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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순례- 삼계면
충과, 효, 씨족, 박사의 고장
생거 남원 사거 임실 (生居南原 死居任實) 임실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순창의 동계면과 인접해 있는 오수면 청웅면과 경계를 이루고 덕치면과도 산을 가운데로 경계선상에 있다. 삼계를 가로지르는 지방도로는 순창에서 장수 천천에 이르는 719번 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23개의 자연부락 단위로 구성되어있다.
본시 삼계면은 조선시대 남원부에 소속되어 일찍이 남원 48방일적에는 아산방 석현방과 말천방 오지방 4개의 방에 속하였던 것을 1906년 통합하여 삼계면으로 개칭 되었음을 기록으로 알수 있다.
삼계라는 지명은 오수천과 율천 사매천이 옛 석현방에 속하였던 산수리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삼계라 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지명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을수 없다. 당시에는 16개의 리(里)로 구분하였던 것을 1972년 세분하여 23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아산방: 학정리,세심리,봉현리,후천리
오지방: 오지리,신정리,망전리,어은리
말천방: 덕계리, 두월리,뇌천리,삼은리
석현방:삼계리, 홍곡리,산수리, 죽계리
1941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원부에 속하던 것을 임실군으로 편입시키고 1951년,1965년 두 차례에 걸쳐 행정조직 개편으로 오늘에 이른다.
삼계면의 지세는 산악으로 70%를 점유하고 하천은 노산과 원통산에서 발원하여 덕계, 두월, 뇌천, 삼은을 거치며 오수천과 합류하다가 산수리를 지나 후천천과 합류하여 적성강으로 흘러든다.
특히 삼계면은 야트막한 산들은 대게가 종중의 산으로 순창에서 나고 남원에서 살다 죽어서는 임실에 묻히고 싶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일테면 삼계는 송장을 거꾸로 묻어도 무탈한다는 이 말은 생거남원 사거임실이라는 말이 생겨난 뜻이라 하였다.
사거임실 이란 삼계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남원의 촌로들이 증언하고 있다. 때문에 삼계는 집단 세거지가 많은 만끔 사우나 정자등이 많고 충신과 효열비가 다른면에 비해 많다. 그리고 세거지로서 500년이 넘은 만끔 전설과 전통을 지키는 마을이 대부분이다.
이들 정자나 사우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이 여러 곳이며 명절 때는 옛 풍습대로 음식을 만들며 기제사나 사당의 제사도 각별하다. 각 종가의 전통은 있겠지만 아직도 옛적에 해 오던대로 춘추 시향은 물론 한식 단오 칠석 동지제는 기본이라고 전한다.
삼계면의 이러한 씨족 구성은 일가의 결집은 물론 면, 나아가 임실군에서도 각기 씨족의 협화가 잘 이루어진다는걸 볼 수 있다.
박사들이 많아 그 교육열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재계, 교육계통의 지도자들이 특히 많음은 이런 씨족구성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손꼽힐 정도의 천석꾼 만석꾼은 없어도 사회 지도층의 인사로 활동하는 사람들 대부분 그 면면을 살펴보면 가문과 일가들의 협조가 잘 된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삼계면 삼정회원들(49년생~55년생) 40여명이 만든 박사기념비가 2000년 4월에 세워졌다. 높이 4미터나 되는 박사기념비에는 삼계 출신 공학박사 41명 의학18명 철학 17명 경제학8명 법학 2명등 모두 86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들 가운데 한상진 심영희 부부를 비롯해서 부부박사가 10여 쌍이다.
◆병자호란과 충의인(忠義人)
병자호란(1636년 인조14년)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
쌍송당김광석(金光奭),그의아들경장,경적(慶長,慶積)아산리출생 참판김성진(金聲振)(종2품으로 지금의 차관),그의 아들 원중,원립,(元重,元立,)
병조좌랑 한경생(韓慶生),그의 아들 유량 족질 황(韓有良,韓황)어은리 출생 숙종비 인경왕후의 외친으로 좌찬성에(부총리급) 증직되고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김광석(金光奭) - 그는 경주인이다. 자는 자굉 이며 호는 쌍송당이고 제숙공 균의 8세손으로 참의(參義) 위(偉)의 아들이다.
1581년 선조 14년에 안산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도 지절이 강개하여 사울의 사우(士友)들이 그를 충의의 선비로 존경하였다. 병자호란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그아들 경장(慶長), 경적(慶積) 조카 원건(元健) 원구(元矩) 원중(元重) 등과 함께 맹세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도리이다. 더구나 우리 집안은 나라로 부터 은혜를 입었으니 자신을 잊고 싸움터로 나가서 비록 죽더라도 웃고 돌아와서 선왕을 상천에서 배알한다면 마음이 매우 즐거울 것이다. 우리 중에 마음을 달리한 자가 있다면 그는 적이나 다름없다" 고 맹세하고 군량 1백석과 가동 50명을 내어 각처에 통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아 여러고을 의사와 여산에서 만나 대열을 정비 청주로 올라가 과천으로 달려 오랑캐군의 군영을 습격하여 적군 5,6백명을 죽였다.
이때에 남한산성에는 조카 김경여가 독전어사로 이곳에서 만났는데 임금에게 이들이 적과 싸운 사실을 아뢰니"백의로써 적과 싸운일은 드문일이라 칭찬하였다. 그러던중 강화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함께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하고 김경여와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 정자옆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그 정자의 이름을 쌍송정이라 하였는데 이는 조상에게 지극한 정성을 드리며 나라의 시련에도 꿋꿋이 절개를 지킨다는 뜻이라 하였다. 훗날 후손들은 용대사(龍臺祠)-지어 이곳에 배향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 되었다.
한경생(韓慶生)- 청주한문으로 병자호란(인조14년 1636년) 당시 정산 현감이었다. 당시 직산 행영으로 달려가 방백 정세규와 의병을 규합하였고 가까운 고을에 격문을 전하였다. 도사 조사 검찰 종사관 유황, 가병사 나덕헌, 부여현감 이후산 홍산현감 김천석 임천군수 이각등과 함께 적의 동태를 살피고 관사를 지켰다. 서천군수 구봉서가 종묘와 사직을 빼았겼으니 임금을 배알한 뒤 자결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정산현을 적으로 부터 온전히 지켰다. 인경왕후의 외친으로 좌찬성에 증직이 되었고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 하였다.
한황-안양공의 6세손이며 경생은 족숙이 된다.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병자호란시 남원의 김원건, 김화와 함께 여산으로 갔고 또 청주로 나가 적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낙향하여 정안(靜安)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놓고 남한산성의 옛일이 생각나면 아들 근오와 함게 눈물 흘리며 내가 미친 오랑캐를 소탕하여 나라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마땅히 여귀가 되리라 하였다는데 끝내 한을 품고 세상을 마쳤다.
◆ 3,1 운동과 삼계인들-이분들은 삼일운동 당시 면민들의 선봉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로인해 옥고를 치른 분들임
허근(1869년 덕계리출생) 김인식(1874년 후천리출생) 허박(1876년 덕계리출생) 허섭(1890년 덕계리출생) 한돈석(1894년 어은리 출생) 허은(1869년 덕계리출생) 김정업(1880년 삼계리 출생)
◆6,25 한국전쟁중 자경대의 삼계인들
(참고-명단만으로 어느면 출신인지 알수가 없어 향토 수호비에 등재된 명단을 전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자경대는 한국전쟁시(6,25) 오수면,삼계면,지사면 출신의 청장년들이 조직한 자치경비대를 말함이다.
오수 자경대원들의 활약은 대단해서 소재지는 물론 말궁구리재 까지 잠복 주민들의 재산과 인명피해를 줄이고 빨치산들의 활동을 막았다는데 아울러 이분들의 활동상황은 차차 다루기로 약속한다. 당시 3개면에서 나선 자경대원들은 260여명 이었다고 하나 잊혀진 사람들이 되었고 삼계인들 중에 자경대원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명단을 찾을 수 없다.
◆효열- 효자 김재기(죽계리 출생)-조선의 효자로 칭하여 1920년 팔도의 사림이 조선효자라는 비를 세웠다.
이씨부인 열녀비(경주인 김정수의 처)- 용동부락
합천이씨 열녀각-(어은골 유의철의 처)- 어은리 사우래
홍씨부인 열녀비(삼계리 유각의 처)- 어은리 사우래(의구비)
◆문화재급 유적
◇청성군불조묘-어은리 청성군은 세종 정묘년에 등제하여 단종(1455년) 을해에 훈업으로 추증 좌익공신 가정대부 병조참판을 특사받았다. 41세인 세조13년(1468년)에 별세하니 세조는 청성군의 종가가 있는 연산 양촌에 불조사를 명하였다. 현재의 귀후재는 불조사를 연산에서 이봉, 후손들이 명절을 비롯해서 음3월20일 한식,단오, 7월 동지제등 일곱차례 배향을 한다.
◇계림군불조묘-후천리 계림군의 불조묘는 조선조 태종이 내린 사우로 한양에서 아산방에 옮긴이래 춘추에 전국의 후손들이 배향하고 있다. (음.2월15일 8월10일)
◇양천허씨 파능세고-
◎아계서원지-(세심리) 양돈 양희적 한정오를 배향
◎용대서원지-김성진,김광석, 김원건,김원립을 배향
◎강촌사우- 삼은리에 있는 강촌사는 본시 어은리에 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설에 의하면 어느시절 홍수와 산사태로 사우가 무너져 후손들이 강지멀 즉 강촌으로 이건하였다고 증언한다. 이곳은 충경공 유성원(사육신중 한분)을 봉안하는 별묘로 고향에 세거하는 방손들이 공의 충혼을 흠모하여 세웠다. 참고로 유성원선생의 묘는 의성 충열사에 있으며 홍천의 구운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곳 강지멀은 문화유씨가 세거한다.
◎월파헌-취수당 김성진이 만년에 지리산에 우거하다가 1623년 인조초에 계림군의 불조묘 위패와 함께 학정리 정각골에 옮겨온 것이다.
◎도통암-미산에 있던 사찰이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갑오년에 세웠던 절터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문법상이라는 여스님이 1970년에 법당을 세웠는데 법당뒤에는 석불이 있다.
◎석정암-노산중턱에 있는 암자로 양층암이라는 웅장한 바위가 있어 천연의 대를 이룬다. 암자 마당에 서면 멀리 팔공산은 물론 지리산 반야봉을 비롯해서 노고단 바래봉등 멀리 천왕봉까지 아련하다. 송석한정호, 향천곽재영, 운정곽종영, 정와김종진, 백헌허준강, 월담이승우, 고관허헌, 치당오병근, 청고유학수 등 여러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지으며 석정음사라(石井吟社) 이름지어 모였다는 곳이다.
◎벗내성지(城址)-삼계리 벗내 마을의 동북쪽 산 기슭 덕계리와 접경에 있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음 고적자료에 의하면 주위에 약 720미터의 투축과 우물터 한곳이 있었다고 함.
◎술뫼 도요지-봉현리 술뫼 마을 동북쪽 유동영씨 소유의 농장 동편으로 밋밋한 비탈에 있다. 주변에 그릇 조각과 불독등이 널려 있고 주변일대는 겉흙 아래를 파보면 찰흙이 꽉 박혀있다고 함
◎세심성지- 봉현리와 성지와 접경에 있었다고 함. 고적자료에는 주변 1키로미터의 토축이 있었다고 하나 토축이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무너지고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자
◎광제정-세심리소재 200여년 전 매당 양돈선생이 지은 것인데 연산군조 무오사화 때 아산방 현재 봉현리에 은거했는데 문장과 덕행이 사표가 되었다. 광제정은 아계사를 짓고 후손들이 배향하고 있다.
◎만취정-산수리소재 조선조 선조5년 형조참의와 대사간을 지내고 예문관을 지낸 계림군의 후손 김 위선생이 1572년에 건축한 정자로 선생은 홍문관 부교리 예문관에 올랐었는데 400여년을 잘 보존하며 1985년 5월28일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106호 지정된바 있고 선조 13년(1580년) 명나라 사신 서계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명위사로 만취정의 서액을 받아 현판을 걸었다. 정자에는 율곡 이이, 송강 정철,제봉 고경명,고봉 기대송, 백호 임제 등이 시문을 주고 받았던 시판이 걸려있다. 선생은 1595년 별세하여 조정에서는 승정원 도승지에 추서하였다.
◎사가정-세심리소재 노서고은상 선생이 지은 것으로 구 한말에 궁내부 주정을 지냈다고 하며 문학과 덕행이 출중하여 많은 문사들이 사가정을 드나들었다고 함.
◎세심정-세심리소재 삼매당 김길 선생이 지었으며 덕행이 향중에 모범이엇다고 전하며 사후 금화장군으로 증직되었음
◎호연정-광제소재 조선 중엽 경유 김재규선생이 마을 앞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택하여 자그마한 뗏집을 짓고 호연정이라 붙임.선생은 계림군의12대손으로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가르침 현재의 정자는 1957년에 후손들이 재 건립함.
◎육우당-어은리소재 한경생은 청성군 안양공의 5세손으로 아호를 육우당이라 하였는데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순천 춘천 부사를 병조좌랑과 수운 판관을 지내다가 연산군 혼조시 낙향하였는데 공은 어은리에 아흔아홉칸이 되는 집을 짓고 육우당이라 함. 병자호란시에는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고 후학들을 가르침. 인경왕후의 부친 문충공 김만기공은 육우당의 서랑( 郞)이었다.
◆씨족 구성
명문 씨족들의 임실 정착은 600여년 전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부분 이러한씨족들은 조선조 무오,갑자,기묘,을사 사화의 여파로 보여지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으로 내려와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삼계면은 청주한, 경주김, 양천허, 풍천노, 연안김, 해주오, 풍산심, 경주정, 밀양박, 합계태, 문화유, 전주유씨로 대표된다 하겠다. 청주 한문이나 경김(慶州金氏를 약칭함 ) 역시 비슷한 연대에 아산방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이나 경김의 집단 거주지는 후천,홍곡, 삼계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한문(韓門)은 대표적 집단 거주지를 어은리(언골,혹은 어은굴)로 한다.
◎ 한문은 시조 란(蘭)의 14세손 안양공 종손(終孫)이 단종때(1455년) 훈업으로 좌익공신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청성군에 봉군 되었으며 공이 별세하자 세조는 충남 연산에 불조묘를 명하여 그를 찬양하였는데 공이 별세후 두 아들의 스승인 광산인 김굉필선생이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참화를 당하고 청성군의 두 아들이 진산군수와 창원군수 였으므로 연화로 파직 당하였는데 후환을 염려하던 청성군의 청양현부인 광산김씨가 아들 희와 석을(韓曦,晳) 데리고 어은리로 이사와 한문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한문이 번성하기 이전에는 광산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하였다. 그 이유로 광산김씨 부인의 친정이 어은리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부인의 친정아버지 김이석공은 후손이 없어 한문에서 외조부의 향배를 500년이상 해왔으며 1671년 숙종초비로 가례를 치른 인경왕후의 외가가 이곳 한문이다.
그때 현종임금의 치정 12년째로 간택령을 내려 팔도의 규수들 중에서 세자빈을 뽑는데 인경왕후는 지정된 방석에 앉지 않고 있으니 임금이 묻기를 왜 방석에 앉지 않았느냐 하니, 방석위에는 규수들의 아버지 함자가 적혀 있는지라 인경왕후는 아버지의 함자위에 어찌 않겠느냐고 했고 좋아하는 꽃을 물으니 목화라 하였는데 그 이유로 만백성을 따뜻하게 할 수 있어서 라고 해 그 지혜가 높이 평가되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때에 왕후의 외가가 있는 어은리까지 길을 넓혔다 한다. 인경왕후의 부친 김만기공은 서포 김만중과 같은 문중이며 한문에서는 충남 논산에 있던 안양공의 불조묘를 어은리 귀후재에 이봉하여 향제를 올리고 있다.
인경왕후가 왕윤을 잉태시 먹고싶은 음식이 이곳 언골 외가에서 먹던 콩잎죽이라 하여 숙종은 어은골에서 콩잎을 진상토록 하였다는데 그때에 콩을 심었던 밭이 지금도 그대로 있다.
특히 오수에서 어은리로 들어가는 길목 임성굴에서 부터 신기리 동초등학교 3키로 정도에 이르는 도로 양편의 땅은 모두 한문의 대종중과 사종중의 땅으로 누구든 한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삼계에 들지 못한다 할 정도인데 현재 어은리의 가구 70여 호중 60호가 한문이며 일가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숙호부락을 비롯해서 삼계면은 100호 정도이며 임실에 거주하는 한문은 400여호로 알려진다.
청주 한문은 아들 형제가 진산군수와 창원군수를 했다 하여 청성군의 불조묘와 그 부인 광산김씨의 묘각 귀후재가 있는 사우래 들 건너는 형인 진산공 희의 묘소가 그 옆에는 창원공 석의 묘소가 있어 그 후손들이 철마다 배향을 하고 있다.
◎ 경김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 김은열로 부터 그 후손중에 고려초기 장군 김순웅을 중시조로 하며 김순웅의 12세손이 계림군 김균(金 )이다. 김균은 고려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3등훈에 오르고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시호를 제숙공이라 내리고 계림군에 봉하였다.
계림군의 고손인 김기(金璣)진안현감 사후에 의정부 좌참찬으로 증직된 공의 묘소를 삼계면 두월리에 안장한 인연으로 8세손 취수당 김성진공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 지리산에 우거하다가 1628년 인조초에 계림군 불조묘를 후천리에 옮긴이래 자손들이 삼계면에 세거하여 후천 세심,학정, 홍곡,산수,삼계등에 집성촌을 이루는데 그 수효는 300호이다.
◎ 양천허씨는 일명 모가울 허씨라 일컫는데 삼계 입성은 1700년초 쯤으로 짐작케 한다. 중시조 서호선생의 인품이 대단하고 학문이 출중하였으나 과거를 보러갔는데 당시 서호선생의 장인 삭녕최씨가 예조판서 시험관이었다고 한다. 이에 장인이 사위를 장원으로 등과 시킬수 없다하여 낙방케 하였다는데 서호 선생을 기리는 비가 순창군 동계면 서호리에 세워지고 후손 고려대 허세욱박사가 한글로 번역하여 비문을 썼다고 한다.
양천허씨는 파능세고라 하여 양천허씨 대 문집으로 허씨의 직계인중 고려때 첨의중찬을 지낸 태학사 의 유고시집과 조선말엽까지 21대에 걸친 125인의 유고 문장과 그 내용을 편집한 것이라 하였다. 양천허씨는 21대까지 대(代) 마다 문헌이 중단되지 않고 전래 되어오고 있대서 보기드문 일이라 하였다.
양천허씨의 후손은 허근(許根)선생이 1869년 생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참여 한 것으로 보아 이분이 당시에 51세였다고 알려진바 허섭이나 허박 선생등은 1876년,1890년생으로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으로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엇다.
◎ 풍산심씨는 기묘사화(1519년)이후 농와(聾窩)심언통이 정착하여 뇌천에 집성촌을 이루고 일명 머네심씨로 불러진다.
◎ 경주정씨는 임진왜란 때(1592년) 피난온 정봉균이라는 분이 정착하여 그의 16대 선조를 화촌에 모셨는데 그 무덤에서 박꽃이 피어났다 하여 일명 박우터로 불렀다 한다.
◎ 해주오씨는 양정 오중립이라는 분이 1562년에 삼은리에서 태어나 1645년 84세로 별세하였으매 그 이전으로 보아진다. 공은 5세 때에 사계 김장생 선생에게서 효경소학을 배우고 8세 때에 경사에 능하였다고 한다. 13세에 감시에 장원으로 종사관들을 놀라게 하였고 광해군 때 사헌부 감찰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노년에는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전한다.
숙종 8년에 태어난 중여 오만오라는 분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과 영암 함평 양산군수 울산 도호부사 까지 역임한 이분도 관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순조 때 쯤(1801년) 삼은사가 살았는데 농은(農隱) 오준상은 숨어서 농사를 짓고 어은(漁隱)오치승과 최석해는 숨어서 고기잡이로 소일하고 초은(樵隱)오일선은 숨어서 나무를 하였는데 세인들은 이들 네분을 장자의 풍류가 있다하여 삼은사라 (三隱士)불렀다는데 후일 이곳은 삼은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연안김씨들은 조선조 초 김순례가 두월리에 터를 잡았다고 향지에 기록되어 있다. 두월리는 두월 들노래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승놀이는 삼계 상여소리 삼계 농요로 두월 들노래를 꼽는다.
◎ 상여소리는 발상 년대를 조선 중엽으로 추정하며 그 연혁과 동기는 고려시대 고려장의 악습과 생매장 제도를 철폐한 조선 개국이후 충효의 사상으로 유도하고 민가의 장례풍속을 개혁하기 위한, 관가의 장례문화를 관료들이 낙향하여 지방의 특색을 살려 구성지면서도 구슬픈 가락으로 가미하여 운상시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말기까지 상여의 치장과 상례의 발전이 인간사중 으뜸으로 숭상하게 전하여 왔으며 일제하에서도 저들이 느껴보지 못했던 엄숙한 장례 풍습을 가히 여겨 철폐하지 못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민중이 봉기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 가혹한 탄압을 하면서 점차 소멸 되었다고 한다.
전쟁후 수복후에도 호구지책이 우선이었던 전통예술등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그 전수 인원도 줄어들고 전통장례 형식조차 사라지자 1984년 정부의 지방문화 육성책의 일환으로 상례비요(喪禮備要)라는 고서를 토대로 옛 어른들의 구전으로 발굴되어 삼계 상여소리라는 이름으로 재연하게 되었다.(참고:삼계상여소리 안내서)
◎ 두월 들노래는 말천방 농요로 불리다가 당시 80세나 되던 김종익 노인의 기억을 되살려 재 정리 되었다고 한다. 농요는 물품기노래와 연계타령, 문열가, 방타령,어휘싸오 등 김맬 때 흥을 돋구기 위해 부르는 노래등이 있다.
기타 정각골 베틀바위 쌀바위와 피바위 도포바위등에 얽힌 전설이 있으며 용소와 아기장수, 엉터리 김영덕장군, 짝귀 김씨,황장군 묘와 말무덤, 왕지골의 정씨부인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참고:제8호 임실향지)
씨족에 관한 것은 각 문중의 도움을 받았으며 일부는 동네 어른들의 구전을 토대로 하고 향지를 참고 하였다.
*이글은 인터넷에서 스크랩해온 것으로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님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