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헤롯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가 살았던 그 시대를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하였다. 또한 성경에서도 그 시대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만약 예수그리스도가 나신 그 시대의 상황과 헤롯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면 성서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역사적 의미를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의 신화가 아닌 역사적 근거를 둔 사실임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롯일가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헤롯일가와 그의 정책
안티파터는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야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B.C43년에 말리쿠스라는 열광적인 유대인에 의하여 독살되었고 이로써 그의 생은 종말을 고하였다.
헤롯은 즉시 그의 대권을 행사하여 말리쿠스를 살해하였다. 안티파터가 죽은 후에 유대는 파사엘의 손에 넘겨졌고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의 정치발전으로 인하여 안티파터의 두아들 앞에는 험난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레스틴에서 만사가 혼란한 상태였다. B.C년에 빌립보 전투는 옥타비안과 안토니에 의하여 참패하였다. 안토니아가 아시아를 통치하려고 오자 곧 헤롯은 뇌물로 그의 환심을 샀다. 그 결과 안토니는 헤롯과 파사엘을 유대의 협동 분봉왕으로 임명하고 힐카누스 2세는 계속하여 대제사장으로만 봉직하게 되었다. 안티고누스(아리스토불루스2세의 아들)는 파르디아인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이 즉시 출병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파사엘은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헤롯은 대적들의 눈을 피하여 안토니에게 아리스토불루스를 유대의 왕으로 삼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안토니는 하스모니안 왕조를 신뢰하지 않았고 로마 원로원의 재가를 얻어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삼았다.
1) 헤롯의 정책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의 명을 따르던 헤롯은 후에 안토니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자 로도스에 체류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에게 재차 유대인의 왕으로 확정해 주었고 안토니우스가 클레오 파트라에게 선물로 주었던 "여리고 도성, 가사와 안테돈, 욥바와 그리고 해안선에 있는 전략적 망루, 사마리아, 가다라, 그리고 해안선에 있는 힙포"를 헤롯에게 넘겨주었다.
2) 헤롯의 목표
헤롯통치의 목표는 첫째, "자기 왕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그는 하스몬 왕가의 주도적인 인물들인 45명을 처형했다. 둘째, 자기 백성의 안녕과 복지였다. 그는 불모의 지역을 식민 개척하고, 도성들을 아름답게 꾸미고, 흉년이 들었을때는 그것을 완하시키기 위하여 매우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물자를 투자하기도 하였고 이 목적을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금,은 그룻도 뷴배하여 주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는 수도시설을 설치하고 그곳에 극장과 원형경기장도 건설했다. 셋째, 자기나라와 백성을 헬라의 문화에 개방 시켰다.
3)대립과 투쟁
주전 37년에서 주전 4년까지 계속되었던 헤롯의 통치기간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왕조간의 대립>과<문화적인 업적>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시기에는 왕의 관심이 주로 적들이나 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공격이 모아졌으며 두 번째 시기에는 주로 대규모 건설사업이 이루어졌다.
그의 통치기간(B.C.37-4) 중의 경력은 패권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헤롯이 그 일생을 마치기까지 변하지 않았던 정책은 인척이나 그 대가에 관계없이 모든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도, 가장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광적인 야망으로 인하여 살해를 당했다. 헤롯은 하스모니아 가문 출신인 Mariamne와의 결혼을 통하여 옛 왕족과 유대를 맺었다. 그는 이두메(Idumea)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반쪽 유대인'으로 취급되었고 로마인의 도움을 받아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백성들에게서는 지지를 잃어버렸다. 헤롯 자신도 완전히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차 박해의 망상으로 바뀌어갔다. 히르카누스(Hyrcanus)는 두 귀가 잘려 살해되었고 헤롯 자신은 제사장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처남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대제사장 직위를 주었으나 하스모니아家가 그를 몰아낼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를 청부살인해 버렸다. 하스모니아에 대한 그의 콤플렉스는 극에 달하여 그의 부인 마리암네(Mariamne)를 죽인 후 그녀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도 죽여버렸다. 그는 큰아들 안티파터(Antipater)마저도 자신이 죽기전 내란의 선동자라 하여 살해했다. 헤롯의 행위는 의심으로 가득찬 병적인 행위였다. 베들레헴의 유아살해(infanticide)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록은 이러한 그의 성격과 잘 일치된다(마2:16)
4) 헤롯의 정치
헤롯은 로마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통치권은 개인적으로 안토니우스가 원인이 되어 원로원에서 부여받았고 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간청함으로써 로마의 호의에 근거하여 확인되었고 전적으로 로마에 의존되었다. 헤롯왕은 필요한 경우에 로마에 군대를 보내고 돈을 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로마의 승인이 없이는 전쟁과 외교정책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내정에 있어서는 그의 세력이 이론적으로 무한하였다. 그는 생각나는 대로 세금을 올릴 수 있고, 최고의 재판관도 되고, 최고의 법률 제정가도 되고, 행정적인 총재도 되는 만능의 인물이었다". 다만 이러한 무한한 권력은 바리새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민중 의 종교적인 감정을 고려하여 필요에 따라 제한될 뿐이었다.
헤롯의 왕국에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특히 옥타비아누스의 선물로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 그 지역 안에 살던 이방인들도 속하였다. 헤롯은 이방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던 하스모니아의 정책을 계속하지 않고 헬라인과 유대인을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는 교활한 현실적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왕으로서 유대인게는 유대인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으로 행동했다. 그 실례로 헤롯은 "그의 명령으로 주조된 화폐들은 어떤 형상도 새겨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중요한 건물들에서도 그 어떠한 상(像)도 두지 않았다. 가능한 한 그는 당시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바리새파의 견해를 존중하였다."
5) 헤롯통치하의 경제
위에서 언급한 헤롯 당시의 무수한 건축사업들과 그가 진척시킨 상황들이 매우 큰 금액의 돈을 고갈시켰고 헤롯이 그 돈을 입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후일 헤롯이 죽은 후 유대인들이 헤롯의 계승자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에게 세금의 경감을 요청한 사실만 보아도 헤롯의 징세가 얼마나 과중했는지는 짐작이 갈 만 하다. 헤롯의 지지자들이었던 부유한 귀족들의 납세 이외에도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세리제도의 활용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세리들이 직접세의 징수를 위해 당국과 계약을 맺게 하였다. 헤롯 당시 예루살렘의 큰 부자들은 소수집단이었다. 이와함께 이 나라에는 심히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무거운 세금은 헤롯의 부유한 지지자들보다는 오히려 시골 주민 및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로마(헤롯왕가)당국자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이 이러한 주민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이러한 경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갈릴리는 끊임없이 눈에 띄는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헤롯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건축사업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새로 개설된 교통망을 통해서, 특히 새로 생긴 가이사리아 항구도시를 통해서, 그리고 헤롯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받았던 부유한 헬레니즘 도시들과 방대한 영토를 통해서 로마제국의 다른 지역과의 <무역>이 촉진되었다."
6) 헤롯의 종교 정책
헤롯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자신을 드러내었다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성서와 후대의 전승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헤롯의 태도를 그리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헤롯은 "하스몬왕가에 가까운 산헤드린의 회원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의 통치 말엽에 서기관들인 유다와 마타아스가 주도하여 성전 문에 설치된 황금독수리상을 제거하였는데 이들은 이 일로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점에 있어서는 그는 민족의 종교적 감정을 소중히 여겼다. 형상이나 마음을 교란시키는 상징물들은 금지되었으며 이것은 화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들이 성전 광장의 바깥 부분을 넘어 들어올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또다른 면에서 보면 종교적인 정책에 있어서 그의 잣대는 이중적이었다. 헤롯은 자기 마음대로 대제사장들을 임명하거나 면직시켰으며. 이렇게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그가 이러한 옛제도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백성들과 제사장들 사이의 틈을 벌여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비록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헤롯이 바리새파의 견해를 중요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헤롯과 로마황제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거절하였고 이들의 거절은 분명히 종교적인 배경 곧 외국(이교)통치자에 대한 지나친 복종의 거부를 의미했다. 그러나 헤롯은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중죄를 주지 않고 단지 가벼운 벌이나 단순한 벌금부과로 그쳤다.
헤롯이 바리새파에 대해 호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이 집단이 .백성들 사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소는 이 집단이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집단은 점차로 그들의 관심사를 정치적인 문제에서 좀 더 종교적인 영역으로 옮겨갔다. ... 정치적으로 헤롯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헤롯이 바리새파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가진 또 다른 이유는 B.C.37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에 세마야(Shemaiah)와 폴리오(Pollio)라는 두 바리새인들의 긴급한 충고로 예루살렘 성문이 열려졌다는 일일 것이다."
2. 헤롯 가문과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연도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도를 측정은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헤롯은 주전 4년에 죽는다. 마태에 의하면 헤롯이 죽기 전에 예수가 탄생했다. 그래서 헤롯은 동방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난 아기'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두 살 아래 어린 아기들을 모조리 학살한다.(마태 2 :1 - 8) 따라서 마태에 의하면 예수의 탄생은 늦어도 헤롯이 죽기 전인 주전 4년 이전이다.
헤롯은 많은 일을 했지만 유대인 상류층과 하류층에 걸쳐서 심각만을 초래케 하였으며 그는 죽으면서 유언장에 자기의 세 아들이 자신의 권력의 상속자로 임명하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세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어 아켈라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를 다스렸고 헤롯 안티파스(Herodes Antipas)는 갈릴리와 트랜스 요르단에 있는 베레아를, 필립(Philippus, Philip)은 북부에 있는 동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리게 되는 새로운 삼두 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이러한 헤롯의 처사는 이스라엘에게 또 한번 분단의 비극을 안겨준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북왕조 분열과 안티파터가 파사엘과 헤롯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데 이어 지배자들에 의한 세 번째의 비극적 국토 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팔레스타인의 분할통치는 로마의 인증을 받아야만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세 아들은 가이사 아구스도를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고 안티파스와 필립은 분봉왕으로(Tetrarch),아켈라우스는 대공으로(Ethnarch) 인증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들의 지배권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의 제의공동체의 독립성을 회복시켜줄 것을 탄원하는 탄원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했으며 세 아들이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갈릴리 지방에서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갈리리 지방에서 일어난 의거는 대부분의 백성들 가운데 잠재되어 왔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즉 이들은 호전적인 마카오 시대와 많은 성과를 거둔 하스몬 왕가를 통해 성서가 말한 희망의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힘이 로마의 점령 기간과 헤롯의 폭정기간에 억눌려 왔기 때문에, 이 억눌린 것이 폭발할 때는 더욱 더 커다란 힘을 발산했으며, 이러한 폭발은 그 후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어 일어나게 된다.
이 의거의 주동자는 갈릴리 사람 유다와 바리새파 사둑이었으며, 이 의거는 시리아총독으로 있던 바루스 휘하의 로마군대에 의하여 가혹하게 진압됨으로써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반로마적인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된다.
계속적으로 의거가 진행되면서 아켈라우스는 고전을 하게되는데 바루스는 아켈라우스가 고전하고 있는 예루살렘까지 진군해서 수많은 폭동 세력을 진압하고 유대인 2000명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된다. 포악한 전제정치를 하던 아켈라우스는 10년도 못되어 A.D 6년에 잔인성과 지나친 권력욕 때문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의 대표자들에 의해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게 고발되어 로마로부터 해임되고 고울 지방의 비넨너로 추방당했다. 그의 영토는 로마총독이 유대 땅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인들은 주민들의 등록을 지시했다. 이것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일단의 유대인 집단을 격분시켰으며 반로마적인 저항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시리아 총독의 관할 구역에 편입된 유대는 율법에 따른 생활과 산헤드린 활동을 보장 받게 되었다. 그 대신 로마는 앞에서 언급한것와 같이 세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주님의 수효와 재산 상태를 조사하도록 명을 내리게 된다.(누가 2:1-5). 누가 복음은 이 인구조사 사건을 예수 탄생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주후 6-7년에 태어났다. 이때 총독은 구레뇨였다. 세금을 징수 할 때는 토착민을 관리로 임명했다. 세금 징수의 앞잡인 세리는 유대인들의 반감으로 유대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또 다른 사료들을 살펴보면 헤롯대왕은 로마기원 714년 (BC.40년) 안토니와 아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의 분봉왕으로 지명받았고, 717년 실지로 취임하였고, 34년간 통치하였다. 그가 죽은해는 750년이었으며, 헤롯의 사망 일자에 대해서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죽기 전에 월식(月食)이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B.C. 4년 3월 12-13일로 측정케 한다. 그의 사자 아켈라오가 아비를 위한 일주일간의 애도후에 유월절을 지켰다고 한다.
둘째로 유력한 근거는 아구스도의 영을 따라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이 되고 첫 번 한 호적의 때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발견된 인구조사 문헌들은 AD 70년에서 258년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는 14년마다 한번씩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AD 62년에도 그곳에서 인구조사가 한번 실시 되었다. 만일 이러한 인구조사들이 획일적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었다고 한다면, 그 이전의 인구조사들은 BC 8년 AD 6년, 20년, 34년, 48년에 실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조사가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들에 동시적으로 실시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디오카우스는와 리비는 AD 27년에 갈리아에서 인구 조사가 실시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것와 같이 예수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확정짓기란 불가능하다.
3. 헤롯안티파스와 예수운동
헤롯 안디바는 아켈라오의 동생으로 B.C. 20년경에 태어났다. B.C. 4년에 아버지인 헤롯이 죽자 왕위를 얻으려고 그의 형과 경쟁했다. 이는 헤롯의 유언 중에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다시 쓰여진 유언에서는 그것이 번복이되었다. 결국 로마의 황제는 안디바에게 1년에 200달란트의 세금이 걷히는 갈릴리(Galilee)와 베레아(Peraea) 지역을 통치하도록 분봉왕으로 임명했다. 그는 그의 부친의 건축사업을 계승했다. 그는 자신의 영토의 수도인 셉포라(Sepphoris)를 확장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가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당시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as)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Tiberias)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안디바는 디베랴를 도시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파내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이곳으로 모여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디바는 누구든지 이곳으로 이주하는 자들에게 무료로 집을 제공하고 땅도 제공해 주었다. 구 후 이 도시는 이방인의 유력한 도시가 되었으며 세월이 지난 후에는 랍비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안디바는 아라비아의 아레타스왕의 공주와 결혼했으나 어느 기회에 로마에 가서 자기 이복동생 헤롯(Herod)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사랑하게 되어 본부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한다. 공관서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세례 요한에게 책망을 듣는다(마가 6: 18, 마태 14: 1-12비교) 신약에서 특별히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서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디아스(Herodias)와 그의 불법적인 결혼은 그의 간음죄를 지적하였기 때문에 투옥시킨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한 것이다. 이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성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을 보낸 헤롯과 동일인이었다(눅 23: 7-12)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Caliqula)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는 그의 청원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였다.
-예수운동-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무대는 주로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예수와 안디바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은 세 번 언급하고 있다. 안디바는 예수의 사역의 소식을 듣고 자기가 목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안디바는 유대인의 전승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즉 선지자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그들이 죽은 후에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유대인의 믿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헤롯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 심히 당황해 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다(눅 9:7). 또한, 헤롯은 예수를 보고 싶어했다(눅9:9).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헤롯의 통치 구역을 벗어나곤 했다. 안디바가 예수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의 백성들의 분개를 다시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분개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그는 안디바의 영토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경고는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눅13:31). 아마도 헤롯은 예수 운동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는 예수 운동이 그에게 정치적 걸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계산일 것이다.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헤롯이 교활한 자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Ⅲ. 결 론
헤롯이라는 한 인물과 그의 가문을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삶 또한 살펴보았다. 왜 예수님께서 헤롯시대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온갖 박해 받는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억압 받는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으며,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것만이 아닌 이 사실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며 그 사실의 과학적 임증을 통하여 더 확신 할 수 있었다. 확신 가운데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 우리가 분명 신학생으로서 맹목적인 신학의 모습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 의미를 다른이들에게 설명 할 수 있었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