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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계
설흔 지음
"나를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유배 거처인 귤중옥橘中屋은 은밀한 한숨과 가혹한 훈계가 맞부딪혀 치고 받는 일대 아수라장이었다. 한숨은 너의 것이었고, 훈계는 나의 것이었다.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에만 있다.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 누런 빛깔인데 우뚝한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는 이를 내 집의 액호額號로 삼는다.
절해고도로 오는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형조참판까지 지내며 중앙 정계를 쥐락펴락했던 유배객, 안동 김씨의 실세 김유근은 물론 왕실과도 관련을 맺고 일세를 풍미했던 유배객, 그림과 글씨와 학식 모두 당대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던 유배객,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모습들일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섬이 아닌 대륙으로 가고 싶었다. 무지한 절해고도가 아닌 문명인의 대륙 말이다. 주제넘은 상상을 하는 내게 바다의 신들은 전에 없이 큰 요동을 선물로 주었다. 생각보다 큰 선물이라 놀란 가슴이 덜컹하고 발목까지 떨어졌다. 여태 꼭 닫혀 있던 내 입술이 급작스레 열렸다.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은 맞는 것,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은 중용에 가까운 것, 말하지 않고 깨우쳐줄 수 있다면 침묵에도 손상이 없을 테고, 중용을 얻어 말한다면 웃는다 해도 걱정이 없 을테지
바다의 신들은 침묵과 웃음과 중용의 상관관계를 다룬 내 암송을 즐겼다. 그들이 환호성 삼아 보낸 요동에 나는 또 다른 암송으로 맞섰다.
군자가 오만하면 스스로 부끄러울 뿐, 소인이 오만하면 화를 불러 들일뿐, 궁지에 빠지면 욕먹는 것은 당연한 일, 남이 허물을 말해도 스스로는 놓지 말기를
<묵소거사자찬>은 실은 내 벗인 김유근이 지은 것이며,<잠오>는 결국 나를 영락하게 만든 오만함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는 글이라는 설명을 하려 했지만 ... 나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묵소거사자찬> 과 <잠오>를 주술처럼 계속해서 암송하기만 했다.
" 북쪽 배가 날아서 건너왔다고 하는 그 말을 들으셨습니까? 그만큼 여정이 험난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길은 내게 자신을 읽으라고 강요했다.
" 험한 길 지나왔다고 마음 놓으면 안 됩니다. 평탄한 듯 보여도 이제 절반입니다. 갈 길은 여전히 멉니다.
약 10년 전 김우명은 내 아비를 모해하는 상소를 올렸다. 내 아비는 무려 4년의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말았으니.김우명이 내 아비를 물고 늘어진 것은 아비의 아들인 내가 미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파면 시켰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이유로 파면시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암행어사로서의 직무를 다 했을 뿐이다.
그뒤로 대사헌 김홍근은 죽은 내 아비의 죄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가 노린 것은 물론 죽은 아비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제자를 비판했고, 이광사를 비판했고, 정선을 비판했고, 심사정을 비판했다. 그들이 미워서? 아니었다.
내손은 차갑고 내 눈은 높아서였다. 방을 나서면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데울 수도 없고, 높은 눈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없고, 방안에만 칩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칼을 쥔 그들은 "앗, 차가워" 하고 펄쩍 뛰는 대신 단칼에 나를 베어버리는 길을 택했다. " 죄인 김정희를 대정에 위리안치하라" 나는 올바르기도 하고 그르기도 했다. 그르기도 하고 올바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의 그 차가운 피와 뜨거운 인정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아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는 결코 사지에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독한 관리라는 말이 가져온 온갖 어두운 기억에 몸부림칠 너에게 나는 위로와 격려 삼아 이렇게 쓴다.
" 혹독한 관리의 차가운 손을 기억하라."
대정에 도착한 내가 처음 몸을 푼 곳은 송계순의 집이었다. 집은 누추하지 않았다. 누추하다는 것은 내가 살던 궁궐 같은 집에 비교했을 때였다. 누추하지 않다는 것은 유배객의 일반적인 처소에 비교했을 때다. 안채에는 주인이 바깥채에는 내가 살기로 했다. 답답했냐고?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누구인던가? 내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사위였고 조부 김이주는 대사헌을 지냈으며, 아비는 대과에 급제해 노회한 정객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어미의 집안 또 어떠한가? 위조부 유한소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고, 문장가인 유한준과는 사촌형제간 이었다. 유척기, 유언호도 배출했으니 내노라 하는 집안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은 나의 반쪽이나 마찬가지다. 책을 빌려주는 데 있어 늘 까다로웠던 나였지만 권돈인만은 예외였다. 우의정을 지낸 조인영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귀한 김유근과 권돈인과 조인영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나침판과 같은 존재들이다.
나는 절해고도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게는 정확히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이곳은 내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나의 위치이자 어쩌면 가장 정확한 위치였다. 나는 전락한 것도, 추락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흐르고 흘러 초연함과 쓸쓸함의 세계에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정 아니던가? 나는 그 이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성준은 강도순이 주인인 지금의 귤중옥을 내게 소개시켜준 사람이었다. 내 아비가 평양감사를 지내던 시절이었다.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아비에게 선물로 수선화를 건넸다. 그 귀한 수선화를 나는 어떻게 했는가?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다. 나는 수선화에 품격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오래된 고려청자를 찾아 그 안에 담아 보냈다. 늦가을의 벗 김정희가 고려청자에 담긴 수선화를 보내주었다는 설명 까지 붙어 있었다.
신선한 풍채나 도시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30년을 지나 나의 집에 이르렀다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추사가 이제 대동강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30년을 지나 이르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경신년(1800년) 봄, 복암 이기양은 사신으로 다녀 오면서 수선화를 가져왔다. 선생은 선물로 받은 그 수선화를 벗들과 함께 감상했다. 그러나 그 얼마 뒤에 수난이 닥쳤다.
천주교와 엮인 이기양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나처럼 혹독한 관리의 자질을 타고났던 선생 또한 꼼짝없이 유배객의 신세가 되었다. 귀한 수선화는 선생에게 회한을 안겨준 수선화로 바뀌었다. 나는 오성준이 건넨 수선화를 보면서 오성준과 질박함을, 정약용 선생과 고고함과 처연함이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떠 올렸다.
수선화는 오성준과 정약용 선생에게서 제 위치를 찾은 사물이었다. 질박한 그대로, 고고한 그대로, 처연한 그대로 위치를 찾은 사물이었다.
한라산에 감로수가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아느냐? 감로수 운운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견문이 부족한 절해고도인의 무지한 과장이려니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칼로 밑동에 구멍을 내니 감로수가 작은 폭포처럼 힘차게 흘러 나왔다. 감로수는 맑고도 맛이 달았다. 기묘사화로 절해고도의 유배객이 된 김정은 우물을 파 목마름을 달랬다고 했다.
그에게 판서정判書渟이라는우물이 있었다면 내게는 감로수가 나오는 나무가 있는 셈이 될 터였다. 그의 우물은 육신만 위로하겠으나 내 나무는 육신과 정신을 다독일 것이다.
나는 한라산을 오르고 싶었다. 나보다 먼저 절해고도의 유배되었던 송시열의 자취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현실적 권력을 지닌 이는 제주목사뿐이었다. 그러니까 제주목사야말로 내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문이었던 것이고, 내 식대로 말하자면 뜨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 제일 먼저 열어야 하는 문이었던 것이다.
너에게 쓰고픈 문장, 내 경험을 통해 분명한 효과가 있음을 증명한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아랫목이 그리우면 문부터 찾아서 열어라."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마을 어느 집 문에서 철 지난 입춘첩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붙이는 법은 알았으되 떼는 법도는 몰랐던 모양이다. 글씨라기보다는 따라 그린 그림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씨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 첫번째 스승이라 할 수있는 박제가朴齊家를 떠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박제가가 있다. 내가 감로수와 한라산과 송시열과 생강과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낸 유람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만난 입춘첩, 그로 인해 촉발된 박제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박제가더러 종착지라 하지않고 종착지 비슷한 곳이라 부른 까닭을, 왜 그런가? 그것은 실은 박제가가 아니라 박제가로 시작된 중국인 들과의 인연, 그리고 그 인연의 와중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인연을 말하기 위한 까닭이다.
나와 박제가의 만남에 관한 사연이 전설로 포장되어 세상을 경박하게 떠돌고 있다. 내가 쓴 입춘첩을 본 박제가가 그 글씨에 반했고, 그래서 내 아비를 찾아와 나의 스승 되기를 청했다는 사연 말이다. 멋진 사연이기는 하나 나도 확인해 줄수가 없다. 왜 그런가? 전설속의 내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전설이란 원래 그렇다. 그러니까 진실이라 하지 않고 전설이라 부르는 것이다.
서얼, 그렇다. 박제가는 서얼이었다. 그러나 문장을 쓰자마자 당장 의문이 고개를 든다. 과연 그런가? 박제가를 서얼이라 부른 것은 사실 당치 않다. 왜냐하면 박제가는 서얼이되 전혀 서얼 같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젊어서 부터 만 리 밖에 있는 먼 땅에서 활개 치는 것을 꿈꾸었고, 결국 중국 연행에 성공함으로써 일정 부분 꿈을 이루었다. 그는 수레를 탔고, 똥 무더기를 보았고, 중국인을 사귀었고, 수레와 똥 무더기와 중국인과의 사귐을 포함해 중국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글로 옮겨 썼다.
그는 서얼이되 고개 숙인 서얼이 아니라 자부심이 강한 서얼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조 임금은 그의 지식에 무쌍사無雙士, 즉"견주어 비길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선비"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때로 과하기도 했다.박제가는 정조 임금의 현릉원 행차 때 의자를 가져와 앉는 치기를 부리기도 했다. 당상관들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행동의 과장을 능히 짐작 할 수 있겠다.
서얼인 박제가가 유배객이 되고, 유배 끝에 세상을 떠난 것은 결국 그 자부심, 혹은 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박제가는 결국은 완벽한 서얼이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오직 하나, 전설 속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현실의 기억속에서 나 스스로 박제가를 스승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가 본 박제가는 바로 <북학의>의 저자 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얼이자 일개 검서관이었던 그가 어떻게 올바른 문을 찾았고, 어떻게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를 뜨뜻하게 데웠는지가 정말로 궁금했다. 궁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북학의>를 지은 그에게 직접 듣는 것이었다.
내 짐작은 맞았다. 박제가는 통념과는 달리 속으로 침잠하는 이, 말을 아끼는 이였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처음엔 절망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중국에 관한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졌다.
나는 박제가의 끊임없는 말들을 들으며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장소인 중국을 상상했다.
개연히 한 생각 일으켜 사해에서 널리 지기를 맺고 싶네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게 된다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잇겠네
하늘 아래엔 명사가 많다 하니 부럽기 그지없다
내 꿈은 일찍이 담헌 홍대용洪大容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 지기를 얻는것, 그리하여 그 앞 선 문명의 향기에 듬뿍 취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천 리길의 종착지는 중국이었고, 박제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실은 그 반대인 출발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꿈을 이뤘다, 중국에서 옹방강翁方綱과 운대 완원 두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다.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게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엣 경전을 즐기면서도 옛 경전에 몰입되지 않는 것, 웃는 얼룰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벼락 같이 내 의견을 개진하는 것, 나를 상징하는 습관이 된 그것들은 바로 옹방강과 완원에게서 왔다. 어디 그뿐이던가.
옹방강은 내게 자식 대하듯 섬세한 애정을 베풀었고, 학식으로 충만한 완원은 내게 '완당阮堂' 이라는 아호를 주었다. 옹방강과 완원이 뜨뜻한 아랫목이었다면 박제가는 그 아랫목을 차지 하기 위해 내가 열어야 할 유일한 문이었다.
박제가는 아랫목으로 이끄는 문이면서 또 다른 문으로 이르는 안내자이기도 했다. 내가 중국에 가서 가장 먼저 만난이가 조강이다. 조강은 나를 보자 마자 반갑게 맞이하고는 내가 지은"개연히 한 생각 일으켜 사해에 널리 지기를 맺고 싶네"로 시작하는 바로 그 시를 읊었다. 감동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신이 쓴 글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세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며 출세하려는 글은 짓지 않고 세속 밖에서 방랑하였는데 시를 잘 짓고 술도 잘한다. 중국을 심히 사모하여 조선엔 사귈 만한 인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외교 사절을 따라 청국에 들어오게 됨에 장차 천하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으며 우정을 위해 죽음도 마자 않는 옛사람들의 의리를 본받으려 한다.
내 평생 중국은 단 한번 다녀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조강과는 당연히 초면이었다. 그럼에도 조강은 나를 알고 있었고, 나도 조강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박제가 때문이었다. 박제가는 유배 전에 다녀온 그의 마지막 중국 여행 때 내가 쓴 시를 가지고 가서 조강을 만났다.
당벽과 모난 성격을 지닌 박제가는 내게 있어 문이었다. 내게 아랫목인 중국을 온전히 알고 중국인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거쳐야만 했다.
결국 조강은 아랫목으로 인도하는 또다른 문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만나기를 열망했던 이들은 실은 조강이 아니라 훗날 내 스승이 된 옹방강과 완원이었다.
옹방강이 누구인가? 일찍이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에도 참여했던 그는 금석학자이자 서예의 대가로 연경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완원이 누구인가? 그는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등의 독창적인 학술 이론으로 연경을 뒤흔든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완원은 당대 최고의 학자임에도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수인사를 나눈 후 단번에 버선발 부터 들이댔다. "초상화로 뵙던 그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초상화라니? 완원의 두 눈이 단번에 커졌다.
나는 초상화라는 단어에 얽힌 인연, 즉 완원의 초상화를 갖고 있던 것은 실은 나의 스승 박제가 였으며, 그 초상화를 보며 선생을 만날 꿈을 키웠다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설명했다.
학식 높고 너그러운 완원은 차만 대접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금석문을 보여주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평실정상平實楨祥'의 자세로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교정도 끝나지 않은 저서를 선물했다. '완당'이라는 호까지 선사하며 조선인인 나를 제자로 삼았다.
완원에 비해 옹방강은 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된 옹방강이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탓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사방에 연줄을 댔으나 성과는 없었다.
결국 나와 옹방강을 연결 시켜준 것은 이번에도 조강이었다. 조강의 벗을 통해 귀국 하기 몇일 전에야 어렵게 옹방강을 만난 나는 이번에도 대뜸 꿈 이야기부터 했다
"10년 전에 꿈에서 뵈었습니다. 이제 실제로 뵈니 그때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보담재寶覃齊라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보담재가 무엇인가? 담계 옹방강을 보물처럼 받드는 서재라는 뜻이었다. 보담재는 내 서재에 걸린 편액이자 나의 또 다른 호였다. 보담재는 옹방강을 높이는 의미도 있었지만 보소재라는 옹방강의 서재 이름을 모방한 의미도 있었다.
보소재는 소동파를 보물처럼 받드는 서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재에 보담재라는 편액을 걸고, 그것을 호로 삼았다는 것은 옹방강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옹방강이 소동파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중국에 갔을 때 내 나이는 스물 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럴듯한 관직이라도 있었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사마시에 갓 합격한 생원에 지나지 않았고, 공식 수행원도 아닌 자제군관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옹방강에게 추사秋史라는 호를 소개 하기도 했는데 호가 아닌 자로 소개했다. 그런데 추사는 기실 나만의 호는 아니었다. 강덕량江德量이라는 중국인이 있었다. 그의 호가 바로 추사였다. 그는 나의 스승과 교분이 있었다.
박제가는 옹방강의 서재에서 그의 벗인 강덕량과 만나 교분을 나누었다. "추사'라는 호 속에는 박제가와 옹방강, 그리고 그의 벗인 강덕량이 함께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개인이 아닌 조선과 중국 사이에서 교류의 상징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추사라는 호를 자로 소개했나? 바로 앞서 보담재를 내 호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옹방강을 존경한다는 뜻이 담긴 보담재를 호로 삼고 옹방강과의 인연을 내세운 추사를 자로 삼음으로써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내세우려는 생각이었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중국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나를 위해 성대한 전별연을 열어 주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 진실로 촌스러우니 /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
이 시는 중국의 선비들을 높인 것이지 조선을 비하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선비들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건 바로 조선을 높이는 것이다. 늙었으나 여전히 뛰어난 이해력을 자랑하는 옹방강은 내 뜻을 곧바로 알아 챘다.
"내 막내아들의 생일이 동파 선생과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오.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게 바로 막내아들을 유독 총애하는 이유라오. 연이어 내민 꿈과 보담재로 옹방강은 젊은 나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그 증거가 바로 온갖 서화와 금석문으로 가득한 보물들을 직접 내게 보여준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구양순이 쓴 화도사비 진본을 보았다. 부적처럼 서재 곳곳을 장식한 소동파의 초상화들을 보았다. 눈이 열릴고 귀가 뚫리는 수많은 보물을 보았다. 경학에 관한 질문이 대다수였던 나의 관심과 옹방강의 관심이 일치한 결과는 옹방강이 내게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 즉 조선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나고 글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극찬을 선물했다.
까다로운 노인에서 인정 많은 노인이 된 옹방강은 내게 많은 선물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은 '유당酉堂이라는 친필 현판이었다. 유당은 내 아비의 호였다.
귤중옥으로 돌아온 나는 감로수를 마시면서 또 다른 감로수인<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槁>를 뒤적였다. 도연명陶淵明과 유종원柳宗元의 문집이 유배의 벗이었다면 내게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가 그러했다.
밥보다 맛있는 이책을 구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맛있는 만큼 구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완원의 아들 완복에게 까지 부탁했지만 당장은 구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다. 내게 이 귀한 책들을 구해준 이는 바로 이상적李尙迪이었다.
그는 옹방강의 제목과 완원의 서문이 들어 있는 <만학집>.<대운산방문고>의 초집과 2집을 내게 보내주었다. 120권 79책에 이르는 거질(황조경세문편皇朝徑世文編> 까지도 잊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그의 은헤를 잊을수 있겠는가? 나는 그를 위해 <세한도>를 그리고 이렇게 썼다.
공자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다. 공자는 특별히 겨울이 된 상황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 않았다.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게 없었다. 이후의 그대는 칭찬을 받을 만하다.
나와 이상적은 1~2년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10년 넘게 알고 지내왔다. 나와 오랫동안 교우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정이 많고 한결같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앞세우기보다는 오래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점이 더 고마웠다. 이상적은 영민한 사람이었다. 내 자부심을 마음껏 드러내게 하는 것보다 더한 위로는 내게 있을 수 없었으니.
이상적이 고관대작들도 받기 힘든 학식 있는 중국인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시작은 바로 나였다. 그러므로 이상적은 나 라는 문을 지나 아랫목에 앉은 것이다.
그는 실무에 능했고, 정보와 정세에도 예민했다. 그는 기꺼이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고, 나는 온갖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 그의 호의에 보답했다. 한미한 가문의 그가 유난히 자주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다.
그와의 교류가 만들어낸 가장 따뜻한 아랫목은 <황청경해皇淸經解>의 입수였다. 청의 경학을 집대성하는 <황청경해>의 편집이 내 스승 완원에 지휘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이상적에게 얻은 나는 그날 부터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냈다.
완원을 통하는 방법이 가장 쉬운 것이지만 완원은 운귀 총독으로 발령을 받아 연락조차 쉽지가 않았다. 나는 완원의 또 다른 아들인 완상생脘常生에게 편지를 썼다. 완상생은 "부탁한 책은 모두 360권에 이르는 거질인데 아직 발간도 되지 않았다."는 깔끔하나 실망스런 답장을 보내왔다.
처음 정보를 주었던 이상적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보의 결실인 <황청경해>를 내 무릎 앞까지 옮겨주었다. 첫장을 펼쳤을 때의 감동은 여태도 잊을 수 없다. 완원이 내게 강조햇던 단어를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엇기 때문이다.
평실정상, "바르고 실질적이며, 정밀하고 상세하게'라는 뜻의 이 단어는 처음 완원을 보았을 때 그가 썼던 바로 그 말이었다.
종이 욕심이 많은 나는 좋은 종이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렸다. 노욕이라 비웃는 이들도 있었지만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이상적에게는 화전지를 요구했고, 전각을 잘 하는 오규일에게는 백로지를 요구했다. 종이만 그러한가?
붓도 그렇고, 벼루도 그렇고, 먹도 그렇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쓸 때 쥐털로 만든 서수필을 썼다. 쥐수염은 빳빳하면서도 부드럽다. 쥐수염으로 만든 서수필은 힘있고 부드러운 글씨를 쓰는데 적격이다.
벼루에는 단계석으로 만든 단계벼루가 있다. 내가 썼던 벼루는 사백년도 더 된것이다. 벼루의 면이 살짝 오목해 먹이 많이 모이는 것이 엣 사람들이 칭찬하던 명품과 하나 다르지 않다. 종이와 벼루가 먹을 돕는 것이다.
좋은 물건들은 관리를 잘 할때 제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종이는 버들가지나 대로 만든 그릇에 넣어 두어야 한다. 벼루에는 새로 길어온 맑은 샘물을 쓰되, 쓰고 난 뒤에는 잘 씻어 말려야 한다. 먹은 쓸 때마다 새로 갈아 써야 하며 붓은 둥글고 건강한 것이 잘 유지되도록 보관해야 한다.
동갑내기인데다 정약용 선생에게 인재 중의 인재라는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학승이었던 초의에게 나는 그가 내게 느꼈던 것보다 더 큰 호감을 느꼈다. 초의는 정약용 선생에게 차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나는 그의 차를 마셔본 후 내가 중국에서 들었던 차에 대한 온갖 지식을 하나 남기지 않고 전했다. 초의의 차가 조선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것은 내가 전한 중국의 차에 관한 지식도 ㅡ 물론 기본적으로는 정약용 선생의 공로이지마는ㅡ 단단히 한몫했다고 말하고 싶다.
초의는 절해고도로 그냥 내게 온 것이 아니다. 초의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 호소와 애걸, 저주와 협박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초의가 만든 차또한 나의 호소, 애걸, 저주, 협박의 대상이었다.
차 시절은 아직 이른 겁니까? 도대체 따기는 했습니까? 나는 몹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색도 좋고 향도 좋은 차가 그립습니다. 더운 날씨에 그냥 보내면 상할 테닌 항아리리에 넣되, 단한히 봉해 보내 십시오. 이곳에서는 차를 구하기 어렵다는 걸 잊기라도 했간 말입니까?
"맹렬과 진심으로 요구하라."
조금은 직설적이어서 의아하게 만드는 이 문장을 나는 요구의 미학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 요구의 미학에 첫번째 단계는 먼저 맹렬과 진심을 주는 것이다. 실은 모든것은 먼저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이론의 적합성은 옹방강의 반응에서 드러난다. 그는 내가 준 것보다 더 귀한 물건들을 보내왔다.
책들과 금석 탁본을 보내준 것도 고마웠지만 주학년朱鶴年을 시켜 구양수歐陽修초상을 그려 보낸 것은 아예 나를 감격하게 만들었다. 구양수도 6월에 태어났고 나도 6월에 태어났다. 송의 대문장가 구양수에 비견할 만큼 내게 기대가 크다는 사실등을 구구절절 장문의 글로 써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나는 옹방강에게 맹렬과 진심으로 요구했다. 그에게 글씨의 법도를 물었고, 학문의 핵심을 물었고, 중국 학계의 동향을 물었다. 그가 보낸 답장은 열정과 학식으로 가듣 찬 한권의 아름다운 책이었다. 자신이 지은 <독경부기>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해 답한 부분을 볼 때마다 내 옷깃을 절로 여미게 만들었다.
제가 지은 <독격부기>는 모두 74권 입니다. 그대가 보고 싶어하는 뜻을 알고서도 한꺼번에 보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도 잇습니다. 늙어서 별다른 할 일이 없는 나는 새벽에 일어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 봅니다. 매일 하다 보니 아예 일과가 되엇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보태고 고치고 깍고 옮겨야 할 곳들을 발견 합니다. 만족스럽지가 않아 다시 얽힌곳을 찾아가다보면 한꺼번에 급히 이루지 못하고 벗들에게 믈어보게 됩니다. 꼭 겸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맹렬로 진심으로 주고 받은 것은 편지와 선물만은 아니었다. 조선인 신위와 중국인 섭지선이 바로 그들이다. 나를 통해 옹방강을 만난 이들이 보고 온 중국이었다.
그들이 느낀 중국의 인물, 정세, 학문에 관한 최신 동향은 내 안에 있는 청고에 가득가득 쌓였다. 중국에 한번 밖에 다녀오지 않은 내가 뜨뜻한 안방 아랫목에 앉아 중국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된 비결이었다.
신위는 나보다 연상인데다가 시서화로 상당한 유명세를 얻은 이였다. 세부에 능한 장점을 지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큰 흐름을 미리보는 안목이 없었다. 그의 잠재력을 알고 있는 나는 그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었다.
맹렬과 진심으로 이룬 효과는 컸다. 옹방강의 환대로 여태 살아오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들고 온 신위는 보고 배우라는 자신의 벽을 부수라는 어찌보면 가혹하기 까지한 그 가차 없는 요구를 제대로 받아들였다.
내가 신위를 보냈다면 옹방강은 아들 옹수곤이 죽은 후 내게 섭지선을 보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섭지선이 옹방곤의 둘도 없는 벗이었기 때문이다. 옹방강 덕분에 새로운 벗을 얻게 되었으므로 옹방강이 내게 섭지선을 보냈다는 말을 쓴것이다.
섭지선은 글씨도 휼륭했지만 무엇보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아비는 <대청회전>을 편집한 학자였다. 운 좋게 그는 아비의 부(富)도 이어받았다.
나는 그에게 오래된 중국 비석들의 탁본을 요구했고, 그 또한 조선 비석들의 탁본을 요구했다. 섭지선과의 인연을 말하며 빼 놓을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옹방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 또한 섭지선이었다.
소치는 요구의 미학, 즉 "맹렬과 진심으로 요구하라'는 문장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다. 소치는 일지암으로 가서 초의를 만났다. 초의는 소치를 직접 가르치는 대신<공재화첩>을 보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소치가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에게서 <공제화첩>을 빌려볼 수 있었던 것은 초의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재화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모방해 그린 후, 초의를 통해 추사에게 보냈다.
소치에 그림에는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맹렬과 진심의 요구가 물빠진 저수지에서 입만 내밀고 발버등치는 고기들처럼 차고 넘쳤다. 나는 소치를 불러 들이면서 그의 요구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각인시켰다.
그림 그리는 길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자네가 이미 화격을 체득햇다고 생각하는가? 자네는 화가의 삼매에 있어 천 리 길 가운데 이제 겨우 세 걸음 내디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왕잠의 <백운산초화고>가 자네에게는 문이 될 것이다. 원나라 사람의 필법을 제대로 모방한 것이니 그림 하나마다 열 번씩 따라 그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치는 나의 까다로운 요구에 숨은 의미를 곧 바로 이해했다. 혹독한 관리의 차가운 손처럼 냉정한 내가 유독 소치에게는 관대한것은 소치의 남다른 노력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소치의 그림에는 흠이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그림에는 흠이 없었다. 기교는 부족해도 정신은, 그 뒷머리는 살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소치'라는 호를 내렸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치는 내가 대정에 자리 잡은 후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육지 사람이다. "하늘과 맞 닿은 큰 바다에 거룻배를 이용하여 왕래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 버린 것입니다. 그는 운명을 하늘에 저당잡히고도 세 번 이나 나를 찾아왔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
두서없는 그 눈물과 하나의 문장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소치에 그림에 내 애정이 지니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소치의 눈물을 못보았다. 장성한 남자가 흘리는 눈물을, 그가 하나의 문장을 토해내는 모습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온 남자가 눈물과 문장에 허물어지는 광경을 못 보았다.
눈물을 닦은 소치는 내 곁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지었다. 소치의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갔다. 소치의 그림을 보고 "압록강 동쪽에 이 만한 그림은 없다.까지 말한것은 단연한 귀결일 터였다. 나는 소치를 신관호에게 소개 시켜줬다.
신관호는 전라우수사로 있으면서 늘 내 안부을 묻고, 붓과 종이, 음식을 보내주었다. 신관호는 활도 당길 줄 모르는 소치를 무과에 급제시키는 신기를 발휘했다. 맹렬과 진심을 담아 요구하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 소치와의 인연은 마침네 임금과도 연결되는 엄청난 결실이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너의 세한도를 남겨라
지난해에 <만학집>과 >대운산방고> 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왔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게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구입해 온 것들이다. 여러 해에 걸쳐 입수한 것으로 단번에 구입 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쫒는데, 그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심력을 쏟으면서도 권세가 있거나 이권이 생기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밖의 별볼일없는 사람에게 보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권세나 이권을 좇는 것처럼 했다.
사마천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햇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난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께서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이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 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렇다.
<세한도 >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어찌 이렇게 분에 넘친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다만 보잘 것 없는 제 마음이 스소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세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을 쓴 것과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잇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 셰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잇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 까 합니다.
권돈인이 그린 <세한도>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것은 너도 잘 알것이다. 이상적이 보여준 나의 <세한도>를 보고 그가 그린 그림이다. 그는 송백을 송주매로 바꾸어 그리고, 차갑고 황량한 풍경을 그를 닮은 온화하고 운치잇는 공간으로 바꾸어 그렸다.
내가 세한도에 찍은 장무상망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나의 벗 권돈인은 언젠가 내게 보내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이 무겁다. 땅이 따듯해서 ㅍ풀이 솓아난다. 산은 깊고 해는 길다. 인적은 없는데 향기는 사무친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무거운 이슬, 돋아나는 풀, 깊은 산 길게 지는 해, 네가 머무는 곳에 향을 남기는 사람. 나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추사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 ...
첫댓글 살아 있을 때 억울하게 헤여졌는데
이제 다시 죽음으로 갈라서고 마는구려
영원히 쫓을 수 없는 길을 가버렸으니
내 가슴이 무너지고 그리움만 사무치는 구려
추사가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긴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