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리기 가운데 통일신라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감은사지 사리장엄구는 그 제작 년대가 확실하면서 국제적인 면모의 문양과 도상,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사리기의 차원을 넘어 한국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리기가 발견된 감은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문왕(神文王) 2년인 682년에 신라 통일의 실질적 영주이자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용이 된 문무왕(文武王)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을 뒤로 한 채 감은사에는 금당 자리를 포함한 절터와 석탑 두기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리기는 원래 서탑 것만이 확인되었으나 1995년 동탑에서 또 한 벌의 사리기가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 쌍탑의 경우 두 벌의 사리기가 각각 봉안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백제의 사리장엄이 지하나 심초석에 마련되는 것과 달리 감은사지 탑은 동탑과 서탑 모두 3층탑신의 윗면의 사리 구멍에서 발견된 점도 사리 장엄 방식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우선 서탑의 경우 사리함의 가장 바깥 상자로 뚜껑이 덮힌 상자형의 청동외함과 그 안에 불단(佛壇)의 모습을 한 내함이 있으며 이 내함 중앙에 수정제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었다. 아울러 당시 사리기를 집어넣었을 때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 작은 티스푼 형태의 숟가락과 핀셋형의 집게가 함께 발견된 점도 처음으로서 주목받았다.
동탑에서는 뚜껑이 덮인 방형 함을 바깥 상자로 하여 그 안에는 파손되어 복원이 불가능하였던 서탑과 달리 기둥을 세우고 천개를 세운 지붕과 불단형(佛壇形)의 대좌를 갖춘 내함이 원형을 갖춘 채 발견되었다. 보개형(寶蓋形), 또는 가마형(輦形)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형식을 사리기에 채용한 것은 당시 장인들의 새로운 창안으로 보이며 감은사 사리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되는 점이 의미 깊다. 이후에도 이러헌 보개형 사리기 형식은 송림사(松林寺) 벽돌탑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기로 계승된다.
서탑 사리함의 외함은 넓은 방형의 판을 이용하여 짜 맞추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면마다 사천왕상을 주조하여 붙였다. 이 사천왕상은 각 면의 중앙에 위치하며 그 좌우에 괴수 모양의 문고리를 배치하였다. 사천왕상의 모습은 전신에 정교하게 표현된 갑옷을 입고 각각의 독특한 자세와 지물을 들고 잘록한 허리에 저마다 개성 넘친 얼굴로 표현되었다. 치켜 올라가 불거진 눈과 매부리 코, 카이젤 수염 같은 이국적인 모습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서역인의 모습과 닮아있는 점에 주목된다. 이것은 서역인의 모습을 사천왕상의 모델로 채택한 예로서 중국의 경우에도 당의 봉선사(奉先寺) 석굴 사천왕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감은사 사리기는 가장 혁신적이고 국제적인 미술 양식을 받아들인 당시 통일신라 초기의 활발한 대외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동탑의 사천왕상 역시 전신에 갑옷을 입고 각각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지물을 잡고 있으며 이 아래로 악귀(惡鬼)를 밟고 있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였다. 신체의 비례는 전체적으로 서탑에 비해 조금 짧아진 듯하며 갑옷, 천의 등은 약간 단순화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활달한 자세와 몸체의 움직임이 보다 자유로워졌고 얼굴의 표정도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동탑의 상을 서탑과 비교해 볼 때 조각적으로 다소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훨씬 개성적이고 부드러움이 강조되어 새로운 조각 양식으로 변화된 점을 느낄 수 있다.
불단(佛壇)의 모습을 한 사리 내함의 하부는 아랫단, 중단, 그리고 난간이 둘러진 윗단으로 구성되었고 정상의 중앙부에는 팔각으로 된 8잎의 연판 대좌를 만들어 사리병이 들어가는 연봉형의 또 다른 외함을 올려놓도록 만든 구조이다.
사리가 안치된 수정제의 사리병도 구성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세부 표현에서 조금 다른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서탑의 경우 둥그런 몸체 아래 조금 높은 굽이 달리고 기다란 목 위로 보상화문을 세밀하게 투각 장식된 은제 뚜껑이 덮인 모습이다. 이에 반해 동탑의 사리병은 금제 뚜껑을 팔각으로 만든 판형 위에 여덟 잎의 연판 형태를 누금(鏤金 : granulation)으로 장식한 더욱 정교한 모습이면서 뚜껑 중앙에는 연봉형 꼭지가 돌출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또한 사리병의 밑 부분에도 서탑과 달리 별도의 원반형 사리 받침이 놓여있는데, 중앙에 돌출된 촉을 중심으로 4엽의 연판을 장식하고 그 외연의 여백을 역시 누금으로 빈틈없이 장식하여 훨씬 정성을 기울인 점을 볼 수 있다.
한편, 사리병 주위에 배치된 호위중(護衛衆)의 모습도 서로 다른 양상을 지닌다. 서탑은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4구의 주악좌상을 네 귀에 두고 그 사이에 춤을 추는 작은 동자상(童子像)을 두었지만 동탑은 사면 중앙에 4구의 사천왕상과 그 사이마다 1구씩의 승려입상을 배치한 점에서 이 두 사리기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구성 방식을 채택하였다고 보인다.
통일신라 전형적인 쌍탑 가람인 감은사 동ㆍ 서탑의 사리기는 일반적인 탑과 마찬가지로 그 외관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두 탑에서 발견된 사리기는 그 형식면에서 동일한 구조를 보이면서도 세부 여러 곳에서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리 외함에 표현된 사천왕상의 경우 동탑의 사천왕상은 서탑 보다 훨씬 개성적이며 부드러움이 강조되어 새로운 조각 양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것은 서탑의 사천왕상이 서역적인 요소를 가미한 당나라의 조각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과 비교할 때 동탑의 사천왕상은 이미 우리식으로 소화된 개성이 발휘되었다. 통일신라 조각으로 바뀌어 가는 이러한 새로운 요소는 사천왕상 뿐 아니라 사리 내함 주위에 배치된 주악상 대신 소형의 사천왕상과 승려입상의 모습이라던가 용과 사자의 정교한 표현, 사리병에 장식된 누금세공(鏤金細工)의 완숙한 기량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리기는 최소 다른 제작자 내지는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되어 넣어졌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좀 더 진전된 기량을 보이는 동탑 사리기가 나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이 감은사 사리기는 삼국시대까지 백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리 봉안 방식에서 새로이 통일신라의 독자적인 모습의 사리기로 정착되어 나가는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삼국 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7세기 후반, 통일신라 미술로 발전되는 가장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가 경주를 중심으로 들어온 당나라의 새로운 양식이라 할 수 있고 감은사 동, 서 양탑의 사리기는 그러한 신양식의 수용과 전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선구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글 사진 = 최응천 /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구주대학에서 ’한국 범음구(梵音具)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하여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을 거쳐 2002년 초대 국립춘천박물관장과 전시팀장, 아시아부장, 미술부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2009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불교미술대전』,『갑사와 동학사』,『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미륵사지 출토 금동 수각향로의 조형과 편년」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