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을 낳은 동몽골의 푸른 호수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우리는 왜 싸웠는가.
우리는 왜 같은 핏줄끼리 칼과 활을 겨누어야 했는가.
내 아버지는 왜 독살당해야 했고
내 어머니는 왜 납치되어야 했으며
나는 왜 이복형을 살해해야 했고
내 아내는 왜 적장에게 끌려가 강간당하고 그의 아들을 낳아야 했는가.
나는 왜 적장을 죽이고 그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아야 했는가.
나는 왜 적장을 죽이고 고아가 된 그 아들을 의형제로 삼아
경호 실장으로 데리고 있어야 했는가.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운명이 그렇게 결정해 주었는가.
아니면 우리 몽골 유목민들만이 유별나게 잔인한 체질이어서 그랬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하늘에 맹세코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데 있다.
바깥세상을 보면 드넓은 초원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곳에서 가축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 가축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아비규환의 내전을 수십 년 동안 벌릴 이유가 없었다.
이제 모두가 하나가 된 만큼 지옥 같았던 과거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바깥세상으로 나가자.
서로에게 겨누었던 칼과 활과 말머리를 바깥세상으로 돌리자.
그리하여 누구나 몽골고원만한 초지를 갖게 되고 가축을 배불리 먹이면
우리는 싸워야할 이유가 없다.
그 길만이 내 아버지가 독살되고
어머니가 납치됐으며 이복형이 살해되고
아내가 강간당한 한을 푸는 길이다. 나뿐이 아니다.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이 미망인이 된 이후,
전장에서 부상당해 장애자가 된 이후,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거나 주린 배를 움켜쥐다 못해
흙과 자갈을 먹다가 죽어간 그 한을 푸는 길이다.
그 길만이
우리의 후손들을 전쟁의 공포, 가난의 공포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는 길이다.
자, 나와 내 아들들을 비롯한 내 가족들이 앞장서서 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과실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다시는 지긋지긋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고원 밖으로 나서자.
수천년을 유목민과 함께 흐르는 몽골의 강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00년 전, 1206년에 태무진이 몽골세계제국의 출범을 선포하고 대양과도 같은 칸, 가장 포용력이 넓은 칸이란 뜻의 칭기스칸으로 취임하면서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연설문이다. 물론 이 연설은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몽골의 학자들에게 자문과 검증을 받아서 임의로 작성한 것이다. 이점 오해가 없기를 거듭 바란다.
올해가 칭기스칸의 제국 탄생 800주년이라 그의 연설문을 써 본 것인데, 이는 몽골과 칭기스칸에 관한 기초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읽을 만한 글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쓴 글'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당혹스런 오해 때문이다.
8년 전, [밀레니엄맨]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그 책 안에 '칭기스칸의 편지'라는 글을 써 실었다. 당시는 대한민국에 IMF 한파가 몰아친 시대였다. 정리해고, 명예퇴직을 당해 길거리에 내쫓긴 사람들에게, 그런 부모들 앞에서 차마 슬퍼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아들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밀레니엄맨이란 책, 특히 '칭기스칸의 편지'는 신문기자로서 또 몽골 연구가로서 할 수 있는 나의 충정이었다. 그래서 편지는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짧은 편지글이 진짜 칭기스칸이 쓴 편지로 오해되어 실리곤 한다. 칭기스칸이 남긴 말이라는 등, 칭기스칸의 충고라는 등의 이름으로 변해 한 포털사이트에만도 2000여개가 넘는 블로그에 이 글이 실려 있다. 특히 요즘은 칭기스칸과 몽골 유목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새로 출간되는 책들에서도 그 글을 머리말로, 또는 광고 문구로 버젓이 쓰고 있다. 그 사람들이야 진짜 칭기스칸이 보낸 편지인줄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편지가 '한국의 젊은이들아!'로 시작되기 때문에 칭기스칸이 아니라 내가 쓴 줄 뻔히 알면서도(고려를 침공한 것은 그의 아들 어거데이칸 시절이며, 800년 전의 칭기스칸이 800년 후의 한국에서 IMF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을 리가 없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베꼈을 것이다. 무지 탓이든 약삭빠르고 후안무취한 상혼 탓이든 저작권 소송을 제기할 생각이 아직은 없지만, 나로선 참 쑥스럽고도 어이없는 일이다. 심지어 한 학교 선배는 나에게 “자네는 칭기스칸 연구자니까 이 글 좀 읽어봐라”면서 내가 쓴 글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어쨌든 칭기스칸이 보낸 편지(?)의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밀레니엄맨 칭기스칸]에 실린 내용이고, 내가 쓴 편지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싸우면서 자랐고, 커서는 사촌과 육촌의 배신 속에서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 마른 나무마다 누린내만 났다. 천신만고 끝에 부족장이 된 뒤에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적진을 누비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나는 먹을 것을 훔치고 빼앗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데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고작 10만, 백성으로는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타고 달리기에 세상이 너무 좁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내가 큰 것은 아니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글이라고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고, 지혜로는 안다 자모카를 당할 수 없었으며, 힘으로는 내 동생 카사르한테도 졌다. 그 대신 나는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평생 친구와 동지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를 위해 비가 오는 들판에서 밤새도록 비를 막아주고, 나를 위해 끼니를 굶었다. 나도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나는 내 동지와 처자식들이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빛나는 보석으로 치장하고, 진귀한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을 꿈꾸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린 끝에 그 꿈을 이루었다. 아니, 그 꿈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빗발치는 화살을 칼로 쳐내며, 어떤 것은 미처 막지 못해 내 부하들이 대신 몸으로 맞으면서 탈출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면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됐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나는 전쟁에 져서 내 자식과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더 큰 복수를 결심했다. 군사 1백 명으로 적군 1만 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도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 버린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 나갔다.
알고 보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