 동물, 또는 과일의 '살'(과육)을 의미한다.
몸(소마)은 뼈, 피, 근육, 살, 피부(Plato, Phaedr., 98c. d)로 구성되어 있거나, 머리, 살, 뻐(Symp., 207d)로 구성되어 있다.
사르크스는 몸 전체, 특히 젊든 늙었든 죽었든 간에 육체적인 몸이라는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복수 사르케스는 시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덧없음은 사르크스의 특별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활력(프쉬케: 영혼)과 욕망(뒤모스)이 사라질 때, 살과 뼈는 소멸하고 만다(Od., 11, 219-222). 신이 인간과 동물과 다른 점은 사르크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누스(nou'", 3563: 마음, 정신)와 에피스테메(ejpisthvmh: 통찰력)와 로고스(lovgo", 3056: 말, 이성)라는 점이다(Epict., Diss., 118, 2).
2. 70인역본의 용법.
사르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0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바살(육, 살, 인간, 혈육, 남자의 성기)의 역사로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소의 고기(창 41:2), 식용 고기(시 78:27), 인간의 '살'(미 3:2 이하), 육체(사 40:6; 사 40:8; 잠 5:11), 골육(창 29:14), 혈육(사 66:23; 창 6:17 이하; 창 9:11 등), 양피로 된 살(창 17:11 이하; 렘 12:3), 몸(겔 23:20; 겔 44:7; 겔 44:9) 등을 표현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사르크스는 신약성경에서 147회 나오며, 그 중 바울 서신에 91회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서에서의 사르크스.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막 10:8; 병행구 눅 3:6과 막 13:20과 병행구를 제외하면 오직 3회 나온다.
(1)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서 "혈육"은 제한성(limitation)을 지닌 인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혈육"은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혈육"은 인간의 부분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적, 종교적, 신비적 능력을 포함한다. 그 반대는 하나님이시다.
(2)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사르크스("육신")는 프뉴마("마음")와 대조 및 반대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반대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3)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서 "살과 뼈"는 지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대조는 육체적 세계와 비육체적 세계의 대조이다. "살과 뼈"는 비육체적 영에 대조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적 육체임을 가리킨다.
(b) 사도행전에서의 사르크스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행 2:17과 행 2:26을 제외하면 행 2:31에 오직 한번 언급되었는데, 행 2:26의 인용구로부터 예수님의 사르크스의 썩지 않음을 언급한다. 그러나 행 2:27의 프쉬케(yuchv, 5590)는 여기서 다시 언급되지 않고 그 대신 "그"를 나타내는 3인칭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원론을 피한다.
(c) 바울 서신에서의 사르크스.
(1) 사르크스는 몸(Body)을 의미한다.
① 사르크스는 고후 12:7에서 육체에 가시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단순히 몸의 근육 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살과 뼈"라는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② 사르크스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는 몸의 근육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③ 갈 4:13에서 아스데네이아 테스 사르크스는 육체의 약함, 곧 병인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에서 사르크스 무는 바울의 병든 몸을 가리킨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④ 그렇지만 롬 6:19에서 동일한 표현은 인식의 약함을 나타낸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⑤ 고후 7:5에 따르면 사르크스에는 내적 근심도 포함된다. 여기서 외적 고생이 일차적일지라도 그러하다.
⑥ 고전 7:28에서도 유사하게 사르크스는 육적 고난과 영적 고난에 노출되어 있는 전 인간(全人間)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⑦ 고후 7:1에 더 나은 "영과 육"이라는 문구는 인간의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불결이나 오염에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둘 다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⑧ 고후 4:11에서 "죽을 육체"는 바울의 지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⑨ 고후 10:3; 갈 2:20; 빌 1:22; 빌 1:24에서 사르크스도 지상 생활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는 가능성을 가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생활이다.
(2) 사르크스는 지상적 영역을 의미한다.
①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3-4에서 바울은 사르크스의 영역을 하늘이나 프뉴마의 영역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사르크스의 영역은 여기서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죄 많은 것이 아니라 단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세대의 자연적 연속이며, 이 영역 안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성결의 영(롬 1:4)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됨을 천명하고 있다.
② 롬 11:14에서 단수는 지상적 민족적 이스라엘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세속적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의 영역을 의미하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영역이 아니다. 롬 4:1; 롬 9:5; 롬 9:8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갈 4:23; 갈 4:29에서 "약속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는 "육체를 따라"와 병행되지 않는다: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래서 롬 9:8에서 속격은 자녀가 속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고전 10:18에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은 지상적 민족이다.
③ 고전 1:26에서 육신에 따른 지혜는 이 세상의 인간의 범주에 따른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한다. 교회에는 이런 부류의 지혜자들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
④ 고전 1:24-26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사르크스의 지혜와 대조되며(참조: 고후 1:12), 고후 10:4에서 하나님의 힘은 사르크스의 무기와 대조된다.
⑤ 몬 1:16에서 사르크스와 퀴리오스가 결합된다.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보다 중요한 그리스도교적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가지고 있다.
(3) 살과 피, 모든 육체.
① 갈 1:16에서 "혈육"은 마 16:17에서처럼 인간 그 자체, 곧 신학적 통찰력, 종교적 경험, 교회의 전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② 고전 15:50에서 이 문구의 요지는 우리의 부분들 중에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부분과 받을 수 있는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쉽게 부패할 뿐만 아니라 쉽게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갈 5:19 이하에서 육체의 일에 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③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시 142:2에서 인용한 롬 3:20; 갈 2:16과 고전 1:29에 나온다. 이 세 구절에서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는 인류를 의미한다.
(4) 사르크스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
① 롬 2:28에서 바울은 몸의 지체의 할례를 마음의 할례와 대조시키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사람들이 사르크스를 보고 그것에 대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을 지닌다(참조: 롬 2:23; 롬 2:27; 롬 2:29).
② 갈 6:13에서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너희 육체"는 할례의 육체이다. 갈 6:12에서 엔 사르크스는 '사람 앞에' 즉 '세속적 고려(considerations)에서'를 의미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갈 6:13).그러나 무할례자들과 마찬가지로 할례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③ 빌 3:3; 빌 3:4에서 사르크스는 매우 중요하며, 첫째로 이스라엘의 자연적 혈통을 의미하지만 바리새주의, 율법, 법적 의를 위한 열심도 의미하며 그래서 특별히 인간의 지적 종교적 역할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이 잘못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의 정반대는 크리스토스 이에수스(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난 의의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을 제미아("해")로 만든다(빌 3:7-9). 그것들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삶의 기초로서 신뢰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 새로운 신뢰조차도 하나님의 행동이다. 육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육을 믿을 때만 나쁜 것이다.
(5) 죄의 주체로서 사르크스.
① 사르크스는 성령이 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는 능력이 아니다(빌 3:3; 롬 8:13 이하; 갈 4:23; 갈 5:18 이하).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관한 기사의 배경이 아닌 곳에서 행위의 주체로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성령은 사르크스가 있거나 없이도 지배적인 주체로 가끔 나타난다. 사르크스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믿는 것은 죄짓는 것이다. 성령의 경우에 힘의 효능은 규범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사르크스의 경우에는 역으로 규범의 사르크스는 힘의 사르크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사르크스의 일이 있게 된다(갈 5:16; 갈 5:19; 롬 13:14).
② 그렇지만 율법 준수는 그 자체 사르크스의 표현이다(갈 3:3; 갈 4:8 이하).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임재를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했다. 어떻게 그들이 이제 율법의 행위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로 마친다(갈 3:3)는 것은 할례를 암시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할례를 그리스도인 됨의 불가결한 절정('완성')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갈 4:8 이하에 의하면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③ 바울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인간적이며 지상적이며, 그것은 법적 의(righteousness)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르크스를 신뢰하여, 그것에 의해 안녕과 명성을 얻도록 유혹하는 이상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반대되는 성격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갈 5:13; 갈 5:17). 따라서 사르크스에 예속은 운명이 아니라 죄이다. 육에 맞춰 사는 삶은 육을 섬기는 것이며, 육적인 사고를 지닌다. 사르크스의 반대어는 아들의 형상을 취하시어 죄많은 육의 형태로,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어 육체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신 하나님이시다.
④ 롬 7:18; 롬 7:25에서 사르크스와 누스(nou'", 3563)의 분열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으나 이 묘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그리스도인 이전의 생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누스는 일시적이나 완전히 사르크스를 다스리거나 제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반대로 중요한 관찰자이다. 신자가 아는 것은 분열을 회고하는 것이다. 이 말의 요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 이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행위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바울은 처음에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실제적인 죄, 즉 자신의 의를 세우는 죄를 범하는 바리새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정당한 욕망도 즉시 자신의 육적 행위로 빠져든다. 따라서 순결한 의지의 순간들과 나쁜 행위의 순간들 사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행위는 심사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사르크스를 반대하는 의지와 구별될 수 있다.
(6) 사르크스의 정복.
롬 7:5; 롬 8:8 이하; 갈 5:24에 보면 신자들은 벌써 사르크스에 살지 않는다. 신자는 사르크스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메시지는 바울의 새롭고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그들은 금욕주의 등으로 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피하지 않는다(참조: 갈 2:19-20).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삶으로 들어간다(갈 2:20). 육의 일들은 비논리적이며 재위임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단일한 행동들로 쪼개어지지 않는다. 삶은 하나의 결정, 즉 사르크스냐 프뉴마냐 라는 질문에 의한 하나의 에르곤(일, 행위)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사르크스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믿음의 생활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7) 동사와 함께 사용된 카타 사르카타("육체대로", 육체를 따라).
① 고후 10:2 이하에서 언급하는 것은 특히 분명하다. 엔 사르키 페리파테인("육체에 있어 행하다")은 아주 단순하게 '한 사람의 육체로, 지상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도 적용된다. 단 한가지 잘못된 것은 사르크스에 대한 생각의 방향(orientation), 즉 더 이상 중립적으로 사르크스로 살지 않고 그 규범(norm)으로 생각하는 삶이다: 육체를 따라 행하거나 싸우는 것. 바울이 이것으로써 나타내는 바는 고후 11:18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보이는 것과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반대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이며(고후 11:17),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유사하게 고후 1:17에서 "육체를 좇아 경영하는 것"은 인간과 지상의 상황만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주의하지 않는 계획이다.
② 동일한 것이 훨씬 더 논란이 되는 구절인 고후 5:16에 적용된다. 카타 사르카는 명사 크리스토스가 아니라 동사 기노스케인과 어울린다. 본문에서 바울은 "외모로"(엔 프로소포),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자질과 아무라도 주장할 수 있는 자질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후 5:12). 바울 자신은 이제 이런 식으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고후 5:16은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준다. 기노스케인 카타 사르카는 인간의 기준으로, 즉 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인물로 간주되는 역사상의 예수님에 대해 알려진 것으로써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나타낸다.
③ 마지막으로 갈 4:23; 갈 4:29에서 게난 카타 사르카는 약속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인간적인 기능만으로 발생한 자손(세대)이다. 만약 이것이 바울에게 두 개의 디아데카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바울의 사상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르크스를 따르는 삶이냐 주님과 그의 약속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냐 하는 결정은 분명히 단지 순간의 단 한번의 결정인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것은 롬 8:4; 롬 8:12 이하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새로운 삶은 페리파테인 혹은 젠 카타 사르카의 포기로 묘사된다. 관용문구 타 테스 사르코스 프호로네인이 롬 8:5에서 사용될 때 이것은 그 의미가 지상의 차원에서 삶의 의식적인 영적 방향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개인적 결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기본적인 방향에서 야기한다. 생각은 에이나이 카타 사르카를 벗어나 발전한다.
(8) 골로새서에서 사르크스.
① 사르크스는 외부의 눈에 보이는 육체에 대해 중립적으로 사용된다(골 2:1; 골 2:5).
② 골 3:22에서 명사와 함께 쓰인 카타 사르카("육신의")는 인간 관계의 영역을 나타낸다.
난해한 골 1:24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당할 때의 사도의 육체적 존재를 가리킨다. 고후 4:11에서처럼 여기서 말하는 바는 바울이 육신으로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하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다(참조: 고후 5:19 이하).
③ 골 2:23에서 사르크스는 의미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④ 골 2:13에서 동격이 되는 사람은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방인이다. 그의 죄는 할례를 의지하는 것이라기보다 방탕함에서 드러난다(골 3:5). 그러므로 우선 매우 단순하게, 육체에 있어서 유대인과 구별되는 이방인에 대해 사용되는 아르코뷔스티아 테스 사르코스는 골 2:11의 할례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자들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본성을 묘사하긴 하지만 헬라 용법에서 유래하는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다.
⑤ 한 가지 새로운 표현은 소마 테스 사르크스이다. 골 1:22에서 이 표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 사용되며,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육체이다. 그러나 골 2:18에서는 누스 테스 사르크스("육체의 마음")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골 2:11은 믿음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적 몸"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골 2:13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의 용법이 반영되긴 하나 수정되며,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9) 에베소서의 사르크스.
① 사르크스의 용법은 에베소서에서 훨씬 더 단순하다. 엡 5:31에서 우리는 고전 6:16에서와 동일한 인용을 본다. 이리하여 엡 5:29에서는 아내를 사르크스(=소마, 엡 5:28)로 묘사한다.
② 엡 5:32에 전제되어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이러한 개념의 사용은 독특한 것이다. 엡 2:14은 지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육체를 언급한다.
③ 엡 2:11에서 육체의 할례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의 영향은 단지 언어학상으로 그러할 뿐이다. 왜냐하면 페리토메("할례")는 에드네("이방인")에 상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 사르키("육체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임시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종교가 속하는 지상의 인간 세상 안에서만 효력을 가지지만, 예수님의 공동체의 일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할례자에 대한 언급 역시 없다. 동일한 것이 레고메노("칭하는")를 부가함으로써 표현된다. 만일 우리가 엡 2:2에서 엡 2:3에 병행하는 개념을 주목한다면, 어떻게 사르크스가 점차적으로 개인의 귀신적(demonic) 특성을 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이 세상의 시대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유대인들 중에서 사르크스였다. 사람을 사르크스와 디아노이아이(마음)로 구분하는 것은 놀랍다. 그러나 디아노이아(민 15:39[70인역본])는 사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썩어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구약성경의 영향이 보인다.
④ 엡 6:12은 독특하다. 실질적으로 본문은 비육체적인 영의 영역을 육신의 영역으로부터 구별하는 후기 유대교 사상과 부합한다.
(10) 목회서신의 사르크스.
목회서신에서 사르크스는 딤전 3:16에 한번 나온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 구절은 롬 8:3; 골 1:22; 엡 2:14을 반영하는 한편 그리스도께서 즉 지상의 영역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이 구원 사건 자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밖의 다른 모든 구절들과 매우 다르다. 본문의 전제로서 천체에 대한 헬라의 개념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존재로서, 그가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심이 이미 하나의 기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특징적으로 이 개념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d) 히브리서의 사르크스
히브리서에서 사르크스는 요일 4:2에서처럼 예수님의 지상의 존재를 의미한다.
(1) 히 5:7에서 "그의 육체의 날"(한글개역, "그는 육체에 계실 때", 히 5:7)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하늘의 존재로 간주되며, 그의 지상의 삶은 단지 잠시동안이었음을 보여준다.
(2) 비슷하게 히 2:14에서 "혈육"(하이마 카이 사르크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외양으로 취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의 전통은 이 개념이 지적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 전체를 포괄하는 정도까지 해당한다.
그러나 유대의 표현에서 배제되지 않는 "실제상의" 특성이 지금 훨씬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늘의 존재가 혈과 육을 취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망에 예속하고, 따라서 구속을 필요로 하는 그는 천사들과 구별된다(참조: 히 2:16).
(3) 관련된 구절 히 12:9에서 "우리 육체의 아버지"는 "영의 아버지"와 구별된다. 이것은 영은 인간의 혼이라는 인류학적 이원론과 상관이 없다. 이 말씀은 오히려 히브리서에 매우 독특하게 존재하는 두 개의 영역 사고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의 아버지는 위의 세계가 복종하는 전능자이시고, 반면에 육의 영역에 속하는 아버지들은 지상의 아버지들이다.
(4) 히 9:10에서 "육체의 예법"은 거의 언제나 육체와 관련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이것은 히 9:13 이하에 의해 지지된다.
(5) 히 9:13 이하에서 육체의 정결은 쉬네이데시스("양심")의 정결과 대조된다. 여기서 정결은 분명히 제의적 정결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에서 한 역할을 하는(마 9:13; 마 12:7), 호 6:6; 삼상 15:22의 선지자의 말이 여기서도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이 외적 정결은 또한 일반적인 지상의 영역의 한 표시이다. 양심의 정결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의 성직자에게서만 발견된다. 그 성전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히 9:11). 그렇다면 우리는 히 9:10에서 "육체"는 "지상의 영역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외적 측면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내적 측면과 대조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에게 판단 받을 때의 인간과 대조된다. 그러므로 유일한 하늘의 대제사장은 이 내적 정결을 소유하신다.
(6) 히 10:20에서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그가 그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만들어 놓으신 휘장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십자가형인가? 그러나 소마가 이 의미에서 사르크스 대신 사용된다는 사실은 별개로 하고, 우리는 디아(diav, 1223)를 우선은 장소적으로, 그 다음으로는 구격으로 취하여, 휘장을 하나의 방해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르크스를 예수님의 인성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취한다면 마지막 두 주장이 그대로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제사에서 피를 바치려면, 혹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얻으려면 휘장이 찢겨져야 했듯이 예수님의 육체가 파괴되어야 했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르크스는 하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만나는 장소이지만, 하늘의 세계가 그렇게 감추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사르크스가 하늘에 접근할 길을 감추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가?
또한 그럴듯한 해석은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지나서(혹은 의해서) 신자를 인도하되, 이러한 방법으로 신자는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대제사장에게로 간다. 이 하늘의 대제사장은 지상적인 모든 것의 저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는 것이다.
(7)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지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죄의 사상은 결코 연관되어 있지 않다. 새 언약에 대하여 제의적 율법이 그러하듯이 하늘의 영역에 대해 지상의 영역은 부적절하고 일시적인 영역이며, 사망의 위협을 받으나 하나님에 대항하여 결코 반역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 단어의 역사(history)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바울 이상으로 발전하며, 롬 1:3 이하와 요한에서 가장 분명한 표현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e) 공동 서신의 사르크스.
(1) 약 5:3에서 너의 "살"(사르카스)이라는 복수가 사용된 것은 살점(살의 조각)과 같은 육체의 살부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참조: 계 17:16; 계 19:18; 계 19:21). 녹은 화농균처럼 악처럼 먹어 들어간다(A. T. Robertson).
(2) 베드로전서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거의 다 이미 언급된 것의 범주 내에 속한다.
① 벧전 1:24에서 파사 사르크스("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사 40: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육체 곧 인간의 힘은 풀과 꽃처럼 덧없는 것이다.
② 벧전 3:18과 벧전 4:6은 두 영역의 사상을 포함한다. 벧전 4:1 이하에서 사르키("육체의")는 단순히 땅 위에서 사는 삶의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중 부가어 파데인(고난 받는 것)인데, 그 이유는 지상의 고난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나타나므로, 벧전 3:18과 비슷한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핍박 중에서 육체의 고난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벧전 4:1a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역시 지상의 영역과 하늘의 영역의 대조가 나타난다.
③ 벧전 3:21에서 히브리서에서처럼 외적 측면으로서의 사르크스를 쉬네이데시스(suneivdhsi", 4893: 양심)와 구별하는 용법을 발견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3) 유다서에서 사르크스는
① 유 1:7에서 "이상한 육체"(한글 "다른 색")와의 간음은 롯을 방문한 천사들에 대한 소돔인들의 음욕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인간과 천사들의 다른 "육체"이다. 이것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될 때만이 악한 것이다. 본문은 벧후 2:10에서 채택되지만 에테라("다른")는 빠져버리고 엔 에피뒤미아 미아스무("더러운 정욕")가 부가된다. 베드로후서는 육체적 정욕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육체에 대한 금욕적 멸시를 향한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헬레니즘적 캐치 워드(표어)인 에피뒤미아이 사르코스("육체의 정욕")는 유 1:16의 단순한 에피뒤미아("정욕")를 대신하여 벧후 2:18에서도 도입된다.
② 유 1:6과 유 1:26은 둘 다 매우 모호하다. 두 곳에서 모두 사르크스는 (비자연적인 성적?) 죄로 더럽혀진, 실제적인 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가 입은 겉옷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 견해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적 중심이든 영적 중심이든 간에 이 더럽혀짐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는 사상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은 너무나 간략하여 어떠한 확실한 해석도 허락지 않는다.
(f) 요한의 기록에서 사르크스.
(1) 요한복음.
요한복음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바울의 용법과 매우 다르다. 사르크스가 요한복음에서 상대적으로 드물게 사용된 점에서도 나타난다(13회).
① 요 17:2에 나오는 파사 사르크스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가지 새로운 점은 천부께서 인자에게 모든 육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② 요 8:15에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비난하여 "너희는 육체(덴 사르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사르카에 관사가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히 바울의 용법을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 요 8:14에 따르면 그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무지(blindnes)의 표시이다. 동일한 대조가 요 7:27에도 언급되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는지를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 다음과 같은 경고가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요 6:42을 보면 이 언급이 예수님께서 청중이 잘 아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하여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특히 그의 혈통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판단을 가리키지만, 함축성 있는 바울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관련해서만이 잘못된 것이다. 혈통과 태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한, 이러한 말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지상의 것들을 판단할 때 아주 적절한 지상의 영역이지만, 다른 영역에서 오신 예수님을 판단하고자 할 때는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죄악된 것이라든가 죄로 유혹하는 것의 뉘앙스는 전혀 없다.
③ 요 3:6에 사르크스는 인류에 대해 말하며, 인류에서 태어난 모든 것이 사르크스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단어는 그것이 사용된 대조적 병행구절로부터 그 내용을 획득한다. 사르크스 곁에 나란히 놓인 것은 프뉴마이다. 사르크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러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지상의 영역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이 죄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 15:22-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우주(cosmos)는 죄가 된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사르크스로서의 존재 상태에서 세상은 파멸로 예정된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지상의 더 낮은 영역으로서 사르크스는 그 정도까지 그것 안에서 단순히 살아가는 자를 결정하며, 따라서 그것은 거의 하나의 능력의 특성을 취하는데, 특히 그것은 또한 임신과 출생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르크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신앙을 통해서만이 그 죄악된 특성을 얻으며, 죄로 가득하게 된다.
그것은 불신앙을 결정한 후에는 결코 사르크스로 불리지 않는다.
요 1:13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과 구별되는 자연적 출생의 원리이다. 의지는 사르크스에 속하므로 사르크스는 하이마타보다는 아네르에 병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부학상으로 특정한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소유하지 않은, 하나님에게 맞서 서있는 자로서의 인간 전체를 포괄한다.
④ 요 1:14에서 사르크스 에게네토("육신이 되어")는 로고스가 지상의 죄를 친히 지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계시가 일어난 장소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계시가 인간의 형태를 취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자기 계시는 옷과 같이 인간의 형태를 거저 입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와 동일하게 되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아버지의 독사(영광)를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것도 기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순종으로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성육신의 신학적 토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비난하는 세상과의 우주적 투쟁에서 신앙이 신적 그노시스의 단순한 부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인격의 완전한 헌신을 포함하는 마르튀레인(증거)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⑤ 요 6:63의 대조는 요 3:6의 대조일 수 있지만 요 6:51-58을 비추어 볼 때 요 8:15의 대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요 6:63은 요 8:15의 비슷한 논쟁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요 6:63은 다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의 사르크스, 즉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고려하는 자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천부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전도만이 프뉴마(영)요 조에(생명)이다.
본 절은 성만찬에서 먹은 사르크스를 '불멸의 약'으로 잘못 이해하는 성례전주의자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마("피")와 결합된 6겹의 사르크스는 성찬식과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먹을 때, 그것은 인자가 육체로 오심이 오직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육(즉 세상) 안에는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자는 이에 의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선물로 살아갈 것임을 고백한다.
(2) 요한 서신들.
① 요일 4:2; 요이 1:7에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구분점이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데 이용된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시인한다. 요한의 반대자들은 결코 계시자(Revealer)와 그들이 거절한 육신을 더 이상 연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영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다(요일 4:2; 참조: 요이 1:7).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내면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실재가 결코 아니었다. 말씀과 행위는 하나가 되어 상호 해석해주며, 하나님은 육체적 결과까지도 포함한 행위로만 비싼 대가를 치르시면서 역사의 무대에 개입하셨다. 따라서, 요한 이외의 다른 신약 성경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거나(벧전 4:1)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딤전 3:16; 참조: 눅 24:39; 롬 8:3; 엡 2:15; 히 5:7).
② 요일 2:16에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표현을 본다. 여기서 병행어구는 "안목의 정욕"이다. 여기서 세상을 믿지 말라는 경고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보다 강한 경고이며, 이 세상에는 육적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병행어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르크스는 욕망을 자극하는 감각 기관으로 여겨진다.
(참조: E. Schweizer; A. C. Thiselton; H. Seeb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