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대학에서 발행하는 『해양전략 제103호』(99년 6월)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회고록에 해당하는 글이므로 자기 입장을 변호한다거나 자랑한다거나 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인접국 해군과의 분쟁 상황을 어떻게 회피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 재미있을 겁니다.
(이 주제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동 지 제35호에 ‘중공 어뢰정 사건에 관련된 국제적 문제의 고찰’이라는 기사가 있으니 이를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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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어뢰정 사건 실기
해군소장(예) 권 정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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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5년에 서해에서 발생했던 ‘중국 어뢰정 사건’을 당시 제3해역사령관으로서 작전을 현지에서 직접 지휘했던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실기이다. 이 실기는 1985년 3월 22일 우리 어선이 중국 어뢰정을 구조하여 서해 하왕등도로 예인해 옴으로서 발생한 ‘중국 어뢰정 사건’의 구조에서부터 중국 북해함대의 우리 영해 침범과 이를 저지 퇴각시키는 작전과정 그리고 외교교섭 과정을 재조명하였으며, 이 사건을 미국 해군함정 푸에블로(Pueblo)호 사건과 비교하였다.
당시 이 사건이 국제법상 한국-중국간에 미묘한 외교 분쟁을 일으켰던 만큼, 이 사건을 사실을 바탕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함정 근무자들에게 제3국 해군과의 교섭 및 분쟁 예방을 위한 교훈으로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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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건의 개요
1985년 3월 21일 오전, 중국 해군의 북해함대 소속 P-6 Huchan급 고속어뢰정 편대 6척이 기동훈련차 산동반도의 靑島항을 출항하였다. 이 훈련편대가 예정된 훈련을 마치고 귀항하는 도중에 그 중 한 척이 산동반도 동쪽 20해리 해상에 이르렀을 때 선상반란이 일어났다. 어뢰정 3213호의 통신사인 杜新立과 항해사인 王中榮이 AK-47 자동소총을 동료들에게 난사하였으며,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결국 이 어뢰정은 편대를 이탈하여 반란자들의 주동 하에 한국행을 결심하고, 동쪽으로 항진하다가 흑산군도 근해에서 연료의 고갈로 표류하게 되었다.
반란이 있은 지 15시간이 지난 후인 3월 22일 오전 11시경 때마침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한국어선 제6어성호가 이 어뢰정의 조난수신호를 발견하였다. 긴급히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우리 어선은 이 중국 어뢰정을 예인하여 같은 날 2000시경 군산항에서 25해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인 下旺燈島의 경찰초소에 신고하였다.
한편, 중국은 문제의 어뢰정 3213호가 한국 측 연안으로 표류할 것으로 예상하고 3월 22일 1700시경 신화사통신 외신부의 司徒强을 시켜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하여 구조 협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 요청을 받은 우리 외무부는 한국 해군에 이 사실을 전파하였으며, 해군은 즉각 작전중인 전 함정에 긴급전보로 구조지시를 타전하였다. 동시에 조난선박이 당시 미수교 국가인 중국의 현역 군함인 점을 중시하여 해군 제3해역사에서는 사건 해역에 함정을 집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예하 함정을 동원하였다.
3월 23일 새벽 0650시경 어뢰정을 찾아 나선 3척의 중국해군 함정이 하왕등도 근해에서 집결중인 우리 해군 함정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들은 3,900톤 LUDA급 구축함 1척을 포함한 전투함 2척과 1,500톤급 예인함 1척이었다.
현장에 위치한 한국 해군 함정은 이들 중국 함정에게 우리 해역에서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국해군 함정이 우리 요구에 순응하지 않자 한국 공군 전투기가 출동하는 등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관계 장관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엄중하게 퇴거를 요구하는 우리 해군의 조치와 미국 대사관이 북경으로 중계한 우리 정부의 강력한 의사가 전달되어 같은 날 0938시에 중국 함정들은 우리 해군이 요구한 우리의 작전해역 밖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한국 정부는 외무부 대변인을 통하여 중국 군함의 한국 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인 3월 23일 2200시에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가 신화사 홍콩 지사의 외신부장을 면접하고 한국 정부의 항의각서를 전달하였으며, 중국은 “不注意”로 한국 영해로 중국 군함이 진입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 시각 이후부터 조난당한 중국 어뢰정 및 그 승무원의 송환과 우리 영해 침범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에 대한 양국의 교섭이 홍콩의 신화사 통신 지사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3월 26일 중국 측의 공식사과각서가 우리 정부에 전달되었다.
우리 정부가 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3월 28일 1100시 양국의 중간 지점인 공해상(위도 36N, 경도 124E)에서 어뢰정과 그 승무원 전원을 중국에 인계함으로서 일주일 동안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중국 어뢰정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 정부가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개최에 전념하다시피한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으로서 자칫 잘못하여 해상에서 중국과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사후 외교교섭에 적지 않은 고충이 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당국은 교섭과 인계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구조송환 조치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여러 모로 표시하였으며, 중국 외교부는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중국 함정의 영해 진입 시에 현장에서 발포하지 않은 점을 중시하여 조사단을 현지에 내려 보내는 등 국제법상 분규 예방을 위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아 현지 사령관이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Ⅱ. 본인의 제3해역사령관 취임
1985년 2월 27일, 본인은 서울 용산에 위치한 한미연합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직에서 제3해역사령관으로 보직 임용되었다. 해역사령관직은 대통령의 친수보직이다. 이 직책은 전라남북도에 연해 있는 전 해역에서 군령권을 행사하는 중요 직책으로서 조선시대의 전라수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시대의 국방전략은 기본적으로 제승방략이었다. 즉 외침이 있을 때는 지방에 주둔한 부대가 일차로 적을 맞아 싸우고, 적의 규모가 지방 병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중앙에서 별도 지휘관을 임명하여 증원군을 현지로 파견하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한 남도에는 종2품의 병사와 정3품의 수사를 두었는데, 오늘날 육군의 후방사단과 해군의 해역사 개념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우리 역사에 그 이름이 찬연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라 좌수사에 부임하실 때가 47세 되시던 2월이었는데, 외람되게도 그 자리에 본인이 48세 2월에 부임하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께 부임신고를 하는데 종전과 다르게 대통령 친수 보직자에게는 직책과 이름이 새겨진 三精刀가 수여되었다.
전라남북도를 연한 해안선은 19세기 탐험가들이 마의 바다라 부를 만큼 복잡하고 돌출이 심할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조석과 더불어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 당시에 대간첩작전이 빈번히 전개되던 때라 이 해역은 전방해역 못지않게 고충이 심했다. 그러나 본인은 이 해역을 책임지게 된 데 대하여 점차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해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국력의 팽창기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완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상은 물론이요 멀리 동남아까지 해양력을 장악하던 곳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자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지원군을 편성하여 이 해역으로 원군을 출정시켰는데 백강(백마강)에 도착한 전선의 수만 해도 천 여 척이 넘었다하지만 이 해역을 지나치지 않고 백강으로 나갈 수 있었겠는가?
고려 태조 왕건이 창업하는 과정에서 수군으로 하여금 목포 앞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성을 함락시킴으로서 후백제를 멸하고 한반도를 재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 이 해역을 사수하지 못했더라면 그때 이미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보더라도 이 해역이야말로 내가 신명을 바쳐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스스로 불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본인이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개월 가까이 업무파악을 위해 예하부대와 인근 작전 관련부대를 방문하면서 바쁘게 지내던 3월말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이 바로 “중국 어뢰정사건”이었다.
Ⅲ. 작전의 전개
1. 초기 배치사항
1985년 3월 22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호남제분에 계시는 한봉규(해사 7기, 예비역 해군 준장) 선배님께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저녁 약속을 하시기에 참모들과 같이 불고기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선배님께서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차장으로 계실 때 본인은 작전계획과장으로 선배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밤 10시쯤 사령부로 돌아왔다.
사령관 공관에서 인터폰으로 상황실에 특이한 상황이 없음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곧바로 전화 벨 소리가 나 본인은 서울서 걸려온 전화를 잠결에 받았다. 해군본부 상황실장인 김성룔 대령(해사 18기, 예비역 해군 준장)이었다.
전화 내용은 중국 신화사통신 홍콩 특파원이 주 홍콩 한국 총영사관에 우리 정부의 구조 협조요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해군의 어뢰정 1척이 승조원 18명을 태우고 靑島를 출항하여 인근 해역에서 훈련 중 지휘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수색중인데 조난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중국 당국에서 수색작전을 펴고 있으나 현재까지 발견하지 못했으며, 아마도 한국근해로 표류해 간 듯하니 구조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외무부로부터 이를 전달받아 전파하는 것이니 경비에 참조하라는 것이었다.
전화기를 놓자마자 인터폰이 울렸다. 상황실에서 작전참모가 같은 내용을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보고하였다. 시계를 쳐다보니 22일 2230시였다.
예하부대에 타전하여 발견 시에 보고토록 지시하고 돌아눕는데 인터폰이 또 울렸다. 우리어선 한 척이 그 어뢰정을 예인하여 하왕등도 앞 50m 해상에 투묘해 뒀음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은 직감으로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싶어 서둘러 상황실로 달려갔다. 상황실에서는 작전참모와 상황실장이 해경과 정보교환을 하고 이 상황을 인근 관련기관과 상급부대로 전파하느라 몹시 바빴다.
본인은 우선 사태가 복잡해지리라는 판단으로 안기부와 보안부대에 연락하여 협조를 구하고 두 가지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첫째는 예하 세력뿐만 아니라 본인이 관할하는 해역을 통과중인 모든 함정을 하왕등도로 집결시키고 다음으로 정보획득을 위해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요원을 찾아 군산 또는 목포에서 대기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본인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 두 가지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칫 해상에서 중국과의 무력충돌이 벌어질 뻔했다.
그 시각에 본인의 예하에는 흑산도, 추자도, 거문도에 배치된 고속정 각 2개 편대(1개 고속정 편대는 고속정 2-3척으로 편성되었음) 그리고 사령부에 1개 편대 총 7개 편대가 동원 가능했다. 그러나 거문도와 추자도는 위치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간적으로 부적절하였고, 사령부 직속 편대는 통역을 대동한 선무팀을 현지로 보낼 생각이어서 부득이 경비중인 흑산도 편대를 급히 기지로 복귀시켜 유류 적재 후 현지로 급속히 출동토록 조치했다. 물론 거문도와 추자도 편대의 후속 집결조치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시점에 진해를 출항하여 서해로 출동 중이던 초계전투함(PCC 수원함) 1척과 유도탄 고속함(PGM-61) 1척이 우리 해역을 통과 중이었기에 이 두 척의 전투함을 본인의 재량권으로 긴급히 투입했다.
초기 정보만으로는 집결 세력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전날 초계 중이던 우리 해군 S-2 초계기로부터 훈련 중인 중국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도 있었고 홍콩 총영사의 구조요청에서도 함정이 훈련 중에 이탈했다는 내용이 마음에 걸려 가용한 함정 전 세력을 집결시키게 되었는데, 결국 몇 시간 뒤에 보니 본인의 판단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2. 중국 함정의 출현
초기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군산 해경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어선 제6어성호가 육성으로 하왕등도 초소 순경에게 상황을 보고해 왔는데, 중국 어뢰정에는 현재 갑판에 2명이 죽어 있고 2명이 무장을 하고 있으며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다는 것이 보고의 전부였다.
제6어성호는 어선 신고망인 RF-201 통신기가 고장나 있었다. 그 때문에 섬에 도착 전까지는 어뢰정에 대한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육성 전파내용을 위도지서-부안 경찰서를 경유하여 다시 해경으로 중계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본인은 마음이 다소 조급해졌다. 선상 반란인 것만은 분명한데추가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갑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부탁한 통역요원을 군산에서는 못 찾고 마침 목포에서 협조하겠다는 사람을 찾아냈다.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는 화교인데 중국어 통역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靑島 출신이었다. 이들이 사령부에 도착한 시간이 23일 0405시였다. 대기시켜 두었던 PKM-69호를 즉시 출동시켰다.
출항 전에 선무반을 편성했다. 총책임자로 제305전비전대장 그 아래 정보참모, 보안부대 장교 1명, 상사 1명, 그리고 통역으로 화교 임영정 씨가 합류했다. 전비전대장에게 PRC-77 휴대용 통신기 2대를 지참시켜 현장과 함정, 현장과 육상 간에 사용토록 세밀히 지시하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이 극도로 흥분해 있음을 감안하여 충돌 예방에 각별히 유념하도록 당부했다. 사태가 악화되어 우리 측에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못한 사령관이 책임질 것이다.
날이 밝아오자 본인이 우려했던 대로 중국의 북해함대 함정들이 인명구조를 핑계로 사전 양해도 없이 대거 우리의 영해를 침범해 어뢰정이 정박해 있는 하왕등도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세력도 중국 해군으로서는 정예라 할 수 있는 3,900톤 LUDA급 DDG 109함을 비롯하여 예인함-723함(1.500톤급), PCS-705함(1,000톤급) 그리고 유조함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동함대였으며 예인함에는 우리말을 구사하는 통역이 동승해 있었다. 이들이 우리 영해로 진입한 시간이 0550-0820시 사이로서 본인이 집결시킨 우리 함대와 거의 동시에 하왕등도 근해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확성기를 통하여 우리말로 “인도적 차원의 인명구조”를 내세우고 무력충돌의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마스트 꼭대기에 국제 인명구조 신호인 “O(Oscar)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 영해 내에서 단정을 내리려 하고,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행동을 취함으로 본인은 우리 함정으로 하여금 그들의 진로를 차단케 하고 우리 공군의 전술기를 요청하면서 즉시 퇴거할 것을 단호히 요청하였다.
현장에 집결한 우리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고속정 2개 편대, 1 PCC, 1 PGM이 현장에 위치했고, 2척의 구축함과 3개 고속정 편대가 추가로 집결 중이었으며, 날이 밝자 우리 S-2기 및 공군의 전술기들이 엄호하기 시작했다.
남의 나라 영해를 무단으로 침입하여 횡포를 부리고 국제법상 상식을 벗어난 이들의 행위로 봐서는 무력으로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상부로부터 지시 없이는 절대로 발포하지 말도록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일선 사령관인 본인의 판단으로도 이들의 영해 침범은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으로 무력충돌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본인은 우선 문제를 확대하지 않을 것, 그리고 어뢰정과 그 승무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외교 교섭 시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그러나 0900시를 전후하여 DDG-109함이 우리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하왕등도 1,000야드까지 접근해 옴에 따라, 본인은 평문으로 긴급히 상부에 보고하였다. “우리 지시에 의하지 않고 강제로 어뢰정에 접근 시는 무력으로 저지하겠음” 평문이기 때문에 상대방도 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고속정이 그들의 진로를 막았다. 중국 함대는 그 이상 저돌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얼마간 양국 함대가 대치해 있으면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중국 측 확성기에서 우리말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영해 밖으로 철수하겠다는 것과 조난당한 어뢰정은 통신사 외 1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승조원 19명중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중국 함정 3척은 1985년 3월 23일 일출을 전후하여 우리 영해를 불법으로 진입하여 우리 함정과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대치했다가, 1058시 대열을 종렬진으로 형성해 우리가 요구한 대로 하왕등도에서 진방위 272도 16.3해리 위치로 나간 다음 1115시에 투묘했다. 우리어선 제6어성호가 흑산도 근해에서 중국 어뢰정을 만나 예인한 지 만 24시간이 지나 일단 군사적인 상황은 충돌 없이 종료되었다.
3. 선무활동
PKM-69호편으로 출동한 제305전비전대장을 중심으로 한 선무반은 3월 23일 0740시에 현장에 도착하여 0800시 해경정편으로 문제의 제6어성호에 승선했다. 상급자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통신사 등 반란 주모자들은 경계심과 불안감으로 접근해 가는 우리 선무반 요원들에게 불신과 기대감이 엇갈린 매우 긴장된 상태에 있었고, 잔여 승조원들은 중국 함대가 접근해 오고 있음을 보고는 어뢰정 안에서 그들의 권익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선무반원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AK 소총으로 무장한 반란자들이 그들을 송환하기 위해 함대가 코앞에 접근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동한 통역이 靑島 사람이어서 의사소통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 통신사 일행은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우리 측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주한 자유중국대사와의 면접을 요구했다.
비무장으로 반란자들과 마주하고 있는 선무반원들은 불상사 없이 이들을 설득하여 무장을 해제시키고 잔류인원과 함께 어뢰정을 떠나 육지에서 헬기가 도착 시까지 대기하도록 사령부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었으나, 어뢰정 승무원들이 순순히 응해주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독촉이 성화같았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살기가 등등했다. 3시간의 설득 끝에 승무원 전원을 하왕등도로 이동시켰는데 그때까지도 반란 주모자들은 무장을 해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함대가 우리 영해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자 반란 주모자들은 안도감을 가지고 AK 소총 2정과 실탄 120발을 우리 측에 내놓았다. 나머지 승조원들도 우리 지시에 순순히 응하여 16시경 UH-1H 헬기 2대로 주모자를 포함한 승무원 4명과 우리 선무반이 군산으로 이동하고, 어뢰정과 잔여인원은 해경-258호정의 예인으로, 어선 어성호는 자력으로 군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때부터 세계의 눈과 귀가 군산으로 쏠리고 있었다.
23일 오후부터는 바다가 점차 험해지기 시작했다. 전승조원을 군산으로 이동시킨 후에 중국 어뢰정은 외딴 섬에 투묘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파도에 밀려 해안에 부딪치거나 암초에 좌초라도 하는 날이면 사건이 더욱 복잡하게 될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어뢰정 사건은 이미 안기부의 소관으로 넘어가 군령 측에서는 누구 하나 현지 사령관의 건의를 받아주려 하지 않고 안기부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더욱 예인하기 어려워질 것 같아 안기부 파견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본부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즉각 해경에게 예인 지시를 내리고 아무 피해 없이 어뢰정을 군산으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군사적 조치사항은 끝났다. 본인은 국지분쟁없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양국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데 일조했음을 우리 대원들과 더불어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Ⅳ. 외교교섭
중국 어뢰정 사건으로 인한 외교교섭의 진척사항은 직접적으로 본인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교섭이 종결되어야만 해상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양국 함대의 긴장이 해소될 것이므로 현지 사령관인 본인의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중국은 미수교국인 관계로 이 사건은 처음부터 비공개로 교섭이 진행되었다. 다만 여기서 본인이 논할 수 있는 부분은 언론에서 취재된 제한적인 내용이지만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985년 3월 24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신문지상에 보도된 것은 3월 25일 조간이었다.
동아일보는 워싱턴 특파원 보도로 “한국과 중국은 지난 21일 발생한 중국 어뢰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현지 홍콩에서 직접 접촉을 하고 있다”고 1면 톱으로 실었다. 미국 국무부의 브라이언 칼슨 대변인은 24일 한국과 중국의 직접 접촉 사실을 밝히면서 그 장소는 홍콩인 것 같다고 발표했다.
뉴욕 타임스는 북경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하여 홍콩 주재 한국 외교관들과 신화 통신사 홍콩 책임자로 중국을 대표하는 許家屯 간의 협상이 홍콩에서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칼슨 대변인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측에 한국 측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중재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에서 이 사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가능한 한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이 사건이 1983년 5월의 민항기 사건보다 중국의 국내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그 이유는 공산당 지도층과 군부간의 긴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함대가 우리 영해를 이탈하고 있을 즈음, 한국 정부는 노신영 국무총리 주재로 외무, 내무, 국방 및 문공부장관이 참석한 관계관 회의를 23일 오전 1100시부터 1230시까지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관계 장관 회의 후 이원홍 문공부장관은 “정부는 중국 선박의 영해 침범에 대한 중국측의 공식 회보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 회보를 접수하는 대로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하면서 부상자를 포함한 생존자와 여섯 구의 사체 처리는 “인도적인 고려, 해난구조에 대한 일반관행에 따라 제반 구호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외무부 김진수 대변인은 23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23일 오전 중국 군함 수척이 훈련 중 실종된 어뢰정 1척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한국 영해를 침범한 데 대해 정부는 중국 측에 대해 엄중 항의하고, 중국은 한국 영해를 침범한 데 대해 사죄하는 한편 관계자를 문책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정부의 항의는 홍콩 소재 중국 기관에 전달될 것이며 미국과 일본에 대해 이를 중국에 전달토록 요청했다고 말했다. 23일 오후에 정부는 관계 장관 회의를 다시 열고 국제법 및 국제관례에 따른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한편, 중국 정부는 23일 오전에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 영해로 들어간 중국 어뢰정과 승무원을 가능한 빨리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실종된 이 어뢰정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중국해군 함정 3척이 “부주의”로 한국 영해를 침범했음을 시인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서방 외교관들은 이 성명을 사실상의 사과로 해석하고 있었으며, 1983년 5월 중국 여객기 납치사건을 상기하면서 중국 측에 한국과 직접 상대하도록 권고하는 입장이었다.
26일 한국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중국 측으로부터 영해 침범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입장은 불변이라면서 중국 측이 사과하는 방법은 국제 관례상 첫째, 상대국에 정부 관계자를 보내는 진사 형식, 둘째, 보도를 통한 성명 형식, 셋째, 각서 전달 등이 있겠으나,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이기 때문에 “성명” 형식이 취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또한 어뢰정과 승무원의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법상 긴급 피난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긴급 피난에 따른 국제관례대로 처리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이해국인 자유중국 정부는 25일 金鍾坤 臺北주재 한국대사를 외교부로 초치, 중국 어뢰정 문제를 두고 한국 정부가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그리고 생존 승무원들의 희망을 존중하여 이들을 다루어 주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와 같이 여러 이해당사국들이 각기 나름대로 성명전을 열고 있는 가운데 26일 오후 이원홍 문공부장관은 중국 어뢰정 정부처리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 지난 23일 새벽 0650시 서해상에 표류했던 중국해군 북해함대 소속 어뢰정을 수색 중이던 중국 군함 3척이 한국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발견, 오전 0938시 한국 해,공군 및 해경 당국이 출동 퇴거시켰으며 정부는 영해 침범 사실을 중시 이날 홍콩 총영사관을 통해 중국 당국에 엄중 항의하고 사과와 책임자 문책 및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2) 영해 침범사건과 관련,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중국 군함들이 실종 선박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한국 영해에 들어갔음을 시인하고 이 사실을 안 즉시 퇴거했다고 해명했으며, 어뢰정과 모든 승무원이 조속히 송환되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3) 26일 중국 정부 측은 주 홍콩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각서로 영해 침범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이러한 영해 침범사건의 재발 방지에 노력하며 책임자에 대하여는 조사 후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4) 정부는 이날 중국 당국의 사과와 해명을 수락함으로서 영해 침범사건을 일단락 짓기로 했다.
이 장관은 이번 사건이 근본적으로 긴급 피난 및 해난구조의 성격과 아울러 공해상에서 일어난 중국 군함 내부의 난동 살인사건이라는 판단 아래 유사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국제법 및 관행을 존중키로 했다며, 부상 승무원의 응급치료를 끝내고 전승무원과 사체 그리고 선체를 3월 27일 오후 쌍방 영해간의 중간 지점에서 중국 당국에 인도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날은 해상의 파고가 높아 그 다음날인 28일중에 인도키로 변경되었다. 이 장관은 이 발표문을 내면서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어뢰정과 승무원을 조기 송환키로 한 데 대해 감사를 표명해왔다”고 부연 설명했다.
중국으로부터 접수한 각서의 형식은 보통 “Memorandum"이라는 제목으로 쓰이는 외교문서였다. 이 문서는 주 홍콩 총영사 앞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명을 받은(Authorized by)" 신화사 통신 부사장 李儲文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지사장인 許家屯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全人大에 참석차 북경에 체류 중이었다.
외교 용어에 공식적인 사과는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Deplore가 가장 약한 의미이고, 그 위에 Regret, 가장 심각한 표현이 Apology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중국 측은 Apology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Apology에도 세 단계가 있는데, 첫째, 사건의 발생 및 결과에 대한 사과, 둘째, 관련자 문책, 셋째,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것이다. 중국 측의 정중한 사과는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대체로 “중국은 한국 정부에 빚을 진 입장”이라는 견해를 가졌고,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중간 직접 접촉을 기대하였으며, 일본 역시 이번 교섭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Ⅴ. 국제법상 검증
해양법에 관한 1958년 제네바협약 중 공해에 관한 협약 제12조에서는 모든 선박이 공해 상에서 위험에 처하거나 원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조난자에 대하여 즉각적인 구조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유엔 해양법협약 제98조 참조) 따라서 조난 선박이 군함이거나 구조할 선박이 군함일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그 때문에 조난 선박인 중국 어뢰정의 조난 상태가 태풍이나 기타 일반적인 해난 등 자연적 불가항력의 원인에 인한 것이 아니고 선상 반란이라는 인위적인 원인에 의한 조난이라는 점이 구조 선박들의 구조 의무를 면제시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어선 제6어성호 어부들은 이러한 국제법의 어려운 규정과는 관계없이 통상 해상생활의 관습에 따라 조난 선박을 구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야말로 선진화된 문명국가의 위상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남이 패망한 후 오갈 데 없는 난민들이 바다 위를 떠돌아 헤매는 소위 Boat People이 세계인의 동정심을 얻고 있을 때 제7함대 소속 군함 1척이 슈빅만을 출항하여 전운이 감도는 걸프 만으로 작전 임무를 부여받고 항진하고 있었다. 이 군함은 항해 도중 한 척의 난민선을 만나 식수와 의약품을 전달하고 그들 본연의 임무를 수행키 위해 걸프 만으로 떠났다.
공교롭게도 이 난민선은 그 이후 해상에서 더 이상 구조 받지 못하고 여러 날 후에 간신히 마닐라 항에 입항하여 그들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늙은 사람 순위로 살해하여 인육으로 연명했음이 밝혀졌다. 세계의 여론이 난민 구조에 소홀히 했던 미 7함대 함정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이리하여 미국 해군에서는 그 함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사실이 있었다.
이에 비하면 제6어성호 선원들은 문명인이 할 수 있는 최선책을 취했다고 보아진다. 물론 이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 중국 어뢰정의 구조를 실시하였고 중국이 인접된 해양에서 한국의 조난 선박을 빈번히 구조한 전례 등을 감안하여 해난 구조비용의 청구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국 함대의 우리 영해 침범에 관하여 살펴보자.
한국의 영해 및 접속수역법 제5조 1항에 의하면 외국 선박은 대한민국의 평화, 공공질서 또는 안전보장을 해하지 아니하는 한 대한민국의 영해를 무해통항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의 군함이 영해를 통항하고자 할 때에는 관계당국에 사전 통고하여야 하는 바, 동법 시행령 제4조에 의하면 통항 3일 전까지(공휴일은 제외함.) 외무부장관에게 당해 선박의 선명, 종류 및 번호, 통항목적, 통항항로 및 일정을 통고해야 한다. 따라서 중국 군함의 한국 영해 침범은 국제법상 대한민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국의 영해 및 접속수역법을 위반한 위법행위로서 중국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들이 홍콩의 신화 통신사를 경유하여 우리 정부에 조난 선박의 탐색을 협조하여 온 것은 주권국인 우리 정부의 관할범위내에서 한국 측의 구조행위를 요청한 것이며, 중국 측의 함정이 우리 영해내로 무단 진입하겠다는 해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측이 국제법 원칙에 따라 이들의 진입 초기부터 해, 공군 및 해경정을 동원하여 영해로부터 이들의 퇴거를 강력히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시간 이상이나 이 요구를 묵살하고 투묘중인 어뢰정을 강제로 탈취하겠다는 명백한 행동을 보여준 것은 북경 외교부가 성명서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주의”로 한국 영해로 진입했다가 스스로 철수했다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제3해역사령관이 함정 세력을 집결시키는 데 소홀하여 시기를 놓쳤거나 인근에 우리 세력이 부족했다면 중국 함대는 분명히 어뢰정을 강제로 탈취했을 것이고 이를 둘러싼 국지적 무력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국제법상 중국 당국의 배상책임은 확실해졌다. 일반적으로 국가 책임 해제의 방법은 재산적 손해에 관해서는 금전배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호혜원칙을 들어 구조비용의 청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국가적 권위와 명예손상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는 소위 정신적 손해인 바, 국가의 정신적 손해 구제방법으로는 교섭진행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죄 또는 진사로서 중국은 사죄 표명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 내용도 사과 표시의 중요한 요건을 모두 갖춘 본격적인 각서의 형태였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발생한 양국간의 외교교섭에서 우리 측이 최대한의 실리를 차지했다고 보아진다.
끝으로, 이 사건이 중국 군함의 영해 침범으로 인하여 발생한 국제협약과 관계되는 일로서 이는 1968년 1월 23일 동해에서 발생한 미국 해군의 Pueblo호 사건과 대조되는 면이 없지 않다. 미 해군의 정보전자 수집함인 Pueblo호는 주기적으로 북한 연안을 따라 최신의 장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여러 번 경고성 방송을 내보냈고, 미 해군은 분쟁에 말리지 않도록 Pueblo호 함장에게 북한 연안으로부터 13해리 이내에 접근치 말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13해리의 거리는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영해 12해리보다 1해리나 공해 상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획적으로 해, 공군을 동원하여 16해리나 떨어져 있는 Pueblo호를 강제로 나포한 것이다.
북한은 1955년 3월부터 12해리 영해를 선포 실시해 온 반면, 미국은 해양강국으로서 3해리 영해를 주장하고 있어서 북한과 미국 간에는 각각 상반된 견해를 유지했다. 그러나 Pueblo호 나포 이후 미국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한번도 투사해 보지도 못하고 승조원 송환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영해 침범을 시인하는 수모를 겪었다. 북한이 그들의 연안에서 Pueblo호를 나포할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우리와 같은 12해리 영해를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권 보호를 위해 군함의 무해통항마저 사전 허가를 요구할 만큼 폐쇄적인 저들이 스스로 남의 영해를 무단 침입한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북한이 Pueblo호를 납치하듯이 명백히 영해를 침입한 중국 함정을 나포는 못할지라도 포격은 할 수 있지 않았냐는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Pueblo호를 나포한 것은 전국가가 동원된 지극히 계획적인 도발행위로서 국가의 안위에 대한 저들의 판단기준에서 국제법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야만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중국 함정의 우리 영해 진입은 지극히 우발적인 사고로서 사전에 예측이 불가하였다. 쌍방이 무력충돌을 회피하고자 노력한 결과로 이 사건을 국가간의 교섭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양식 있는 기준행동을 현지 사령관이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로 우리의 실익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Ⅵ. 결언
1985년 3월 28일 1110시. 약 일주일간 국내외 초점을 모았던 중국 어뢰정이 난동자 2명을 포함한 승무원 13명과 시체 6구를 싣고 중국 측에 인도되어 떠났다. 중국 측의 인수대표는 주홍희 북해함대 참모장이, 우리 측은 해경 258정장이 서명을 했다. 이로서 중국 어뢰정사건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합참 작전국 차장이 조사차 내려왔다. 그는 해역사령부의 작전지휘에 대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해군이 이번 작전에서 대간첩 작전교리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 함정이 경계선 돌파시 교리대로 발포하지 않았음을 문제 삼으려고 했다. 남의 나라 군함이 자기 작전해역에서 도발행위를 자행하는 데 본인에게 분한 마음이 왜 없겠는가?
지상군의 판단에서 보면 본인이 지휘한 초기 조치가 너무 소극적이고 대범성을 결여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군사작전이 국가간의 외교의 한 수단이라는 교과서적인 사실에서 이번 해군의 작전이 우리의 외교적 입지를 크게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모할 것이다. 여기에 지상군과 해군의 사고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3월 30일은 토요일이었다. 선무반의 통역을 담당했던 임영정 씨에 대해 사령관이 감사장을 수여했다. 임씨는 서울에서 중국 음식점을 하다가 3년 전에 한국인 처의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 역시 음식점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TV 보도를 통해 반란 주동자 2명이 중국으로 송환해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무장 해제토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애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그들을 사지로 몰고 간 것이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아 며칠간 잠을 설쳤다고 했다. 함께 갔던 선무장교들의 보고에 의하면 어뢰정은 70년대 초에 건조한 선박인데도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하극상 사건으로 경황이 없었음에도 맨 마지막으로 하함하는 수병이 군함기를 거두어 간직하는 것을 보고는 느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후 1987년에 본인이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장으로 재직 시에 권병현 당시 미얀마대사를 인천으로 안내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어뢰정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권대사님이 외무부 실무담당자였는데,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북경간 핫라인을 가동시킬 만큼 미국의 중재 역할이 컸다고 한다.
본인은 이 글을 끝맺으면서 만약 누가 이 글을, 더욱이나 후배들이 읽어준다면, 군함의 배타적 권한이나 지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그 함장이나 사령관이 일차적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여 분쟁을 유발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첫댓글 중국과의 대결 어쩌구 하면 꼭 세계대전 같은 시나리오를 들이미는 사람들에게 질려버린 탓에... 사실 이정도 사건에 대한 연구가 더 중요하지 않을런지...
꽤나 중요하죠. 특히 국제법은 과거사례자체가 판례와 비슷하게 적용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