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아가(雅歌) 2:1-7
‘雅歌’는 ‘노래 중에 노래’란 뜻으로 아름다운 서정시입니다. 솔로몬의 삼천의 잠언과 일천 다섯의 노래 중에(왕상4:32) 엄선하여 뽑은 사랑의 노래를 ‘雅歌’라고 합니다. 일국의 왕과 향촌 처녀와의 지순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주제를 노랫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으로만 생각한다면 아가서는 뛰어난 연애 소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토록 살아있는 것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이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신랑되신 예수님과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와의 사랑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성도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왕중에 왕인 솔로몬과 한 포도원에서 일하는 포도원지기의 딸인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은 누가 보아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얼굴이 햇볕에 그슬려 마치 게달의 장막과 같이 거무스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술람미의 미모나 신분이나 배경을 본 것이 아니라 전인격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는 고귀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약 조건과 자격을 따졌더라면 죄와 허물로 가득찬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술람미는 부모나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생존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오라비들이 돌보고 있었으나 오라비들은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내쫓아 포도원지기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처녀로서 얼굴이나 다듬고 피부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햇볕에 쬐어서 그무스럼하게 타고, 목자들의 장막에서 염소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지기에 불과한 술람미를 솔로몬 왕은 무어라고 불렀습니까? “내 사랑아”(1:9; 15; 2: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식으로 신부가 되지 않은 연인을 신랑 될 사람이 부르는 애칭입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1:9)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술람미에게서 다른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한 것입니다.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강건하고 생명력 넘치는 준마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2:10; 13), 라고 불렀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어여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였습니다. 술람미의 어여쁨이 어디에서 발견되었습니까? 포도원에서 목자들과 함께 양떼를 먹이고 있는 술람미를 어여쁘다고 했습니다. 술람미는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1:8). 처녀로서 집안에 앉아 얼굴이나 꾸미고 피부나 관리하는 술람미가 아니라 목자들과 함께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술람미를 어여쁘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솔로몬왕과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도인 나와 여러분의 사랑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도원과 목장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며 봉사하는 성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 사랑아’, 내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향하여 ‘내 사랑아’, ‘내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주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내 사랑아! 내 어여쁜 자야! 라고 부르시는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이어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15)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의 온유하고 순결한 성품에 대한 칭찬입니다. 술람미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요(마6:22), 마음의 창문입니다(잠4:20). 병원에 가면 의사가 환자의 건강상태를 눈을 보고 진단합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진단할 때도 의사는 사람의 눈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판단합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도 술람미의 눈을 보고 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습니다. 술람미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한 것은 비둘기는 순결, 온유, 평화를 뜻합니다. 술람미의 눈은 신랑을 알아보는 눈이요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성도의 눈은 비둘기 같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의 눈은 사악한 눈이요 음란한 눈이요 시기 질투의 눈이요 정욕의 눈입니다. 명품에 눈이 밝은 사람이 있어요. 겉모양만 보고 얼굴이 잘 생긴 것을 봅니다. 돈에 눈이 밝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햇볕에 그을린 검은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거짓 없고 순결하고 온유함을 보았습니다.
성도의 눈은 비둘기 같이 보여 온유하며 겸손하고 사랑과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술람미의 눈은 포도원을 살피는 눈이였으며, 양들을 지키는 눈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가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눈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다른 사람의 흠이나 찾고 불평이나 하고 말썽이나 부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술람미를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2:2)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백합화’는 꽃잎이 깨끗하고 맑은 꽃이라 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아름답게 피어난 백합화는 너무나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술람미는 게달의 장막과 같다라고 할 정도로 햇볕에 쬐여 검었지만 솔로몬은 깨끗하고 순결한 백합화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생활 잘하는 성도를 백합화 같다고 하십니다. 어린이 찬송가에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라는 찬송을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백합화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백합화처럼 깨끗하고 순결하며 그윽한 향기를 풍겨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합화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하였습니다. 순결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겨내는 아름다운 백합화가 가시나무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화원이 아니라 사방으로 가시가 둘러있는 가운데 백합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가시에 찔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시나무 가운데’란 성도의 수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가시밭’이란 미움과 시기, 질투, 고난과 질병과 슬픔이 많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마음 편안할 날 없는 불안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탄 마귀들이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불신과 불의로 충만한 세상에 성도는 백합화처럼 많은 수난을 받고 있습니다. 불신 가족들 가운데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는 외로운 성도가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찌르는 가시가 충만합니다. 기독교의 특색이 가시밭과 같은 세상에서 성장하고 피고 찢기고 상하고 터지는 백합화입니다.
백합화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윽한 향기를 풍겨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줍니다. 바람이 불면 향기는 멀리까지 퍼집니다. 그런데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바람이 불때마다 가시나무에 찔려 꽃잎은 상처를 입지만 향기는 더욱 진하고 멀리까지 퍼지게 됩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복음송이 있습니다. 동남풍이 불어도 서북풍이 불어도 가시밭에 백합화는 가시에 찢겨집니다. 그러나 예수 향기는 더욱 진하게 더욱 멀리 풍겨낸다는 고백이 담긴 노래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예수 향기’는 더욱 날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성도를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고 하십니다.
원시부족들 가운데 재미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부족들이 모여 축제를 하는 날 처녀들이 회초리로 총각들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총각들은 맨살에 회초리로 맞은 자리에 피가 흘러도 아프다기 보다는 웃으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총각이 처녀들에게 맞은 흉터를 자랑으로 삼는 것입니다. 맞은 흉터가 많은 총각이 처녀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족장이 되는 것도 적들과 싸워 창에 찔리고 칼날의 흉터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얼굴이나 가슴, 등에 큰 흉터를 마치 훈장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이 수난속에 피어난 종교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기독교의 상이요 역사요 특색이요 성질입니다. 교회는 가시밭과 같은 세상에 피고 찢기고 상하고 터져 향기를 품어내는 고난의 백합화인 것입니다. 성도의 생애는 가시에 찔리고 상처로 곪아 터진 고난의 삶입니다. 고난 받은 성도는 더욱 아름답고 그 향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바울의 생애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였고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가 고난과 순교자로서의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였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불신과 핍박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백합화입니다. 지금도 남편이 찌르는 가시로 괴롭힘을 받는 성도가 있고, 부모가 찌르는 가시가 되고, 자녀들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친구나 이웃이 가시로 괴롭히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친히 술람미와 같은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왕궁에서 궁녀들의 사랑속에 지내는 왕입니다. 그러나 술람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친히 골짜기의 백합화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고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인들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이같은 사랑을 받고 감격하여 노래하였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2:6)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가시나무에 찔리는 아픔보다 왕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 왕에게 가시로부터 찔리는 고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빠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은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사랑과 위로를 감사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고난의 아픔보다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따뜻한 사랑받는 성도의 노래인 것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이 이런저런 고난을 당하지만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더욱 감사하는 성도의 노래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찌르는 가시로 인하여 찢겨지지만 향기를 더욱 풍겨내듯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고난을 당하지만 오히려 예수 향기 날리는 성도들이 되셔서, 왼손으로 고이고 오른팔로 안아 주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