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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약속” 후기
어떤 날 아침 새벽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벌서 그 내용의 태반이 망각 속으로 살아졌지만 그래도 그 속의 진실만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하고 싶은 말을 소설 속에 담아 놓는다는 것은 아주 잘된 착상이라고 본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지?.
아무도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
외출중입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 주십시오.
용건을 간단하게 남겨주시면 돌아오는 즉시 전화 걸어 드리겠습니다.
녹음된 소리.
”용건은 간단하지 않은데 너무 길어서 너무 많아서 백지로 접어 보낸 편지 속에 모두 담겨 있다.
이 밤이 새면 너는 새하얀 면사포를 쓰고 너의 아빠의 팔에 네 손을 올려놓고 3분간 걸어 나가면 그 사람 손에 인계되겠지.
우리들의 그 약속들은 어디로 가고……
그러나 나는 안다 우리의 그 약속은 언젠가는 꼭 지켜지리라고……
천년 후에라도 아니 그다음 천년 후에라도…….”
얼마나 허무 하고 아팠던 삶이었던가?
이제 그 마지막 구절 에서 천년 후에라도 이루어질…… 아니 그다음 천년 후에라도 이루어져 아프지 않게 살아 갈 수 있는 또 다른 생이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믿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원고지 뭉치를 던져 놓고 간 그 사람의 삶,
그 하소연의 주인공은 한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것 밖에는 알 길이 없었다는 이 출판사의 얘기다.
오래전부터 원장님의 친구인 한 노련한 의사인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젊은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한 몇 달 동안이지만 인생을 회상하면서 미련 없다고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살아가는데 오직 한 가지
“하느님 이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편안히 가게만 해주십시오.”
하면서 기도 하신다던 아무 욕심도 없다는 노인이었지요.
“남 보기에 갈 곳도 많고 의지할 데도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이 몸 하나 의지할 공간이 없고 몸을 쉬일 이 작은 마음의 공간도 없습니다.”
라고 하시던 쓸쓸한 노인이었지만 표를 내지 않고 즐거운 척 하시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시던 老醫師(노의사)님이 기억납니다.
젊은 봉사자들과 같이 있었던 짧은 몇 달이지만
“이 시간들이 내 마음 속에 너무도 뚜렷이 첫 사랑의 기억 같이 남아 있을 거야”
라고 말 하였지요.
어렵게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더 공부 한다고 애쓰다가 얻은 병을 치료 하려고 파견 나갔던 병원에서 어떤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나 외로워서 그만 푹 빠지고 말았다.
한여름 밤에 바닷가를 산책하며 무수한 별들과 서산에 지는 달을 바라보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손잡고 걸었다.
한여름 밤의 바다는 燐光(인광)이 도깨비불 같이 떠다니고 그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가 마치 자체의 불빛을 발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속에서 수영을 하면 우리의 몸은 천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면서 즐거운 환호성을 밤바다에 띄워 보내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었다.
초저녁 달이 동편에 뜰 때에 냇물이 졸졸 흐르는 숲속에서 명곡의 번역된 가사로 흥얼거리면서 부르던 노래는 그 가사 그대로
“서 편에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편의 산엔 동이 트누나.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 띄운 얼굴로 편히 가소서
친구 내 친구 편히 가시오!“
하고 이별의 노래를 불러주며 밤을 밝히며 이야기하던 여인은 친구 이상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내 뼛속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야만 했던 쓸쓸한 이별을 했다.
천년의 약속만을 간직하고 헤어졌다.
이 쓸쓸한 이별에 바로 뒤에는 또 다른 슬픈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솥의 밥을 먹으며 한방에 살던 대학 동창인 아주 친한 벗을 죽음으로 갑자기 잃어야 했던 나는 홀로 남겨진 외롭고 쓸쓸 하던 마음이 공허 하던 시련의 시기을 겪고 있었다.
친구를 잃고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져 나 자신을 주체 못하고 몹시 방황하고 있었다.
병원 상사의 권유로 만난 시골에서 대학이라도 나왔다는 여자와 짧은 만남으로 앞뒤 생각 없이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말았다.
첫 번째 단추가 이렇게 끼워진 것이다.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투기가 많고 인정이 없는 여자였다.
실현 불가능한 자기의 원칙을 만들어 놓고 이를 지키라고 강요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여자와 이야기라도 나누면 금방 부부 싸움이 일어나고 그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던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친 후배들이 미국에 가기 위해 잠시 나를 따라와 우리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후배에게 조금만 잘해주면 곧 다툼이 일어나 부부 싸움이 끊어지지 않았다.
레지던트 하면서 동시에 대학원 박사 학위 공부를 하여야하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것을 본 원장님께서 몰래 병원 약품으로 보조를 해 주시었는데 그것을 집에 가져다 놓았다가 서울 갈 때 가져가서 여비와 교육비를 보태고 있었다.
부부가 작은 다툼을 하면 병원장에게 자기 남편이 병원 약 가져다 팔아 먹는다고 고발을 하여 원장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곤혹스러웠던 일 년이 지나고 예정대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런 생활에서도 아들이 하나 나왔다.
집에 놓아두고 온 자식과 처의 생활은 친정의 도움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처의 기세는 더 올라갔고 혹독한 120일간의 군의 학교 훈련과 집에 두고 온 가족의 문제로 나의 정신과 육체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머리털은 원형 탈모증으로 보기 흉하게 여기 저기 빠지고 발은 무좀으로 짓무르고 한창 자랄 때 제대로 먹지 못해 자라지 못 했고 원래 왜소한 체격에 볼품없는 군복까지 입혀 놓으니 육군 대위 계급장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군의관 생활이 시작 되었다.
최전방 DMZ 연대 의무 중대장으로 발령이 나서 민가에서 떨어진 민통선 안에 있는 부대에서 근무 하게 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의무 중대장이기 때문에 당번 병들이 밥 해주고 신발 닦아주고 침대 펴주고 세숫물까지 떠다 받혀주니 내 일생을 통해 이때가 제일 호사스러운 생활은 이었다.
의사로서의 훈련은 제대로 받은 전방에는 처음은 專門醫(전문의) 군의관이기 때문에 전방 연대 군인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좋았다.
원래 모질지 못한 성격에 중대원 사병들이 휴가를 신청하면 무조건 내주게 되어 선임 하사에게 여러 번
“중대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주의를 받았다.
이때가 바로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까지 습격 하고 무장 간첩을 계속 보내고 북한에서 생물학 전쟁인 세균전 까지 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실제로 전방 부대에는 水因性(수인성) 전염병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일어나 전 육군이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미생물을 전공하고 또 육군에서 유일하게 미생물 主特技(주특기)를 가진 장교였다. 전방 의무중대장 보다는 야전 의무시험소에서 생물학전에 대비해야 할 미생물 전문 요원이었다. 이 호사스럽고 편안한 DMZ 안의 醫務中隊長(의무중대장)은 이 몇 달로서 끝을 맺어야 했다.
원주로 이동하여 역시 영내 생활을 하며 사병들이 날라다 주는 식사와 일과 후 책상위에 만들어주는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마음과 몸이 편한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처와 아들이 원주시내에 셋방을 얻고 다른 전방 군인 장교들이 하는 대로 통근차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런대로 전방 군인 가족으로 해주는 밥을 먹고 출퇴근 하는 보통의 장교 생활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대학원 강의 받으러 서울 나가고 부지런히 대학의 학생 실습준비와 대학 연구실 일을 열심히 하였다.
육군에서는 생물학전에 대비하는 전문 요원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나의 미생물 주특기를 살려 더 전문요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장기 군대 복무와 국비 미국 유학을 권유 받았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일본군 마루타 부대에 있었던 선배 교수로부터 절대로 생물학 전쟁과 관계되는 연구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이것만은 완강히 거절 하였다. 그 대신 월남전에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가족들은 원주에서의 셋방살이도 접고 서울로 이사를 보내고 오음리 파병 훈련소로 가서 한 달간의 파병 훈련을 받고 월남 십자성 부대 102 병원 병리 시험 과장과 검역장교로서 파병근무를 마쳤다.
검역장교로 귀국 장병을 따라 서울로 출장을 온 1989년 12월 25일 성모 병원에서 둘째가 태어났다.
세월은 잘도 간다.
15 개월의 월남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아버지가 뇌졸중이 일어나 아들이 귀국하는 부산 부두에 환영식에도 못 오시고 서울 위생 병원에 입원하시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모시고 나가라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근무지는 서울이 아닌 부산 제3육군병원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새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러지자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 처가 아니다.
양노원이나 노인병원이 있는 한국이 아니었다.
유일한 정신 병원으로 치매 환자를 돌보아주는 병원은 청량리 뇌병원 하나 밖에 없었다.
면식도 없는 원장 최신해 박사를 찾아 갔다.
나의 주임교수 장익진 박사와 최신해 박사는 연세대 동문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장 박사에게 소개장도 부탁 하지 않았다. 내직업도 의사이기 때문에 직접 대면할 수 있었고 내 형편과 사정을 들어주시었다.
“장익진 박사 밑에서 미생물을 하는 현재 군의관입니다. ………………………………”
하고 말씀드렸더니 사무장을 불러 지시 하셨다.
“닥터황 부친을 입원 시켜드리시오”
너무나 고마우신 분이고 내가 의사이기 때문에 편의를 보아주신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된 것을 이때 같이 고맙게 여긴 적이 없다.
다음날 아버지의 입원수속을 끝내고 부산 근무지로 내려갔다
부산에서 또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데 전방 부대와는 달리 육군 소령의 영내 거주는 허락 되지 않았다. 서면 로터리 근처에 있는 좀 큰 개인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보아 주기로 하고 우선 숙소를 해결하였다.
매주 주말에는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입원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돌아 왔다. 당직을 하는 병원의 한 직원이 서울에 아들이 둘 있다고 하니 커다란 강아지 인형 두 마리를 애들 주라고 선물 하였다. 이것이 또 화근이 되어 어떤 여자가 주었냐고 또 한 번 소동이 나서 여기에서 오래 있지도 못하게 되었다.
뇌막하 출혈의 후유증으로 오는 치매는 겨우 아들을 알아볼 정도로 심하고 월남에서 출장 올 적마다 모아드린 돈은 어디다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기억을 못하신다.
그래도 세월은 간다. 또 일 년이 지나니 3년 반의 군대 생활이 끝나 드디어 제대하고 서울로 올라 갈 수가 있었다.
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카톨릭대학교 연구실로 돌아갔다. 대학원 석사 2년, 박사 4년의 전체 또 다른 6년의 과정은 끝났으나 아직 학위는 못 받았다.
집의 방 한 칸에다 월남서 구해온 의료기구들로서 병원의 중환자실과 같은 병실을 꾸며 놓고 아버지를 병원에서 모시고 나왔다. 그동안 나 대신 아버지를 돌보아 주신 청량리 뇌병원 스태프들과 최신해 박사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치매 시아버지를 돌보는 며느리와 아들은 항상 싸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치매 환자는 딸이 돌보아야지 며느리가 돌보면 안 된다. 가끔 아버지의 피부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 상황 판단이 되지만 그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는 아들의 심정은 겪어 보아야만 인수가 있다.
결국 일 년여 앓던 아버지는 1972년 11월21일 운명 하셨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에 두고 온 다섯 명의 아들딸과(기옥,기란,정림,기림,기명)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65세로 마감하셨다.
장례를 치를 때까지 나의 눈물은 말라 있었고, 장사를 지내고 와서 이틀간을 한없이 울었다. 이틀 동안 먹지도 않고 계속 울기만 하였다.
고생만하시던 아버지 이제부터는 그래도 좀 잘 모실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도 못 참으시고 가시다니.
아버지의 恨(한), 북에 놓아두고 온 아버지의 아들딸들, 나의 형제들, 아버지의 사랑하시던 부인, 나의 어머니, 아버지는 가셨지만 이제 내가 더 어머니가 보고 싶고 나의 누이동생들이 더 보고 싶어진다.
목 놓아 울고 또 울었지만 내 주위에는 이렇게 그리움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만이 더욱 외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