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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그룹사운드의 흔적 이야기 스크랩 데블스
마운틴보이 추천 0 조회 143 10.01.18 2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지촌서 잔뼈굵은 '악마들' 쇼무대 스타로 발돋움

6인조 소울 록 그룹 데블스. 대표 곡인 ‘그리운 건 너’와 ‘너만 알고 있어’, ‘몰라요 몰라’는 언제 들어도 편안하고 흥겨운 숨겨진 한국 소울 록의 명곡이다. 1969년부터 브라스가 가미된 사운드를 최초로 시작했던 이들은 말쑥한 양복 차림보다는 태권도복이나 망토, 잠옷 같은 무대 복장에 맨발 차림도 불사했던 튀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데블스의 진가는 엽기적이었던 기발한 쇼맨십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소울 풍의 탄탄한 창작곡을 수록한 독집 앨범을 석장이나 발표한 진짜 밴드였던 것이다. 데블스는 한국 록의 3대 계보로 통하는 신중현, 김홍탁, 최이철과는 상관없는 자생적 그룹이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기지촌을 주무대로 잔뼈가 굵은 질긴 생명력의 아웃사이더였다.

리더 김명길은 대한제분의 총 책임자였던 부친 김익성씨와 모친 유순분 씨의 3남 1녀 중 둘째로 1947년 6월 26일 인천시 하수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선주였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해방 당시 좌우익 갈등에 휘말린 부친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부친은 할아버지의 반대로 가수의 꿈을 접었던 분. 명랑한 성격의 김명길은 인천 송현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등교길에 행진곡을 들으며 흥얼거리길 좋아했다. 집안 어른들을 통해 들은 김용만의 ‘방랑시인 김삿갓’을 처음 부른 이후 6학년 때 닐 세다카의 ‘Oh! Carol’같은 팝송을 접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at다 부른 노래는 식사 시간에 마음 속으로 끝까지 불러야 밥을 먹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 했다.”

동인천중에 입학하자 사춘기가 된 그는 염세적으로 변해 갔다. 이 때 접한 클리프 리처드 주연의 음악 영화 ‘틴에이저 스토리’의 삽입곡들은 음악적 감성을 자극했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던 형을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등 많은 외국 노래를 접했다. 당시 음악 실기 시간에 어려운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이에 음악 선생님이 “방과후에 노래 공부를 하자”고 했지만 도망을 다녔던 그 시절에 대해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인천공고 기계과에 진학해 경기도 대표 아마추어 레스링 선수로 활약했다. 1966년 고교 졸업 후 신검을 받고, 67년에 입대 영장을 받았다. 당시는 맹호, 청룡부대 등 전투 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던 시기. 지원자가 없자, 신검에서 갑종 판정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해병 청룡부대로 차출되었다. 월남으로 갈 처지가 되자, 김명길은 음악을 하기 위해 잠적해 버렸다. 병역 기피자가 되었던 것. 신분을 숨겨야 했던 그는 67년 그룹 앰비션을 결성해 인천의 기지촌인 신포동의 미군 클럽 '캘리포니아‘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멤버는 기타 이홍섭, 베이스 최진화. 인척들의 간섭이 없는 파주 용주골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음악 장비를 도둑맞아 인천으로 돌아왔다. 밴드를 시작하며 영향을 받은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등 흑인 음악. “그 때 우리는 비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흑인 음악을 더 좋아했죠. 그래서 우리 레퍼토리는 거의 '새까만' 곡이었죠.” 당시 기지촌을 통해 입수한 외국 빽판들을 야외 전축으로 들으며 음악을 익혔다. “당시 얼마나 판을 많이 들었던지 까만 판이 하얗게 변했을 정도였다.”

1968년 6월. 파주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연주하던 베이스 최성근이 합류하면서 드럼 정태섭, 세컨드 기타 박인규와 4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서로 잘났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을 담은 악마들이란 뜻의 ‘데블스’로 이름을 정하고 다시 파주로 갔다. 하지만 매니저 역할을 하던 박영걸이 잠적하면서 기지촌 주변 밴드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이에 팀을 떠나려다가 양공주판이었던 살벌한 왜관의 미군 클럽 실버 달러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젊은 치기탓이었다. 이웃에 있던 클럽 킹에는 김민배, 연석원, 도한길의 록그룹 에인절스가 출연하고 있었다. 연석원은 동향인 인천 출신이었다. 당시 부산 하야리에서 미8군 오디션을 받은 데블스는 그러나 A클라스로 합격해 전북 김제의 미군 클럽 하우스 밴드로 부킹이 되었다.

그 때 에인절스가 데블스 후임으로 실버 달러로 왔다. 이 인연으로 두 팀은 통합을 해 6인조로 재구성되었다. 곧 베이스 최성근은 테너섹소폰으로 전향해 브라스 밴드를 구성했다. 다시 파주로 올라와 활동하던 중 조성국의 도움으로 종로 2가 관수동의 음악 살롱 라틴 쿼터로 진출했다. 라이더스, 챠밍 가이스, 팝 콘스, 스핑크스, 셰그린 등 여러 록 그룹이 출연을 했던 명소였다.

주인은 에드훠의 보컬로 명성을 날렸던 서정길씨. 노래에 따라 서로 스텝?맞추는 독특한 무대 매너를 선보인 데블스에 반한 서정길은 장기 계약을 요청했다. 하지만 밤에는 파주에서 낮에는 서울에서 연주하는 강행군이 지속되자 파주 클럽에만 전념했다.

라틴 쿼터에서 철수한 후 서정길의 주선으로 시민회관 ‘AAA쇼’무대에 처음 섰다. 이 때가 1969년 말. 맨 처음 데블스는 쇼의 진행이 잘못되거나 출연자의 펑크 때 대타용으로 무대에 섰지만, 이들의 연주에 반한 박영호 단장이 정식 계약을 체결해 주었다. 당시 AAA쇼의 출연 가수들은 신중현, 펄 시스터스, 김추자, 쟈니 리, 정원, 이태신 등 당대의 스타들. 후에는 나훈아까지 합류했다. 지금은 트로트의 황제이지만, 당시 나훈아는 멤버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노래 반주를 부탁하던 무명 가수였다.

 


파격과 엽기의 무대연출
한국적 소울리듬의 한 획 그어


1970년 초 명성을 듣고 찾아 온 동아방송 라디오 PD 이해성의 주선으로 임희숙과 함께 ‘밤의 그룹 사운드’에 첫 출연했다. 이후 김상희간 진행한 TBC TV ‘백화가요 쇼’에 출연하면서 방송계에 알려졌다. 이후 MBC 라디오 ‘젊음을 가득히’의 전속 밴드가 되면서 이수만이 진행했던 TBC 라디오 ‘비바 팝스’ 등 여러 방송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68년부터 시작되어 화제가 되었던 보컬 그룹 경연 대회는 신인 뮤지션들의 등용문이자 각 레코드사의 가수 픽업장이 되었다.

1970년 7월 ‘제 2회 플레이보이 배 전국 그룹 사운드 경연 대회’. 대상은 히 식스, 금상은 라스트 찬스가 차지했지만 화제를 모은 그룹은 단연 데블스였다. 해골이 그려진 옷을 입고 시체로 분장한 쇼걸을 담은 관을 연석원이 끌고 등장한 발상이 제법 충격적이었다. 덕분에 구성상을 수상했다. 리드 싱어로 나선 연석원은 제임스 브라운의 ‘Goodbye My Love‘를 뛰어난 가창력으로 소화해 가수왕상을 거머쥐었다. 이에 주간경향에서는 70년 9월 30일자의 음악 살롱 실버 타운 코너에 데블스를 대표 주자로 소개했다. 또 이들의 무대를 보고 반한 작곡가 김영종이 음반 제작을 제안해 왔다.

기지촌과 이태원 클럽을 전전하는 무명 생활을 거쳐 온 데블스는 1971년 10곡이 수록된 데뷔 음반을 세상에 발표했다. 번안곡이 주류를 이뤘던 당시, 데블스의 첫 음반은 번안곡 두 곡을 제외하곤 작곡가 김영종의 작품과 김명길의 창작곡 ‘눈 나리는 밤의 데이트’ 등 대부분 창작곡으로 구성된 의미있는 앨범이었다. 그 때의 멤버는 리더에 기타 겸 보컬 김명길, 건반 백동근(도한길과 교체), 베이스 박인규, 테너색소폰 최성근, 보컬겸 기타 연석원, 드럼 정태섭의 6인조 라인업. 이후‘소울 대왕’으로 불리며 마이하우스와 닐바나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주축 멤버 연석원의 군입대로 또 다시 멤버 이동이 이루어졌다. 여대영 악단 출신의 트럼펫 주자 홍필주가 가세한 데다 색소폰 최성근이 키보드를 맡았다. 테너 색소폰에는 박문이 영입되고 베이스는 박인규에서 킹크스의 리더 채완식으로, 드럼도 정태섭에서 머니스의 리더 유기원으로 교체되었다. 이 멤버가 소위 ‘철창 앨범’으로 불리는 74년의 전설적인 2집 음반에 참여한 정규 멤버들.

2집은 멤버들이 장충동 자유센터의 철장 대문을 뒷모습으로 걸어가는 파격적인 재킷을 선보였다. 저항적인 향내가 진동하는 재킷엔 숨겨진 사연이 있다. 병역 기피자였던 리더 김명길 때문. 처음‘몰라요 몰라’를 타이틀곡으로 삼으려 했지만 매니저 박영걸씨가 “그 곡을 타이틀로 해 매스컴을 타면 붙잡혀 갈 거냐”고 제지하는 바람에 ‘그리운 건 너’로 변경했다. 비운의 곡이 된 ‘몰라요 몰라’는 트럼펫과 색소폰 소리가 낭랑한 데블스의 숨겨진 명곡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2집은 멤버들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 활동 정지를 당하면서 잊혀졌다. 뒤늦게 방위병이 된 박명길은 “훈련소에서 점심 시간에 라디오를 트니까 저희 음악이 나와 미칠 것 같더군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브라스가 가미된 탁월한 리듬감에다 울부짖는 듯한 소울 창법이 매력적인 이 저주받은 명반은 최근 LP로 재발매되었다.

1975년 데블스는 박영걸씨가 창립한 노만기획에 소속되어 그룹명을 친구들로 개명했다. 77년 ‘너만 알고 있어’, ‘사랑의 무지개’ 등이 실린 3번째 독집을 발표했다. 민요와 소울을 접목한 ‘신고산타령’,‘뱃노래’는 흥미로운 시도였다. “당시 작곡을 해도 심의를 넣으면 번번히 걸려 작곡보다는 편곡에 관심을 두었다.” 이후 편곡상을 수상한 이은하의 ‘밤차’(78년)와 ‘아리송해’(79년), 정난이의‘제 7광구’(80년)등은 그의 편곡 작품. 강변가요제에 초청되었던 데블스는 1979월 7월 두 달 간 부산 광복동의 나이트클럽 바카스로 내려갔다.

이 때 부산호텔에서 드럼 유기원의 생일 파티를 열다 국제시장의 건달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지역 언론에 ‘서울에서 원정 온 D모파’로 보도된 이 사건으로 멤버들은 벌금형을 선도 받으며 2달 정도 활동을 중단했다. 주춤했던 데블스는 79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오픈한 마포 가든호텔 나이트클럽 오픈식에 ‘신중현과 뮤직파워’와 함께 초청되었다.

81년 5월 10일 박영걸씨가 개최한 이은하 쇼에 참가했다. 문화체육관에서부터 전국을 순회한 공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발호로 인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대실패. 팀이 깨진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후 박문이 그룹명을 이어 받아 홍필주 최완식과 함께 하얏트호텔 무대에 서며 데블스를 재가동해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김명길은 81년 7인조 밴드 퀘스쳔스를 결성해 워커힐 클럽에서 활동을 하며 음반도 한 장 발표했다. 음악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김명길은 그 동안 작곡해 둔 노래들을 발표하기 위해 새로운 솔로 신보 음반 제작을 꿈꾸고 있다.

군입대로 탈퇴했던 연석원은 황해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진지하게 음악을 연구했던 그는 대중음악계의 거물급 인사로 통한다. 70년대 중반‘연석원과 아웃사이더’를 결성해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했다. 민요를 채보해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독집‘어부’는 의미심장했다. 80년대들어 편곡자로 변신했다. 박인수, 박강성을 비롯해 민중 노래패인‘노래마을’의 음반과 포크의 명반으로 꼽히는 곽성삼의 2집‘길’음반은 모두 그가 편곡한 앨범이었다. 이후 음악공부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간 그는 KBS 서울 올림픽 전야제에서 음악감독을 맡았고 2000년에는‘재즈 화성악(성연사)’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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