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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천이씨대종여로 원문보기 글쓴이: [溪巖]환암공파[영양군25세]
Ⅳ. 강호문학(江湖文學)의 창도자 1. 농암문학의 창작현장 : 분강(汾江)1) 분강은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의 낭만적이면서도 탈속적인 한국적 풍류가 펼쳐진 현장이다. 농암은 「어부가」, 「농암가」 등의 농암문학의 창작 현장인 분강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묘사했다.
북쪽은 높은 산이 우뚝 솟아 구름에 닿아 있고 서쪽은 긴 숲이 길에 끌려 우거지고 동쪽은 긴 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멀리 청량산으로부터 만학천봉 사이를 구비 돌아 반나절 정도 흘러와 관(官)의 어전(魚箭, 통살로 물고기 잡는 것)에 이른다. (여기서) 물의 흐름을 막으니 그 모습이 긴 성과 같고, 통살물(箭水)이 부딪혀 아래에 깊은 못(淵)을 이루었는데, 이름을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못은 절벽을 베개로 하는데, 절벽 위에는 ‘병풍암(屛風庵)’이라는 옛 암자가 있다. 기암괴석과 좌우의 뾰족한 봉우리의 그림자가 못 밑에 떨어져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여기서부터 물결은 점점 잔잔하여 맑고 깨끗하다. 이 물굽이가 농암 아래에 이르면 넓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만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汾江)’이라 한다. 강 가운데는 반석이 있어 마치 비단자리를 깐 듯하므로 이름을 ‘점석(簟石)’이라 한다. (농암집 권4, 「애일당중신기)」 분강에는 귀먹바위(聾巖)와 더불어 사자바위(獅子石), 코끼리바위(象巖), 자리바위(簟石)가 있었고, 이들 바위에서는 농암 특유의 강호풍류가 펼쳐졌다.2)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이 연출된 이 모임에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온계(溫溪) 이해(李瀣),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 퇴계(退溪) 이황(李滉),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어은(漁隱) 임내신(任鼐臣),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등 많은 인물들이 회동하였다. 위의 인물들 중 특히 퇴계와의 회동은 매우 빈번하고도 긴밀하게 이루어졌는데, 퇴계와 회동한 당시 모습을 농암은 아래와 같이 잘 묘사해 놓았다. 자리바위(簟石)의 유상을 경호(景浩 : 退溪의 字)와 중거(仲擧 : 黃俊良의 字), 그리고 여러 자제들과 함께 했는데, 조그만 배를 타고 귀먹바위(聾巖) 아래서 뱃줄을 풀어 천천히 흘러가서 사자바위(獅子石)를 지나 코끼리바위(象巖)에 이르러 배를 바위에 의지해 묶어 놓고, 주변을 두루 구경하고 나서 다 함께 그 위에 올라가서 만져보고 놀기를 오래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래로 내려와 바로 자리바위에 이르니, 이 때는 비가 새로 개이고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깨끗하게 씻기어 매끄럽기가 마치 구슬 같았다. 다만 바위틈에 물이 고여 있어서 자리를 골라 차례 없이 빙 둘러앉았고, 조그만 술상을 차렸는데 예를 갖추긴 했으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했다. 이렇게 하여 종일토록 술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여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는 분강 한가운데 드리워 있고, 강물은 여기에 이르러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자리 곁으로 흐르고, 그 아래는 경호가 앉아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목금(木禁 : 나뭇가지로 만든 조그만 뗏목)에 올려 띄우니 경호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하니, 중거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하였다. (농암집』권1, 「우여범주유점석차경호(雨餘泛舟遊簟石次景浩)」) 기록의 치밀함이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인다. ‘술잔에 술을 부어 목금(木禁)에 올려 띄우니 경호(퇴계)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의 순박한 이미지는 인욕이 스며들지 아니한 순진무구의 세계로 초월한 인간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농암과 퇴계는 이 점석의 유상을 무척 즐겼는데, 이 점석의 유상은 처사가 자연을 사랑하고 시와 인생을 즐기는 풍류의 지고한 경지를 보여주는 현장으로 뒷날 농암이 「어부가」를 찬정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곳이다. 국문학사에 2대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도산십이곡」과 함께 「어부가」는 이 점석의 뱃놀이의 서정과 낭만이 빗어낸 걸작이 아닐 수 없다.
2. 농암의 국문시가3) 농암은 특히 강호생활(江湖生活)의 풍류(風流)를 즐기는데는 읊기만 하는 한시보다도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국문시가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스스로 「효빈가(效顰歌)」,「농암가」, 「생일가」같은 단가(당시는 아직 시조창이 나오기 이전이므로 시조라는 명칭이 없었음)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83세 때 잊혀져 가던 「어부가」(12장)를 재발견하여 이를 개작하였는데, 그에 의하여 개작된 「어부가」(9장)는 흔히 농암 「어부가」로 불리며 조선후기의 한국문화(문학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원래 중국의 악부시(노래로 부를 수 있는 시)인 사(詞)에서 유래한 기존의 「어부가」(12장)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詞)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그가 이를 재발견하고 다듬어 놓음으로써 「어부가」가 우리나라 노래인 장가(당시에는 가사를 장가, 시조를 단가라고 불렀음)로 재창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 효빈가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란 말뿐이오 갈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고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농암은 생애를 바쳐 헌신했던 수십 년간의 관료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로한 부모님과 숱한 가솔의 생계를 돌보느라 벼슬길에 들어선 지 44년이 지나서야 「효빈가」를 부르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하면 부끄러운 귀거래이지만 입으로만 귀거래를 읊조리고 있는 다른 벼슬아치들에 비기면 깨끗하고 욕심 없이 귀거래하는 까닭에 스스로 도연명을 효빈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歸去來)’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효빈가(效顰歌)」4)라는 감격적 소회의 시조를 읊었음을 아래와 같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정 임인(1542년) 가을, 농암 늙은이 비로소 관직을 벗어나 국문(國門)을 나섰다. 배를 빌어 타고 한강에서 전송의 술잔을 나누다, 취하여 배 위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문득 산들바람이 일었다. 도연명의 ‘배는 요요히 가벼이 흔들리고 바람은 표표히 옷깃을 날린다(舟搖搖以輕颺 風飄飄而吹衣)’는 구절을 읊조리노라니, 돌아가는 감흥이 더욱 무르익었다. 흡족하여 홀로 웃으며 이 노래를 지었는데, 노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바탕으로 하여 지었기에 「효빈가」라 했다. (농암집 권4, 「효빈가 병서」)
비록 「귀거래사」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토만 붙여 놓은 듯한 대목이5) 있기는 하나, ‘귀거래’의 정취와 감흥이 절제된 언어로 잘 표현되어 있다. 초장에서는 말로만 귀거래를 외치고 실천에 과감하지 못한 현실에서 늦게나마 귀거래를 단행했다는 자부심이 엿보인다. 종장에서는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는 동안 소원해진 고향산천과 화해하고자 하는 몸짓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귀거래의 목적이 ‘청풍명월’로의 귀의에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청풍명월은 곧 임천지락(林泉之樂)의 등가물이며, 「효빈가」는 농암시가가 ‘자연미의 발견과 그 향유’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인 것이다.
◎ 농암가 농암에 올라보니 늙은이 눈이 더욱 밝아져오네 인간사가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1542년(76세) 음력 7월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효빈가」를, 10월에 고향에 돌아와서 「농암가」를 지었다고 그의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 「농암가」는 그가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농암에 올라 산천을 둘러보고 느낀 점을 노래한 것으로,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한국 문학사 전체의 흐름에서 보더라도 조선 중기 국문시가를 대표하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농암’은 예안 부내 앞을 흐르는 ‘분강’이 내려다보이는 영지산 기슭에 높이 솟아 있던 바위로, 그의 고향집에서 1리 정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농암’은 우리말로 ‘귀먹바위’(혹은 ‘귀막이 바위’)인데, 이 바위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상류에는 물살이 센 여울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울이 울어대어 강과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칠 양이면 그 소리가 너무나도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에 ‘귀먹바위’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식으로 고쳐 ‘농암(聾巖)’이라 하고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그는 1512년, 이 농암 위에 어버이를 위하여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가 살던 시절에는 오늘날처럼 안경이나 보청기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70대 중반의 노인이라면 당연히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귀가 먹은 노인이 귀먹바위에 올라갔으니 무슨 소리가 들리겠는가? 오직 희미하게나 들리는 것은 세차게 흐르는 강물소리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역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귀먹바위에 올라 귀머거리가 되는 순간, 눈은 오히려 밝아지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귀머거리가 되는 순간 눈이 밝아지는 까닭은 인간사(사람이 하는 일)는 항상 변하지만 산천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농암은 ‘인간사’와 ‘산천’을 마주 들어 ‘변화’와 ‘불변’의 관계로 파악한다. 늙은이의 눈이 더욱 밝아졌던 것은 불변하는 산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연미의 발견’은 이처럼 자연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에 기초해 있지만, 추상화된 ‘관념’이 아닌 구체화된 ‘형상’을 통해서 추구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바위 앞에 의젓하게 서있는 ‘저 산’과 ‘저 언덕’ 같은 구체화된 자연형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발견, 그것이 농암 시가의 특질이다. 그러므로 ‘어제 본 듯 하여라’가 주는 의미는 매우 심장하다. ‘어제 본 듯’은 자연에 대한 ‘친근감’과 ‘신뢰감’을 동시에 표상한다. 도산서원 진입로 입구 옛 분천동 뒷산 노변에는 1982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 회원일동이 건립한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있다. 농암가비에서 오른 쪽으로 계곡의 작은 길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비포장 도로 옆에는 농암각자가, 조금 위의 언덕에는 애일당이 자리잡고 있다. 농암각자(聾巖刻字, 경북 유형문화재 제43호)는 앞면을 다듬은 네 개의 자연석 암벽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고 두 자씩 음각되어 있다. 일제시 도로 개설로 인하여 애일당을 영지산 위쪽으로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긴 글자로 자경(字徑)은 약 75cm에 이른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크기의 큰 글자다. 원래는 옛 애일당 터 농암 주변에 있던 자연 암벽에 표면을 다듬어 두 글자씩 조화롭게 새겨놓은 것인데, 안동댐 건설로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애일당 축대 아래쪽인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 생일가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장수와 요절)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대 굽은 허리에 여든 넘어 봄 맞음이 그 몇 해이런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님 은혜로세 농암이 귀거래를 외치고 고향에 돌아 온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러 1551년 7월 29일, 85회 생일을 맞이하여 금서대(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생일을 맞이하는 회포를 「생일가」 한 수로 표현했다. 「생일가」는 85세의 생일을 맞은 작가가 그가 누린 높은 공명(功名)과 장수(長壽)를 자랑하고,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낸 작품이다. 「생일가」에서 세속의 욕망을 초월하여 인생을 달관한 농암의 눈빛이 느껴진다. 농암은 모든 것을 달관하였으면서도 임금의 은혜는 잊지 않았다. 「생일가」는 농암의 귀거래가 ‘임천지락(林泉之樂)’과 아울러 ‘인간지락(人間之樂)’의 향유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노년의 즐거움을 가족이나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인간지락’이다. 이 점에서 농암은 매우 다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국가로부터 정계은퇴 후에도 우로(優老)의 은전을 받아 계속 품계가 더해졌고, 향촌에서는 화목한 자손들로부터 극진한 효양을 받았으며, 이웃들로부터는 향촌의 원로로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강호자연과 친화하여 무한한 ‘임천지락’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타계하기 2년 전인 87세에 “그 만년의 거취와 즐거운 행적이 이 세 단가에 다 나타나 있다(其晩年去就逸樂 盡于此三短歌)”라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한 세 단가는 앞서 감상한 「효빈가」․「농암가」․「생일가」를 말한다. 요컨대 이 세 작품은 귀거래 이후 부단히 추구된 ‘임천지락’과 ‘인간지락’의 시적 표현인 셈이다.
◎ 어부가 양편(장가와 단가) 농암은 전래되어 오던 어부장가 12장(章)을 9장으로, 어부단가 10장을 5장으로 개작했는데, 이 「어부가」 양편(장가 9장, 단가 5장)은 자연 속에 묻혀 뱃놀이와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어부의 풍류로운 삶과 그 정취를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549년(83세) ‘어부사(漁夫詞)’를 지었는데, 그 저작동기와 과정이 아래의 그의 서문과 퇴계의 발문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부가」 두 편은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늙어 전원에 은퇴한 뒤로부터 마음이 한가하고 일이 없어, 옛사람들이 술 마시며 읊조리던 것들 가운데서 노래할 만한 시문 약간 수를 모아, 노복들에게 가르쳐 때때로 들으며 세월을 보냈는데, 아들 손자들이 이 노래를 늦게 얻어 와서 보여주었다. 내가 보니, 그 가사의 말(詞語)이 한적하고 뜻이 심원하여, 읊조리게 되면 사람으로 하여금 공명에 벗어나 티끌세상 밖으로 표표(飄飄)히 멀리 오르게 하는 뜻을 가지게 할 만했다. 이를 얻은 후로는 그 전에 즐기던 가사(歌詞)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여기에만 뜻을 두었다. 손수 책에 베껴, 꽃피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에 술잔을 잡고 벗을 불러 분강의 조각배 위에서 읊조리게(詠)하니, 흥과 맛이 더욱 참되었고 오래도록 피곤함을 잊었다. 다만 말에 차례가 맞지 않거나 중첩됨이 많은 것은 반드시 그 전사(傳寫)에서의 잘못일 것이다. 이는 성현의 경전에 의거한 글이 아니기에 망령되이 개찬(改撰)하여, 한 편 12장은 3장을 버리고 9장으로 장가를 만들어 읊었고(詠), 한 편 10장은 단가 5결(闋)로 줄여 짓고 엽(葉)을 만들어 창(唱)하였다. 합쳐서 한 부(部)의 ‘새로운 곡(新曲)’을 이루었는데, 깎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보태어 기운 곳도 또한 많다. (농암집』권4, 「어부가서(漁父歌序)」)
서울의 유련정(遊蓮亭)에 있을 때 두루 물어보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녀 보았으나 비록 노령운창(老伶韻倡)이라도 이 어부사를 잘 아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으로써 이 곡을 제대로 알고 좋아하는 자가 적은 것을 알았다. 지난해에 여러 음악을 아는 것으로 이름이 난 밀양(密陽)의 박준(朴浚)이란 분이 있어 우리나라 음악에 관계된 것이면 아악(雅樂)이건 속악(俗樂)이건 한데 모아 한 부의 책을 만들어서 출판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는데 이 ‘어부사’와 ‘상화점(霜花店, 쌍화점)’ 등 여러 곡이 그 책 속에 섞여 실려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것(쌍화점 등 여러 곡)을 들으면 손이 저절로 춤추어지고 발이 저절로 굴러질 정도로 좋아하지만, 이것(어부사)을 들으면 권태를 졸게 되니,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사람이 아니면 본디 그 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또 어찌 그 음악을 알겠는가? 우리 농암 이선생만은 나이 70이 넘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멀리 떠나 분수(汾水)의 굽이로 와서 한가히 지내되,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회포를 세상 물정 밖에다 붙이고서, 늘 조각배를 타고 노 저어 물안개 낀 강 위에서 휘파람 불며 노닐거나 고기 낚던 돌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갈매기를 사랑하여 만사를 잊었고 고기들을 보고 즐거움을 알았으니 강호의 즐거움(江湖之樂) 중에서 그 참된 것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면 어렴풋이 신선과 같이 보였다. 아! 선생은 여기에서 이미 그 참된 낙(眞樂)을 얻었으니, 그 참된 소리를 좋아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퇴계집 권43,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 퇴계의 견해에 따르면 사실 당시에 어부가는 대중에게 인기가 거의 없었다. 대중들은 템포가 빠른 ‘쌍화점’ 따위의 노래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계는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또 어찌 그 음악을 알겠는가?”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람’이란 물론 어부가를 몹시 사랑했던 농암을 가리킨다. 이처럼 퇴계는 어부가가 지음인(知音人) 농암을 만나 진가를 드러낼 수 있었다고 보았다. 농암은 금계(錦溪, 黃俊良의 호)가 가지고 온 어부가가 너무 쓸데없이 긴 것(冗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울러 가사가 순서에 맞지 않는 것, 중첩되어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러한 잘못이 원본 어부가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으로 판단하고 개찬(改撰)을 시도하여, 1편 12장은 9장으로, 또 다른 1편 10장은 5장으로 만들었다. 개작을 마친 뒤 새로운 곡을 시아(侍兒)에게 익히도록 하고서, 매양 반가운 손님과 좋은 경치를 만나면 그는 뱃전에 느긋하게 기대어 물안개를 헤쳐 나아가면서 반드시 시아들로 하여금 「어부단가」를 합창하거나 「어부장가」를 읊조리며 나란히 춤도 추게 하니,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를 ‘신선(神仙)’에 비유했고, 퇴계는 강호의 참다운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어부가의 참다운 소리(眞聲)를 좋아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의 국문시가 가운데 문학적 가치가 가장 높은 작품이 「농암가」라면 문화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작품은 「어부가」이다. 그는 사라질 위기에 있었던 「어부가」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이를 수정하고 다듬어서 후세에 전해 주었을 따름이지만 그에 의하여 수정된 「어부가」는 그의 호를 따서 ‘농암 어부가’라 불리며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의 「어부가」는 가사의 내용이나 노래의 곡조가 중국의 사(詞)에 가까웠던 기존의 「어부가」를 완전히 한국 노래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구의 사(詞)에 가까웠던 12장 짜리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어부가」는 그에 의하여 9장으로 수정되어 우리나라 노래인 장가(長歌, 歌辭의 다른 이름)로 정착되어 이황을 비롯한 영남사림에게 전해지고 이것이 조선후기에 이르면 궁중음악에서 민간음악에 까지 광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선 순조(純祖) 시절은 궁중에서 공연되는 무용극인 정재(呈才)의 극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궁중정재에서 부르는 「선유악(船遊樂)」이라는 노래는 농암「어부가」가 그대로 창사(唱詞)로 쓰여지고 있고, 고종 때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 속에도 뱃놀이할 때 부르는 「어부사(漁夫辭)」가 실려 있는데 역시 농암「어부사」를 창사로 쓰고 있으며, 조선 말엽에 이르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사랑 받고 널리 불리우는 장가 12편이 12가사 혹은 12잡가란 명칭으로 가곡원류(歌曲原流)를 비롯한 각종 노래집에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편인 「어부사(漁夫辭)」는 역시 농암의 「어부가」란 사실이 그 좋은 예이다. 둘째, 원래 관료들의 노래였던 「어부가」를 그는 강호의 노래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일찍이 김영돈․공부 등이 「어부가」를 무척 좋아하여 스스로 부르기도 하고 관기에게 창하게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관직에 있으면서 관념적으로 강호를 그리워하며 「어부가」를 불렀을 뿐이다. 반면에 그는 벼슬에서 은퇴한 후 이황, 황준량 같은 고향의 후배들과 강호생활을 즐기는 과정에서 이 「어부가」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 「어부가」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 동안 즐겨듣던 가사(歌詞)는 모두 내던져 버리고 오로지 이 「어부가」에만 마음을 쏟았다”(「어부가」 발문)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퇴계는 제자인 이담(李湛)이 너무 놀러 다니는 데만 몰두하지 말 것을 은근히 충고하자 이에 대한 답장에서 “농암 선생이 임천지락(林泉之樂, 강호생활의 즐거움)을 나에게 물려준 까닭이 바로 여기(도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기는 일)에 있다(聾巖先生所以附與林泉之樂在此)”고 자신 있게 답하여 자신이 강호생활의 정신과 풍류를 농암에게서 배웠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농암도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퇴계에게 보낸 생애 마지막 편지에서 “일찍이 강산 전부를 그대에게 물려준다는 편지를 부친 일이 있다(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고 하여 두 사람이 도산과 분강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으로 물려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처럼 퇴계 이황은 농암 이현보로부터 아름다운 자연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강호생활의 멋과 운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한시와 함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국문시가도 필요하다고 하는 국문시가의 가치와 유용성에 대한 인식도 함께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농암의 국문시가 작품들이 영남의 후배들에게 국문시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퇴계에 의하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창작으로 계승되고, 다시 퇴계 문하의 3대 처사(處士,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선비)로 꼽히는 권호문(權好文)의 「독락팔곡(獨樂八曲)」과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및 이숙량(李叔樑)6)의 「분천강호가(汾川江湖歌)」(6장)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시 농암의 종증손자(從曾孫子)인 이시(李蒔)7)의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3장)와 「오로가(烏鷺歌)」(1장)의 창작으로 이어져 내려가면서 국문학사에서 ‘영남가단(嶺南歌壇)’이라고 불리는 국문시가 창작의 전통으로 확립되어, 송순(宋純) - 정철(鄭澈) - 윤선도(尹善道)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함께 조선후기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농암의 「어부가」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창보사(傖父詞, 一名 城皐九曲)」,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續漁父詞)」, 신재효(申在孝)의 「어부사」같은 작품의 창작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어부가」라는 하나의 작품 계열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현재 안동시 도산면 청량산 기슭 가송리(농암 선생의 유적지 입구)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 시가비’가 세워져 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 선정기념으로 2001년 7월 1일에 세운 것인데, 전면에는 「어부단가」(5장)가, 후면에는 농암 선생의 이력에 대한 간략한 소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11) 현인(賢人)의 모임.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이 조카들과 순숙(荀淑)의 집에 갔는데, 태사(太史)가 덕성(德星)이 모이는 징조가 있으니, 반드시 현인이 모이리라고 상주했다는 고사가 있다.
12) ‘일사(一舍)’는 30리(里)로, 군대의 하루 행군 거리를 말하니, ‘삼사’는 90리이다. 1619년에 권시중(權是中)이 편찬한 선성지(宣城誌)에 의하면, “예안현의 경계는 동쪽으로 영해부(寧海府) 임현(任縣) 영양(英陽) 경계까지 41리, 남쪽으로 안동부 경계까지가 11리,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 현 영주) 경계까지가 39리, 북쪽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가 41리이다”라 하였다. 여기선 대체로 예안땅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를 어림잡아 ‘삼사(三舍)’라 한 것 같다. 13) 농암집, 「농암선생문집서」, “汾川一鄕數百里有此 吾東數百年希覯之事 如太史氏善占天象 則德星之聚東漢陳荀 必讓聾巖九老三舍矣” 14) 낙동강은 도산서원 앞을 거쳐 부내(汾川)의 외곽으로 굽이쳐 흐르는데, 분강촌 부근 강이 바로 ‘분강(汾江)’이다. 농암이 그렇게 명명했다.
15) 권두환, 「영남지역 가단의 형성과 전개과정」, 농암 이현보의 문학과 영남사림(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문화인물 농암 이현보 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2001, 26~27면, “농암(聾巖)을 맹주로 하는 경북 예안 지방의 분강가단(汾江歌壇)의 존재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이 가단은 농암의 「어부가」 산정과 향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과 자연과 노래가 하나의 도를 이루는 경지를 추구함으로써 우리 문학 특히 한시와 시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아울러 영남 지역을 적어도 嶺左․嶺右․江岸 등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지역에 가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국문시가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분강가단의 문학사적 의의를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는 길이 될 것이다.” 16) 농암이 은퇴 이후에 지은 우리말 시가에는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어부단가」, 「어부가」(장가)만이 아니라, 실전되어 알려지지 못한 다른 작품들까지도 있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리고 농암의 문집에 실린 시문들이 주로 은퇴 이후의 것들이고, 그 이전의 것은 누락되어서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은퇴 이전에도 우리말 시가 작품들을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농암에게는 「효빈가」를 짓기 14년 전에 그의 어머니가 시조형의 「선반가」를 지어 그를 맞이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접어두고 현존하는 그의 국문시가 작품에 한하여 논하기로 하되,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의 경우는 원문보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어로 풀이한 것을 인용하고, 「어부가」의 경우는 지면 관계로 이것을 인용하는 것조차 생략하기로 한다.
17) 효빈(效顰)이란 ‘추녀가 미인의 웃는 모습을 본뜬다’는 고사에서 나온 성어로, ‘효빈가’는 바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지었기에 붙여진 제목이다. 그런데 ‘효빈가’를 지은 시기를 ‘연보’에서는 76세 때인 1542년 8월에 이천(伊川)의 별서(別墅)에 머물며 지었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농암 자신이 87세 때인 1553년 윤3월 16일에 쓴 「효빈가 병서」의 기록을 따라 1542년 7월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며 배 위에서 지은 것으로 보았다. 18)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첫 대목은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이다.
19) 농암 이현보의 여섯 째 아들로 이황의 제자이며, 스승의 필법을 이어 받아 퇴계 문하의 3대 명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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