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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기불전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도산
삼보께 귀의하옵니다. _()_
초기불교를 함께 공부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처음에 이해하기 어렵고 내용도 많은 경전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순서를 권해드립니다.
1. 본 카페의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 동영상>을 찬찬히 보시면 도움이 크게 됩니다.
교재는 각묵 스님의 「초기불교 이해」라는 책을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이 책도 사실은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깊이 공부하지 마시고
우선은 전체적인 맥락과 "아 그렇구나"하는 이해만 하시길 권합니다.
이는 나중에 교학이 어느정도 되시면 다시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 이제 본격적으로『상윳따 니까야』를 끈기를 가지고 독파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이 경전은 초기불교를 교학적으로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경들의 결집입니다.
참고로 초기불교 교학의 중요한 열쇠는 「아비담마」(논장)와 『청정도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교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시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경전들은 한 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추후 수행시나 언제고 거듭 보셔야 합니다.
한편 어떤 일을 당하여 그 경을 읽고자 해도 너무 방대하여 찾기가 쉽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대비하여 이왕이면 경을 읽으실 때, 반드시 경에 대한 요람집을 꼭 작성해두시길 권해드립니다.
가령,「간략하게 경」(A8:63)을 읽으시면, 읽으시고 나서는 엑셀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아래 그림이 작게 나오면 마우스 왼쪽을 클릭해서 확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위와같이 정리해 놓으시면, 추후 이 파일을 열어, 키워드 검색을 하시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아비담마」(논장)와 『청정도론』을 공부하실 때도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수행을 하실 때도,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상황] [수행]까지 넣어 정리하시면 어떤 상황에
어떤 수행에 도움이 될지는 나중에 공부가 더욱 깊어지시면 재정리 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러므로, 이왕 경을 읽으실 때, 우선 위와 같은 정도라도 꼭 정리해두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교학을 할 때, 수행을 하실 때, 필요하면 키워드를 검색하여 반복해서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엑셀 파일의 제일 아래에 보면 Sheet가 있는데, 『니까야』 마다 Sheet를 따로 만들어
작성하면 관리하시기 좋습니다. 가령, Sheet의 이름을 "디가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등 이런식으로 따로 만들어 작성하시고, 경의 요약을 어느 행에 삽입할 때는
경의 번호 순서로 삽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Sheet별로 되어 있어 경전이 섞일 염려도 없고, 또 번호 별로 일목요연하게 됩니다.
3. 이제 초기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아비담마 길라잡이」를 공부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이에 대한 공부는 큰 인내와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 카페의 <아비담마> 공부방에서 질문과 답변을 통해 공부하셔도 좋습니다.
특히 "고요2" 법우님께서 정리한 내용이 연재되고 있으니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초기불전연구원 동호회에서 저자이신 스님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아비담마 공부가
이제 막(2011.11.13. 일요일) 시작되었으니 다시 없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셨으면 합니다.
아비담마 공부를 대충 거르신다면, 초기불교에 대한 혼란과 경에 대한 오해는 계속 되리라
감히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를 믿든 안믿든 일단은 모두 공부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이해가 안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경전을 읽으시어 마음의 해탈을 경험하며 쉬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번의 『상윳따 니까야』독경과 요람집 작성과 3번의「아비담마 길라잡이」는
동시에 일정시간씩 시간을 배정하여 해도 좋습니다.
4. 이제 수행에 대한 지도서,『청정도론』을 권해드립니다.
『청정도론』은 아비담마의 용어와 교학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니, 아비담마에 대한 정교한 공부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청정도론』은 경전들에 대한 1차적 근본 주석서의 역할을 하므로,
『청정도론』공부 없이는 초기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①아비담마를 공부한 후, ②『청정도론』을 공부하고, ③그후 깊은 경전공부를 하시길 권합니다.
특히 이들 교학의 목적을 오해하고 불신하여, 초기불교가 윤회 등에 집착하는 줄로 오해하고
나아가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스스로 차단하고 법을 비방하는 일은 경계해야 합니다.
실제로 공부를 하여 삼장에 대하여 폭넓은 이해를 하면, 염려하던 윤회 등에 대한 집착이 있기는 커녕
업, 과보, 윤회 등에 대하여 의심이 사라졌음은 물론, 하늘, 지옥, 신, 윤회 등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버렸으며, 오히려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온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괴로움만 설하시고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하시지 않았다면 불교는 염새주의일 것이고,
부처님께서 윤회만 설하시고 벗어나는 길을 설하시지 않았다면 불교는 협박의 종교일 것이지만
부처님은 생로병사우비고뇌,절망,윤회 등에서 벗어나는 경지를 설하셨고, 그 방법도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희망의 종교요, 실천의 종교요, 궁극적 행복을 주는 종교라 생각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 중에는 믿어야할 대상이 있고, 수행으로 알아야할 대상이 있습니다.
업과 과보(윤회 포함)는 불,법,승,계 등과 더불어 믿음에서 출발해야할 대상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경험 한계를 벗어난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거나 부정(어리석음에 뿌리)하는 것은 괴로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수행자는 그 법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온,처,계,근,제,연의 법을 꿰뚫어 보아 사념처를 닦고
머물며, 점차 지혜를 넓혀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해 나가 검증해야 합니다.
즉 믿음과 통찰지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에만 치우쳐도 맹목이 되지만, 처음부터 믿음없이 통찰지에만 치우치면 교활하게 됩니다.
가령, 사마타를 닦을 때에도, 처음 그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법으로 모든 부처님과
모든 아라한이 목적한 바를 이루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체험으로 결과를 얻고, 확신이 생겨납니다.
정작 윤회, 업, 과보에 대하여 부정하고 끝없이 성냄에 뿌리박은 논쟁을 만들어 내는 분들이야말로
의심과 부정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유하면 직접 물에 빠진 아름다운 여인을 업고 만리를 온 사람은 이미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랬는데
여인을 대충 몇 번 만 업어봤거나 지켜만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여인을 업고 가는 내내 뒤따라다니며
상상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비방하며, 여인이 떠나간 후에도 그치지 않고 끝없이 비방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리나 걸어오면서 여인을 업은 그 수행자는 애욕과 집착에 빠져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려는 목표를 세우고 여인 업기를 도전한 수행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수행자는 목표가 분명하고 절박감이 크며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똥물만 있는 바다에서 더럽다고 코를 막고 혐오스러워하며 성내고 있으면
그 똥물에서 나오기 어렵고, 아예 인식이 사라져야 한다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등 허우적 거릴수록
오히려 그 사견의 늪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듭니다.
실제로 괴로운 현실을 괴롭다고 꿰뚫어 알고(고제), 그 원인을 꿰뚫어 알고(집제), 부처님과 수 많은
아라한들께서 열반을 실현했다고 믿고(멸제), (도제)교학을 배워 법다운 추론으로 이 도를 닦으면
고제와 집제를 소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실참수행으로 윤회 등의 괴로움의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자신의 눈,귀,코,혀,몸,마노에서 일어나는 현상(법)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물면, 머지 않아 마음과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은
가라앉습니다. 번뇌들은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이때 향상을 위해서는 더욱 교학의 힘이 필요합니다.
스님을 찾아뵙고 자주 법을 들어야 하고, 경을 더욱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학을 바탕으로 자주 체험하다보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차 생겨납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기반으로 믿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결코 향상은 없습니다. 그저 수행을 흉내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향상의 조건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수행의 향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러면 어떤 순서로 향상합니까?
점차 환희로움(약한 희열)이 일어납니다. 다시 희열(강한 희열)이 솟아납니다.
점차 눈,귀,코,혀,몸으로 습관적으로 목말라 갈구했고 좋아했고 마음에 들어했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이 가라앉고 마음에서 정신적 둔함이 제거됩니다.
이때 비로소 고요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경안입니다. 칠각지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 감고 명상하면 고요하다고 해서 고요함이 결코 아닙니다. 자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 고요함이 일어나야 그 가운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발견하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비유컨데 똥물가운데 가볍게 떠오르는 선법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선법들이 차츰 굳어지도록 거듭 단련하여
강력해진 37가지 선법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그것으로 도성제라는 배를 건조해 나가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때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쁨이 계속되고 믿음은 더욱 커지고 정진의 힘은 커집니다.
이때 온 몸에 행복이 깊이 스며듭니다. 이런 행복을 기반으로 삼매가 일어납니다.
최소한 근접삼매라도 일어나야 이런 삼매를 기반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인 여실지견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느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보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가지
얕은 위빳사나의 지혜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법을 보는 것은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지혜 중에는 의심을 제거함에 의한 청정도 들어 있으니,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의 법과 조건에 대한 의심이 있고서는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면 거짓입니다.
이렇게 여실지견을 열심히 닦고 많이 공부짓다보면 점차 염오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언젠가는 수승한 지혜를 많이 얻고, 더 나아가 道와 果가 일어나고, 나아가 번뇌들을 멸진하게
된다고 배웠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유하면 장차 언젠가는 예류도라는 배를 만들어 똥물바다 가운데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게 되고
이제 다시는 고통스런 아래쪽 악처로 침몰하지 않고 내려가지 않게 될 것이며,
그 과에 의지하여 행복하게 머물면서, 37가지로 만든 좋은 엔진을 장착하여 언덕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장차 일래도라는 보다 좋은 배를 만들어 떠오름이 견고하게 하고, 그 과에 의지하여
행복하게 머물면서, 더욱 강력해진 37가지로 만든 좋은 엔진을 장착하여 언덕으로 나아가며,
다시 장차 불환도라는 성냄의 풍랑에도 이겨내는 강력한 배를 만들어 언덕 가까이 나아가고
언젠가는 아라한도로 무명의 안개를 완전히 걷어내어 암초 등의 위험을 벗어나 정확히 안전한 곳에
배를 인도하여, 모든 들뜸을 가라앉혀 언덕에 안전하게 배를 대고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마시고 꼭 윤회, 업, 과보 등에 대하여 아주 정교하게 철저히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마음은 한량없이 고요해지고 경안해지며
점차 염오의 지혜가 생겨나고 집착은 사라집니다.
교학은 수행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삿된 견해로 인한 장애와 괴로움, 방해거리를 제거하는데
큰 작용을 합니다. 아니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벗어날 수 있는 길도 발견하게 해줍니다.
교학에 대한 공부를 하고 믿음이 확고한 분들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집착도 가지지 않으며
그런 성냄의 논쟁에 끼어들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평온하고 고요히 수행에 매진합니다.
설사 수행이 모자라더라도, 바른 수행을 찾을 안목이 생기며, 바른 수행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경과 율은 보물지도와 같으며, 논장 등의 교학은 지도를 보는 방법과 같습니다.
아직 길을 떠나지 않았고(수행을 배우지 않음), 길을 잘못가고 있어도(수행을 잘 못해도)
교학을 토대로 바른 길을 가는 안목이 생겨나리라 확신합니다.
꼭「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독파하시고 거듭 이해하시고,『청정도론』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청정도론』을 공부하실 때는, 1장부터 각 장별로, 별도로 노트 정리를 하면서 공부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도표나 도형 등으로 재정리하면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역시 편집기는 즉시 도표나 도형이 가능한 엑셀을 권해드립니다.
저도 다른 워드편집기를 쓰다가, 초기불교를 하면서 할 수 없이 엑셀을 배웠습니다.
이렇게『청정도론』을 외우지는 마시고, 이해하면서 노트정리만 1회 하십시오.
5. 이제 노트정리한 것을 경전의 요람집으로 근거를 보충하면서 익혀야 합니다.
이때부터 『앙굿따라 니까야』와 『맛지마 니까야』와 『디가 니까야』가 꼭 필요합니다.
중요한 수행은 이 경전들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경을 읽으시면 요람집에 추가합니다.
특히,「대념처경」(D22)는 수행에 대한 집대성과 같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수행을 정리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경전 요람집을 만들지 않았다고 후회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나에게 후회라는 법이 일어났구나"하고 알아차리고 집중하여 마음챙겨 주시하여 제거하십시오.
이대 후회와 꼭 들뜸도 함께 일어나니 들뜸도 주시하여 제거해주십시오.
모든 유위법은 집중하여 주시하고 있으면 법이 사라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라도 하나씩 하나씩 유장한 마음으로 경전 요람집을 정리하시면 됩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요람집은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안됩니다.
왜냐면, 자신이 한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꼭 스스로 직접 하나씩 하나씩 시간을 두고 유장한 마음으로 하시길 권합니다.
6. 수행
1) 교학을 머리로만 알고 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른 교학은 무엇입니까?
가능하다면 훌륭하신 스승님을 모시고, 교학의 처음부터 수행까지 병행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으니, 교학 스승님 따로, 수행 스스님 따로 모시는 경우도 좋겠습니다.
교학을 공부하시면서, 배운 교학을 만약 가능하다면 하나씩 하나씩 체험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교학을 하시면서 언제 수행을 하지 하고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교학 자체가 기초적인 수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면, 경전을 읽으시면, 희열이나 평온이 함께하는 마음의 해탈을 경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념처 수행의 심수관에서, 마음의 해탈이란, 욕계 유익한 마음들도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대념처경」D22 §12 주석579; 청정도론XIII.12의 주석)
저의 방법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수행도 하면서 하는 교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 교학을 하면서 행하게 되는 간단한 심수관의 수행 예
실재로 경을 큰소리로 읽고나서 그 내용을 눈을 감고 고요히 사유하면 마음의 해탈을 경험합니다.
그때 그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행복을 경험하고 마음껏 경험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행복만 경험한다고 열반으로 가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위빳사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 그 행복만 경험하지 마시고, 그 마음에서 나와서 이렇게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보십시오.
"이전에는 없던 평온(또는 기쁨)이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인, 해탈한 마음이 있구나"하고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이것은 「대념처경」에 근거한 매우 좋은 심수관이라는 수행입니다.
교학을 하면서 이런정도로만 해도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한 수행이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아 나는 왜 그럴까?"하고 실망할 필요는 없으며,
"해탈한 마음이 없구나"하고 멍하니 있으면 안됩니다. 꼭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즉, 그럴 때는 반대로 이렇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 역시 매우 훌륭한 수행이 됩니다.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일어났구나"하고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대념처경」D22 §12 ⑧)
그러므로 주시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대상이 없으면 안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챙김은 의도적인 근면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_()_
그러면 이런 수행이 훌륭하다고 한 것은 자신감을 주기 위한 방편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훌륭합니다.
위와같은 수행과정은 "(부처님의)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법수념法隨念)"이라는 ①삼매수행과
그 삼매에서 출정하여 ②법을 대상으로 위빳사나를 닦는 심수관을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심이 청정한 부처님의 제자는 반드시 유익한 마음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추후『청정도론』에서 40가지 명상주제를 배우시면, 그러한 유익한 마음(근접삼매와 본삼매)에서
나와서(출정하여) 다시 그 정신현상들(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위빳사나를 배우게 됩니다.
이런 유익한 마음이 근접삼매 경지까지 고도로 깊어지면 위빳사나 닦기가 빨라지는데
이는 모두 신심이 청정한 부처님의 제자만이 가능한 삼보에 대한 믿음의 공덕입니다.
위빳사나를 닦기 위해서는 근접삼매 정도의 깊은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접삼매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면 매우 좋습니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할 수록 결국에는 근접에 들게 되어 있고, 그러면 위빳사나는 일취월장하게 됩니다.
3) 교학을 하면서 행하게 되는 간단한 법수관의 수행 예
여기서 심수관만 해도 좋겠지만, 심수관이 익숙해지시면 연습삼아 법수관도 행해 봅니다.
만약 이전에 없던 그 유익한 마음이 일어난 조건을 꿰뚫어 알면 법수관에 포함됩니다.
조건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선 초보적으로 이유가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유를 아는 것을 꿰뚫어 안다고 합니다.(「대념처경」D22 §13 주석584)
왜 이 유익한 법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이 유익한 법을 닦아서 성취할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추후 교학으로 보다 정확한 법수관을 배우면 됩니다.
4) 정신적 행위는 누가 합니까?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해탈한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이 그런 마음을 행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가령, 즐거운 느낌이 조건따라 일어나서 느끼고 사라집니다. 결코 나의 것이 아니고, 나란 개념은 없습니다.
(「대념처경」D22 §11 주석557)
5) 마음챙김과 지혜
그러면 이를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누가 합니까?
그것은 마음챙김(定에 포함)과 지혜(알아차림 포함)가 합니다.
그 마음챙김과 지혜도 역시 나의 것이 아니고, 신의 것도 아니고, 그저 조건따라 일어나는 법일 뿐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다보면, 차차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다섯 감각기관은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은 마음챙김을, 마음챙김은 해탈을,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운나바 바라문경 S48:42)
6) 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합니까?
반대로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경을 읽거나 그 해로운 법을 알아차리고 계속 주시하면 사라집니다.
해로운 법은 조건이 멸하면 사라지는데, 그 법을 알아차리고 계속 주시하는 행위가 선행이기 때문에
해로운 법의 조건이 사라질 수 밖에 없어서, 해로운 법(불선한 정신적 현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아비담마에서 인식과정과 법을 배우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해로운 마음이 제거되면, 그때 해로운 마음이 제거된 이유를 압니다. 이렇게 이유를 아는 것을
꿰뚫어 안다고 합니다. 물론 무상,고,무아로 여리작의를 확대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이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여리작의에 대하여는 <초기불교> 공부방의 1,630번 글을 참고하십시오)
또한 이런 노력도 역시 사념처 중에서 법수관의 과정입니다.
7)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위와같이 유익한 법(선법)은 일어나게 하고 증장시키려 노력하고, 해로운 법(불선법)은 제거하도록
노력하넌 것이 바로 팔정도의 하나인 바른 정진입니다. 이 정진이 있어야 바른 도닦음이 가능합니다.
(「대념처경」D22 §21의 바른정진 편 참고)
또 앞에서 설명드렸듯이 이것은 바른 마음챙김이 되고, 그 순간 바른 집중이 생겨납니다.
구체적으로 왜 도닦음이 되는지는 <초기불교> 공부방의 저의 1573번 글을 참조해주십시오.
8) 법을 찰나적으로 보아야 합니까?
이때 찰나를 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립시오.
아비담마 교학적으로 말하면, 상속의 단위로 알아차리고 마음챙겨서 주시하십시오.
보통 알아지는 현상(법)은 찰나에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는데 이를 상속(흐름)이라 합니다.
이렇게 [법이 수 많이 상속하는 것]을 보면서 그 법이 계속 그대로 [존재]한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대념처경」D22 §13 주석583) 그러므로 애써서 [상상으로 찰나를 보려고] 하지 마시고,
상속의 단위로 법의 흐름을 보면 됩니다.
그렇게 법의 흐름(상속)을 알아차리고 계속 주시하면, 해로운 법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고, 유익한
법은 계속 증장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접 아비담마를 공부해서 알아내십시오.
이렇게 아비담마의 교학은 수행하면서 겪게 될 각종 위험에서 속지 않고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9) 위빳사나에서 구체적으로 법은 무엇이고, 법의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법은 고유성질을 가진 최소단위의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말합니다.
위빳사나는 법이 가진 두 가지 성질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대상을 봅니다.
이 자상과 공상 두가지 모두 법의 성질이며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자상은 법이 가진 고유성질이고, 공상은 모든 법이 공통적으로 가진 성질, 즉, 무상, 고, 무아입니다.
구체적으로 법의 종류와 이름, 법수, 법의 관계(조건) 등에 대하여는 아비담마를 공부하십시오.
10) 사띠(마음챙김)는 무엇입니까?
위와같은 행위가 마음챙김입니다.(「대념처경」D22 전체)
구체적으로 이렇게 눈,귀,코,혀,몸,마노의 물질적 정신적 감각기관에 일어나는 현상들(법)을 거머쥐고
그 대상에 깊이 파고들어가, 주시하는 것이 바로 사띠(마음챙김)입니다.(『청정도론』)
후에 아비담마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배우시면 됩니다.
그리고『청정도론』을 통해 사띠를 토대로 한 계의 단속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체적으로 배우시면 됩니다.
우선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알아차려지는 현상(법)]을 거머쥐고 파고들어가 주시하십시오.
이런 마음챙김을 계속해서 행하면서 확고하게 머무는 행위를 [확립]이라 합니다.
11) 사띠는 언제까지 합니까?
마음챙김과 지혜만이 현전할 때까지라고 부처님은「대념처경」에서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12) 마음챙김을 해도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런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을 하는데도 괴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과거의 해로운 행위를 하여
받는 해로운 과보이오니 그 괴로움을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선업을 행하면서 달게 받고 잘 견뎌야 합니다.
마음챙김의 선행을 하면서 받는 괴로운 과보는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 아주 용이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가슴에 일어난다면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알고 그 느낌을 주시합니다.
이때 느낌은 나의 것도 아니고, 신의 것도 아니고, 중생의 것이 아니라, 느낌이 조건따라 일어나 느끼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나"라는 개념을 인식하면 안됩니다. 그러려면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 안되고, 단지 그 괴로운 느낌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괴로운 느낌이 계속된다면, 계속 생멸을 거듭하며 상속하고 있는 것이며, 과보는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13) 업은 과거에 짓습니까, 아니면 지금 짓습니까?
이렇게 업이란 찰나찰나 지금도 선업 또는 불선업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과보의 영향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짓습니까"라고 물으면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유신견에 빠지므로, 반드시 연기에 의해 질문해야 하며
연기에 의해 답해야 합니다. 즉, "업지음(의도적 행위들)은 무엇을 조건으로 일어납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의조적 행위들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다"고 답해야 합니다. 연기적 사고가 무아의 실천입니다.
아비담마의 인식과정과 업과 과보를 배워 열심히 수행하면 차차 인식의 변화가 오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이왕 업이 매 찰나 일어날 것이라면, 계, 사마타, 위빳사나 등의 선업이 일어나도록 합시다.
참고로 마음챙김이 있는 한, 항상 선업이라 합니다. (아비담마 참고)
14) 교학을 하면서 얻게 되는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인식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챙기고 알아차림을 교학을 하면서 실천하면, 그 마음이, 그 느낌이, 그 인식이, 그 심리현상들이
일어나서 자기 고유성질을 행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보게 됩니다. 계속되는 반복속에서 인식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행자는 '이런 현상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들은 조건따라 일어나고 멸함을 알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학을 하면서도 무상을 알고 보게 되며,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 것을 알고 보게 됩니다.
다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는 인식은 확대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할만한 고정불변하는 어떤 실체도 없다(무아)는 것을 절감하고 알고 보게 됩니다.
인식의 변화를 통해 해탈열반을 실현한다고 아비담마에서도 가르칩니다.
15) 아비담마를 배우면서 이왕이면 법을 구별하고 확인해 봅시다.
또한, 아비담마와『청정도론』을 공부하실때는 내내 법만 사유하고 배운 법을 확인하기 위해
실재 자신의 내면에서 법을 찾아내고 구별해내도록 관찰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후 사념처 수행의 과정에 포함되고, 위빳사나의 기초인 [견청정]의 과정입니다.
15) 구체적인 수행은 언제 합니까?
이미 교학을 하시면서 훌륭히 사념처를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수행은 교학 후에 배우셔도 그리 늦지는 않으니, 조급한 마음이 일어나면
"들뜸과 후회가 있구나"라고 꿰뚫어 알고, 그 들뜸과 후회를 따로따로 주시하고 마음챙기면 됩니다.
제가 지혜도 낮고 기억력도 없고 우둔하여 위와같은 방법으로 해왔습니다.
물론 근기가 높으신 수행자는 더 수승한 방법이 있으실 것입니다.
7. 검증의 노력
그리고 훌륭하신 스승님을 모시고 항시 검증 받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과 율에 우선적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르겠으면 성인제자들의 가르침인 논장과 집대성해 놓은『청정도론』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스승님의 검증은 반드시 삼장의 교학을 근거로 지도 받아야 합니다.
어느 개인의 체험을 그대로 맹신하면 위험합니다. 반드시 삼장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삼장을 우선하는 한, 법에 대하여 차차 자신의 견해는 없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방법을 택하여 교학과 수행을 가느냐는 자신의 몫입니다.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초기불교 교학과 함께 항시 행복하시길, 모든 괴로움 없으기길 염원올립니다. _()_
도산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