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NCC 김홍식 간사입니다.
천정명 목사님께서 한일 URM 관련해서 URM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자료를 요청하셨습니다.
잘 정리된 자료를 찾기 힘들어서 제가 여러 자료를 수집해서 올립니다. 주로 과거 역사들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Ⅰ. WCC 도시농어촌선교(URM) 소개
* 이 자료는 1989년 세계선교회의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WCC CWME에 의해 1986년 7월 정리된 것입니다. KNCC는 1987년 2월 이 자료를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1. URM(Urban Rural Mission)의 자기이해
1) 서론
URM은 근본적으로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정의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선교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남․여성들의 운동이다.
오늘날 도시농촌선교는 세계 다섯지역까지 확장되었다. -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
여기서 교회들과 관련된 그룹들은 각 지역에서 민중들의 삶과 그들의 문제에 참여하고 있다.
2) 목적과 전망
지난 30년 동안 URM은 여러 상이한 단계를 거쳐 왔고 이에따라 그 목적과 시각이 규정되었으며 사회와 세계의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여 재규정되었다.
1964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에서 시작된 '도시산업전도'가 세운 원래 목표는 전체 사회속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로 생성된 부분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실체화하는 것이었다.
1965년 이름을 '도시산업선교'로 바꾼 후 선교에 대한 이해는 사회정의를 고취하고 옹호할 필요성, 힘의 뜻을 규정할 필요성과 날카로운 정치적 분석과 이해를 가질 필요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깊이를 더해갔다.
그리고 연합운동내에서 도시와 농촌의 연계에 대한 지속적인 긍정은 1978년 세계교회협의회 내에 '도시산업선교'와 '농촌농업선교'의 합볍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서시는 하느님의 의도적인 선택이 URM의 시각을 통해 명백히 명시되었다. 하느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행동에서 URM을 독특하게 하는 것은 바로 각 지역 활동과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민중들을 조직하는 일을 강조하는 태도이다. URM은 근대화와 산업화로 급속히 일어나는 사회변화 과정과 착취적 경제, 정치구조로 희생당하는 자들의 고난의 현장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
URM이 전념하여 일해 온 소외된 자들은 빈민, 실업자, 공장노동자, 여성노동자, 원주민, 어업종사자, 가난한 농부, 농업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다. 사회에서 보통 대다수를 구성하는 이들은 땅으로부터의 소외, 경제적 착취, 문화적 결핍, 인종, 민족 차별 등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억압받고 있다.
URM은 복음이 교회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사회변혁 과정에서 역사의 주체가 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도록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믿는다.
3) 방법과 지원구조
URM의 지역활동에서 실행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착취와 소외당하는 자들이 권력을 가지도록 조직함으로써 그 민중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URM은 조직가를 훈련하고, 자료수집, 통신, 자료교환, 부정의 근본원인에 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민중들의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을 지원한다.
행동-반성이란 방법을 통하여 URM운동에 관련한 사람들은 그들의 투쟁에 일의 특수한 배경을 가지고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억압당하는 자들과 연대행동을 통하여 신앙은 계속 도전될 것이며 교회는 거듭날 것이다. 어디든지 언제든지 필요할 떄면 URM은 민중의 조직과 운동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정 혹은 다른 지원을 동원할 것이며 연결해 줄것이다. 그리고 상호연락, 교환과 연결을 통한 국내 지역과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민중운동의 연대를 확인한다. 그러나 URM은 민중운동을 '소유'하고 있거나 지도하지 않고 민중들의 열망과 주도적 행동에 대응하고 주체성과 인간의 존엄과 완전한 인간성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 동참한다.
4) 비전
URM이 근본적으로 지역별 차원 그리고 상황에서 불의와 대항하여 투쟁하는 동안에 불의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억압의 세력이 국경을 초원하므로 이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URM은 이데올로기적 기본원리를 인식해야 하며 사회․정치 변혁과 변화에 몰두하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하여 단결된 연대를 이룩해야 한다. 민중들이 정의롭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할 때 URM은 기존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그들의 정치적 행동과 투쟁에 참여한다.
URM은 현재 조금 더 평등한 부의 분배를 이룩한 몇몇 제도나 현존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URM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제도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선다. 희망의 표시가 있는 곳에 URM은 그런 자유의 공간을 지키고 진척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다. 교회의 전체 선교의 필요한 구성요소로서 URM은 정의와 해방-하느님의 평화-을 위한 민중들의 역사적 운동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좁은 교파주의와 종교적 차이까지도 초월하는 연합운동에 깊이 관련하여 계속 일하기 위해 전념할 것이다.
Ⅱ. 도시산업선교와 농촌선교에 관한 교회의 입장
* 1982년 7월 KNCC 도시농촌선교분과위원회 안내 자료중...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979. 8. 20)
1) 모든 사회는 선교의 영역이며, 산업화 시대에서 산업사회는 현대선교의 중요한 영역이다.
2) 모든 인간은 선교의 대상이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근로자, 농민은 중요한 교회의 선교 대상이다.
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각 회원 교단에 소속된 도시산업산교회가 정당한 선교단체임을 확인한다.
4) 일부 보도기관이 산업선교에 대한 일방적인 보도를 통하여 산업선교를 왜곡시키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이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2.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979. 8. 27)
도시산업선교는 성서에 근거하여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당한 자들을 도우며 복음으로 희망을 안겨주는 선교의 행위로서 세계교회와 더불어 그 일을 추진하여 왔다. 우리는 이 선교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으며 앞으로도 역사 속에서 계속 본 교단의 산업선교의 원리 및 지침에 의하여 추진할 것을 고백한다.
3. 기독교대한감리회(1979. 8. 28)
도시산업선교를 "불순세력" 운운... "용공"운운... 등으로 모함하는 처사는 사실 왜곡이며 선교자유를 탄압하려는 인상을 준다. 한국에서 산업선교를 하고 있는 기독교회들은 근로자들을 노동계급으로 보지 않고 노동계층에서 당하고 있는 억울한 대우와 고난을 문제 삼아 그들의 권익옹호에 헌신하고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반공 선교를 지원하고 있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교역자대회 참가자 일동(1982. 7. 7)
노동자들과 농어민들의 권리를 짓밟지 말고 그들을 위한 산업선교, 농어촌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1회 총회
생존의 위협에 떨고 있는 노종자 농민 등 민중을 혹세무민하거나 그들과 격리되는 존재양식을 폐기하고, "민중과 함께 사는 교회"의 본연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Ⅲ. 한국의 URM 25주년 역사와 미래
조승혁 목사(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 이 자료는 1983년 10월 29일~11월 11일까지 있었던 '한국교회 산업선교(UIM) 25주년 기념대회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주권 중심의 역사로 볼 것인가? 민권 중심의 역사로 볼 것인가? 이 말은 정치․경제․사회적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민중의 참여란 시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UIM 25주년 역사를 보는 시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중심적 또는 URM 선교단체 중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요구 또는 산업사회 발전 과정에서 민중적 요구와 현실을 중심으로 볼 것인가? 다 일장 일단이 있다.
한국 UIM 25주년 역사를 첫째, 선교 운동의 맥을 선교 단체 중심으로 본다. (운동의 주체가 UIM이란 시점에서) 그리고 둘째, 선교 활동의 내용이 도시산업화 과정에서의 제 문제와 사건을 수용했는가? 또는 민중적 요구를 따라서 민중적 참여를 유발하고 동원했는가? 하는 등등의 두 가지 시점에서 요약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이는 교회선교운동사적 시점과 교회선교운동과 지난 25년간 어떤 역할을 도시 산업사회 또는 농촌사회에서 하여 왔는가를 평가하여 보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저는 4기(四期)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초기과정
1) 시기(1957~1967년)
예 장 1957년 9월 예장 총회가 결의
감리교 1961년 9월 시작
1962년 2월 감리교 인천 동서지방 결의
(물론 1960년 4월 개인적으로 시작)
성공회 1961년 서울 교구장 Bishop John Deily 황지 탄광에서 시작
1968년 안마태 신부 영등포
기 장 1963년 6월 5일
구세군 1965년 전장 서기관 안길화 부령이 시작
UIM 연합단체 1964년 5월
1966년 1월 제1회 UIM 연구회 및 조직
(1) 1957년 한국의 공업화 이식 - 소비재에서 생산재 산업으로
(2) 1962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첫 단계 등등으로 의미
(3) 1962년 한국노총이 기업단위에서 산별단위
2) 지역적으로
서울, 인천, 안양, 대전, 대구, 부산, 황지, 도계 등등, 다 이 시기에 생겨났다.
3) 동기와 선교활동
(1) 동기는 산업사회에 대한 관심의 표현과 전도에서 즉 교회의 순수한 전도적 동기와 열의에서 시작
(2) 활동 내용
실무자 훈련, 교육과 예배, 평신도 활동(조직, 교육, 전도), 공장목회(Industrial Chaplainship)
(3) 노동자 교육(교양중심)
복지와 봉사
* 즉, 교회의 전도로써 교세 확장이란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 교회의 전도 방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실무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노동경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4) 신학적 입장
한마디로 표현하면 산업전도이다.(Industrial Evangelism) 이는
(1) 개인구원
(2) 산업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심 표현
(3) 급증하는 산업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ㅡ이식의 강조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 이 시기에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 활용이란 관점에서 평신도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강조가 Industrial Evangelism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결론으로 초기과정은
(1) 준비와 모색의 단계(조직, 내용, 방법, 연합 등)
(2) 참여와 학습의 단계(내용, 방법 등의 잘못, 교회와 산업사회와의 거리, 저도대상에 대해서)
(3) 전도는 삶의 현장에서(Working Place and Worker) 민중의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됨.
2. 제2기 과정
1) 시기(1968~1972:4년)
(1) 조직이 안정되고 선교활동의 과제가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선교운동이 각 과제에 따라 전문성을 갖게 되었다.
(2) 지역단위 활동과 전국단위의 활동과의 연결내지는 연합 전선이 형성됨.
(3) UIM운동이 UIM Group만이 아니라 학생, 청년단체(YMCA, YWCA), 교회단체(NCC, 아카데미, 교단 등) 등의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4) 산업사회, 도시빈민운동, 농민문제 등을 함께 연합해서 다루기 시작했다.
(5) Industrial Evangelism에서 Urban Industrial Mission으로 명칭을 바꾸게 됨. (1968 CCA-UIM협의회 이후)
(6) 도시산업선교 단체들의 정비와 확신이 이루어짐.
(재정, 인력의 문제로 정비되면서 KCAO 같은 조직이 탄생됨)
(7) 선교 방법에서 Saul D. Alinsky의 방법의 적용.
(8) 가톨릭 그룹과 프로테스탄트 그룹의 연합체 조직(KCAO-URM)
* 이 시기는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제1차 경제개발 과정에서 분배의 문제, 사회 계층간, 지역간, 산업간의 격차 등 산업화의 역기능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UIM도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2) 지역적 개념을 탈피하게 됨.
UIM이 활동(Activity)에서 운동(Movement)의 성격을 띄게 됨에 따라 지역 단위 활동을 전국단위 운동과의 한 선상에서 보게 됨에 따라 지역 단위 개념이 없어지고 지역의 문제가 연합되는 전체적 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음.
이는 KCAO-URM의 역할이 컸다.(CCA-URM의 협력에서 가능해졌다. 감사드린다)
3) 선교 운동의 내용
노동사회와 만나고 산업사회와 노동자 현실에서 참회를 한 UIM은 노동자와 농민 즉 힘없고 가난한 민중 편에 서야 하겠다는 신앙 고백에 따라 선교의 과제가 뚜렷해졌고 이를 위해서 UIM group간의 연합은 물론 교회(NCC, 교단 등) 단체와 선교단체들의 연합전선 형성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느낌에서 이를 조직화하고 공동전선을 펴 나가게 되었다. 그 선교운동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산업사회를 중심한 활동
1968년부터는 선교의 과제가 확실해 짐에 따라 그리고 UIM의 입장이 어느 편에 서야 되겠는가가 명확해짐에 따라 교회의 선교란 차원에서 보다 노동자들의 삶의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어떤 내용을 갖고 참여하여야 하겠는가 하는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반성과 함께 운동과 프로그램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질적 변화는 오늘의 UIM의 성숙을 가져왔으며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①노동운동 지도자 교육 ②노동자 의식화 교육 ③노동조직 활동 ④노사분규에 관여 ⑤노동자 복지 문제에 구체적 기여 등으로 나타났다.
(2) 도시사회를 중심한 활동
1968년 연대도시문제연구소의 발족, 1971년 9월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발족 등으로 인하여 도시 저변 사회의 빈민들의 문제에 교회가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는 선교 방법면에서 UIM Group에 큰 영향을 주엇다 할 수 있다.
(3) 농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함.
(4) UIM이 한국사회의 경제적 문제를 다루게 됨(1969년 10월 24일 노동문제와 사회발전 대강연회를 서울 시민회관에서 4,000명이 모여 신구교가 연합적으로 다루게 됨에서 시작됨)
따라서 이 기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노동자의 문제를 경제, 사회학적인 입장과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보기 시작했으며 행동화하기 시작했다.
* 1971년 10월 9일 사회정의구현과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띠를 두르고 소금을 뿌리면서 가두 데모함.
(5) KCAO의 조직과 선교 운동의 변화
1971년 1월 4일 한국산업문제협의회로 UIM, JOC, 신구교 학생단체,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1971년 9월에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로 개칭하고 UIM, JOC, 학생단체(KSCF, Pax Romana), 청년단체(YMCA, YWCA), 농민단체(가톨릭농민회), 도시선교 그룹을 망라해서 조직케 됨.
KCAO의 출현은 선교 내용과 방법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명실공히 노동자, 농민, 빈민 문제를 위한 연합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고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행동주의(Action)적 대처를 하게 했다.
다시 말하면 KCAO는 종래의 교회 선교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민중적 차원에서의 민권운동을 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1972년 9월 마닐라에서 있었던 CCA-URM 주최 Theology in Action의 영향을 받아서 민중을 주체로 한 선교 활동을 하게 하였다는 면에서 그 의미를 둘 수 있으며 KCAO가 1972년부터 노동자 농민이란 말 대신 민중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KCAO는 Paulo Frerier와 Saul D. Alinsky의 이론과 방법을 실무자 훈련을 통해서 학습시키므로 해서 선교운동의 내용과 방법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민중을 몸(Action)으로 섬겨야 한다는 새로운 계기를 창출해 내게 되었다.
4) 제2기의 신학적 입장
(1) Industrial Evangelism에서 Urban-Industrial Mission으로
(2) 선교에 있어서 현존(Presence)의 문제
(교회 없는 곳에 교회있고, 교회 있는 곳에 교회 없다)
(3) Missio Dei의 입장에서 사회구원에, 역사 전체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평화를 이룩하는 민중선교 운동을 전개하게 됨.
(4) 따라서 선교의 내용은 복음화보다 인간화에 두고 교회의 지상 과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입장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따른 사회 개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5) 그러므로 선교의 주체가 민중이며 민중이 사회에 선교 과제를 제시하면 선교 방법은 민중의 경험 속에서 창출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5) 결론적으로
제2기의 UIM은 선교의 과제를 사람, 조직(집단)에서 보다 문제와 사건에서 찾았으며 이 문제와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연합적으로 대처하여 나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프로그램 중심에서 Action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여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이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URM 운동이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며 대처하느냐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시작했다.(1972년 KCAO주최 URM 협의회의 현영학 박사의 발제에서 앞으로 선교의 과제는 사회과학적 분석과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음)
따라서 노동자 문제는 노동자만의 문제, 노사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보기 시작함. 이 시기는 URM 운동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서 초기 과정에서 참회에서 얻은 확신을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해서 새로운 활기를 갖게 되었으며 이런 행동주의적 운동에서 갖는 신앙고백적 선교활동을 확신을 갖고 굳혀가기 시작했다.
3. 제3기 과정
1) 시기
(1) 정치 권력과의 충돌
(2) URM Group이 민중에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3) 한국 교회의 인권운동, 민주회복 운동에 URM Group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4)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통한 문제를 전문적인 각도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5) NCC, 각교단(감리교, 기장) 등이 URM 중앙위원회를 조직, 각 교단적인 차원은 물론 전 교회적 운동으로 확산 추진케 된 시기다.(예장은 1957년에 벌써 조직했음)
(6) URM 각 지역에서의 노동교회 설립.
2) 선교운동의 내용
(1) 노동문제, 노사분규에 직접 개입
예 :
(ㄱ) 삼원, 반도상사, 동일방직, 삼고사, 방림방직, 해태제과, 신흥제지, 청주시장 청소부 문제, 청계 피복 지부, 대한방직 등의 노사분규에 직접 간접으로 개입함.
(ㄴ) 한편 노동상담 사업을 통하여 노사분규와 노동자 문제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기도 했다.(예, 삼미사, 삼원교통, 고속버스 노동조합 등)
(2) 노동운동의 자율화 추진전개
예 :
(ㄱ) 1974년 4월부터 시작된 한국노총과의 성명전
(ㄴ) 1975년 1월 156명이 발기인이 되며 민주노동운동 자율화 투장 선언문 발표
(ㄷ) 1974년 10월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위원회 조직, 투쟁전개
(3) 인권․민주회복운동전개
예 :
(ㄱ)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 주도
(ㄴ) 1974년 1월 17일 긴급조치 1호반대 성명 사건 주도
(ㄷ) 1973년 12월 10일-16일까지 KCAO가 인권주간 선정 “자유케 하소서”란 주제하에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인권문제를 다루기 시작함
(ㄹ) 1977년부터 매년 3․1일 노동절을 기하여 KCAO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 인권 선언문 발표
(ㅁ) 1974년 11월 KCAO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 인권 옹호 위원회 조직 등등
......
(4) 선교 자유 수호 활동 전개
(5) 노동문제에 관한 사회 고발
(6) 노동자 복지 활동에 전문적으로 참여
(7) 각종 소 그룹 활동과 의식 교육 실시
(8) 노동자 교회 설립
(9) 도시 선교(CO) Group이 중심이 된 민권 운동 전개
3) 신학적 입장
제3기 과정에서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구체화에 두었다 할 수있다. URM은 민중의 고난과 아픔에 신앙고백적 결단과 참여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URM Group은 고난 속에서 기쁨을 갖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다.
신학적 논점을 몇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1) 구조악과 구원의 문제
2) 사건과 고난과 기쁨의 의미
3) 죄인으로서의 연대와 은혜의 연대
4) 고난과 부활 그리고 희망
4) 결론적으로
1973년부터 1980년까지는 15년간 쌓아온 경험과 다져진 기반을 갖고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이 민중들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사실에 몸으로 부닥쳐 싸워 나갔으며 그러기에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이런 고난의 사건들은 NCC를 비롯 각 교단, 한국교회에 자극을 주어 전 교회적인 관심과 행동을 유도하기까지 되었다.
URM은 이 시기에 Missio Dei의 신학적 입장을 구체화하고 행동함으로써 민중을 섬기는 구체적 표현을 했다할 수 있다.
따라서 URM Group은 비록 소수이나 “내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함이다”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이 기간에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3차에 걸친 전 매스콤을 동원하는 놀라운 사건과 선전의 대상이 되었다.)
4. 제4기 과정
1) 시기(1981-현재)
현재 URM은 정부의 강한 감시와 탄압을 받고 있으며 제3자 개입 문제 등 법적 제한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건의 변화로 URM 운동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단계가 아닌가 본다. 따라서 조직의 정비, 실무자 양성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할 수 있겠다.
1957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선교 내용상으로 보아서 이상의 소개한 것 외에 다루지 아니한 것이 있다. 이는 ‘일반 목회적 차원에서 하여온 활동 등이다.
(1) 예배 활동 (2) 성서 연구 (3) 공장 목회 (4) 상담 활동 (5) 문서 선교 활동 (6) 평신도 중심의 활동 등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본 활동으로 전개하고 있다.
5. 한국 URM의 미래
지난 24년의 경험과 주어진 상황에서 미래를 전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경험에서 갖는 반성
(1) 기구화와 보수성의 탈피(프로그램 중심에서 운동중심으로)
(2) 평신도와 실무자의 양성(자원지도력 배양의 문제)
(3) URM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4) 조직의 재 구성과 재정의 문제
2) URM의 미래
대전제를 둔다면 현재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초기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한다.
(1) 전제를
(ㄱ) 선교운동이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었으면
(ㄴ) 방법의 문제 -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동원했으면 한다.
(ㄷ) URM 기반의 재 구축-교회와 노동자를 동원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2) URM의 미래
(ㄱ) 민권 운동을 전개
(ㄴ) 교구 목회(개교회가 담당)
(ㄷ) Team Ministry
(ㄹ) 지역단위 KCAO의 조직 추진
(ㅁ) 산업사회와 노동운동의 여건 변화에서 선교 과제를 택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ㅂ) 제2의 노동조합 추진
Ⅳ.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보고
김동완 목사
* 이 자료는 2000년 12월 4일~7일까지 있었던 제7회 한일교회협의회 자료 중 일부입니다.
1. 들어가면서
한․일교회협의회는 두 나라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나아가 아시아 교회와 함께 공동의 선교적 사명을 발견하고, 상호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73년에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87년에 오사까에서 개최되었던 6회 협의회 이후 13년만에 7회 협의회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한일양국의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교류하고 협력해 왔습니다. 여성, 청년, URM, 외등법 문제, 고난의 현장 방문 프로그램 등은 회수를 더해가면서 양국의 선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13년 만에 만난 우리는 주변환경이 많이 바뀌고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세계는 냉전 종식에 이어 시장경제 논리에 의한 신자유주의로 편입되었으며, 이로 인한 남북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이어지면서 생명과 평화는 21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2천년대의 첫해, 에큐메니칼 형제인 우리의 만남은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과 정의, 인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논의를 새롭게 펼쳐 나아가야 하는 길목에서의 새로운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20세기의 부정적 요소를 버리고 새롭게 오는 21세기의 비전을 오늘부터 열리는 제7회 한일교회협의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고, 양국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용시켜 나갈 중요한 과제들을 발굴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지구적 자본의 극대화와 이로 인한 빈부의 문제, 자연환경파괴,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 등을 통해 인위적 생명을 생산해 내는 죄악까지 저지르고 있는 생명 파괴적인 양상에 저항하고, 인간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6회 협의회를 마친 87년 이후, 한일 양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군사정권의 종식과 더불어 일정정도의 민주화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분단이래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나면서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고착 상태에 있었던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간의 긴장상태의 대립으로 동북아시아는 화약고였습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의 물줄기가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선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키고 유지시켜 나아가는데,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와 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7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써 준 세계교회의 도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교회의 지원과 협력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다시금 그러한 노력들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번 협의회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2.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
80년대의 한국교회는 그 동안 정부당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 왔던 통일논의를 교회에서 시작하여 국민일반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아울러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는데도 주력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일논의의 적극적 공개화는 민간통일운동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정부측의 대북 적대정책의 수정이나 통일정책에도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87년 5월, 일본교회협 대표단 3명은 북한을 공식 방문하였습니다. 아울러 미국, WCC 등도 북한을 방문하고 선교 협력을 모색하는 해외교회의 노력들이 80년대에 있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처음으로 신학적 정책적 입장을 밝히게 됩니다. 88년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그것입니다. 이 선언문은 공개적인 토의과정과 합의도출 과정을 거친 진정한 에큐메니칼 합의문서이면서, 그간의 정부당국에서 내어놓은 통일정책 선언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 민간차원에서 공표한 최초의 통일선언문이었습니다. 이후 통일논의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수위와 지향점을 결정케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 열화처럼 달아오른 통일에의 열망과 통일운동 및 통일논의의 이론적 바탕과 촉매제가 바로 이 선언이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88년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한반도평화협의회”에서,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이 선언에 전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86년 글리온에서 남북교회가 처음 만난 이후 ‘평화 조성을 위한 성서적 기반’이라는 주제로 88년 제2차 글리온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한 그리스도인들이 합의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과 ‘한반도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기도문'을 채택하고 매년 8.15 직전 주일을 남북한교회가 함께 ‘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90년 12월에 열린 3차 글리온 회의는 희년공동사업에 대한 협력방안과 역할분담을 협의하고, 이를 통해 국내외 교회의 일치와 연대를 증진시킨다는 것을 구체적 목표로 삼고, 교회에서의 대중적 통일운동을 선언하면서 한국교회는 95년 희년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1995년 희년을 위한 협의회 준비 및 남북교회 관계에 대한 협의를 위해 92년 1월 NCCK 권호경 총무가 조선기독교도연맹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남한 정부의 비협조로 인하여 그 해 2월 NCCK 총회에 참석하려던 북한 방문단의 서울 방문이 불허되는 우여곡절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8월에는 약 6만명이 참여하여 독립문에서 임진각까지 48KM를 잇는 “평화통일을 바라는 남북인간띠잇기대회”를 열게 됩니다.
또한 1995년 3월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글리온 4차 회의에서 8.15 희년 공동예배를 판문점에서 드리자는 내용에 합의하게 되지만, 남한 정부가 북한주민접촉신청을 불허함으로써 남북한이 함께 드리는 공동예배도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96년 이후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한국교회는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북한동포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민족화해의 정신에 거스르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 신앙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라는 고백 위에서 올 초까지 10차례에 걸쳐 약 50억 이르는 식량과 의료기기, 비료, 의복 등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전달하는 등 북한동포돕기에 전력하였습니다. 일본교회를 비롯하여 해외교회도 이 일에 많은 참여가 있었습니다.
97년 한국교회는 한국전쟁의 날인 6.25를 민족화해와 민족의 동질성, 상호신뢰 회복을 위한 계기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취지 아래서 이 날을 민족화해의 상징적인 날로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민족 화해의 날‘로 선포하고 이 주간을 민족 화해의 날 공동기도주간으로 정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북한 기독교인들은 해외교회의 도움으로 해외에서 꾸준히 만나왔으며, 97년 9월에는 본인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1998년 5월과 9월에 NCCK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해(99년), 6월부터 9월까지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의 일환으로 “평화의 엽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 바 있으며, 올(2000년) 6월부터 8월까지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하루 1분 기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만남도 우리가 벌여온 그 동안의 노력이 큰 토대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6.15 이후에 조성된 ‘남북간의 화해 분위기’를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를 크게 관심하고 있습니다.
3. 21세기를 향한 과제
현재 한국에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산업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송출비리, 저임금,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노동 등으로 기본적인 인권이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의 확립이 절실합니다. 유엔에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조약’이 결의되고, 이주국에서의 노동조건 및 의료, 교육 등에서의 평등, 문화적 독자성이 주창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을 정부당국이 인식하고 유엔 인권 규약과 인종차별 철폐 조약, ILO의 이주노동자가 향유해야 할 최저한의 대우에 관한 조약 등의 국제 인권법들을 완전히 비준하고, 실시하도록 우리교회가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지난달 한국의 온양에서 개최된 8차 외등법문제 국제심포지움에서 참석자들은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일본 교회 중심으로 진행된 이주노동자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아시아 내의 여러 노동자 송출국과 수입국의 기독교 공동체들로 확산되기를 희망한다.’라는 선언문을 발표 한 바 있습니다.
21세기 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한․일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이 절실합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던 일본이 전후보상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함으로서 세계 평화의 행진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교회가 적극 지원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12월 7일 도쿄에서 개최될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 한일양교회가 적극 지지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청년, 여성 등 평신도들의 교류와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전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21세기의 희망인 청년들의 교류를 한일교회가 적극 지원함으로서 양국에 잔재하는 잘못된 역사관을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여 양국기독청년들의 선교 영역을 확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마치며
지금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해야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교회도 주변환경의 변화에 도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연대를 공고히 하여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협의회를 통해 한․일 양국교회의 연대를 새롭게 모색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Ⅴ.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 총무보고
오츠 겐이찌
1. 머리말
한일교회협의회는, 제1회 모임을 1973년에 서울에서 개최하고, 그 후 1974년에 제2회 모임을 교또에서, 제3회를 1976년 서울에서, 제4회를 1978년 도쿄에서, 제5회를 1985년에 도꾜, 제6회를 1987년에 오사까에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금번 협의회는, 1987년 이후 13년만에 개최하게 된다. 만약, 1982년 11월에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한일교회협의회를 보탠다면 근번 모임은 제8회가 된다. 특히 1982년의 협의회에서는, 한일교회협의회의 방향성이 명확하게 거론되었으므로, 그 요점을 요약해 보면, ① 상호이해와 공동보조의 추진, ② 공통의 과제를 위한 한층의 연대의 강화, ③ 자료정보의 교환 그리고 협력, ④ 연대를 아시아의 여러교회에 확산 하는 일 등이었다. 이 방향성은, 제 6회 협의회에서도 재확인되어 있다. 제6회까지 제출된 공통과제는 한국의 민주화문제, 기생관광문제, 남북통일문제, 재일한국․조선인의 인권문제, 역사교과서의 개편을 포함한 역사인식문제, 천황제 문제, 그리고 일본의 아시아에의 경제침략과 군사화문제 등이었다.
이러한 양국에 관련된 중요한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13년간 NCC협의회가 열리지 아니하였는가에 관해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다. 1978년 1월에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제4차 협의회에서 앞으로의 태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한일NCC의 합의점을 볼 수가 있다.
① 청년, 학생, 부인(어머니) 등의 Class Roots Level에 있어서의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만든다.
② 중요한 개별 제목에 대한 연구협의회로 자주 모이고, 필요에 따라서 전체협의회를 개최한다.
이상의 협의에 의해서 1978년 5월에는, 제1회 한일URM협의회가, 다음해에는 제1회 한일교회청년협의회가 수원에서 같이 개최되었다. 또한 교육부는 같은해 12월, 제1회 한일교회학교교사협의회,(나중에 한일(재일)그리스도교교육협의회라고 명칭변경)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문서사업부가, 제1회 동북아시아기독자문학회의 및 1988년에는, 제1회 한일그리스도교출판연구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 이르러 제1회 한, 일, 재일에 의한 외등법문제 국제심포지움이, 1996년 6월에는 제1회 한, 일, 재일, NCC 여성위원회의 교류연대 프로그램이 지금도 계속적으로 모이고 있다.
이와 같이, 지난 13년간 한일교회협의회는 개최하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과제나, 여러층에 걸친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 중(여러모임)에서 나온 문제는, 일본의 군사화문제, 전쟁책임, 그리고 한일 신시대(新時代)라고 표현되는 천황의 방한문제 등, 한일교회 양자간에서 꼭 의논하지 아니하면 안될 문제를 갖고 있다. 20세기를 마무리짓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공통과제의 확인과, 그 과제에 대한 한일NCC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때라고 말할 수 있다.
2. 13년간(1987-현재까지)의 일본기독교협의회의 발자취
지난 13년간에 세계는 큰 변화를 이룩했다.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동서관계로부터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문제를 살피게 되었다. 만약, S. 헌팅턴의 생각이 바르다고 하면, 지금부터의 세계는, 종교나 민족을 포함한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는 시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일본은, 풍요로운 나라의 일원으로서, 또한 그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 일본의 아시아로의 경제진출과 ODA 등에 의한 경제원조는, 아시아의 일부의 특권계급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의 독재를 영속시키는 원인이 되고, 또한 ‘비루마’ 등의 군사정권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각료에 의해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옳지 못한 발언이나 역사교과서문제, 군사화 문제 등에 관해서 아시아로부터의 강한 비판의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오늘에 이르러서, 한국이나 중국 등 일부의 나라들로부터 일본에 대한 비판의 소리만이 전달되어오는 것은,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인 강압이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강력한 경제지배하에 이룩되는 세계화는, 부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경제격차를 만들어내고, 결국 그 영향은, 가난한 나라들 중 가장 가난한 나라에 부과되어 있다. 경제의 세계화는, 동시에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유한 나라로 사람들의 이동을 가져오고, 80년대에는 NCCJ나 각 개교회에도 직접 난민, 이주노동자로부터 상담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세계화의 문제는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에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추종자로서 존재하고, 미국이 실행하는 전쟁으로의 협력을 국제공헌이라 칭하고 자위대의 해외파병의 기회를 살펴왔다. 그리고 13년간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특히 강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일본과 미국의 새로운 가이드라인에 의해서, 헌법의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이 행하는 전쟁에 후방지원이라고 말하며 참가하고, 그리고 그 결과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된 일이다.
다음에 기술하는 사항이 NCCJ가 지난 13년간 다루어온 중요한 과제이다.
1) 천황제에 항거해서
NCCJ는,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과거와 현재에 미친 침략행위를 회개한다는 관점에서 천황제를 비판하여 왔다. 천황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는, 단지 과거의 일 뿐만이 아니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1989년 1월 소화천황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다음해 11월 새천황의 즉위식 ‘대장제’가 거행되었다. 우리들은 ① 정부가 대장제에 관여하는 일과, ② 대장제에 국비를 사용한다는 두 가지 사항에 근거를 두고 즉위의 예식, ‘대장제’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NCCJ는 천주교회나 일본복음동명의 일부회원과 같이 1989년 11월 ‘대장제문제 서명운동센터’를 세워, 즉위의 예, ‘대장제’가 천황의 신격화에 연계되고,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장제’ 당일을 향해서 100시간 단식 기도회를 그리스도교회관 앞에서 갖고, 이 기도회는 언론기관에서도 보도되어, 그 결과 아시아 여러 교회는 일본의 교회들이 역사에 대한 회개를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작년 만들어진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정한다는 법률에도 반대의 의견표명을 행하였다. 우리들의 양심에 비추어서, 천황군대의 아시아, 태평양의 여러나라에의 침략의 상징인 ‘일장기-히노마루’를 국기로 인정할 수가 없다. 천황을 찬미하는 노래 ‘기미가요’를 국가로 노래할 수가 없다. 금일의 문제는 공립학교의 교육현장에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강제 시행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교사에게는, 경고, 감봉 등의 처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교장 등이 ‘왜 노래하지 않느냐’, ‘히노마루’를 게양할 때는 ‘일어서라’고 야단을 치고 있다.
그리고 작년 새 가이드라인 관련법이 국회에서 가결된 직후, 장래 예상되는 국가의 전쟁에 의한 새로운 전사자를 위해서 ‘신야스구니신사법’의 필요성이 의논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천황제와 내셔날리즘과 군사화를 결부시켜 나가려고 하는 책동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것이냐고 묻고 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일본정부에 요청되어 있는 천황 방한 건은, 천황을 일본국가의 최고 책임자로 대하게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반대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번 협의회에서 어떠한 합의를 얻을 것을 원하고 있다.
2) 패전 후 50년(1995년)과 NCCJ 설립 50년(1998년)
우리들은, 1995년의 패전 50년과 1998년의 NCCJ 설립 50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보고하고 싶다.
1995년이라는 해는 한신(오사카 고오베)대지진, 오-무 진리교 사건이 일어나고, 종교법인법의 개정이 행하여진 해였다. 한신대지진에서는, 피해지역의 교회가 교회의 부흥보다 지역의 부흥이라고 하는 자체적 엄한 과제를 부과했다. 오-무 진리교 사건은, ‘가르트’ 종교의 문제점이 표출된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기성종교가, 청년들이 직면하는 마음의 갈등에 응답하지 않고있지 않는가라는 반문을 받았다. 또 종교법인법의 개정은 노골적인 국가의 종교에 대한 개입이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수상의 ‘사죄의 편지’와 같이 국민기금을 통해서, 옛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서 ‘보상금’의 지불을 개시하였다.
우리들은 국민기금은 국가의 전쟁책임을 속이는 도구이며, 국가는 명확한 피해자 개개인에게의 사죄와, 그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배상을 실행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NCCJ는, 1995년 1월 ‘전후 50년을 맞이하며’라는 나까지마 마사아끼 의장의 성명과, 5월에는 ‘일본의 전쟁책임에 관한 일본기독교협의회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성명의 의미는 ① 과거의 죄책을 회개하고, 그 회개의 실재를 구체적으로 증거하자는 NCCJ 회원에게의 호소 및 ② 아시아와 세계의 교회에 대해서, 우리들이 또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고,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면서 걸어간다는 입장표명이었다.
3) 재일외국인의 인권
한일교회협의회는 과거에 가진 6회의 협의회를 통해서 꾸준히 재일 한국․조선인의 인권문제를 공동의 과제로 삼아왔다. 일본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외국인등록법 등으로 관리를 받고 있는 재일외국인의 상황을 천주교를 포함한 에큐메니칼한 형태로 취급하기 위해 1986년 1월 15일 ‘외등법문제에 대처하는 그리스도교연락협의회’를 발족했다. 또 1990년 7월 ‘제1회 외등법문제 국제심포지움’이 한,일,재일의 교회에 의해서 열렸고, 지난 10월에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심포지움을 합해, 8회 모임이 되었다.
1980년대의 후반 NCCJ나 개교회에서는 난민이나 이주노동자로부터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인권문제가 크게 확대되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 NCCJ에서는 1989년 9월 ‘난민․외국인노동자문제 기독자연락회(나중에 ‘난민․이주노동자문제 그리스도교연락회’로 명칭변경)’을 발족시키고, 이 문제를 취급하는 교회의 네트워크 만들기나 세미나의 개최, 뉴스레타의 발행 등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를 취급하는 전국적인 시민네트워크 운동에 NCCJ가 장소를 제공하고, 적은 형태이지만 오늘까지 협력을 계속하고 있다.
외등법문제의 취급에서 발전적으로 이루어진 ‘외국인주민기본법’안 추진을 위하여 NCCJ에서도 에큐메니칼 틀 안에서 이 문제를 추진시키자고 상의원회에서 질의하였다.
4)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일본의 군사화는 지난 13년간에도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특히 1989년의 항만전쟁 이후는 ‘국제공헌’이라는 미명하에서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계획되었다. 1992년 6월에는 ‘PRO협력법’이 강행 가결되어, 캄보디아, 모잠비크에 자위대가 파병되었다. 그리고 작년 주변사태법을 포함한 신 가이드라인 관련법의 성립에 의해서 일본은 드디어, 미군의 후방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자위대를 전쟁에 출동시킬 수 있는 구실을 얻었다. 또한 미국은 극동에 10만인의 주류미군체제를 견지하고, 오끼나와나 한국의 기지를 강화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들이 오끼나와의 전쟁경험에서 배우는 일은, 일본군대는 오끼나와의 사람들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오끼나와의 미군기지에서는 ‘소녀강간사건’에 나타난 것 같이, 끊임없는 여성에게의 성폭력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NCCJ는, 국내에서는 종교인,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과의 넓은 연대 속에서 새로운 가이드라인 관련법 반대나 오끼나와의 기지 철거를 오끼나와의 사람들과 더불어 외치는 운동을 하여왔다. 그리고 오는 수년 내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되는 헌법개악을 염두에 두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서서 일본국 헌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비폭력에 의한 평화의 구축에 참여하는 일을 에큐메니칼의 과제로 ‘평화를 실현하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사무국장 오가사와 요시노부 목사)를 같이 힘쓰고 있다.
그리고 국제적인 연대활동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평화에 대한 책임으로 1989년 3월에 일본․미국NCC협의회를 한국, 필리핀에서 대표를 초청하여 개최하였다. 또한 그 후속으로 미국, 일본, 한국, 필리핀 대표들의 오끼나와 투어가 실시되었다. 1991년 초부터 시작된 ‘항만전쟁’ 반대운동에서는, 중동교회협의회와 협력하여 전쟁피해자 구원 등의 프로젝트 지원 등을 실시하였다. 새 가이드라인 등의 문제를 포함하여 1998년 10월에 일본․미국NCC협의회를, 1999년에는 미군과의 새로운 군사협정(UFA)을 갖은 필리핀NCC와 협의회를 개최하고 공동으로 미국의 군사지배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우리들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에큐메니칼한 국제적인 연대활동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5)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원하며
1984년의 WCC 주최의 도잔소회의는,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교회만의 과제가 아니고 에큐메니칼한 과제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확인에 근거하여 NCCJ는, 1987년 5월에 전후 처음으로 3명의 대표를 북조선에 파견했다. 1989년 9월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KCF)의 대표 4명이 일본을 방문하고 도쿄, 오사카에서 전후 처음으로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해 8월에는 도쿄에서 NCCK와 KCF의 대표와 같이 회의를 하고 1995년의 ‘통일희년의 해’와 8월 15일 전 주일을 통일을 위한 주일로 지키는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1990년 12월에 모인 제3회 글리온회의 이후에는 에큐메니칼 테두리 안에서 일본NCC로서 협력을 계속하였다. 1995년 교토에서 개최된 WCC가 주최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회의’에서는 주최국으로서 협력하였다.
1995년 북조선의 홍수피해에 대해서는, 다음해 NCCJ로부터 2명의 대표를 위문차 파견했다. 그후 계속하여 북조선의 식량위기에 응답하기 위하여 NCCJ는, 조선식량긴급지원특별위원회(그후 ‘조선인도지원특별위원회’로 명칭변경)를 설치하고, 북조선으로의 식량지원과 방문단의 파견(1997-1999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북조선으로의 식량지원을 전담하는 NCCJ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에도 참가하고, 오늘에는 북조선식량지원NGO연락회의 중심멤버가 되어있다. 또한 국제적인 연대를 확장하기 위해서 NGO와 같이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일 등을 같이하여왔다.
지난 13년간에 있어서의 NCCJ의 기본자세는
일본사회 안에서 소수자로서 산다는 일을 선택하여왔다. 소수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이 땅의 소금의 역할을 갖고 가려고 노력하여 왔다.
NCCJ는 1995년, 전후(패전) 50년을 맞이하고, 1998년 NCCJ 설립 50년을 맞이한 때를 기억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볼 시간을 가졌다.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그 일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걸음을 걷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일본정부에 대해서 전쟁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계속해서 묻는 채임을 갖고 있다.
NCCJ는, 1998년 개최한 선교회의에서, 이 사회 안에서 약하게 만들어진 사람들 편에 서서 나가기로 확인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여러 사람들과의 공생을 목표로 하는 ‘외국인주민기본법’ 안을, 에큐메니칼 형태로 같이 짊어지고 가기로 한다.
3. 새로운 공동의 가능성을 구하여
나의 역할은, NCC의 13년간의 주요한 관심을 술회하는데 있지만, 최후로 한 말씀만 한국NCC와의 공동의 가능성을 말씀드림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한다.
1) 과거에 있어서 일본NCC는, 한국의 민주화투쟁에 적지않게 협력을 했다. 그러나, 금후 일본NCC는 일본의 군사화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여러 가지 움직임에 의해서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NCC의 협력이 필요하게 된다.
2) 새로운 흐름가운데 한일 신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있다. 그리고 ‘한국측으로부터 일본의 교회에 대하여 사죄를 넘은’ 새로운 관계만들기의 필요성이 자주 제안되고 있다. 과거의 역사를 업신여기려고 하는 교회를 포함한 금일의 일본의 상황 가운데, 우리들은 이러한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에 관련된 문제를 한일NCC에서 개방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3) 교류와 대화와 공동과제의 확인을 위해, 한일교회협의회를 3년마다 한번, 장소를 서로 바꾸어 가며 개최하는 점을 검토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 협의회가, 우리들의 상호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보고를 마칩니다.
첫댓글 김홍식 간사님 URM에 대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첨가하여 한일 URM에 대한 자료(회의자료 포함)도 좀 부탁드립니다.
자료 올려주신 김목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글로도 자료실에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글 파일은 등급을 업시켜 주시면 올려 놓겠습니다. 읽기 권한 밖에 안되서요... 그리고 한일URM관련 자료들은 분야가 너무 많아서 다 올려 놓을 수 없고 또 예전 타자기 시절 자료들은 파일화 된 것이 없습니다. 최근 것들 중심으로 찾아 보겠습니다.
등업했습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