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제
679
호 2002/10/31))
못하면 괴로운 영어 하자니 또 괴롭다
온 나라가 ‘영어 광풍’에 휘둘리고 있다.
영어는 21세기 한국의 입신양명 보증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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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향란 |
영어에 자신이 없는 보통 엄마일수록 조바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영어로 동화를 구연하는 강사를 지켜보는 엄마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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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입사 준비를 하려고 대형 서점에 들른 복학생 김씨.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영절하) <아직도 영어 공부하니?>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심정을 파고들어 성공을 거둔 책 제목이다. 그도 ‘영절하’ 세대이니 익숙하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터진다. <그래, 아직도 영어 공부한다. 왜!> 그 사이 나온 책인 모양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
영어 잘하는 법>. 포한까지 느껴진다. 너무 수험서가 많아 어지럼증이
인 김씨는 정보를 얻을 양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다음 카페에만 5백 개가 떴다. “토밥 구합니다” “토마토 좋아요?” 토밥은 <토익은 내 밥이다> 토마토는 <토익 점수 마구마구 올려주는 토익책>의 준말이란다.
‘영절하’ ‘토밥’ ‘토마토’를 아시나요?
그들의 허풍은 절규나 다름없었다. 지난 10월21일 새벽. 종로의 한 학원에서는 어김없이 종로 괴담이 재연되고 있었다. ‘책으로 공부하면 한
달에 100점. 강의까지 들으면 200점’이라는 족집게 강사 김대균씨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김씨가 10월에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은 1천2백16명. 인터넷에서 강의를 듣는 회원이 9천명이다. 수강증이 전매되기도 한다. 그의 별명은
토익 시험을 달마다 본다 해서 매달 시험 보는 강사다. “수강생 한 명이 ‘영어 책 덮은 지 5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김씨뿐 아니다. 요즘은 이른바 ‘기출 강의’가 아니면 수강생들이 거들떠보지 않는다. 최근 토익 카페에는 비상이 걸렸다. 카페마다 ‘저작권에 위배되는 게시물은 삭제한다’는 서슬 퍼런 경고가 붙어 있다. 지난 10월9일 실제로 한 카페가 문을 닫았다.
시험을 치른 후 학생들이 기억 나는 대로 시험 문제를 올렸고, 회원이 5만 명이 넘는지라 그들이 주워 모은 정보는 금세 태산이 되었다. 지난 7월, 이 카페의 주인 박 아무개씨는 이 자료를 책(<토익은 내 밥이다>)으로 묶어 출간했고, 토익위원회는 박씨를 저작권 위반이라며 불러들였다. 현재 대학교 3학년생인 박씨는 합의금 2천1백만원을 물어야 했다.
책이 절판되자 <토익은 내 밥이다>는 졸지에 비전(秘傳)이 되어 버렸다. 전남대 구내 서점은 영문도 모른 채 곤욕을 치렀다. 그곳에 아직 10여권이 남아 있다는 정보가 인터넷에 뜨자, 전국에서 문의 전화가 쇄도한 것이다. 서점 주인은 “이제는 없다. 도대체 웬 난리냐”라며 의아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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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향란 |
토익·토플 100만 명 시대. 오전 7시
무렵 시작되는 새벽반 강의실에서도
빈 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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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책을 구했다는 한 학생의 말은 더 가관이다. “이미 ‘기출’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굳이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1999년~2001년 기출 문제가 담긴 자료 묶음이 이미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60 문제까지 겹친 걸 보았다. 운전 면허 시험인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이렇듯 기출 문제집이 나도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자 9월부터 시험 주관사가 대응에 나섰을 정도다
‘체면 점수’ 900대로 토익 인플레
미국 대학원 유학용인 GRE 시험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다. GRE는 한달 동안 같은 문제 뱅크에서 출제가 되는데, 시험 주관사인 미국 교육평가원(ETS)의 조사 결과 월초 평균 점수와 월말 평균 점수에서 중국은
100점, 한국은 50점 정도 차이가 났다. 시험을 대행하는 한미교육위원단(풀브라이트 재단)의 심재옥 부단장은 “쪽지에 적고 캠코더로 찍고,
어느 학원이 그런 일을 시키는지 다 안다”라고 말했다. 덕분에
GRE(ETS) 시험은 하반기부터 상대적으로 유출이 어려운 지필 고사로
회귀했고, 횟수도 1년에 두 차례만 치를 수 있도록 강등 조처를 당했다.
오는 11월과 3월 단 두 차례뿐이어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크게
불편해진다.
<토익은 내 밥이다> 저자 박씨는 이런 세태에 회의적이지만, 사회의 요구에 내몰린 사람들의 자구책이라는 변론을 편다. “시중에 적중률이
높다고 소문이 난 유명 출판사 책은 모두 비슷하다. 기출 문제를 놓고
단어만 이리저리 바꿔서 누구나 척 보면 답을 안다. 내 책만 때려잡은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일까. 대학에서 토익과 토플 점수는 이미 취업을
위한 플러스 알파 이상이다. 성균관대가 96학번부터 졸업인증제인 ‘삼품제’를 통해 영어 점수 미달자를 탈락시킨 이후 4년제 대학 대부분이 졸업인증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쯤이야’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서울대도 2000학번부터 텝스 700점을 넘지 못하면 졸업하지 못하도록 했다.
학생들에게 졸업 인증 점수 자체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치러야 하고, 점수가 인플레되면서 취업 지망생이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체면 점수’가 900점대까지 치솟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외무·행정 고시는 물론 사법 고시까지 자체 영어 시험이 아닌
3T(토익·토플·텝스) 성적을 채택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했다.
그 가운데서도 토익 시장은 가히 폭발 수준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토익은 미국 대학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위세는 더욱 드세졌다. 지난해 응시생은 100만명에 육박한다. 미국에 토익 개발을 의뢰했던 ‘토익
종주국’ 일본이 놀랄 정도다.
토익위원회가 지난해부터 초·중급자용 토익 시험인 ‘토익 브릿지’까지 도입하면서 토익 열풍은 아이들에게까지 옮아가고 있다. 토익 브릿지는 1시간짜리 시험이어서 ‘미니 토익’이라고 불린다. 9월 말까지 5천명이 응시했다. 60%가 중학생이고, 초등학생도 10%에 이른다.
자녀의 실력을 재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욕구가 커지고, 외국어 고등학교를 준비하는 중학생이 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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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향란 |
우리 선생님은 과연 몇 점일까? 서울 종로구 한 외국어 학원에서 수강생들이 만점 강사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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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류한희 양은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미국에서 5년 동안 살다온 해외파다. 류양의 어머니는 아이의 어휘가 범상치
않아 보여 실력을 알아볼 요량으로 응시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힌 게
주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토익반, 미국 유학반까지 생기는 건 문제다”라고 말했다. 정규 토익 시험에서도 고등학생 응시자가 크게 늘었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고등학생 토익 평균(586점)이
대학생(567점)보다 높았다.
원어민 교수 강의도 ‘속빈 강정’ 일쑤
점수 인플레가 심해지면서 토익 만점자가 대입 특별 전형에서 탈락하고, 환상적인 점수를 맞고도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박정민씨는 상위 0.5%에 속하는 토익
965점을 맞고도 벌써 두 번이나 서류 전형에서 미끄러졌다.
토익 인플레는 일본과 비교해도 기이한 일이다. 취업이나 승진할 때 필요한 점수가 650점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한 영어 강사의 말이다. 한국은 800에서 820점 사이. 그러다 보니 회사들은 입사한 직원에 대해서는
회화와 작문 실력을 잴 별도 시험을 병행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 후배들의 토익 점수가 하늘 모르고 치솟으니, 승진을 앞둔 중견 사원들로서는
산 너머 산이다.
대학도 몸살을 앓는다. 이른바 원어 강의가 대폭 늘면서다. 학생들은 전공을 배우는 것인지 영어를 배우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지난해 학부에 원어 강좌를 2개 마련했던 서울대 사회학과는 올해 모두
폐강했다. 현대 사회학 원어 강의를 하던 교수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6명으로 겨우 꾸리던 비교사회학 원어 강의도 없어졌다. 지난해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들었다는 한 학생은 “해외파나 일부 학생은 재미있어 한다. 하지만 외국어 고등학교 출신인 나도 솔직히 강의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라고 토로했다.
대학에 원어민 교수가 늘어난 것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이다.
외국 교수가 한국 교수의 곱절인 한 지방 대학의 영어교육과. 전임 교수
직함을 달고 있지만 학력이 학사인 경우가 절반이다. 전공도 역사학·심리학이어서 영어 교육 전공은 고사하고 심지어 영문학과도 거리가
있다. 그야말로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가르칠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냥 생활 영어를 가르친다. 학원 강사 출신이 수두룩해 철새처럼 돌아다닌다. 학생들만 손해다.” 특히 외국 교수 초빙은 사립 대학일수록 더욱 열심이다. 학교 홍보 때문이다.
반면 아이들 영어 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학부모들은 여전히 방치된 채다. 기세 좋게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의무 과목으로 만든 교육인적자원부는 요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교사를 매년 천명씩
교육 현장에 투입하겠다고 장담했건만 고작 1백36명분 예산을 받아내는 데 그쳤다. 그마저도 지역 단위로 묶어 순회 수업을 해야 할 판이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백미숙씨는 “교수법을 제대로 배운 원어민 교사라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아쉽다”라고 말했다.
사교육 시장이 4조원 규모로 추산되고 그 가운데 절반이 영어 시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수험 노하우도 동급 최강이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영어 공부를 떠난 한국 학생들도 시험을 위해서 한국으로 ‘역유학’한다. 미국 학교의 방학 시즌이 되면 강남 학원가에는 미국 대학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반이 대거 개설된다. 이익훈 어학원 집계에 따르면 수강생의 90%가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 나머지 10%가 국내 학생이다.
“차라리 동남아 사람들이 부럽다”
교보문고 매장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아들에게 줄 토플 책을 고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2년째 유학 중인 고3 아들을 위해서다. “어차피 아이비 리그에 못갈 바에야 국내 대학에 가는 것이 취업에 유리하다. 회화야
능숙해도 시험은 요령이 필요한 것 아니냐. 한국 토플 책이 최고라고 하더라.” 미국의 한 재단이 만든 상품에 불과한데도 이미 토익과 토플은
국가 공인 시험의 지위를 얻었다.
먹고 살려면 그 시험대에 서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조금만 삐끗해도 ‘반(反) ETS’ 감정이 불붙는다. 최근 응시료 환불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인 것이 그 예다. 지난해 성기완 교수(우송대·영어교육학부)는 ETS의 상업주의와 정부의 편의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살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은 문제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영어는 한마디 해야 사람 축에 낀다며 온 나라가 돌격 중인데,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영어 못해 괴롭고, 영어 못 가르쳐 괴롭고. 영어권 식민지로 살았던 동남아 국가가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요즘이다.
노순동 · 차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