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억세게 좋은 날! 세상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침부터 게으름을 피웠다. 창경궁에 도착했을 때 국악공연은 이미 시작은 되었고 공연장에 들어가서 서서 지켜봐야했다. 작년과는 다르게 연상회상 전바탕을 연주하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거나 고개를 떨어뜨리는 어른들,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진지한 눈빛의 양코배기들. 그 중에 고개를 흔들며 장단을 읽고 있는 백인이 눈에 띄었다. 노트를 보며 영산회상의 장단 변화를 따라가는 듯 보였다. 근데 옆에 앉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 아닌가? 대금 연주자 김정승이었다. 아! 외국 음악학자에게 국악을 안내하기 위해 함께 공연장을 찾았구나! 자리를 옮겨 김정승 선생 쪽으로 다가갔다. 작년에 미국 대학으로 초빙되어 6개월동안 한국 음악을 알린 덕분인지 영어로 신나게 설명하신다. 우리 음악이 서양에 소개되고 있는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다 고무적인 흥에 취해 뒤로 나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영산회상의 박자에 몸을 실어 소리없이 예전의 감격을 떠올렸다.
2년 전 똑같은 프로그램에 이끌려 아침에 공연을 보러왔다. 그 때도 영상회상 한바탕을 들었는데 신비로운 체험이 나에게 들어왔던 것이다. 전통 음악 중 연산회상의 비중은 각별하다. 원래 고려시대에 불려졌던 부처님의 공덕을 기린 노래였는데 조선에 들어서면서 불교 탄압으로 인해 가사는 탈락하고 곡만 남아 지금까지 전승되었다는 “영산회상”. 전체 50분에 가까운 대곡임에도 장단의 변화가 조였다 풀었다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서서히 달아오르고, 가락마저 은적의 신비와 살짝 드러나는 아름다운 자태마저 감추는 겸손의 미까지 온축하고 있어 무궁무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50분간 나는 깊은 바다를 유영하면서 어느 누구도 범접 못할 바닷 속 정경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한 듯 보이는 바다 속에서 생명의 약동을 느끼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이 기억을 뒤로하고 공연이 끝났을 때 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회자 송혜진의 안내가 끝나고 김정승과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동서양의 만남을 축하하는 사진을 찍어줬다. 김정승은 만날 때마다 깊이를 드러내는 연주자다. 김정승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김정승을 애호한다. 내가 그의 연주를 바로 앞에서 본 것은 교사연수 때였다. 그의 단단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무술의 장인에게서 나오는 기합과 동일했다. 전장의 사무라이의 서슬퍼른 칼날처럼 대금은 긴장감을 유발시켰고 권위는 주변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신묘한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 그는 정악이란 전통을 고수하는데 머물지 않고 전통을 어떻게 변화, 발전시키느냐에 초점을 옮기고 있다. 앞으로 그의 소리 작업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공력에 따라 국악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이 소리과 시선은 이미 전통 너머에 있다.
나의 스승 문응관은 김정승과 대척점에 서있다. 김정승은 정악을 넘어 새로운 소리를 실험하고 있다. 어쩌면 대금소리의 품위는 김정승이 고품일 것 같다. 하지만 보존을 우선시해야하는 정악단의 성격상 보존을 우선시해야하는 정악 부문에선 김정승은 이탈한 셈이다. 이젠 김정승에게서 정악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정승은 문응관을 두려워한다. 문응관은 정악의 흐름을 더 깊이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벗어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갈등은 언제든 증폭될 수 있기에 두 사람간의 우정은 불안하다. 연습실을 함께 쓰고 있기에 서로의 소리의 장단점을 형량하는 그들로서는 서로 다른 길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고 있다. 나로서는 내 스승 문응관의 소리를 높이 쳐야하지만, 왠지 김정승의 가슴 서늘한 카리스마가 그리울 때가 많다. 문응관의 소리는 정악대금의 원융무애한 흐름을 담지하고 있다. 삶의 지친 사람들에게 정신의 안식을 전하고 있다. 정악의 가치가 점차 알려진다면 문응관은 나중에라도 외국에서 대접받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소리는 세상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푸근한 소리다.
김정승을 뒤로하고 창경궁을 나오자 핸드폰이 울린다. 사범님! 오전에 미동초에서 뵙기로 했는데 오늘 낮에 제자 결혼식이 부천에서 있다고 안된단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하고자 가까운 지인을 떠올렸다. 전광진 교수님이 떠올랐다. 전화를 돌리니 12시에 성대 연구실에 나오신단다. 남은 3시간 동안 머물 수 있는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야했다. 텅빈 공간을 찾아간 곳이 천도교 중앙교당.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지석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 너머의 천도교 교당을 들어서니 아무도 없고 혼자 쉴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이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도교의 영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만 하다. 역사적 유적지에서 밀려오는 감상이 있다. 책을 펴고 잠시 사색에 잠길 순간, 나에게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운을 뗀다. 이 건물과 동학의 역사를 얘기해주고 싶단다.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을까 싶었지만, 적당한 시간을 때워야하고 동학에 관심이 있기에 상구를 청하였다. 토요일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이 분은 일종의 전도라고 볼 수 있기에 10분만 하겠다고 양해를 구한다. 건물 이곳저곳을 안내하시겠다고 하셨는데 나야 주저앉고 싶어서 의자에 앉아서 장기전을 취했다.
19세기 후반 해체되는 조선에서 민중들의 에너지는 예술과 종교로 이동한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이때 발전한 수도계로서 예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판소리, 풍류음악, 산조의 탄생은 세계 음악사에서도 경탄의 대상이 될만한 사건이지만 사실 침몰하는 조선을 두고 예혼을 달래는 것이다. 민요 “한오백년”의 가사를 감상하면 단박에 드러난다. 하지만 민중의 바램은 절대적 믿음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동학은 서양의 기독교와 외세의 압박, 일제의 지배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우리 역사에 믿음을 던져주고 산화했다. 일제로부터 강제로 협박당한 경술국치 이후 동학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은 10년 후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라를 구할 의연한 사람을 기르고자 교육 사업에 뛰어들고 사람들이 결집할 수 있는 교당과 독립자금을 구하고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엄청난 무리(1910년대 2천만명 중 천도교인이 300만이었다고 함)의 천도교 교인들에게 지원을 강제했다고 한다. 당시 종교 조직으로 천도교만큼 일사분란하고 광범위한 조직은 없었다. 기독교는 미미했고 불교는 다양한 종파로 분립되었고 대종교는 소수였고, 새로 발흥한 원불교는 자생력을 키우고자 독립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1919년 삼일 운동은 손병희가 모든 계획과 연출과 책임을 진 그의 작품이었다. 천도교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고 지원했으며 책임을 져야했기에 우리 역사에서 하나 둘 스러져갔던 것이다. 눈가가 촉촉해질 즈음 안내의 방향은 교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중간중간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했다. 그것은 천도교 종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의 글씨를 보건대 그는 제도적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종단을 지배하는 위선을 체념하는 정도의 체험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종단에서 떠도는 옛 선사들의 언어의 낙엽을 제대로 소화시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진인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쉬워서 계속 상구적 자세를 취하였다. 참았던 봇물이 떠지듯 점점 교리의 근원으로 향하고 있다. 인간의 신성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내 안의 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는 기도를 통해 한울님을 만난다는 신비를 드러냈다. 접신이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지만 그의 신관은 과정적이면서도 목적론적인 양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내천 역시 인간이 한울님과 만나야하는 목적론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교육으로서의 사다리가 불안한 상황이다. 돈오적 성격이 다분하다. 그래서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헤어질 때 오히려 진인이 아쉬운 듯 핸드폰 번호와 그가 수양하는 우이동으로 초대한다. 나에게 전하고 싶은 책도 준비해놓겠단다. 난 그에게서 언어의 각질을 뚫고 체험으로 충만한 진인의 자유자재를 잠시나마 느꼈다. 동시에 나에게 뭍은 두터운 먼지를 어떻게 쓸어버릴까도 떠올렸다. 버려야 샘물을 마실 수 있다!
전광진 선생님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 동안 사전 출판은 순조로워보였다. 근데 사전의 파생상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주저하는 상황이다. 난 파생상품을 능가하는 작업으로 활로를 뚫고자 개진했다. 지식의 소유권과 상품 가치는 별개지만 선생님의 능력은 이미 현실 이익까지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안학교 기획이전에 인터넷 코뮤너티로서 사이버 대안학교를 기획하신다. 그럭저럭 점심 먹고, 헤어져 또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쌓였던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청간 선생님과의 도제관계가 나의 의식 수준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제야 터지는 구나. 그래 기다린 보람이 역시 있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