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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토행정기 담의(談義)
글쓴이: 牧田諦亮/전 쿄토대학 교수
실린곳: 神田喜一郞 선생 추도 중국학논집(1986)/ 갈진가 편저「최부표해록연구」(1995)
옮긴이: 崔英鎬/廣南고등학교 교사
호소카/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편집자 주: 마키타 교수의 "당토행정기 담의" 중에서「표해록」과 직접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여 편집하였음을 밝혀 둔다.
이미 26년 전에「책언입명기(策彦入明記)의 연구」하권을 출판할 때, 책언화상(策彦和尙)보다 52년 전에 거의 같은 수로로 북상하여 북경을 경유, 본국에 귀환한 조선 최부(崔溥)의 「표해록」원문을 양명문고장본, 내각문고장본에 의거, 부록으로 실었다. 그 때「표해록」의 일본어본으로「당토행정기」를 구했으나, "월국문학파마청현역고(越國文學播磨淸絢譯考)" 라는 것 무슨 뜻인지 몰라, 신전(神田)선생을 방문하여 상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작년 여름 한국을 여행하여 전남 나주에 있는 최부의 묘에 참배한 후로부터 전공은 아니지만「표해록」에 관해서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신정 선생께서는 이미 타계하셨지만, 왕년에 선생댁을 자주 방문하여 중국 불교사에서부터 정토종사, 중국문학, 그 이외의 많은 부분에서 지도를 받은 것이 머리에 떠올라「당토행정기」에 관해서 약간의 소론을 기록하여 신전 선생의 영전에 바치는 바이다.
1. 당토행정기에 관하여
「당토행정기」는 1769년 6월에 황도서림 등 4개의 서사(書肆)의 협력으로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 만들어졌다. 청전군금의 이름은 현(絢), 자는 원염(元琰), 담유 또는 공작루주인(孔雀樓主人)으로 경도(京都)의 유명한 유학집안 이등용주(伊藤龍州, 본성은 淸田)의 3남으로 중국역사에 뛰어났으며,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13번 읽고, 비평하기를 좋아하여 만년에「자치통감비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가 표해록을 번역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당토행정기」 권1 의 권수(卷首)에 상세히 나와 있다.
2. 당토행정기의『고(考)』와 청전군금(淸田君錦)의 사관(史觀)
「당토행정기」권1에는「자치통감비평」10책을 저술할 정도로 중국역사에 해박한 군금(君錦)답게 조선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조선의 흥망에 관하여 중국역사를 참고로 설명하였다. 단지 그 끝부분에, "명초기 재상 李仁人(李仁任 ?-1388)이라는 학자가 그 주군 왕씨를 제거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조선이라 고쳐 지금에 이르다" 라고 한 것은 고려말기의 정치가로 홍건적 토벌의 무공을 세워 재상이 된 이인임과 이 정권에 불만을 품고 드디어 이인임을 추방,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를 혼동하고 있다.
『고(考)』부분에 이어 표해록의 내용인 최부의 제주도 부임, 아버지 최택의 사망, 아버지 상을 치르기 위해 제주도 출발, 폭풍에 대한 기록이 계속된다. 홍치원년(1488) 윤정월 6일에 고래를 보았으나, 군금은 이 고래에 관해서도『고』에 "해유 혹은 해추 라고 쓴다" 라고 설명한 것도 신정백석(新井白石) 선생의 글을 참고로 한 것 등 군금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일단의 관심을 알려준다.
표해록 윤정월 18일의 기록에 최부 일행이 동네사람들에 의해 끌려갈 때 소나무, 대나무로 둘러싸인 높은 지대에 은인(隱人) 왕을원의 집이 잇어, 을원이 이들의 궁상을 보고 술 등을 주며 휴식하도록 하나, 최부는 우리 조선은 부모상을 당하면 3년간 술, 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고, 학자인 왕을원의 후의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상중이라 이 후의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구하자, 을원은 최부에게는 차를, 종자들에게는 술을 권하는 기록이 있다. 군금은 그후 을원이 조선의 불교 유무를 묻는 질문에 최부가 조선에는 불교를 믿지 않고 오직 유교를 숭상하여 집집마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한다는 대답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고(考)』에,
"대개 바다 옆이나 깊은 산속에 살면서 남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들 속에야 진짜 대군자나 대호걸은 있을 것이다. 번화한 도시나 대도시에 살고 남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유자든, 은사든 십중팔구는 가짜 혹은 사기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재주가 있다, 없다 혹은 명성이 있다, 욕심이 많다 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다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여 바다옆의 산속에 살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 속에 진짜 대군자, 대호걸이 있다고 강조한 것은 군금의 마음속에 적석(赤石)에 살았던 소년시대, 梁田(1672∼1757)밑에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썼을 것이다.
윤정월 21일 기록에 도저소에 백발노인이 오자 최부가 천태산, 안탕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 내용이 있다. 천태산은 이 곳에서부터 2일 걸리며, 안탕산은 하루 더 걸린다고 알려준다. 이 곳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를 묻자, 노인은 5천8백여 리, 양자강까지는 2천여 리라고 답한다.(군금은 580여 리, 2백여 리라고 했다) 물론 최부는 추측에 자니지 않음을 기록해 놓았다. 단지 군금이 10분지 1로 숫자를 고쳐 놓은 것은 중국의 10리를 일보의 1리로 계산했을까. 어쨌든 지나치게 적게 기록했다.
표해록 권1의 중간, 홍치원년 윤정월 18일까지를 끝으로 군금의 당토행정기는 그 권1을 마무리했다.
윤정월 19일의 기록에 의하면 일행이 큰 비를 만나 겨우 도저소(절강성 해문위의 出城)에 도착, 왕벽이 문자로 어제 상사에게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 인가를 약탈했다고 보고했으며 당신들은 정말로 倭냐고 묻자 최부가 우리는 왜가 아니고 조선국의 문사라고 대답하는 부분이 있다. 당토행정기 권2에는 왜선을 외국선으로 하고 왜를 해적이라고 쓰고 있다. 왜선을 일본배, 왜를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꼈을까. 군금의 마음을 추측해 본다.
표해록의 본문(윤정월 19일)에,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 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비왜도지휘, 비왜파총관을 설치하고 왜에 대비하고 있다. 만약 왜인을 잡으면 모두 선참후계 한다" 는 기록을 당토행정기(권2)에, "예로부터 해적이 우리나라 국경을 여러 차례 위협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법도를 정하시고 만약에 해적을 잡으면 다 베어버리고 후에 상주했다"로 기록했는데, 왜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적이라 고치고 비왜도지휘 등의 관을 기록하지 않아 강호시대의 문인으로서 "왜" 라는 글자에 대해 특이한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토행정기 권수의 附言 6條중에,
"직원초(職原抄)에 현번료(玄蕃寮)가 있다.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중국도 번융(蕃戎)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 지금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왜속(倭俗)이라고 스스로 비하하여 번융이라고 부르던 나라를 中華, 中夏라고 존칭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법령을 심하게 어긴 것이라고 해야 한다." 라고 쓰여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또 같은 날 최부의 기록에서도 당시(명 홍치초)의 중국연안 관현의 왜구에 대한 감시의 엄격함이라든가, 왜로 오인되어 죽을 뻔한 최부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 안으로 도망갔던 일로 미루어 볼 때 중국관헌이 "왜"를 죽여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는 실정 등도 잘 이해된다. 최부 등은 홍치원년 윤정월 24일 험악한 해안선을 따라 건도소에 도착한다. 왜구에 대비한 항구의 경비가 대단히 철저함을 느낄 수 있다. 이곳까지 오자 왜구로 오인 받았던 혐의가 벗겨져 조선의 문인으로서의 대접을 중국관헌은 물론 일반시민으로부터도 받게 된다. 尹이라는 노관헌(老官憲)이 최부 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기록 중에 장보라고 하는 자가 병오년 등과소록(헌종 성화 22년 1486년에 등과한 자들의 일람표)의 자기 이름을 가리키며 자랑한다.
최부는 장보의 안내로 그의 집에 가본 즉, 용을 새긴 2층 3문의 석주가 세워져 있는 눈이 부실 정도의 금박으로 "병오과장보지가" 라고 크게 써 놓았다. 그걸 보고 최부가 그에게 질세라 자신은 두번이나 급제했고, 매년 쌀 200석을 하사 받으며 정문은 3층이라고 허황된 말로 과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일부러「부탄지언(浮誕之言)」이라고 밝히는 것은 실제에도 쌀 200석도 받지 못하면서 장보와 대항하기 위해 억지 말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표해록이 성종에게 바치는 중국 표류의 보고서인 것을 감안하면 부탄지언도 이해된다. 淸田君錦은 이 부탄지언에 구애되어 7행에 걸친『考』를 남겼다.
"매년 쌀 200석을 받는 것이 과장된 거짓말이라면 조선의 봉록을 받는 관리의 봉록이 빈약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일본에는 2000석 이상의 신하가 수천인, 만석이상의 신하가 수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또한 제후의 신상은 어떠한가. 사실을 말해도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장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하충(夏蟲)에 얼음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무릇 천지간에 우리 대일본에 필적할 만한 나라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중국에 대해서는 비굴한 태도로 임해, 성조차 一字로 바꿨다고 고야난정(高野蘭亭·高惟馨), 적성저래(物戊卿) 또 그 이외의 강호시대 유학자들에서도 알 수 있는 편견으로 군금 자신은 중국을 중화, 중하라고 부르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조선에 대해서는 거꾸로 얕보는 듯한 태도가 행정기 속에 보인다. 신기하게도 군금이 태어난 향보4년(享保·1719)에 덕천 8대 장군인 길종(吉宗)의 장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 475명 중 유일한 제술관(製述官)으로 수행했던 신유한(申維翰(1681∼ ?)이 261일 간의 일본여행기로 잘 알려진「해유록(海游錄·평범사 동양문고 252, 강재원씨 역주)」에는 조선인의 일본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군금이 문제로 삼았던 봉록에 관해서도 신유한은 일행의 중요한 숙박지에서 반드시 번주의 봉록액을 기록했다. 예를 들면 복강의 태수원선정(太守源宣政·黑田宣政)은 식록(食祿) 52만석, 적간관(赤間關)의 태수원길원(太守源吉元·毛利吉元)은 식록 35만 9천석으로 기록했으며 또 광도성(廣島省)을 다스리는 태수원길장(太守源吉長·淺野吉長)은 42만 6천석, 비전(備前)의 태수원계정(太守源繼政·池田繼政)은 31만 5천석, 또 근강수산(近江守山)에 판창근강수원중치(板倉近江守源重治)는 50만석으로 적혀 있다. 윤정월 24일 기록에 대한 군금의『考』는 뜻밖에도 강호기의 일본 문인으로 대한관(對韓觀)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표해록 권2는 홍치원년 2월 6일부터 시작된다. 처음 소흥역에 도착한다. 서흥역은 문화대혁명 중에 서쪽이 흥한다는 의미가 걸려서 동방흥으로 개명했다. 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리라. 이 역의 서북쪽에 유명한 전당강(저강, 절강이라고도 함)이 있어 이 강을 건너면 절강의 수도 항주에 도착한다. 여기서 진수태감 장경 등의 문초를 받게 되는 것을 미리 알았다. 이것에 대해 군금은『考』에서, "진수태감은 환관으로 지방에 가 있는 자들이다. 원래 천자의 대리인으로서 지방관리들을 감독하는 자들이므로 그 지방의 높은 관리보다도 권한이 강하여 주군에 큰 해를 끼친다. 명조 폐정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적었다. 조익의「22사차기(史箚記)」를 군금은 보지 않았으나 명대 환관의 화를 여기에 기록한 것은 중국사에 통달하고「자치통감비평」10권을 저술한 군금의 중국사관에 의한 것이다.
2월 9일의『考』에는 최부가 북경인 이절의 친구인 어떤 사람이 면회하러 와서 주희의「소학」한 권을 소매속에서 꺼내어 주며 시 한수를 원했으나 거절한 일에 관해서 논평하고 있다. 최부가 그 사람에게 시를 지어주지 않은 것은 표해록에는 소학 한 권을 받지 않고 시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절이, "도로서 사귀고 예로서 접대할 때는 공자께서도 받았다" 라고 질책한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은 시를 얻으려는 것이지 도로서 사귀는 것이 아니고, 예로서 접대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소학을 받는다면 시를 파는 것이 되기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군금은 행정기 권 2에의『考』에서 말하기를,
"최부가 이것을 취급하는 태도가 좋지 않다. 곳곳에서 음식이나 재보를 선물하면 받으나, 그냥 서적을 선물하면 받지 않는다. 물건을 받은 답례로서 관리에게는 부탁을 받지 않아도 시를 만들어 증정하면서 여기에서는 실례가 된다고 하여 시를 짓지 않았다. 지나치게 저속하다."
최부가 어린 아이의 학문과정이나 수신, 일상도덕에 관한 기록인 소학 등에 흥미가 없어서였을까. 완고하게 받지 않고 시도 지어주지 않은 것은 군금이 말한 것처럼 약간은 시종일관하지 않은 점이 있다.
표해록 권 2, 홍치원년 2월 17일(당토행정기 권3) 소주에 머물고 있을 때 왕, 송이라는 두 사람이 예빈관에 찾아 와서 문답을 주고 받는 기록이 있다. 그중 수, 당의 대군을 고구려가 물리쳤던 일을 거론하여, 어떤 비결이 있어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를 묻자, 최부는 모신, 맹장이 있어 용병술이 뛰어났으며 병사 모두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기꺼이 여겼기 때문이며 이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되어 물자가 풍부하고 땅은 넓으며 부국강병할 뿐아니라 충신과 인재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라고 대답한다. 아마도 명나라의 지방관을 의식하여 더욱 강조했으리라. 이 것에 대해 군금은『考』에서,
"임진왜란 때 우리 병사가 한번 들어가면 8도는 연기가 되었다. 충심이 깊고 지력이 있는 士들은 어느 바위동굴속에 도망쳤는가. 우습다. 그러나 이국에 가면 본국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도리니까, 최부의 대답을 책망할 필요는 없다."
라고 하면서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야당의 지도자가 중국에 가서 최고 지도자에게 자기 나라 총리를 폄하하는 것과는 좀 취지가 다르다 할 수 있다.
군금의 중국지리에 대한 지식도 2월21일의 양자강 기록에서 나타난다. 그의 考에서 20행에 걸쳐 양자강, 황하의 하폭(河幅), 수해의 극심함 그리고 12만 명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대운하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대강(大江)은 황하에 비하면 상기한 것과 같이 광대하지만 그 해악은 극히 적다. 비용도 천백배 적게 든다" 라고 하여 황하의 무서움에 대해 기록한 걸 보면 군금의 중국 견식의 깊이를 알 수 있다.
2월 27일 최부 일행은 대운하를 북상하여 회음역 회안부에 도착한다. 옛부터 유명한 수로로 남송의 소희(紹熙) 5년(1194)에 황하가 범람하여 회수에 흘러 모래가 회수의 흐름을 방해하여 그 지방 저지대에 홍택호(洪澤湖)가 생겼다. 이 이후 큰 비 때마다 수재가 있어 연안도시가 물에 잠기곤 했다. 최부의 견문에 의하면 강의 넓이 10 여리, 깊이는 밑이 없으며 수류가 급하다고 했으며 왕래하는 선박의 재화도 셀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옛부터 이 땅에는 치수(治水)전설이 있다.
즉 옛날에 우(禹)가 귀산의 산기슭인 이 강에 미후(원숭이)라는 괴물을 잡아서 큰 밧줄로 묶어 와 회수의 범람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또 사하(四河)의 합류인 사주에 보광사가 있어 승가화상이 수난(水難)을 다스려 왕래하는 선원들로부터 향토안전신으로 사주대성(泗州大聖)으로 숭앙받고 있다는 전설도 있다. 이 것에 대해서는 나도 승가화상의 연구논고에서 피력한 바 있다.(중국 불교사 연구 제2 所收, 중국에 있어서 민속불교의 성립과정 甲편 승가화상 참조) 군금은 우왕 치수전설이 보이는 괴물, 무지기(無支祈)의 상을 최부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림으로 그려 권두에 실어놨다. 어쨌든 필지는 다르지만 황지강 저「중국의 수신(水神)」에 실려 있는 무지기(巫支祁)상과 함께 흥미있는 그림이다. 그의『考』에,
"회수의 신을 무지기라고 이름지었다. 모습은 원숭이 같지만 신통력이 광대하고 변환자재하여 하늘에 걸터 앉고 땅에 들어가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한다. 백만인으로 공략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우왕이 여러 가지 산과 하천의 신을 불러들여 신병 수만을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신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번 몸을 움직였더니 천지가 암흑이 되어 폭우가 내리고 벼락이 떨어지고 큰 파도가 생겼기에 많은 신병들이 설 수가 없고 패배했다. 우왕이 여기에 이르러 신산성려(神算聖慮)를 짜내시고 경신(庚申)으로 하여금 이것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드디어 매우 용맹하고 변환자재 요괴를 굴복시키고 황금의 쇠사슬로 그 목덜미를 묶어 회수에 가라 앉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악독경(岳瀆經)에 나와 있다고 한다. 악독경은 전국시대 사람의 작품이고 문장도 매우 좋으며 원말, 명초기가지는 전서(全書)가 있었다고 한다. 송경렴은 전서를 봤다고 한다. 호원서는 이 것을 다 평론했다.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이 아동의 울음을 그치게 한다. 회수신을 묶은 황금의 쇠사슬이 어부의 그물에 걸려서 약 3미터 끌려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경경록(輕耕綠)에도 실려 있다. 서유기는 언급한 회수신의 무지기를 재료로 만든 이야기인 것 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곳곳을 재미있게 가필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기록 등에서도 박학하기로 유명한 군금의 중국민속에 관한 깊은 관심을 알 수 있다. 태고때부터 수신 전설이 최부가 통과할 때에도 아직 남아 있어 이 무지기의 그림을 지니고 있으면 회수풍파의 난을 면한다는 풍속이 행해지고 있었다. 최부는,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믿을 수 없다" 라고 했다.
3월 7일 연주부, 원래 노국땅에 도착한 최부 일행은 곡부, 공자의 고향을 지나간다. 군금은『考』에서, "성인의 자손을 송이후에는 연성공(衍聖公)이라고 부른다" 라고 처음으로 곡부공림의 모습을 전하고, "서거하신 후에도 그 위령, 신험이 참으로 보통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오로지 두려워하고 존경하여 모셔야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강호시대 문인의 공자 숭앙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또 가까운 태산에 관해서도『考』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산이 오악중의 하나이고 대종(岱宗)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신다. 4백 여주의 물생토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죽음도 지배하신다. 그러므로 천하의 사람들이 지우(智愚), 구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태산참배를 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 속에서 강남 사람들은 무부산에 참배하는 사람들도 많다. 강북 사람들은 모두 태산에 참배한다. 우리 대일본국에서 이세(伊勢) 양궁(兩宮)에 참배하는 것과 같다. 그 참배하는 모습은 잡념을 버리고 몸을 깨끗이 씻고 세상에서 말하는 산상(山上)참배와 같다. 그것이 이당(李唐)시대로부터 그 이후는 두배나 성해졌다. 오잡조(五雜俎) 혹은 다른 책에 많이 실려 있다." 이 것에 관해서 천자의 봉선(封禪)의 예도 전부 이 태산에서 행하는 일, 오악 중에서도 그 산의 높이가 3리 정도로 화산(華山), 형산(衡山)에 못미치나 명산으로서 특히 훌륭해, 그 산에 오르는 자가 많다는 등, 또 칙사 등산에 대해서는 지북우담(池北偶談)에도 그 줄거리가 기록되어 있는 등 중국의 서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군금의 학식이 엿 보인다.
3월 14일 임청현의 관음사에 이르렀는데, 배 운항을 위하여 4개의 갑을 설치하여 저수한 것, 또 현치(縣治)의 성황, 선박의 집산 등이 기록 되어 있다. 대운하의 북상이 쉽게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 기록을 읽으며 상상할 수 있다. 다음 16일에 상용(商用)으로 청원역에 온 진기 등 7인의 요동인을 만났다. 최부 일행이 요동을 거쳐 한성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듣고, 청주와 그 이외의 선물을 주면서 4일 초순에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인 바, 요동 안정문(安定門)안에 사는 그의 아들인 유생 진영을 찾아서 그가 건강하다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최부는 그의 후의에, "지금 우리는 죽을 뻔하다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터이다. 표류 만리에 의지할 데가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처지에 이와 같이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고 게다가 골육지친과 같이 대해 주며 음식까지 후하게 받게 되니 감사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라고 대답 했다. 이 일을 두고 군금은『考』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은혜와 애정은 조수(鳥獸)라도 변함이 없다. 최부는 사람들 앞에서 돌아가신 부친과 살아 계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울었다. 그러나 요동을 지났을 때, 진기가 부탁한 말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진기가 준 엿 한 쟁반은 그냥 손해를 본 셈이다. 우습다."
라고 최부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했다. 최부 일행은 5월 23일 요양역에 이르러 29일 요동을 거쳐 수일 후에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6월 4일) 이 사이의 일기에 진기의 부탁에 응한 기록이 없으므로 군금은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로부터 2일 후, 뱃길로는 갑마영역 등 몇 개의 역을 거쳐 3월 18일에 덕천역에 도착한다. 그 일대는 치안이 험악하여 하중(河中)에 떠 있는 시체를 3구나 볼 정도여서 남방의 도적은 사납지 않으나 북방의 도적은 험악하여 사람을 습격하면 반드시 죽이고 물건을 훔친 후 시체를 수중에 버린다고 기록했다. 책을 많이 읽은 군금은『考』에서,
"산동하북에 향마적(響馬賊)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다 강인하여 궁마(弓馬)의 달인들이다. 먼 거리에서 사람을 보면 먼저 우는 화살(鳴鏑矢)을 쏜다. 그 화살은 사람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잘 아는 사람은 그 우는 화살을 들으면 짐을 다 버리고 옷도 벗고 알몸으로 도주한다. 그러면 죽음을 면하고, 주저하면 살해당한다. 이들을 향마적이라 한다. 청의 조항부(趙恒夫)가 만든 교산적(交山賊)도 같은 부류이다."
여기서 말하는 향마적, 명적시 등은「福惠全書」, 兒女英雄傳」,「六部成語」등에 나오는 것으로 군금이 이런 책까지도 섭렵한 것으로 추측된다.
황진(黃塵)이 하늘을 뒤덮는 홍치원년 3월 28일에 이르러 드디어 대망의 북경 숭문역을 통과,「사이조공지지(四夷朝貢之地)」인 경사(京師)에 들어갔다. 외국인 숙박관으로 별관을 회동관이라고 부른다고 최부는 적고 있다. 이 때부터 약 52년 후 가정 19년(1540) 3월 2일 대내의융(大內義隆)의 사절인 묘지원(妙智院) 책언화상(策彦和尙)의 일행 50명이 똑같은 순문문으로 입성, 일본인 숙사로 정해진 회동관에 들어 갔으나, 17년이나 일본의 조공이 없었기 때문에 황폐하여 조선, 유구, 탈달인이 함께 머무는 옥하관에 머물렀다고 책언은 쓰고 있다. 물론 책언은 최부의 표해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군금 자신도 같은 경도(京都) 차아천용사산(嵯峨天龍寺山)의 승려가 50년 후 최부일행과 거의 같은 대운하를 북상, 같은 옥하관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군금이 표해록을 번역하여 작성한『考』는 대단히 많고 그 어느 것에서도 군금의 박식함을 보여준다. 또 중국역사와 관련된 고찰도 군금의 해박함을 보여준다. 한편 최부의 행동에 대해 상당히 신랄한 지적이 많은 것은 위에 적은『考』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첫째는 중국에의 경도(傾倒), 둘째는 조선에 대한 멸시였을까. 대다수 강호문인들의 경향이었다.
조선으로 귀환하기 위해 대기중인 3월 29일 최부는 병부에 가서 상서인 여자준과 면회한다. 그때 낭중 재호와 문답을 한다. 표류 중에 사망한 사람은 없는가 묻고 일행 43명이 다행히 황은을 입어 모두 살았다고 답했으며 또 당신 나라는 장례시 가례에 따르는가를 묻고 우리나라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사대부 가정의 규율로는) 먼저 소학과 가례를 가르치며 과거 역시 경학에 정진한 자를 뽑으며, 장례시에도 전부 문공의 가례에 따른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재호가 당신 나라 국왕은 글을 좋아하는가 묻자, 최부는 우리 나라 왕은 1일 4회 유신과 만나며 학문을 좋아하여 싫증내는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군금은 이에 대해『考』에서 길게 그의 의견을 쓰고 있다. 약간은 장황하다고 생각되나 뒤의 최부 자신의 운명에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그의 전문을 적어 둔다.
"최부, 당의 땅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 글은 최부가 귀국 후, 조선 왕의 명령으로 썼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근거가 없으면 오히려 책망을 받을 것이다. 만약 조선 왕이 학문을 싫어 한다면 최부가 말하는대로 매일 4번 씩 유신대면(儒臣對面) 운운이라고 쓴다면, 최부는 당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을 빗대어 조롱한다고 조선왕이 화를 심하게 낼 것이다. 조선왕에 나쁜 면이 있다면 숨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善)하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정반대로 말한다면 안될 것이다. 하루에 4번까지 유신을 대면한다는 것은 거짓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개 신하는 아첨하기 때문에 말해야 하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보신과 이익만을 위하여 묘계(妙計)를 꾸민다면 성인의 도리가 아니다. 이러한 풍조로 인하여 옹폐(擁蔽·왕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아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함)의 화가 생긴다. 대체로 천하의 화는 옹폐가 제일 크다. 그 해악은 정욕의 백배에 이른다. 인품이 좋고 정직한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원망을 사게 하는 것은 다, 이 옹폐로부터 기인한다. 임금과 신하가 백성의 사정을 잘 살펴 이국타국(異國他國)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조심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옹폐의 화는 적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옹폐는 군주의 귀를 막아 사실에 통하지 않고, 이(理)에 밝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후한의 사상가인 왕부는「잠부론(潛夫論)」을 저술했다. 당시는 입신출세주의 세상에서 관리로 출세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는 세속과는 달리 관계에서의 승진을 단념하고 분연히 은거하여 잠부론 10권을 저술한 것이다. 그 책 8권인 교제조(交際條)에, "간웅은 무리를 좇아가고 처사(處士)는 더욱 더 옹폐한다. 총명하고 거룩한 임금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잘 알아 살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고, 또「순자(筍子)」성상(成相)에, "상옹폐 실보집(上擁蔽 失輔執)"이라 했고,「한비자(韓非子)」고분(孤憤)에, "인생옹폐 대신전권(人生擁蔽 大臣專權)"이라 한 것처럼 관리가, "자신의 보신과 이익만을 생각하여 꾸중과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관리의 묘계이며 성인의 도리가 아니다. 이러한 풍조에서 옹폐의 화도 생긴다"는 것처럼 정치가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군금이 왜 옹폐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들고 나왔을까. 어쩌면 최부가 후에 사화에서 처형당하는 비운을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측의 조사, 조선 본국과의 연락, 또 최부 일행 43명에 대한 천자로부터 수상 등이 모두 끝나고 홍치원년 4월 20일 천자를 배알하기로 했으나, 최부는 복상중이므로 효를 지키기 위해 상복을 벗지 않겠다고 주장하여 관리, 이상과 논쟁했다. 이상은 이감론(理感論)에도 있듯이 사람이 물에 빠지면 손을 내밀어 구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임을 역설했다. 예부상서는 친상은 가볍고 천은은 무거우니 배알의 예를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부는 굽히지 않고 상복을 고집하며 저항했으나, 결국 길복을 입고 궁중에 들어가 5배3고두의 예를 마치고 단문으로 나와 승천문, 장안문을 나오자 마자 상복으로 갈아 입고 장안가를 지나 옥하관으로 돌아온 일을 표해록 권3에 기록했다. 이 것에 대해서 군금은 행정기 권 4의『考』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여러 곳에서 닭고기, 돼지고기, 술, 요리 등 선물을 사양치 않았으며, 식사는 채식으로 하여 고기, 술 등을 먹지 않았다 해도, 이 것들을 받아 들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국에서 표류, 여행 중이었으므로 임시방편이라 할 수 있겠다. 천자에게 배알할 때, 길복으로 갈아 입는 것을 거절했는데, 이는 효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칭찬할 수 있겠는가. 인간만사의 근본은 효임으로 몸을 칼로 자르는 사람이 있어도 효도는 다해야 한다. 그러나 최부의 행동은 확실히 효도에 따라 하였겠는가. 만일 그 당시 명제나 대신의 노여움을 사, 조선왕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면 어떠했을까. 속된 말로 어리석은 자가 배운 것 하나로 휘둘렀던가, 남의 약점을 이용한다던지 해서 욕을 먹었다면 어쨌을까. 이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눈치를 보고 약점을 이용한다고 하면 허사가 된다. 최부의 행동은 간사한 생각으로 나온 것을 아니겠지만 그 행동에 충분한 배려를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유교 제일의 조선에서 목숨을 구해주고 예로서 본국에 송환시켜줌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고집했다는 것에 대해 과연 최부가 이 기록대로 실행했을까. 혹은 성종에게 드리는 보고서였기 때문에 부친의 복상을 위하여 임지인 제주도에서 출발한 후, 끝까지 상복차림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지금은 논하지 않겠다. 따로 진행하고 있는 표해록의 일본어 번역에서 고려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