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천재 사로잡은 ‘매혹의 연인’/미모·재능 겸비… 니체·릴케·프로이트 창작혼 고무
여성의 불륜은 남성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방종으로 오히려 남성을 포로로 만든 여인이 있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러시아 로마노프왕가에 충성하는 장군의 외동딸이었던 그는 1937년 76살로 죽는 그 순간까지 남성들 위에 군림했다.
니체로 하여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게 했고, 릴케로 하여금 서정시인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프로이트에게조차도 경의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살로메는 역사상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남성들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인간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살로메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지 않은 지식인이 없었고, 그로부터 위안을 느끼지 않는 남성이 없었으며, 그가 먼저 남성을 떠났지 남성이 먼저 그를 버린 적도 없었다.
러시아 주재 네덜란드 대사관 소속 목사 헨드리크 기로트와 사랑에 빠졌을 때 루는 17살의 소녀였는데 이 첫사랑으로 사랑에는 눈을 떴지만 여성으로서는 눈뜨지 못했다고 한다(H. F. 페터즈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열아홉살 때 취리히로 간 뒤 살로메는 유럽 일대를 사랑의 무대로 삼아 항상 두 남자 이상씩을 가까이서, 또는 원격조종하면서 도시와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더욱 희한한 사실은 26살 때 인도네시아인의 피가 섞인 독일인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안드레아스와 결혼해 그가 84살로 죽을 때(1930년)까지 부부로 지내면서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전혀 없었고, 집에 머물기보다는 외박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이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소문이 구구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철학자 파울 레가 살로메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동거할 무렵 살로메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삼위일체 기념사진 사건’이 터졌다.
살로메는 평소 공공연히 한 집에서 두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꿈 이야기를 ‘삼위일체’라 하곤 했는데, 살로메에게 홀딱 넘어간 레의스승 니체가 구혼을 했다.
레에게 마음이 쏠린 살로메를 끝내 포기하지 못한 니체는 기념촬영장에서 달구지를 끄는 두 남자(니체와 레)에게 살로메가 채찍을 휘두르게 하여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신의 죽음을 목격한 이 세계로부터 나를 구제해줄 여성의 사랑을 열렬히 갈구”하던 니체였던지라 살로메에 대해 “나는 그때도 그를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면서 “루와 함께 나는 통속에서 살련다”고 절규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니체 <나의 누이와 나>).
독설가 니체가 살로메를 찬양만 한 것은 아니어서 “냉감증 환자”라는 특유의 빈정거림을 내뱉기도 했으나 살로메는 약삭빠르게 니체가 보내온 편지를 발췌·출판해 명성을 얻었다. 미모에다 재능까지 인정받은 살로메는 당대의 명사들 사이를 누비며 한껏 그 마력을 발휘하다가 36살 때 14살 연하의 풋내기 무명 시인 릴케를 만난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결핍에 의해 서서히 죽어간다”는 명언을 남긴 살로메는 연약해 보이는 릴케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랫동안 당신의 아내였습니다. 내게 당신은 최초의 실재였으며 당신을 통해 육체와 인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릴케는 어떤가. 살로메가 촌스럽다고 한 르네란 이름을 라이너로 바꿨고, 성서의 <아가>에 나오는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그대는 내 마음을 빼앗아 갔노라”는 구절을 낭송하다가 어느새 “여왕”으로, “당신은 나의 봄바람, 여름비”로 높여 불렀다.
남성들이 살로메가 뜨개질하는 모습만 보고서도 “열심히 성교하는 것 같지 않느냐”고 할 만큼 루의 육체와 정신은 온통 남성을 사로잡는 노획자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나치는 루가 죽은 뒤 가택을 수색해 책과 편지 등을 몰수해 갔으며, 루의 유골은 괴팅겐 시립묘지의 남편 무덤에 함께 묻혔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 한겨레신문 1995. 04. 16.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