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가정교회'란 최근 몇 년간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있는 미국 휴스턴서울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영기 목사께서 말하는 '가정교회'를 가리킵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제가 사역의 현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목사님들께 '가정교회'의 실천적 유효성에 대한 평가를 감히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장로교회의 목사가 목회적 필요에 의하여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할 때 유념해 두어야 할 점들은 없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지면 관계로 '가정교회' 운동의 몇 가지 주장들을 설명하면서, 장로교신학의 교회론적 관점에서의 비평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끝에 장로교 신학의 관점에서의 가정교회 운동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와 아울러 한국 장로교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I.'가정교회'는 교회인가?
최영기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를 가리켜 "한마디로 교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면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성경 상의 증거로 신약 성경 시대의 가정교회를 지적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형태는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였던 교회로서 모든 성도가 다 일반 성도이면서도 다 목사와 같이 헌신하였던 교회인데, 이것이 '가정교회사역원'에서 말하는 가정교회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가정교회'를 교회로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정교회'가 지역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골고루 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없이 성도들이 먼저 개척한 교회의 모습과 유사한 형태로 지역 교회의 부속 기관인 친교 중심의 구역과도 다르며,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훈련과도 다르며,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 모든 사역을 골고루 다하는 지역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장로교 신학의 교회론에 비추어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이유로 하여 '가정교회사역원'이 '가정교회'라고 칭하는 소그룹을 '교회'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첫째,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정에서 모인 교회는 개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들로서의 '가정교회'를 말해주는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교회의 구별에 따를 때에 하나의 개교회를 말해주는 사례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정치 규정집(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 Government 1645, Westminster Divines, 이하 '웨민규정집'으로 씀)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있으며, 그 아래에 지역마다 한 노회 정치(presbyterial government)가 있으며, 그 아래에 여러 개의 개별적인 회중들(several particular congregations)이 속하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큰 박해가 일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행 8:1). 또 사도행전 15장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한 교회 안에 몇 개의 개별적인 교회들이 장로들의 지도를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웨민규정집은 밝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웨민규정집은 말하기를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기 집에서 가졌던 모임을 가리켜 에베소 교회라는 노회적 치리 아래에 있었던 개별적 교회라고 지목합니다(고전 16:19; 행 18:19, 24, 26). 따라서 한 도시 아래에 한 교회로 묶어지는 몇 몇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들이 있다는 신약 성경의 증거들(롬 16:3-5; 골 4:15; 몬 1:1-2)은 한 노회 아래에 몇 몇의 개별적인 회중들, 곧 오늘날 개교회라 불리우는 교회들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교회 안에 속한 여러 갈래의 소그룹 모임을 가리켜 '교회' 또는 모임의 장소를 의식하여 '가정교회'라고 일컫는 것은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부적절합니다.
둘째,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가 지역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하기 때문에 지역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가정교회의 예배는 한 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 드리는 공예배가 아니며, 또한 목사에 의하여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회중으로 이루어진 개교회로서의 교회라는 특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기독교강요 4.1.10).
따라서 한 사람의 목사의 목회적 지도 아래 모이는 개별적 회중의 모임인 개교회 속하여 그 교회 안에서 몇 몇 가정들이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은 이름 그대로 성도들의 '가정모임'일지언정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가정모임'이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아니겠지만 유기체로서의 교회일 수는 있으므로 '가정교회'라고 일컫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란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도 교회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교회의 한 측면을 가리키며, 성령 안에서 연합을 이룬 성도의 모임(coetus fidelium)을 뜻합니다.
그런데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가정교회'는 신자만의 모임이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하는 모임이므로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유기체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가정교회'를 유기체로서의 교회라고 부른다면 구역예배의 모임이 더욱 더 교회이며, 제자훈련의 모임이 더욱 더 교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임은 적어도 '가정교회'보다는 더욱 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정교회사역원'이 '가정교회'를 일컬어 굳이 '교회'임을 주장할 때 그 의도는 '가정교회'가 하나의 지역교회와 같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기체로서의 교회 개념의 적용을 통해 '가정교회'를 교회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하는 장로교 목사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로 일컬어지는 소그룹 모임을 '교회'로 규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소그룹 모임을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목장'으로 일컫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으나 그것을 독립된 '교회'가 아닌 하나의 '구역' 또는 '가정모임'으로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교회'라는 명칭을 주고 존재의 성격을 '교회'로 규정해 주어야 '가정교회'의 리더인 목자가 목양의 동기를 자극 받고 또 그 책임성을 크게 느낄 수 있다는 실용적 동기 때문에 신학적 문제점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III.'가정교회' 세 가지 원리와 장로교신학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 운동의 성경적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 관련한 것으로 교회의 사명은 제자를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이며(마 28:18-20), 둘째는 제자 훈련 방식에 관련한 것으로 제자는 단순히 교실에서 지식을 전달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보고 배우도록 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이며(막 3:13-15), 셋째는 목회자와 성도의 사역 분담의 원리에 관련한 것으로 제자를 만드는 목양의 사역은 성도의 몫이며,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양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4:11-12).
1. 교회의 존재목적: 제자를 만듦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며, 이 목적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장로교 교회론에서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의 제 4권에서 교회론을 다루며, 책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대하시며 그 안에서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외적인 수단들 또는 방편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즉 무지하고 게으른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과 복음의 축복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돕기 위한 장치로 교회를 주셨다는 것이 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칼빈의 설명입니다. 또한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 표현한 칼빈의 생각(기독교강요, 4.1.1; 엡 4:13 주석을 참조)은 교회를 통해서만 신자가 잉태되어지고 양육되어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필요성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설명하면서 교회를 '학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4.1.4). 즉 칼빈에 따르면 교회와 성도의 관계는 어머니와 자녀, 또는 학교와 학생의 관계와 같아서,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으로 설명이 됩니다.
교회의 필요성에 관련한 칼빈의 설명을 다시 풀면 '교회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양육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구원하여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그것이 교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때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수용될 수 있겠습니다.
2. 제자훈련 방식: 모델링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은 본을 보이는 모델링(modeling)을 통한 능력의 배양에 있으며, 지식 전달이 아니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볼 때 논리의 비약을 담고 있습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 바울, 베드로께서 각각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말씀한 바를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깨닫게"하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이 소개되고 강조되고 있음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고 있지 않은 듯 싶습니다. 더구나 '가정교회사역원'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제자 삼는 데에 있다고 인용한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에 이미 제자 삼는 방식과 관련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훈이 있음에 대해서는 충분한 평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키게" 하도록 하는 목표를 위하여 행하여야 할 훈련의 방식은 "가르치는" 데에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르치는 방식은 교훈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을 포괄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은 향하여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a)고 말씀하며 책망을 하셨을 때에, 이미 제자를 만들기 위한 가르침의 방식은 교훈의 전달뿐만 아니라 그 교훈에 대한 순종의 모범을 포괄하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사실 교훈의 전달과 순종의 모범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훈의 깨달음이 기초가 되어 그 결과로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므로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순종의 모델링"은 "순종케 함"이라는 제자훈련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유용한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 "순종의 모델링"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전달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므로 제자를 훈련하는 기본적인 전제이며 내용이어야 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로 인하여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과 관련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아는 지식이라고 교훈합니다(기독교 강요 1.1.1-3). 따라서 칼빈은 모든 하나님의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하며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에게서 선을 바라며 그의 말씀에 살아가는 경건이라고 설명합니다(기독교 강요 1.2.2).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에 따른 구원론은, 중세의 아퀴나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나 둔스 스코투스의 주의주의(voluntarism)에 치우치지 않은 채, 어거스틴의 관점에 따라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지성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의지를 균형있게 반영합니다(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1, 226).
장로교 신학을 따를 때, 신학은 결코 사변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살아 숨을 쉬는 실천적 학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본을 보이는 현장 실습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장로교 신학이 말하는 '지식'의 실천적 측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제한성이 있는 판단입니다. 장로교 목사는 말씀의 전달과 교훈의 각성이라는 지식적인 측면이 새 생명을 낳는 영적 기반이 됨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목회에 실제적인 반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가정교회사역원'이 말씀의 지식에 기초하여 제자의 삶이 나온다는 영적 관계의 원리를 결코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비평을 하는 것은 '가정교회사역원' 스스로 '가정교회'의 사역과 목사의 사역을 구분하여 제자를 양육하는 현장인 '가정교회'의 역할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최소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만들어 영혼을 구원하는 상보적인 방식으로 '제자훈련'과 '가정교회'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은 믿는 이를 위한 훈련이며,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역은 '가정교회'의 사역이라고 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사역은 믿지 않는 자로 하여금 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을 넘어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비는 그릇된 대비라고 하겠습니다.
더욱 더 주의하여야 할 것은 '가정교회' 사역에 요구되는 헌신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가정교회' 운동이 복음의 지식이 교육되어야 할 필요성을 축소화하는 만큼, 전 교회적으로 신앙의 지성적 측면이 매우 약화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장로교 목회자가 '가정교회'를 수용할 때에는 '가정교회'의 역할에서 축소화시킨 복음의 지식과 교훈이 교육되어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목회적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며, 제자를 낳기 위한 노력이 매우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주지하여야 하겠습니다.
3. 목회 사역의 분담
목회자와 성도의 사역 분담의 원리에 관련하여 제자를 만드는 목양의 사역은 성도의 몫이며, 이러한 목양의 사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회자의 몫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견해에 대해서 장로교 목회자는 어느 정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은 목사가 목회사역분담의 성경적 교훈을 무시하고 목회 사역을 독점함으로써 목회 본연의 사역을 소홀히 하고 과중한 사역으로 인하여 본인의 피로는 물론 교회의 무기력을 불러 왔다고 지적합니다. 현상에 대한 지적은 옳지만 진단 및 처방은 장로교 신학의 이해와 어긋납니다.
일단 목사는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면서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통해 서로를 섬기도록 격려한다는 원칙은 장로교 신학에서도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의아한 것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목사의 일과 성도의 일을 종류로 구분하여 배타적 관계로 놓는다는 점입니다.
이 본문이 목사는 성도를 훈련, 연단, 준비시켜서,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 결과로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는 주장은 인정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은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훈련시키고 은사의 기회를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도를 심방, 위로, 상담하는 것은 목사가 감당해야 할 훈련 방식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풀이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장로교 교회에서도 장로는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에 따라서 목사를 도와서 영적 감찰, 교리의 부패 방지, 심방, 위로 등의 사역을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직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은 심방과 위로의 사역을 장로에게 전적으로 미루고 목사에게 이러한 직무들을 면제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주의 말씀을 받은 형제들의 형편을 살피려 이들을 방문한 사례가 목사에게 심방이라는 목회적 직무가 주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한 예를 보였기 때문이며(행 15:36), 또한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 경건이라 교훈한 야고보서(1:27)의 말씀은 목사에게도 마땅히 적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장로와 집사의 직무는 목사의 직무를 돕기 위한 것이며, 목사의 직무가 이들의 직무와 배타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제자를 삼는 훈련이 보고 배우는 것이라면, 심방과 위로 사역을 행하지 않는 목사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심방의 사역을 하도록 훈련시킬 수가 없게 될 것이므로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하는 장로교 목사는 마땅히 각 '가정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을 돌아보고 필요시에는 상담과 심방과 위로를 행하여야 할 목회적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자신의 직무를 의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를 돕는 직분자로 세움을 입은 장로와 집사 등으로 하여금 직무의 소명을 분명히 하여 그들과 더불어 그 직무를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가정교회'란 최근 몇 년간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있는 미국 휴스턴서울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영기 목사께서 말하는 '가정교회'를 가리킵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제가 사역의 현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목사님들께 '가정교회'의 실천적 유효성에 대한 평가를 감히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장로교회의 목사가 목회적 필요에 의하여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할 때 유념해 두어야 할 점들은 없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지면 관계로 '가정교회' 운동의 몇 가지 주장들을 설명하면서, 장로교신학의 교회론적 관점에서의 비평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끝에 장로교 신학의 관점에서의 가정교회 운동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와 아울러 한국 장로교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I.'가정교회'는 교회인가?
최영기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를 가리켜 "한마디로 교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면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성경 상의 증거로 신약 성경 시대의 가정교회를 지적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형태는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였던 교회로서 모든 성도가 다 일반 성도이면서도 다 목사와 같이 헌신하였던 교회인데, 이것이 '가정교회사역원'에서 말하는 가정교회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가정교회'를 교회로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정교회'가 지역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골고루 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없이 성도들이 먼저 개척한 교회의 모습과 유사한 형태로 지역 교회의 부속 기관인 친교 중심의 구역과도 다르며,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훈련과도 다르며,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 모든 사역을 골고루 다하는 지역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장로교 신학의 교회론에 비추어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이유로 하여 '가정교회사역원'이 '가정교회'라고 칭하는 소그룹을 '교회'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첫째,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정에서 모인 교회는 개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들로서의 '가정교회'를 말해주는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교회의 구별에 따를 때에 하나의 개교회를 말해주는 사례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정치 규정집(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 Government 1645, Westminster Divines, 이하 '웨민규정집'으로 씀)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있으며, 그 아래에 지역마다 한 노회 정치(presbyterial government)가 있으며, 그 아래에 여러 개의 개별적인 회중들(several particular congregations)이 속하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큰 박해가 일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행 8:1). 또 사도행전 15장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한 교회 안에 몇 개의 개별적인 교회들이 장로들의 지도를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웨민규정집은 밝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웨민규정집은 말하기를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기 집에서 가졌던 모임을 가리켜 에베소 교회라는 노회적 치리 아래에 있었던 개별적 교회라고 지목합니다(고전 16:19; 행 18:19, 24, 26). 따라서 한 도시 아래에 한 교회로 묶어지는 몇 몇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들이 있다는 신약 성경의 증거들(롬 16:3-5; 골 4:15; 몬 1:1-2)은 한 노회 아래에 몇 몇의 개별적인 회중들, 곧 오늘날 개교회라 불리우는 교회들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교회 안에 속한 여러 갈래의 소그룹 모임을 가리켜 '교회' 또는 모임의 장소를 의식하여 '가정교회'라고 일컫는 것은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부적절합니다.
둘째,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가 지역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하기 때문에 지역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가정교회의 예배는 한 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 드리는 공예배가 아니며, 또한 목사에 의하여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회중으로 이루어진 개교회로서의 교회라는 특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기독교강요 4.1.10).
따라서 한 사람의 목사의 목회적 지도 아래 모이는 개별적 회중의 모임인 개교회 속하여 그 교회 안에서 몇 몇 가정들이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은 이름 그대로 성도들의 '가정모임'일지언정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가정모임'이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아니겠지만 유기체로서의 교회일 수는 있으므로 '가정교회'라고 일컫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란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도 교회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교회의 한 측면을 가리키며, 성령 안에서 연합을 이룬 성도의 모임(coetus fidelium)을 뜻합니다.
그런데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가정교회'는 신자만의 모임이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하는 모임이므로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유기체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가정교회'를 유기체로서의 교회라고 부른다면 구역예배의 모임이 더욱 더 교회이며, 제자훈련의 모임이 더욱 더 교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임은 적어도 '가정교회'보다는 더욱 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정교회사역원'이 '가정교회'를 일컬어 굳이 '교회'임을 주장할 때 그 의도는 '가정교회'가 하나의 지역교회와 같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기체로서의 교회 개념의 적용을 통해 '가정교회'를 교회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하는 장로교 목사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로 일컬어지는 소그룹 모임을 '교회'로 규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소그룹 모임을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목장'으로 일컫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으나 그것을 독립된 '교회'가 아닌 하나의 '구역' 또는 '가정모임'으로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교회'라는 명칭을 주고 존재의 성격을 '교회'로 규정해 주어야 '가정교회'의 리더인 목자가 목양의 동기를 자극 받고 또 그 책임성을 크게 느낄 수 있다는 실용적 동기 때문에 신학적 문제점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III.'가정교회' 세 가지 원리와 장로교신학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 운동의 성경적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 관련한 것으로 교회의 사명은 제자를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이며(마 28:18-20), 둘째는 제자 훈련 방식에 관련한 것으로 제자는 단순히 교실에서 지식을 전달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보고 배우도록 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이며(막 3:13-15), 셋째는 목회자와 성도의 사역 분담의 원리에 관련한 것으로 제자를 만드는 목양의 사역은 성도의 몫이며,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양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4:11-12).
1. 교회의 존재목적: 제자를 만듦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며, 이 목적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장로교 교회론에서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의 제 4권에서 교회론을 다루며, 책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대하시며 그 안에서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외적인 수단들 또는 방편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즉 무지하고 게으른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과 복음의 축복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돕기 위한 장치로 교회를 주셨다는 것이 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칼빈의 설명입니다. 또한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 표현한 칼빈의 생각(기독교강요, 4.1.1; 엡 4:13 주석을 참조)은 교회를 통해서만 신자가 잉태되어지고 양육되어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필요성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설명하면서 교회를 '학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4.1.4). 즉 칼빈에 따르면 교회와 성도의 관계는 어머니와 자녀, 또는 학교와 학생의 관계와 같아서,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으로 설명이 됩니다.
교회의 필요성에 관련한 칼빈의 설명을 다시 풀면 '교회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양육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구원하여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그것이 교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때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수용될 수 있겠습니다.
2. 제자훈련 방식: 모델링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은 본을 보이는 모델링(modeling)을 통한 능력의 배양에 있으며, 지식 전달이 아니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볼 때 논리의 비약을 담고 있습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 바울, 베드로께서 각각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말씀한 바를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깨닫게"하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이 소개되고 강조되고 있음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고 있지 않은 듯 싶습니다. 더구나 '가정교회사역원'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제자 삼는 데에 있다고 인용한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에 이미 제자 삼는 방식과 관련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훈이 있음에 대해서는 충분한 평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키게" 하도록 하는 목표를 위하여 행하여야 할 훈련의 방식은 "가르치는" 데에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르치는 방식은 교훈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을 포괄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은 향하여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a)고 말씀하며 책망을 하셨을 때에, 이미 제자를 만들기 위한 가르침의 방식은 교훈의 전달뿐만 아니라 그 교훈에 대한 순종의 모범을 포괄하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사실 교훈의 전달과 순종의 모범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훈의 깨달음이 기초가 되어 그 결과로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므로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순종의 모델링"은 "순종케 함"이라는 제자훈련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유용한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 "순종의 모델링"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전달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므로 제자를 훈련하는 기본적인 전제이며 내용이어야 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로 인하여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과 관련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아는 지식이라고 교훈합니다(기독교 강요 1.1.1-3). 따라서 칼빈은 모든 하나님의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하며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에게서 선을 바라며 그의 말씀에 살아가는 경건이라고 설명합니다(기독교 강요 1.2.2).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에 따른 구원론은, 중세의 아퀴나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나 둔스 스코투스의 주의주의(voluntarism)에 치우치지 않은 채, 어거스틴의 관점에 따라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지성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의지를 균형있게 반영합니다(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1, 226).
장로교 신학을 따를 때, 신학은 결코 사변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살아 숨을 쉬는 실천적 학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를 훈련하는 방식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본을 보이는 현장 실습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장로교 신학이 말하는 '지식'의 실천적 측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제한성이 있는 판단입니다. 장로교 목사는 말씀의 전달과 교훈의 각성이라는 지식적인 측면이 새 생명을 낳는 영적 기반이 됨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목회에 실제적인 반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가정교회사역원'이 말씀의 지식에 기초하여 제자의 삶이 나온다는 영적 관계의 원리를 결코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비평을 하는 것은 '가정교회사역원' 스스로 '가정교회'의 사역과 목사의 사역을 구분하여 제자를 양육하는 현장인 '가정교회'의 역할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최소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만들어 영혼을 구원하는 상보적인 방식으로 '제자훈련'과 '가정교회'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은 믿는 이를 위한 훈련이며,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역은 '가정교회'의 사역이라고 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사역은 믿지 않는 자로 하여금 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을 넘어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비는 그릇된 대비라고 하겠습니다.
더욱 더 주의하여야 할 것은 '가정교회' 사역에 요구되는 헌신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가정교회' 운동이 복음의 지식이 교육되어야 할 필요성을 축소화하는 만큼, 전 교회적으로 신앙의 지성적 측면이 매우 약화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장로교 목회자가 '가정교회'를 수용할 때에는 '가정교회'의 역할에서 축소화시킨 복음의 지식과 교훈이 교육되어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목회적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며, 제자를 낳기 위한 노력이 매우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주지하여야 하겠습니다.
3. 목회 사역의 분담
목회자와 성도의 사역 분담의 원리에 관련하여 제자를 만드는 목양의 사역은 성도의 몫이며, 이러한 목양의 사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회자의 몫이라는 '가정교회사역원'의 견해에 대해서 장로교 목회자는 어느 정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은 목사가 목회사역분담의 성경적 교훈을 무시하고 목회 사역을 독점함으로써 목회 본연의 사역을 소홀히 하고 과중한 사역으로 인하여 본인의 피로는 물론 교회의 무기력을 불러 왔다고 지적합니다. 현상에 대한 지적은 옳지만 진단 및 처방은 장로교 신학의 이해와 어긋납니다.
일단 목사는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면서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통해 서로를 섬기도록 격려한다는 원칙은 장로교 신학에서도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의아한 것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목사의 일과 성도의 일을 종류로 구분하여 배타적 관계로 놓는다는 점입니다.
이 본문이 목사는 성도를 훈련, 연단, 준비시켜서,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 결과로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는 주장은 인정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은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훈련시키고 은사의 기회를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도를 심방, 위로, 상담하는 것은 목사가 감당해야 할 훈련 방식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풀이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장로교 교회에서도 장로는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에 따라서 목사를 도와서 영적 감찰, 교리의 부패 방지, 심방, 위로 등의 사역을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직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은 심방과 위로의 사역을 장로에게 전적으로 미루고 목사에게 이러한 직무들을 면제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주의 말씀을 받은 형제들의 형편을 살피려 이들을 방문한 사례가 목사에게 심방이라는 목회적 직무가 주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한 예를 보였기 때문이며(행 15:36), 또한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 경건이라 교훈한 야고보서(1:27)의 말씀은 목사에게도 마땅히 적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장로와 집사의 직무는 목사의 직무를 돕기 위한 것이며, 목사의 직무가 이들의 직무와 배타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제자를 삼는 훈련이 보고 배우는 것이라면, 심방과 위로 사역을 행하지 않는 목사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심방의 사역을 하도록 훈련시킬 수가 없게 될 것이므로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하는 장로교 목사는 마땅히 각 '가정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을 돌아보고 필요시에는 상담과 심방과 위로를 행하여야 할 목회적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자신의 직무를 의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를 돕는 직분자로 세움을 입은 장로와 집사 등으로 하여금 직무의 소명을 분명히 하여 그들과 더불어 그 직무를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