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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7일, 서울 서강대 다산관 503호에서 진행된 '2011 한국사회포럼' 세 번째 단체 세션 행사인
'기본소득,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 토론회에서
금민 운영위원장이 발표한 글입니다. 제목은 '기본소득의 정치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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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정치철학
<기본소득의 정치철학적 정당성: 실질적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에서 바라본 기본소득>
진보평론 45, 2010 가을호, 국문 요약
금민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기본소득’(basic income)은 i)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ii) 어떠한 조건과도 상관없이, 즉 자산이나 소득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노동 여부나 노동할 의사도 묻지 않고, 단지 사회구성원이라는 자격에만 근거하여, iii) 인간다운 생활에 충분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참여가 가능할 정도의 액수로, iv) 국가나 정치공동체로부터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아래에서 다룰 주제는 기본소득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 이론(theory of justification)은 과연 무엇인가이다.
I. 실질적 자유로서의 기본소득: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론과 자유지상주의
자유의 관점에 입각한 기본소득의 정당화는 판 빠레이스(van Parijs)의 작업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기본소득에 관한 현대적 논의를 이끌어 온 판 빠레이스는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Real Freedom for All)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받아들일 수 없는 불평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자유의 중요성 사이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제1장에서 그는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 자유의 목표들, 자유 개념을 구성하는 전제인 강제 개념의 두 유형,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의 구분 등을 특유의 분석적 엄밀함 속에 검토한다. 그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유 개념을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로서 재구성한 후, 자신의 입장을 ‘실질적 자유지상주의’(Real-libertarianism)라 규정하며 단순히 평등주의적일뿐인 그 외의 ‘좌파 자유지상주의’(Left-libertarianism)와 구분한다. 소유(ownership) 개념을 자원에 대한 모두의 ‘동등한 몫’(equal share)으로 정식화하는 힐럴 스타이너(Hillel Steiner)와 비교할 때, 자유 및 권리 개념에 관한 판 빠레이스의 재구성은 ‘자기소유권의 원칙’(principle of self-ownership)과 ‘최소수혜자 우선의 원칙’(principle of leximin priority) 모두를 더 많이 보장할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상관관계를 더욱 정연하게 만든다. 이처럼 재구성된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의 개념은 정의(Justice) 개념의 고유한 기초인 개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종류의 연대성의 지평을 열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빠레이스의 자유 개념은 자유지상주의의 지반 위에 수립된 논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본소득의 정당화에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 빠레이스처럼 자유지상주의 틀 안에서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되물을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는 ‘자기소유권’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사회에 대한 정당성 준거를 확보하기 위한 이와 같은 방식은 모든 종류의 자유지상주의의 유적(類的) 특성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소득의 정당화를 위한 더 적절한 논의 지평을 달리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II. 대지와 지구에 대한 공유자 자격과 기본소득
통치론 제2부(Second Treatise) 중에서 자유지상주의 논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부분은 제5장 「소유에 관하여」(Of Property)이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 논변이 거의 주목하지 않은 부분은 소유권의 입론에서 로크가 “자연의 단일한 공동체의 공유”(sharing all in one community of Nature), 곧 “만물에 대한 공동소유”(community of all things amongst the sons of men)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소유권 장(章)의 첫 절인 § 25에서 로크는 한편으로 원천적인 공유제를, 다른 한편으로 자기보존(self preservation)의 권리를 소유권의 두 가지 전제(premises)로 제시한다. 이어서 § 26에서는 자기보존권은 자기보존을 위한 수단에 대한 권리를 당연히 파생시킨다는 점을 논하며, § 27에서는 이와 같은 수단에 대한 권리로서 인격, 신체, 행위, 노동에 대한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을 제시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유 획득에 관한 노동이론’(labor theory of property acquisition)을 전개한다. 로크는 외적 사물에 노동을 첨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외적 사물에 대한 소유권으로 확장된다는 논변, 소위 ‘합체 논변’(mixing argument)을 고안한다.
로크에게 사적 소유는 ‘합체 논변’의 출발점인 자기소유권 이외에도 또 하나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 바로 원천적 공유 개념이다. 인격, 신체, 활동, 노동에 대한 자기소유권이 외적 대상에 대한 소유권을 성립시키는 적극적 근거라면, 공유는 그러한 소유권의 성립에 대해 가능 근거로 작용한다. 로크의 공유 개념은 현실적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인 자격의 문제이다.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대지와 산물에 대해 원천적 공유자의 자격을 가지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동에 의거하여 사적 소유를 획득할 수 있다. 로크의 공유 개념에는 용익권과 같은 긍정적 공동체 특유의 ‘포용적 권리’(inclusive rights)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공유지의 이용이란 노동을 의미하며, 노동은 곧바로 ‘배타적 권리’(exclusive rights)인 사적 소유권을 성립시킨다. 그런데 잠재적인 자격의 관점에서 원천적 공유는 사적 소유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적 소유에 대해 유보 조건을 설정하는 제한 근거(argument of limitation)로도 나타난다. 공유 개념은 통치론 제2부 §§ 27, 31, 34, 46에서 소유의 한계를 정하는 조항인 ‘충분성 조건’(sufficiency-proviso)으로 되살아난다. 즉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적 소유권을 수립할 기회가 모두에게 충분할 정도로 남아 있는 조건, 곧 로크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나 자유롭게 개간할 수 있는 미개간지가 충분히 남아 있는 경우에만 노동에 의한 사적 소유가 정당화 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적 소유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충분성 조건'의 함의이다. ‘하인’(servant)의 노동생산물은 주인의 소유라고 말한 임노동 옹호자 로크는 독립적 노동에 대한 대체 수단인 임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충분성 조건'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다. 인디언 추장과 영국의 날품팔이의 처지를 대비하는 통치론 제2부 § 41에서 로크는 사적 소유권에 기초한 물질적 생산의 발전이 ‘충분성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 때 로크는 완전고용이 가능하다면 '충분성 조건'이 충족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조건이라면 - 로크에 따를 때에도 - 실업자에 대한 선별적 복지는 정당화 된다. 여기에서 정당화의 기초는 바로 사적 소유의 한계인 '충분성 조건'이다. 로크가 ‘자선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며 통치론 제2부 § 5에서 “정의와 자선”을 동등한 두 원칙으로 공표하지만, 소유권이 로크 정의론의 중심이라는 점이 바뀌지 않는다. 로크의 정의론은 ‘소유론적 정의론’(proprietary theory of justice)의 일종이다. 노동성과에 따른 소유만이 정의의 영역에 속하며, 자선은 이와 같은 정의의 영역 외부에서 오직 보충적인 원칙으로 등장한다. ‘자선의 원칙’을 통해서는 질병이나 사고, 무능력과 같은 특수한 처지에 입각한 조건적인 공공부조만이 정당화될 뿐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구빈법부터 현재의 선별적인 사회수당까지는 이로부터 정당화 될 수 있겠지만 보편적인 자격에 입각한 기본소득은 전혀 입론될 수 없다. 공공부조와 같은 '특수하고 조건적 권리'(special-contingent rights)는 입론되지만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 권리'(general-noncontingent rights)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재구성은 통치론 제2부 § 41의 '인디언 추장' 논거에 의지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논거는 경험논거이지 규범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충분성 조건’의 불충족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권리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은 경험 논거가 아니라 규범 논거를 통해 답해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로크가 회피해 버린 문제를 그의 논증 구조 전체의 일관성을 지키면서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나타날까?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사고 실험'이 요청된다. 그러한 '사고 실험'은 필요에 따른 분배원칙을 로크의 체계 안에서 재구성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자기보존권으로부터 필요에 따른 분배권을 정당화하는 시도는 로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권리의 정당화를 위한 구조는 로크의 체계에 대해 열려 있다. 노동과 소유권에 대한 로크의 강조는 필요에 따른 분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함축하지 않으며 그러한 권리의 논증 줄기가 로크가 직접 전개한 다른 논증 줄기들과 전혀 모순되지도 않는다. 필요의 원칙을 도입하는 ‘사고 실험’은 로크의 체계를 다음과 같이 변형시킨다. 모든 사회구성원은 자기보존권에 기초하여 한편으로 노동에 따른 소유권을, 다른 한편으로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만큼,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권리를 가진다. 만인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원천적인 공유자로서의 자격은 노동성과에 입각한 소유권에 대해서는 가능 근거로서,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권리에 대해서는 적극 근거로 작용한다. 이처럼 기본소득과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상호 동등한 두 가지 분배원칙으로 간주하면 필요와 성과라는 두 개의 독자적 원칙에 근거한 이원적인 분배정의론이 구성된다. 필요의 원칙을 도입한다 해도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원칙과의 관계에서 양자는 상호독자적이며, 상호배척적이지 않으며 상호용인적일 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분배정의론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구성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로크가 전개한 소유권 중심적이고 권리 중심적인 일원론적 정의론을 명백히 넘어선다. 로크의 체계 ―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의 기본적 논증구조는 필요의 원칙에 대해 비록 내적으로 열려 있으나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정의론의 문턱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거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의를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사고하는 자유주의적 전통 때문이다. 현대적인 논쟁에서도 정의(justice) 또는 그 지극히 협소한 변형으로서 호혜성(reciprocity)은 기본소득에 대한 분배정의론적 정당화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원래 배분적 정의(iustitiva distributiva)의 문제는 전체의 것을 개별에게 나눠줄 때 척도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며, 여기에서는 개별적인 노동성과 뿐만 아니라 인류나 사회구성원과 같은 평등하고 공통적인 자격도 충분히 척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원래 출생, 신분 등과 같은 차별적인 기준으로부터 로크에 이르러서 좀 더 공정한 기준인 노동성과로 분배정의의 척도가 바뀐 것뿐이다. 따라서 노동성과라는 기준에 평등한 공통자격이라는 기준을 덧붙인다고 해서 분배정의론의 구조가 무너질 이유는 전혀 없다. 분배 정의는 공동체와 개인 간의 관계의 문제이지 교환적 정의(iustitiva commutativa)처럼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원칙과 교환적 정의의 기준인 등가원칙을 같은 것으로 보고 혼동하는 것, 또는 기본소득은 등가원칙에 대한 수정을 의미한다고 확대 해석한다면 자유주의적 논변의 틀에 갇히게 다. 기본소득에 전제된 정의원칙, 곧 공통적인 자격에 입각한 평등 분배라는 원칙은 교환적 정의의 문제와 논리적으로 무관계할 뿐만 아니라, 배분적 정의의 기준에 관련해서도 모두에게 평등한 공통자격이라는 기준이 보충되었을 뿐이며 성과에 따른 분배원칙 그 자체를 정지시키지도 않는다. 단지 성과에 따른 분배원칙은 더 이상 전일적으로 관철되지 않으며 제한될 따름이다.
필요의 윤리를 자유주의 전통 안에서 최대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판 빠레이스의 경우처럼 자유 개념을 실질적 자유로 확장하는 작업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확장은 기본소득을 자유의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최선의 길이다. 하지만 위에서 시도한 로크 분석의 시사점은 대지에 대한 모든 개인의 원천적 공유(original community)야말로 ― 그것이 조건적인 소유권이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든 ― 모든 실질적 자유의 기초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공유 개념에는 근대 공화주의에 특유한 ‘공적 자유’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원천적 공유 개념의 재구성을 통해 협소한 자유지상주의의 지평을 벗어나는 길이 ‘실질적 자유지상주의’(Real Libertarianism)보다 더 적절하게 기본소득을 모든 개인의 무조건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로서 정당화하는 길이다. 판 빠레이스의 ‘실질적 자유로서의 기본소득’은 그의 출발점인 자유지상주의적 지반을 더 많이 벗어날수록 더 분명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III. 공화국: 원천적 공유자 자격과 만인의 보편적 공통성
원천적 공유자로서의 만인의 동등한 자격 개념은 공화주의 담론에서는 일체의 특수 규정(particularity)을 제거한 보편적인 ‘공화국’(universal republic) 개념, 곧 구성원 모두의 보편적 공통성(the universal-common)의 개념에 상응한다. 대지에 대한 만인의 공유는 모든 사람이 공유자로서의 보편적 자격에서 공통성을 가진다는 점, 곧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공통성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 담론은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폴리스(Polis), 곧 '공적인 것'의 우위를 근본 명제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이다. 두 번째는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군주론(Ⅱ Principe)과 로마사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 등장하는 ‘덕성’(virtù)과 참여의 공화주의이다. 세 번째는 자유를 '공적 자유', 곧 ‘자기입법’(Selbstgesetzgebung)의 자격으로서 파악되고 자기구속(Selbstbindung)의 개념과 동일화 하는 루소와 칸트의 근대 공화주의이다. 기본소득은 이와 같은 공화주의 담론의 갈래들로부터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기본소득의 정당화를 위해서 루소와 칸트의 근대 공화주의는 각각 고유한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난점은 모두 근대 공화주의의 두 유형이 가지는 고유의 탁월성과 일치한다. 루소 공화주의의 핵심인 소유 불평등의 시정과 소유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개인들의 자립성은 자유에 대한 현실적인 기초를 강조하는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이 효과는 기본소득의 정당화에 대해서는 장점이자 동시에 난점이 된다. 즉 소득의 재분배라는 점에서 기본소득은 옹호되지만, 자산재분배도 마찬가지로 옹호되며 기본소득만을 위한 정당화 논거가 되기 힘들다. 캐롤 패트맨(Carol Pateman)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루소에게 중요한 문제는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루소의 논지를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루소의 논지는 금융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과도할 정도로 불평등하게 집중된 상태에 대한 시정을 옹호한다. 하지만 소유관계의 시정은 기본소득을 통한 분배방식의 시정과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물론 자산불평등을 시정하는 조치를 통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면 루소의 논변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투기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나 직접적 규제 형태로 이루어지는 시정조치가 루소적 핵심이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재원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핵심인 것은 아니다. 아울러 ‘필요에 입각한 동등한 분배’가 아니라 개인의 자립적인 삶이 루소의 핵심이다. 루소는 타인의 자선에 의해 유지되는 삶은 가장 비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일견 충분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듯하다. 특히 기본소득은 ‘보편적 자격’에 입각한 무조건적 ‘권리’이지 타인의 자선에 의지하는 ‘시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자선에 대한 루소의 폄하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선별적인 사회수당의 경우처럼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복지제도보다는 생산수단의 재분배가 낫다는 것뿐이다. 기본소득 도입보다 생산수단의 주기적인 재분배를 통해 평등주의적 소생산자사회를 주기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루소의 원래 입장에 더 가깝다.
소유의 보호인가 재분배인가의 문제 틀을 벗어나서 공적 이성의 원리인 ‘원천적 계약’을 중심 범주로 삼는 칸트의 정치철학은 기본소득의 정당화에 좀 더 용이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당화에서는 기본소득의 ‘실질적 자유’라는 의미가 희박해진다. 이는 칸트에게 특유한 점인 재화윤리학(Güterethik)의 공백과 맞물리는 문제이다. ‘보편적 원칙의 공화국’은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으며, 재화의 분배에서의 정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칸트에 의지하면서 재화윤리학을 구성하려는 시도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롤스의 시도가 있다. 분배윤리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롤스는 칸트 이론 특유의 의무론(deontology)에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대척적이기도 한 논변 체계인 공리주의 논변을 한 축으로 끌어 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화윤리학이 공백으로 남겨질 때 칸트의 공화주의는 단지 ‘심의 민주주의’(deliverative democracy)만을 낳을 뿐이다. 이 경우에도 특별히 기본소득의 탁월성을 정당화하는 논변은 구성되지 않는다. 물론 공리주의 논변에 의지함이 없이 오직 칸트의 원칙을 통해서 사회국가의 일반적인 정당성을 논증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입각한 사회국가를 다른 유형의 사회국가, 예컨대 후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국가보다 특별히 더 정당화하는 논변은 칸트적인 건축술(Architektonik) 안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다양한 논변들이 현대의 기본소득론 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물질적 독립성을 강조하는 필립 페티트(Philipp Pettit)의 논변, 정서와 동기를 강조하는 논변, 상호성을 강조하는 스튜어트 회이트(Stuart White)의 논변, 시민적 의무를 강조하는 리처드 대거(Richard Dagger) 논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그들도 종래의 공화주의 논변과 마찬가지로 모두 고유한 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IV. 공화국: 만인의 공통적인 자격으로부터 공통적인 사회적 조건으로의 확장
기존의 공화주의의 유형들이 기본소득과 같은 발상을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는 논쟁 맥락에서 등장했다. 근대 자유주의와 근대 공화주의가 등장한 17세기와 18세기는 소유권혁명의 시대이기에 소유는 이 시대의 정치철학의 양축 모두에서 중심 문제가 된다. 따라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 개념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를 위해서는 '공화국' 개념을 '만인의 공통적 자격' 개념에서 '만인의 공통적 조건' 개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확장은 다음과 같은 개념사적 발전을 의미할 것이다. 첫째, 소유권 논증의 협소한 지평으로부터 벗어나서 지구에 대한 만인의 공유(共有) 개념에서 출발할 경우에만 기본소득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이와 같은 공유 개념은 단지 소유의 한계를 설정하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규범논증적 역할’(normbegründende Funktion)을 맡아야 하며, 이와 같은 적극적인 규범논증은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무조건적인 일반적 권리’로서 정당화하기에 충분하여야 한다. 셋째, 공유 개념이 이처럼 충분한 논증기능을 가지기 위해서 공유 개념은 그 개념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고유한 대립인 ‘공유(communio)인가 소유(dominium)인가’의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 즉 공유 개념은 물질적 재화의 귀속과 관련된 차원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보편적 자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공유 개념으로부터 보편적인 ‘이념의 공화국’ 개념으로의 전환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이는 로크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발전의 선(線)에서 대략적인 방향성이다. 이러한 발전사에서 우리는 공유 개념으로부터 ‘보편적 공화국’의 개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넷째, 이와 같은 ‘보편적 공화국’은 단지―칸트 식의―‘원칙의 공화주의’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추상적-규제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 형성의 역할도 해야 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보편적 공화국’은 인종적 차이, 성별, 이주, 장애 여부 등 어떤 특수한 차이와 무관하게 만인은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보편적 인간 자격의 공화국’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충분한 기본소득을 통해 일정 수준에서는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인간 조건의 공화국’이어야 한다. 칸트는 앞부분에 머물고 말았다. ‘공적 원칙의 공화주의’는 ‘공통적 조건의 공화주의’를 통해서 보충되어야 하며, ‘공통성’이란 ‘보편적 자격’과 ‘보편적 조건’을 함께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결론적으로 다섯째,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서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는 유형의 공화주의는 ‘보편적 조건의 공화주의’이고, 이러한 조건은 자연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즉 자격의 보편성은 조건의 보편성으로 전 사회적으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 자격―인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에 부합되는 ‘사회적 조건’을 인류공동체가 공동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공화국’은 ‘모든 사람의 나라’, 곧 ‘보편적인 사회적 조건’이 모든 개별적인 인류에게 보장되는 ‘보편적인 사회적 공화국’일 것이다.
‘공화국’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려는 위의 시도는 거꾸로 ‘공화국’ 개념을 확장시켰고, ‘원칙의 공화주의’로부터 ‘사회적 조건의 공화주의’로의 확장을 낳았다. 이러한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별적 권리들을 낳는 공적 원칙은 그 자체로도 물질화되고 사회화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만인의 입법자로서의 동등한 자격의 원칙’에 머물 뿐이다. 하지만 자격의 현실화는 조건의 수립으로, 곧 자격에 부합되는 현실적 사회적 조건의 확립으로 나타나야 한다. ‘보편적 자격의 공화주의’는 ‘보편적 조건의 공화주의’를 수반하며 양자는 동일한 원리 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V.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민주주의
인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만인의 보편적이고 동등한 자격은 개념적으로 ‘평등(동등성)의 원리’와 ‘공통성의 원리’를 모두 함축한다. 즉 모든 사람은 i)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자격을 ii)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부분으로부터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간 모두의 '공통적 조건'으로 논증될 수 있음을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더 따져야 할 부분은 첫 부분과 관련하여 기본소득과 민주주의의 상동성의 문제이다. 첫 부분은 무엇보다도 평등한 선거권의 의미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또한 평등 원리는 선거권의 범위를 넘어 여러 가지 평등한 자격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사회구성원의 물질적 조건의 문제로 전개될 수도 있다. 즉 동등한 추상적 자격에 입각하여 자격에 합당한 구체적 조건에 대한 요구가 정당화된다. 여러 가지 사회적 권리가 해당된다. 그런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권리들 중에서 기본소득, 곧 모두에게 특수한 조건과 상관없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동등한 자격의 원칙’, 곧 ‘동등성의 원칙’에 가장 근접한다. 사회구성원이라는 자격 요건에만 기초하는 보편적 복지의 제도들 중에서 기본소득은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보편적인 평등 수당이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동등성의 원칙’에 접근한다. 그것은 평등한 선거권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원리적인 상동성을 가장 많이 보여준다.
정치적 주권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1인 1표, 평등한 선거권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기본소득 역시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재산 수준이나 노동여부 등 여타 조건과 관련 없이 모두 동일한 액수의 기본소득을 지급받는다. 하지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통해 달성되는 평등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충분조건을 가진다는 의미이지 동일한 조건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소득은 전면적인 조건의 평등이 아니라, 조건의 부분적인 평등일 뿐이다. 일정 수준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동일한 사회적 조건을 확보한다는 것과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가진다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아울러 이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직접적으로 경제적 평등의 원리에 의거하여 정당화되지 않으며, 기본소득과 경제적 평등은 오직 ―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액수의 범위에서만 ― 원리적 상동성을 가질 뿐임을 뜻한다. 하지만 기본소득과 정치적 평등, 주권의 원리는 전적으로 같은 원리 위에 기초한다. 기본소득은 구빈(救貧)을 위해 지급되는 국가의 시혜(施惠)나 사회적 자선(慈善)이 아니라 모두가 대등한 인류구성원, 사회구성원, 또는 국민이라는 보편적 자격을 가진다는 점으로부터 비롯되는 보편적 권리이다.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와 국민주권을 원리적으로 동일한 기초 위에 세운다. 이와 같은 원리적 상동성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보편적 복지에 관한 논의의 주권론적 차원이 분명해지며 기본소득 운동의 국민주권운동,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확보된다. 즉 기본소득은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진정한 국민주권, 진정한 민주주의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부여만으로 실현할 수 없다. 기본소득과 기본복지를 통해서 모든 국민이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할 때에만 비로소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국민은 진정한 주권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기본소득을 통해 평등의 원리는 정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 권리와 같은 포괄적인 시민권의 문제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