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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편 군대
1314년의 잉글랜드군
에드워드 2세의 기병부대는 봉건적인 부대와 봉급을 받고 복무하는 부대, 잘 무장된 왕실 기사단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보병부대는 창병이거나 궁수였지만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다. 에드워드 시대의 전형적인 군대는 3개 전투단위(사단)로 조직되어 있었다. 군부대신은 군대의 조직과 행동의 총책임자이다. 그는 관례적으로 전위부대를 지휘했다. 배녹번에서 군부대신은 헤리퍼드의 백작이었다. 비록 그의 명예는 에드워드 2세가 글로스터를 전위부대의 공동 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훼손되었지만. 본대는 관례적으로, 국왕이 참전한 경우에는 직접 지휘를 맡았다. 따라서 에드워드 2세는 중앙 부대에 있었으며 궁내장관인 에드먼드 몰리 경이 왕실 기사단을 이끌고 함께 있었을 것이다. 배녹번에서 후방 부대의 지휘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잉글랜드군은 스털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군했고, 전위부대는 적절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첫날 전투에서 후퇴한 이후에는 질서 대신 혼란이 가득했다. 바부르는 잉글랜드 왕이 병사들을 10개 소부대로 나누고 각각 능력이 있는 자에게 지휘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에드워드가 대략 10,000 명의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이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잉글랜드 기병
봉건제도 하에서 국왕은 영주들에게 40일간 복무할 기병들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에드워드 2세 때에는 영주들이 더 오랫동안 근무하지만 더 적은 병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310년 펨브룩 백작은 베릭에서 내려온 소집령을 받았다. 비록 직접 참석하는 것은 거절했지만 그는 자신이 국왕에게 5명의 기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는 1명의 기사와 8명의 무장한 기병과 10마리의 갑옷을 입힌 말을 제공하는 것으로 의무를 이행했다. 이것을 통해 말과 중기병의 장비는 기사 한 명의 반값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10년 베릭의 소집은 국왕의 반대편에 선 귀족들이 최소한의, 질 낮은 기병만을 제공했기 때문에, 단지 37명의 기사와 472명의 중기병을 모으는데 그쳤다. 이와 비슷하게, 1314년에도 랭커스터의 백작과 그의 파벌은 에드워드 2세의 소집령을 무시했고, 최소한의 할당량만을 베릭으로 보냈다.
국왕 역시 직접 재산이 20 플로렌 이상인 자들을 기병으로 양성했다. 이 비용은 ‘기사 비용’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직접 기사로 복무하든지 대리인을 보내야 했다. 이 기병들은 봉급을 받고 근무했다. 따라서 잉글랜드군은 이론적으로는 적어도 5천명 이상의 기사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사 작위를 얻기를 열망했던 것은 아니었고, 국왕은 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계속해서 압박을 가해야 했다. 이에 관련해 귀중한 사료가 있다. 에드워드 1세 시대의 말 목록이다. 이것은 국왕이 봉급을 지불하는 기병들의 이름과 말의 종류와 비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것에 따라서 말 주인들은 말이 국왕을 위해 일하는 도중 살해되었을 경우 변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폴커크 전투 당시 에드워드 1세의 봉급을 받고 일하는 기병과 왕실 기사단은 1,300명이었다. 봉건적인 징집병은 500명에서 1,000명 사이였다. 따라서 국왕의 기병 전력은 최대 2,300명까지 추정할 수 있다. 학식이 풍부한 맘스버리의 사제는 Vita Edwardi Secundi에서 배녹번 전투 당시 잉글랜드 기병은 2천 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의 가장 냉정한 기록조차도 숫자의 문제에 관한한 과장이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강력한 부대의 기사와 중기병은 모두 중무장한 기병대였고, 말의 방어가 중요해짐에 따라 말에도 다수 갑옷을 입혔다. 배녹번 전투는 폴커크 전투만큼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다. 잉글랜드군의 숫자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자료에 따르면 국왕은 그의 군대에서 복무하기 위해 참전한 890명의 기병, 즉 기사와 종자와 중기병들의 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고 나와 있다. 이것을 통해서 베릭에 소집되었던 기병부대의 최소 숫자를 추정할 수가 있다. 이 숫자는 또한 에드워드 1세가 폴커크에 배치했던 군대와 비슷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잉글랜드 보병
스코틀랜드 원정을 위해 남부 잉글랜드의 징집 보병들은 소집되지 않았다. 북구 잉글랜드와 중부 잉글랜드, 웨일스의 보병들만이 소집되었을 뿐이었다. 1314년 3월 24일, 에드워드 2세는 21,540명의 보병을 소집하여 6월 10일까지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실로 거대한 군세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원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증거로 보건대 그의 병력 소집 시스템은 기껏해야 소집한 병력의 절반만을 제공했을 것이다. 나머지는 소집 첫 단계에서 도망쳐버린 것 같다. 1314년 3월 9일의 소집 문서에서는 4,500명의 궁수들을 북부의 5개 주에서 소집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 궁수들은 ‘활과 화살, 그리고 다른 사용 가능한 무기’를 소지할 것을 지시받았다. 이 기록을 보면 잘 무장한 궁수들로 구성된 강력한 병력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명령은 이후 더 광범위한 소집령으로 대체되었다. 불행히도 세부적인 사항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소집령은 단순히 보병만을 요구했다. 이것만 보아서는 군대 내의 궁수와 창병의 비율을 파악할 수가 없다. 5월 29일 이후, 에드워드는 급히 그의 지방관들에게 친서를 썼다. ‘.......병사들을 준비시키라고 명령한 기일이 이미 지나갔다.......그대들은 서둘러서 병사들을 다소 무리하는 한이 있어도 보내도록 하라.’ 에드워드의 말투는 그가 보병부대를 모으는데 어려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분명히 마지못해 징집된 질 낮은 신병들이 베릭에 도착했으며,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그들을 결합력 있고 효과적인 전투 병력으로 훈련시킬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궁수
배녹번 전투를 위해 보병들이 소집되었던 지역인 북구, 중부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은 모두 장궁병들의 훌륭한 기량으로 이름 높은 지역이었다. 1314년 3월 9일의 소집령과, 그것을 대치한 5월 27일의 소집령을 비교해보면, 2,000명의 요크셔 궁수들이 특별히 병종을 명기하지 않은 4,000명의 보병으로 대치되었다. 1,000명의 노팅엄셔 궁수들과 더비셔 궁수들 역시 2,000명의 보병으로 대치되었다. 비록 다른 수치들이 이 가설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지만, 궁수와 창병의 비율은 대략 절반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웨일스의 로저 모티머가 3,000명의 웨일스 보병을 모으는 것을 총지휘했다. 연대기 저자인 웨일스의 제럴드는 웨일스인 가운데서도 특성상 차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 웨일스인은 창병이었고, 남부 웨일스인은 장궁병이었다. 따라서 로저 모티머가 모은 3천 명의 보병 중에서 남부에서 소집된 1,000명은 장궁병이었으며 북부에서 소집된 2,000명은 창병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브리스틀 시는 100명의 석궁수(crossbowmen)와 궁수를 조달했다. 이것으로 보아 도시들이 석궁수의 일정비율을 제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석궁수와 장궁병의 비율에 대한 언급은 없다. 크로스보우는 비싸고 손이 많이 가는 무기였기 때문에 부유한 마을에서 소집된 부대만이 크로스보우로 무장했을 것이다. 따라서 전체 부대에서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다. 이 시대에 사용된 크로스보우는 벨트 고리를 이용하여 장전되었다. 비록 발사속도는 장궁보다 낮았지만 결코 성가시기만 하고 느린 무기는 아니었다. 기계를 이용하여 발사하는 크로스보우는 14세기 후반부터 사용된다.
외국인 부대와 용병
존 바부르는 프랑스 기사들과 가스코뉴, 네덜란드 지방, 브르타뉴, 그리고 푸아투 출신의 병사, 아퀴탱, 바욘 출신의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서 복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배녹번에서 에드워드 2세를 위해 싸운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독일 기사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수도사 바스통은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4명의 독일 기사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비록 급료를 받지 않고 싸웠지만. 외국 병력을 고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비쌌다. 바부르는 실수로 헤노 백작이 배녹번에서 싸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1326년과 1327년에 스코틀랜드 전쟁에 참가했다. 그의 복무에 대한 급료는 놀랍게도 5,5000 플로렌에 달했다. 비록 아무 성과도 없었지만. 바부르가 이러한 외국인 부대를 언급한 것은 그들의 수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이국적인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25명의 아일랜드 지도자들이 1314년에 소집되었으며, 상당수의 앵글로-아일랜드 기사들도 참전했으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는 에드워드 2세와 함께 5월 29일에 노섬벌랜드의 뉴민스터 대수도원에 있었으며 일부 아일랜드 부대가 그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전술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전쟁은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한 기병이 견고한 창병의 대열에 뛰어들었을 때의 무력함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을 보여준다. 1282년의 빌스 전투에서 허밍버러의 월터는 웨일스인들은 잉글랜드 기병에 의해 쓰러졌으며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궁수들이 기병들 사이에 밀집하여 싸웠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비슷하게 1295년에 워릭의 백작은 엄선된 기병과 궁수들을 이끌고 북부 웨일스의 창병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웨일스인들은 창의 밑동을 땅에 단단히 대고 돌격하는 잉글랜드 기병을 향해 겨누어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기병 사이에 석궁수들을 배치했다. 또는 석궁수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일반 궁수였을 수도 있다. 곧 많은 창병들이 화살에 의해 쓰러지자 기병대가 다시 돌격했고, 전투는 대학살로 막을 내렸다.’ 연대기 저자인 니콜라스 트레버는 분명한 서술을 제공한다. ‘기병과 궁수의 조합만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기병 혼자만이 아니라.’ 허밍버러는 이것을 폴커크 전투에서 재현했다. 에드워드 1세의 무질서한 기병대는 스코틀랜드 창병을 향해 돌격했다. ‘그들은 두꺼운 나무와 같이 버티고 있었고, 수많은 창들로 굳게 버텼다.......그러나 아군의 보병들이 화살을 쏘았고, 일부는 주변에 풍부하게 널려있는 돌을 투척했다. 상당수의 적군이 쓰러졌고, 적군 선두 대열은 혼란에 휩싸여 후방으로 몰려들었다. 그러고 나서 아군 기병대가 돌격하여 그들을 궤멸시켰다.’ 에이머 드 발렌스, 로버트 클리포드, 앙리 뷰몽, 험프리 드 보훈, 자일 드 아르장탕은 모두 폴커크 전투의 중심에서 싸웠다. 그러나 거기서 쌓은 경험을 배녹번에서 활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중 최악으로 클리포드와 뷰몽은 기병대를 보병의 지원 없이 화려하게 머레이의 창병부대를 향해 돌격시켰고,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에드워드 2세의 군대는 워릭의 백작이 1295년에 이끈 것 같이 기강이 잘 잡힌, 정선된 부대는 아니었다. 배녹번의 군대는 거대했고, 다루기 힘들었으며 조직력이 없는 집단이었고, 서로 공통점이 없었다. 그리고 군인이 아니라 국왕이 지휘했다. 기병과 보병 사이의 조합의 전술적 문제는 그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배녹번에서 이 거리는 더욱 커졌다. 무능한 지휘 때문에 오만한 기사들은 고의적으로 사회적 지휘가 낮은 보병들을 무시했으며, 지원을 받지 않고 돌격했다. 보병대도 물론 기병대가 격퇴당하면 자신들이 잔인한 수확자 앞의 말먹이처럼 홀로 남겨져서 그들을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병종이 협력하여 싸울 때에만 그들이 굳건히 버틸 수 있었다. 따라서 배녹번에서 보병들이 기병의 패배를 목격하자, 그들은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1314년의 스코틀랜드군
스코틀랜드는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고, 결코 잉글랜드와 맞먹는 중장 기사단을 배치시킬 능력이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기본적으로 보병이었고, 전투의 주력은 궁수의 지원을 받는 창병의 스킬트론 대형에 의지했다. 14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5분의 1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상당수가 잉글랜드를 지원하고 있었거나 로디언 같이 보복당하기 쉬운 지역은 중립으로 남았기 때문에 브루스는 그들 모두를 군대로 소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가 1314년의 가을, 스털링 외곽에 소집한 군대는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받았고, 뛰어난 지휘를 받았으며 하나의 목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잉글랜드군이 갖지 못한 이점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독립을 방어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병사들의 수가 아니라 정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든지 용기가 없는 자는 적당한 때에 떠나라고 말했다. 그는 오직 ‘승리하거나 아니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병사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전통적으로 3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전위부대는 토머스 랜돌프의 지휘를 받았고, 머레이에 있는 그의 영지, 북쪽에서 인버네스까지, 그리고 북동부의 도시들에서 소집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은 국왕이 지휘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드워드 브루스에게 맡겨졌다. 그는 부칸, 말, 앵거스, 레녹스, 갤러웨이 등지에서 파견된 병사들을 지휘했다. 로버트 왕은 후위, 또는 예비부대를 지휘했다. 이 부대는 케릭에서 소집된 왕의 직속병사들과 스코틀랜드 남부의 저지대 병사들과 고지대 가문들과 아가일 출신의 앵거스 오그 맥도널드 가문 병사들과 서부 섬 출신 병사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기록에 따르면 배녹번의 스코틀랜드군은 전통적인 3개 보병부대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바부르는 4번째 부대를 추가해서 기록했다. 이 부대는 젊은 궁내장관인 제임스 더글러스가 지휘했다고 한다. 바부르는 또한 로버트 브루스가 전투 전에 제임스 더글러스와 군사령관인 로버트 키이스 경을 파견하여 접근해오는 잉글랜드군을 정찰할 것을 명령했다고 서술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향했다. 좋은 말을 탄 병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전투의 막바지에 에드워드 2세가 패배하여 도주하자 더글러스와 그의 소규모 기병대는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너무 적었다. 그의 병력은 채 60명도 되지 않았다.’ 로버트 키이스 경뿐이 아니라 제임스 더글러스도 배녹번에서 기병부대의 일부를 지휘했던 것 같다. 비록 전투 둘째 날에는 말에서 내려서 창병 곁에서 도보로 싸우긴 했지만. 만일 바부르의 주장대로 제임스 더글러스가 독립된 보병부대를 지휘했다면 브루스가 그를 그 중요한 임무에서 떼어내어 기병대와 함께 정찰 임무를 맡겼을 리가 없다.
존 바부르는 그의 서사시인 ‘브루스’를 1376년, 스튜어트 왕조의 첫 번째 왕인 로버트 2세의 치세에 썼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바부르는 배녹번에서 국왕의 조상인 이 젊은 궁내장관의 역할을 과장하여 국왕을 만족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1314년 이전까지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기사도 아니었다. 브루스는 6월 23일에야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바부르의 서사시에서는 브루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로 과장되었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더글러스가 에드워드 브루스, 머레이 백작, 그리고 국왕과 동등하게 독립된 보병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스코틀랜드 스킬트론
스킬트룸이나 스킬트론이라는 말은 방패벽이라는 뜻이며 습관적으로 스코틀랜드 창병부대의 속이 빈 원형 진형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연대기 저자인 기스버러가 처음으로 폴커크 전투에 대한 서술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부르는 배녹번에서 스코틀랜드 보병의 대형을 스킬트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무질서한 잉글랜드군을 표현하는데 이 말을 사용했다. 이때에는 서로 대형을 이루지 않고 뭉친 모습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토머스 그레이 경은 배녹번에서 스코틀랜드군의 전진을 ‘모두 스킬트론으로 정렬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이때에는 서로 밀집되었다는 의미이다. 병력이 밀집한 모습 외에도 특정한 대형이나 특별한 무기, 전술이 없는 모습도 스킬트론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스코틀랜드 보병
스코틀랜드군의 등뼈는 대형을 이룬 창병부대였다. 이들은 6열 횡대로 정렬하여 쇠로 된 창끝을 빽빽하게 곤두세운 대형을 이루어 잉글랜드 중갑 기병대가 돌파할 수 없게 했다. 이 대형은 돌파하기 어렵지만 기동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부대에게 취약했다. 토머스 그레이 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코트라이에서 프랑스 보병에게 패배한 플랑드르인에게서 교훈을 얻었다.’ 브루스도 분명히 코트라이 전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폴커크에서 잉글랜드군이 윌리엄 월레스의 창병부대에게 안겨준 패배도 알고 있었다. 둘 중 어디에서 배웠든지 브루스는 스코틀랜드군의 창이 무겁고 성가신 무기이며 병사들이 잘 조직되고, 훈련되었을 경우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창병부대가 단지 기병의 돌격에 맞서서 버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창병부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려면 진격할 수 있어야 했고,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했다. 6월 23일, 스털링 성으로 진격하는 클리포드의 앞길을 차단한 머레이의 창병부대의 행동은 단지 그들의 기동성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또한 포위 공격을 시도하는 기병부대를 후위가 저지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훈련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중세 스코틀랜드군에게서 프로이센 근위대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껏해야 들쑥날쑥하게 정렬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1318년 스쿤에서 발표된 스코틀랜드 의회의 포고령에 따라 스코틀랜드 보병의 무장과 장비를 추측해볼 수 있다. 이 포고령에 따르면 10 플로렌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칼과 플레이트 장갑, 철제 모자나 배서넷을 장비해야 했다. 그들의 갑옷은 패드 아머나 누빈 갑옷이나, 소매 없는 체인메일이었다. 두 번째 재산등급의 사람은 소 한 마리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들은 창이나 활로 무장했다. 갑옷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창이나 활이 이들이 장비해야 할 최소한의 장비였을 것이다. 궁수는 분명히 스코틀랜드군의 일부였다. 그러나 창병과 궁수의 정확한 비율은 알 수가 없다. 스코틀랜드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저지대 출신의 보병대는 그들의 잉글랜드 적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패에 대한 언급은 없다. 보병대는 창병부대였고, 그들은 이 다루기 힘든 무기를 다루기 위해 두 손을 다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빽빽하게 밀집한 스코틀랜드 창병의 대열에는 방패를 위한 공간이 없었다. 잉글랜드 북부 지방에 부과된 ‘보호세’들이 브루스의 전쟁 비용의 대부분을 제공했다. 이 돈으로 그는 병사들을 북해 연안의 저지대(지금의 베네룩스 3국-역자)와 한자 동맹의 가맹도시에서 구입한 갑옷과 무기로 잘 무장시킬 수 있었다.
배녹번 전투에는 아가일,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의 섬들 출신의 병사들도 참전했다. 하일랜드 가문들도 그들이 참전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고지대 병사들은 로버트 왕의 부대에서 싸웠으며, 그들의 이국적인 복장에도 불구하고 저지대 병사들처럼 창병과 궁수로 싸웠을 것이다. 로버트 왕이 그의 군대를 어떻게 훈련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큰 단일부대로 통합되기 전까지는 작은 단위로 나뉘어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이틀간의 전투는 효과적인 지휘계통이 부대를 하나로 묶는 것과 브루스가 자신의 뜻을 부대에 반영시킬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궁수
로버트 왕의 치세 전까지 스코틀랜드군에는 궁수가 현저하게 부족했다. 그가 봉건적인 기사 제공의 의무를 궁수로 대체한 것이 그 증거다. 한 예로, 트위들의 영지는 한 명의 기사를 제공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10명의 궁수로 대체되었다. 브루스는 분명히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맞먹는 부대로 이 위험에 맞서려고 했던 것 같다. 활은 하일랜드에서도 사용되었지만, 궁수들은 대부분 남부와 중부 스코틀랜드의 국경지대에서 징집되었다.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장궁과 한자 동맹의 항구를 거쳐 들어온 주목 화살로 무장했다. 그 증거로 서부 고지대의 한 후대의 석판에서 장궁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적군보다 더 짧고, 덜 강력한 활로 무장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스코틀랜드 궁수의 열세는 숫자 때문이었지 장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부병
고지대 병사들이 애용하던 무기인 로카버 엑스(Lochaber axe)와 이와 비슷한 폴암(polearm)인 제다트 엑스(Jedart axe)는 저지대에서 무시무시한 효과를 발휘했다. 상당수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배녹번에서 이와 같은 무기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창병부대와 혼합되어 싸웠을 것이다. 바부르는 일부 병사들이 ‘그들의 대형에서 튀어나와서 말들을 찔렀다.......그리고 기수를 떨어뜨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이 병사들은 너무 커서 다루기 힘든 창 대신에 칼과 단검, 도끼, 그리고 폴암 등 더욱 접근전에 알맞은 무기로 무장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기병
소규모의 스코틀랜드 기병부대가 조상 대대로 스코틀랜드의 군사령관이었던 로버트 키이스 경의 지휘 하에 있었다. 바부르의 서술에 따르면 그 수는 500명 이하였다. 그중에 중무장한 기사가 있었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역할은 잉글랜드 중장기사대처럼 중심 타격부대가 아니었고, 적 기사들과 직접 맞서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역할은 경기병으로서 접근하는 잉글랜드군을 정찰하고, 브루스에게 적의 전력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기병과 정면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으며 둘째 날에는 말에서 내려서 보병으로서 창병 곁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의 기록은 모두 스코틀랜드군이 배녹번에서 보병으로 싸웠다고 말하고 있으며 기병대에 대한 언급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군에서 기병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존 바부르의 서술에서 더글러스와 키이스가 이끈 정찰부대에 대한 언급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전투의 막바지에 더글러스가 잉글랜드 왕을 추격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다만 바부르의 이야기 중에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돌격을 가해서 잉글랜드 궁수들을 패주시켰다는 것만은 미심쩍다. 그렇게 적은 규모의 기병대가 전진하는 스코틀랜드 보병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수의 궁수 대형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바부르가 두려운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패주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기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더 일찍 기록된 잉글랜드 기록들이 궁수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바부르의 어쩔 수 없이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배녹번에서 싸웠던 성전 기사단원(또는 신전 기사단,Knight Templar)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성전 기사단은 1312년에 공식적으로 교황에 의해 해산되었다. 프랑스 왕은 기사단장을 처형했고, 45명의 기사단원을 1314년 파리에서 화형에 처했다. 대조적으로 잉글랜드에서는 기사단은 단지 재산을 몰수당했을 뿐이었고, 기사단장은 연금을 받고 은퇴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309년 초기, 국왕 대리인인 존 드 세그레이브가 아직 국내에 상당수 남아있는 기사단원들을 소집했다. 전 스코틀랜드 출신 성전 기사단원들이 로버트 왕의 군대에서 싸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의 유명한 뷰상트 군기 아래서 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계속.......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