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막 최초의 선 라우렌시오 신부
“네. 그렇군요.”“네 그렇습니다.”
파란하늘의 구름과 코스모스를 벗 삼아 5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금시발복의 전설이 담긴 금대리와 원주의 호국에 성인 영원산성을 뒤로 하고 가파른 가리파제에 당도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내리막 도로를 따라 내려 가다 보면 일제 때 애환이 담긴 중앙선 철길 밑을 지나 신림삼거리에서 제천 방향으로 달리다 구학으로 가는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강원도에서 횡성의 풍수원 성당, 원주의 인동 성당 그리고 세 번째로 오래 되고 원주시 8경의 하나인 용소막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입구 좌측에 ‘선종완 노랜조 신부 생가터’의 표시석이 있다. 그리고 선종완 신부의 박물관과 느티나무가 세월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성당 안은 단순 소박하다. 고딕식답게 천정을 지탱하는 골조가 드러나 있고, 제대 뒤 벽에 십자가 고상만이 설치되어 있다.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대상을 최소화했다. 창문 사이로는 십자가의 길(Via Cruise) 14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금은 성당을 리모델링 해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선종완(1915 ~ 1976) 신부는 1915년 8월 용소막 성당이 있는 신림면 용암리 544번지에서 태어났다. 양조장 집 3대 독자인 선 신부는 용암리 에서 태어나 용소막 성당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신부의 꿈을 키웠다. 신림공립보통학교와 봉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동성학교, 경성 천주공교신학교(가톨릭대학 신학부 전신), 성심신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성 음악에 매료됐으며 한 때 수도사를 꿈꾸기도 했다. 신학교 시절부터 라틴어와 희랍어, 히브리어 등 10개 국어에 능통했다.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귀국해서는 가톨릭대 신학대학교 교수로 후배사제를 양성하며 대부분의 사제생활을 성서연구와 교육에 몰두했다. 현재 원주교구를 이끌고 있는 김지석 주교와 정인준 신부 등이 모두 선 신부의 제자들이다.
용암리 양조장집 3대독자
1930년 3월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신부로의 길이 시작된다. 1932년 그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한다. 선 신부의 부모는 자식이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계승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선 신부는 1934년 수도원을 나와 신학교에 재입학한다. 신학교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선 신부의 순수성과 청빈함을 잘 알고 있는 선생들이 재입학을 허용했다고 한다. 2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은 선 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는 춘천교구에서 잠깐 사목활동을 하다, 3월 일본 도쿄로 유학해서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과에 다닌다. 그리고 1945년 5월 휴학을 하고 귀국해 경성 성신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1947년 5월에는 성신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공부를 위해 1948년 9월 로마의 우르바노 신학대학 4학년에 편입한다. 1949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안젤리쿰대학, 성서대학 신학연구과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51년 6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스라엘로 가 예루살렘 성 서얀두 대학원에 다니면서 성서고고학에 대해 공부하고 또 성지순례를 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 공부한 것은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은 성서번역의 튼튼한 뿌리가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토대로 구약과 신약을 우리말로 번역한 최초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선 신부가 본격적으로 성서번역에 착수한 것은 1952년. 성서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며 1948년 떠난 로마 유학길에서 돌아 온 직후였다. 오랜 기간 박해를 받은 한국 가톨릭은 당시만 해도 우리말로 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춘천 소양로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할 때 신자들이 놀랄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선 신부는 독자적으로 번역작업에 뛰어든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읽힌 성경은 역관이나 선교사들이 중국어나 영어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었지만 선 신부는 직접 히브리어로 된 원전을 해석해 우리말로 풀어냈다. 그 결과 1958년 구약성서 제1편인 '창세기' 발간을 시작으로 1963년까지 레위기, 민수기 등 10여권을 발간했다. 성경은 한문을 통해 처음 수용되었고, 그것이 라틴어, 그리스어로 확대되고, 마지막에 히브리어까지 확장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우리말로 번역한 최초의 신부
1952년 6월 성서고고학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선종완 신부는 9월 가톨릭대학 신학과 교수로 복직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성서 번역에 온 힘을 쏟는다. 그는 1954년 4월부터 1955년 3월까지 잠시 횡성과 소양로 교회 주임신부를 맡았다. 그리고는 다시 가톨릭대학 교수로 돌아와 성서번역을 시작했고, 1958년 7월 구약성서 제1편 창세기를 우리말로 펴낸다. 이때부터 구약성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이름으로 나왔으며, 주해까지 있어 성서학자들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되었다.
지역 내에서도 용소막 성당은 알지만 신자들을 제외하곤 이 유물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
지 않다. 선 신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소하다.
그리고 선 신부는 한평생 성서연구에 매진하셨을 뿐 아니라 성경말씀 그대로 생각하고 실천하신 분이다. 때문에 신학생들에게 항상 “ 넓은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학문에도 조예가 깊고 덕행면 에서도 남을 선도할 수 있는 산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그저 사회의 생활 방식을 따라하는 사제가 아니라, 현실 파악에 어둡지 않은 지혜로운 사제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강조 하였다.
그는 또한 1955년 10월부터 1960년까지 가르멜 수녀원 고백신부로 근무한 인연으로, 성경속에 가장 힘든 사람이 여성이기에 여성인권에 적극적이 였다. 그래서 1960년 3월 25일 경기도 부천에서 성모영보수도원을 설립했다. 선 신부는 수도원을 살리기 위해 메추리를 사육하기도 해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행히 당시 메추리알 값이 좋아 수도원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성모영보수녀원은 1967년 6월 과천으로 이전을 했고, 1975년 용인군 이동면에 수련원을 준공하면서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 그 후 과천의 수녀원이 도시화로 인해 수용되면서 성모영보수녀원은 이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성인권에 적극적이 였다.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되면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는 원주교구 소속 신부가 되었고, 1967년 사제서품 25주년이 되어 은경축을 맞았다. 1968년에는 신구약 공동번역 성서 작업을 위한 가톨릭측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또 다시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구약 번역작업에 참여했는데,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번역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꼼꼼하기 이를 데 없어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남긴 교정원고와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남긴 교정원고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자는 손으로 쓰고 교정을 보았으며, 후자는 타자로 친 원고에 교정을 보았다. 또한 선종완 신부는 번역하는 작업을 원할히 하기 위하여 OA책상과 회전의자를 손수 만들어 번역작업의 효율화를 기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76년 구약성서 번역이 완료되었고, 7월 10일 원고교정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단독으로 구약 희브리어 원전 번역
선 신부가 독자적인 번역작업에 몰두할 때 한국 교회사에 남을 '큰 일'이 추진된다. "가톨릭 200년
역사와 개신교 100년 역사에 있어서 두 교회가 함께 쌓아 올린 기념비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
받은 '공동번역성서'가 그 것이다. 1968년부터 8년동안 진행된 신구약성서 공동번역에는 가톨릭 측
전문위원 겸 번역위원으로 선 신부가, 개신교측에서는 고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참여했다. 선 신부와 문 목사는 성서의 이미지를 가능한 한 한국적 표현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번역' 이다.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번역이 아니라 교
회 바깥에 있는 일반 서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의미했다. 하지만 차질 없이 추진된 공동번역 작업의 마무리는 온전히 선 신부의 몫으로 남는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접한 문 목사가 민주
구국전선에 주체가 돼 참여했다가 국가보안법에 묶여 수감됐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와 공동번역성서 참여
공동번역이 늦어진다는 주위의 요구에 선 신부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번역작업에만 메달렸다. 선신
부의 동료교수인 오기선 신부는 선 신부 선종 1주기를 맞은 1977년 7월 가톨릭시보에 게재한 추모
글에서 "선 신부는 마지막 손질을 위해 매일 한 시간도 안주무시고 꼬박 뜬 눈으로 지새며 일했
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24시간을 쪼개 일하던 선 신부의 건강에 이상이 발견됐다. 간암이었다. 병원에서는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병마도 선 신부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선 신부는 76년 7월 11일 간암으로 선종하기 일주일 전까지도 병상에서 원고교정을 모두 마치는 열정을 보였다.
1977년 마침내 신구약 합본 '공동번역성서'가 빛을 보게 됐다. 세계 최초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합동
으로 낸 성경이다. 한국 가톨릭은 2005년 새번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이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했다.
선종하기 일주일 전 까지 원고 교정
선종원 신부는 항상 사람을 만나면 늘 머리 숙여 인사하며, “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라고 겸양지덕을 미덕으로 삼으며 평생을 살아 온 원주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