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시고 우루벨라 옆에 있는 나란자라강가의 무찰린다 나무 아래에서 7일을 앉아 계셨다.
그 7일 동안 때 아닌 비바람이 몰아 치자, 나무의 왕 무찰린다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부처님 주위를 일곱겹으로 에워싸고 그 위로 거대한 차양을 펼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고귀한 이가 춥지 않기를, 높은 습도로 불쾌하지 않기를... 날벌레와 내적 동요, 내부적 열기로 감각적 인상을 자아내지 않기를..." 일곱날이 지나 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나시고 하늘이 개이자, 무찰린다는 에워싼 형상을 풀고 젊은이의 형상으로 부처님 앞에 서서 제자에 상응하는 인사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신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법을 보고 알아 만족하는 이에게 무상함은 행복이다. 숨결을 머금은 것들이 평안하길 소망함도 행복이다. 자아관념에의 갈애를 평정하는 관조 역시 행복이다. 미세한 자아의식을 살핌만이 행복을 여읜 행복이다.
* 무찰린다 나무 : 제목 : Mucalinda : 처음 번역할 때는 [Udana 01-04]의 '니그로다 나무'를 단순히 '보리수 나무'라고 번역했었다. 그렇게 번역했던 이유는 보리수와 니그로다 그리고 무찰린다는 모두 뱅갈고무나무(뱅갈보리수)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뱅갈고무나무(니그로다 나무)'는, 늘어진 나무가지가 땅에 닿으면, 땅에 닿은 부분에서 뿌리가 자란다. 그 결과 땅에 닿은 나무줄기는 독립적인 나무처럼 되며, 니그로다 나무는 옆으로 퍼져 나간다. 이처럼 하나의 나무가 여러 나무이기도 한 것이 뱅갈고무나무의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나무 그늘이 아주 크고 시원하여 양치기들이 뱅갈고무나무 아래에서 자주 휴식을 취했기에, [Udana 01-04]의 빨리어본에서는 '아자빨라 니그로다(양치기의 니그로다)'라고 되어 있다('양치기'보다는 '염소치기'가 단어에는 부합한다. 그런데 염소치기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생소하므로, 그냥 양치기로 표현하였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계셨는지는 전승에 따라 좀 차이가 난다. 상좌부는 4주라고 설명하고, 대승 계열은 7주라고 설명하는 듯 하다. 상좌부 전승은 순서 대로 보리수 나무, 니그로다 나무, 무찰린다 나무,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로 옮겨가며 각각의 나무 아래에서 1주씩 계셨다고 설명한다. 대승 계열에서는, 언급하는 나무는 네가지로 동일하지만, 순서나 머문 기간과 관련해 여러 전승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보리수 나무의 가지가 지면에 닿아 뿌리 내린 것을 각각 다르게 이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원론적인 불교 전승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이름하기로 한다. [Udana 01-04]에서도 '니그로다 나무'로 정정하였다.
* 나무의 왕 : Naga_raja이다. raja는 왕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가(Naga)는 뜻이 여럿이다. 나무, 뱀(특히 코브라), 용, 코끼리에서 강, 심지어 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다가 뱀 혹은 '나무(cf.우주수)'란 이미지를 매개로 번개와도 연결된다. 보통 여기서의 '나가'는 뱀 특히 코브라를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나가의 왕'은 '뱀의 대왕'인 셈이다. 한문 경전에서는 용왕으로 번역되어 있다. 인도 고대 신화에 따르면, 브라흐마가 뱀들의 거주지를 지하로 정하면서 사악한 신념을 지닌 사람만을 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나가'는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여하튼 인도 고대 신화에 따르면, 뱀이 물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것은 바른 법과 함께 하는 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기독교 전승에서도 유사하다. 고대 신화에서 뱀은 주로 대지의 비밀 혹은 초월적 지식을 간직한 존재로 묘사된다. 성경에서 사탄이 뱀의 형상을 하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는 것 역시 뱀의 이러한 신화적 성격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찰린다'는 나무의 이름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나가의 왕'을 '나무의 왕'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무'가 가지는 신화적 이미지로 볼 때, 사실상 의미의 차이는 거의 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까닭은 게송과 본문의 유기적 이해에 보다 용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위 '현실'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앉아 계시는 7일 동안 비바람이 몰아 쳤는데, 위에서 서술한 뱅갈고무나무의 특성에 따라 병풍처럼 펼쳐진 나무 아래에 계셨기에 비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중관학파를 개창한 '나가르쥬나'의 이름이 '나가'와 '아르쥬나'가 합쳐진 단어인데, '용수(龍樹)'라는 한문표기는 뜻을 번역한 것이다. 아르쥬나는 '팔' 혹은 '(굵은) 나무 가지', '나무 줄기(나무의 몸통)'를 의미한다. '나가'라는 단어의 뜻을 '나무'라고 해석하면, '나가르쥬나'는 '(불법이라는) 나무에서 가장 굵은 나무 가지' 혹은 '(불법이란) 나무의 몸통'을 의미하게 된다. 즉 '나가르쥬나'라는 이름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 빨리어 구절은 "sakabhavana nikkhamitva"이다. nikkhamitva는 '(어디로부터) 물러나 드러나는'이란 뜻 정도이다. sakabhavana는 saka_bhavana인데, saka는 '스스로의(자기 자신의, 자기 소유인)'란 뜻이다. bhavana는 수용적 간주(12연기의 '유')를 의미하는 bhava와 관련이 있는데, '거주지'를 의미한다. 주로 <정>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 집중 혹은 자각에 따른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하다면 '집중(사마따)'과 관련하여서는 '고요하고 안정된 내적 상태'라는 뜻이고, '자각(사띠)'과 관련하여서는 '통찰(지혜)'를 의미한다. 위의 <경> 본문에서의 뜻은 선정(집중)과 관련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무엇에 집중한 결과, 스스로 그 무엇이 되어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칭한다. bhava와 달리 bhavana는 긍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이지만, 선정과 관련하여선 본질적으로 우리가 인간의 몸에 대해 일으키는 수용적 간주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을 자신으로 간주하는 작용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소위 공무변처등 무색계선정이라 이름하는 bhavana가 비록 일상의 거친 '자아 의식'과 같지는 않지만, 미묘한 산냐(동일시, 간주)와 함께 하는 상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는 수용적 간주(12연기의 '유')에 따라 인간의 몸을 거주지로 정한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간주는 거의 확고부동하다. '인간의 몸'이, 일상의 우리에겐 bhavana인 셈이다. 그래서 bhavana는 거주지라는 뜻도 가지는데, 대부분의 영어본은 거주지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sakabhavana nikkhamitva]란 구절은... 나가의 왕 무찰린다가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거친 자아 의식보다 높다고 이름할) 어떠한 수용적 간주 상태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어떠한 상태로 드러났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무찰린다를 나무로 보고 있다. 나무는 극히 고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고요함에서 벗어나 나무가지로 부처님 몸을 감싸고 부처님 머리 위를 가렸다는 뜻으로 보았다. 개인적으로 굳이 분별하자면, 대승의 관점에 따라 식물도 윤회라 이름할 현상에서 배제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찰린다를 '나무의 영(나무의 신)'으로 보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cf. 상좌불교는 식물의 윤회를 긍정하지 않는다).
* 높은 습도로 불쾌하지 않기를... : 빨리어 구절은 [ma Bhagavantam unham]으로, "고귀한 이가 덥지 않기를"이다. 그런데 '때 아닌 7일간의 비바람'을 생각하면, '덥지 않기를'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높은 습도로 불쾌하여 더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솔직히 '덥지 않기를'은 벌레에 물려 가려워서 열이 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물파스 광고 같기도 하고 좀 우스꽝스러워서... 하하하
* 날벌레와 내적 동요, 내부적 열기로 감각적 인상을 자아내지 않기를... : 빨리어 구절은 [ma Bhagavantam damsamakasavatatapasirimsapasamphasso]인데, "고귀한 이가 damsamakasavatatapasirimsapasamphasso하지 않기를"이라는 뜻이다. damsamakasavatatapasirimsapasamphasso는 damsa_makasa_vata_tapa_sirimsapa_samphasso이다. 여기서 damsa는 '작은 날벌레, 깔따구'이고, makasa는 '모기'인데, damsa_makasa는 '사람을 물지 않는 작은 날벌레와 사람을 무는 작은 날벌레'로 결국 작은 날벌레를 총칭한 것으로 보인다. vata_tapa는 '바람과 열기'를 의미하는데, 위에서 이미 [고귀한 이가 춥지 않기를, 높은 습도로 불쾌하지 않기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의 vata_tapa는 내적인 동요나 내부적 열기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내부적 열기는 명상 중 곧잘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영역본은 바람과 태양으로 번역했는데, 7일간 비바람이 몰아 쳤다고 되어 있음에도 태양이 나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sirimsapa는 '수공업자, 만드는 자'를 의미하고, sam_phasso는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즉 sirimsapa_samphasso는 '내부적 인상을 자아내는 무엇'을 의미한다. 따라서 damsamakasavatatapasirimsapasamphasso는 '날벌레, 내적 동요와 내부적 열기로 내부적 인상을 자아내는 현상'을 칭함을 알 수 있다.
* 제자에 상응하는 : namassamano인데, namas는 '귀의한다'는 뜻이고 samano는 '유사한'이라는 뜻이다. 즉 '귀의하는 것에 유사한'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여타의 부분은 각주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이제 게송을 살펴 보자. 빨리어 구절과 한글 해석은 다음과 같다. Sukho viveko tutthassa sutadhammassa passato Abyapajjam sukham loke panabhutesu samyamo Sukha viragata loke kamanam samatikkamo Asmimanassa yo vinayo etam ve paramam sukham 법을 보고 알아 만족하는 이에게 무상함은 행복이다. 숨결을 머금은 것들이 평안하길 소망함도 행복이다. 자아관념에의 갈애를 평정하는 관조 역시 행복이다. 미세한 자아의식을 살핌만이 행복을 여읜 행복이다.
첫째 구절 : Sukho viveko tutthassa sutadhammassa passato : 법을 보고 알아 만족하는 이에게 무상함은 행복이다. tutth(a)_assa로 '만족하는 무엇'라는 뜻이고, suta_dhammassa는 '법을 안다(듣는다)'는 뜻이며, passato는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tutthassa sutadhammassa passato"는 "법을 알고 보며 만족하는 무엇"을 의미한다. viveko는 viveka의 변형인데, viveka는 '벗어남'을 의미한다. '벗어남'에는 물질적 벗어남, 정신적 벗어남, 재생의 벗어남 즉 12연기에서 '내부 결정(취)'의 벗어남의 세가지가 있다. 출가하여 사문이 되는 것 역시 물질적 벗어남의 한 유형이다. 1902년 런던판은 viveko를 기본적으로 출가 사문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찰린다의 "스스로에게서 벗어나(saka_bhavana nikkhamitva)"를 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bhava가 '취 연 유'라는 연기에서 '유(수용적 간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해석함으로써 본문과 게송이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연결성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데, <경>의 본문에서 설명하는 무찰린다의 행위를 부처님께서 살피시고 찬탄하는 내용이 게송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bhavana는 수행의 하나인 <정>의 집중과 관련하여 비록 수용적 간주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bhavana에서 벗어남'은 수행의 하나인 <정>의 자각과 관련한 요소이다. 바로 '비빠싸나(위빠싸나)'라는 이름과 관련한다(보다 엄격하게는 삼마빠띠). 무상하기에 비빠싸나도 가능하다. 그래서 무상함이란 표현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둘째 구절 : Abyapajjam sukham loke panabhutesu samyamo : 숨결을 머금은 것들이 평안하길 소망함도 행복이다. Abyapajjam은 '악의를 여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loke는 '이 세상의'란 뜻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 pana_bhutesu에서 pana는 호흡이다. 빠나는 산스크리트어의 쁘라나(prana)인데, 쁘라나는 산소라는 물질적 측면은 물론 어떤 생명과 관련한 기운의 의미도 있다. '기'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bhutesu는 대지를 거니는 것들을 의미한다. 결국 pana_bhutesu는 '숨결과 함께 대지를 거니는 것들'이다. samyamo는 samyama의 변형인데, samyama는 '절제, 자기 통제, 금욕'등의 의미이다. 결국 "panabhutesu samyamo"는 '숨결과 함께 대지를 거니는 것들에 대한 자기절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두번째 구절은, "숨결과 함께 대지를 거니는 것들에 대한 자기 절제로 악의를 여의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뜻이 된다. 바로 무찰린다가 부처님의 몸을 감싸는 행위를 칭하는 것이다.
셋째 구절 : Sukha viragata loke kamanam samatikkamo : 자아관념에의 갈애를 평정하는 관조 역시 행복이다. "kamanam samatikkamo"는 '갈애를 극복하여 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sam(a)의 의미를 보다 살려 '갈애를 평정하는'으로 번역하였다. viragata는 '사라짐, 욕망의 부재'라는 의미 이외에 '관조, 응시'등의 의미가 있다. 일어난 것을 놓치면 그것에 휘둘리게 된다. 하지만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 관조하면 휘둘리기만 하지 않는다. 그럼 '자아관념'이라는 표현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는 네번째 구절과 관련이 있다. 네번째 구절로 바로 들어가 보자.
넷째 구절 : Asmimanassa yo vinayo etam ve paramam sukham : 미세한 자아의식을 살핌만이 행복을 여읜 행복이다. paranam은 '최상의'라는 뜻이다. 그런데 para의 의미가 피안(저쪽 언덕)과 관련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최상의'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많은 것은 인도 종교의 특징이다. 이전 [Udana 01-06]에서 annata(산스크리트어 ajnata)가 '무지'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최상의 지혜'라는 뜻을 가질 수도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비슷한 예로 vedanta는 '앎의 끝'이라는 뜻이다. '앎의 끝'은 '무지'를 의미할 수도 있고 '최상의 지혜'를 의미할 수도 있다. 고전 샹키아에서도 알 수 있듯, 인도에서 '궁극의 지혜'는 '지혜 없는 지혜'이기에 이러한 표현들이 많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행복을 여읜 행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Asmi_manassa는 '내가 있다는 관념'을 의미하는데, 명시적인 관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잠재적이고 미세한 자아 의식을 의미한다. 즉 일상에서의 자아의식이라기 보다는 bhavana의 상태일 때 있는 자아의식이다. 그리고 vinayo는 '종식시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훈련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수행을 하지 않고 종식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그런 의미도 있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경>의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단어들이 서로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넷째 구절에 비춰 셋째 구절의 갈애는 일상의 자아관념으로 좁게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무찰린다의 행위와 연관되어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무찰린다는 bhavana에서 벗어나는 행복과 함께 하여 Abyapajjam이라는 행복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Abyapajjam의 행위 양태 즉 부처님의 몸을 보호했음에도 그러한 행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나는 ~이다"라는 자아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곤 그 관념에 기대어 우쭐해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이 스스로를 내세우려는 마음을 관조하여 평정한 무찰린다는, 우쭐해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 없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인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viragata의 행복과도 함께 하였다(셋째 구절). 하지만 무찰린다는 끊이 없이 형상(vanna)을 취한다. 특정한 bhavana에서 벗어나는 행복과 함께 하지만, 무찰린다는 또 다른 bhavana를 취할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러하다는 점은 관조하지 못하고 있다. 무상함은 관조하지 못하고 있다(네번째 구절). Asmimanassa와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이다. cf. 세번째 구절의 "kamanam samatikkamo"를, (특히 'loke : 세계에서'와도 관련시켜)... 보다 좁게 '애욕(kama)'을 극복하여 넘어 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음을 제외한 다섯가지 감각기관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을 넘어 가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세번째 구절은... ['세상에 대한 욕망' 즉 '외적 욕망'을 극복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은 행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 네번째 구절은... '내적 욕망' 즉 '외적 대상과 관련한 다섯가지 감각기관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감각기관과 관련하는 욕망'을 다루는 내용이 된다. 그러한 '내적 욕망'은, 당연히 '나는 있다는 견해'와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용에서, 다음의 측면에 주의해야 한다. '욕망'은 행온과 관련하고, 행온은 심식의 대상이므로, 본질적으로 내적 욕망이 아닌 것은 없다. 단지 여기서는 필요에 따라... 눈, 코, 귀,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의 대상과 관련한 내적 욕망을, 외적 욕망이라 이름하였고... 그 이외의 대상과 관련한 욕망을, 내적 욕망이라 이름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신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법을 보고 알아 만족하는 이에게 무상함은 행복이다. 숨결을 머금은 것들이 평안하길 소망함도 행복이다. 자아관념에의 갈애를 평정하는 관조 역시 행복이다. 미세한 자아의식을 살핌만이 행복을 여읜 행복이다.
첫댓글 내용을 약간 보충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군요... (^~^ 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