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타는 목마름으로」민중문화운동 전개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삼천리는 여전히 비단같은가/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다소곳이 거짓말에 귀 기울이며/뼈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겨울공화국 3면) 75년 2월 광주시 대의동 옛 YWCA강당구국기도회장. 유신체제의 폭압에 눌려 모두가 숨죽이고 기도를 올릴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당시 광주중앙여고 교사 양성우시인은 시낭송을 통해 「박정희 공화국」의 폐부를 찔러 폭력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행동문학의 정형을 보여준다. 목포출신 김지하의 담시 「오적」「비어」와 함께 70년대 필화사건의 본보기를 만든 양성우는 학교에서 파면당하고 77년 일본잡지 「세계」에 「노예수첩」을 발표, 감옥에 들어간다. 70년대는 이렇게 문학의 현실참여가 필연적으로 대두됐고 광주.전남지역 많은 문인들은 「문학의 무기화」를 통해 고난의 역사와 핍박받는 민중을 노래하게 된다. 유신헌법철폐와 표현의 자유를 내걸고 집단적인 공동보조를 취해오던 문인들은 74년 11월 18일, 마침내 현실참여를 표방하는 조직체를 결성한다. 개인주의와 도피주의, 체제옹호에 급급하던 한국문단 풍토를 일거에 깨뜨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그것이다. 이 모임에는 광주지역 문인과 서울의 광주.전남출신 문인들이 대거 참여한다. 박봉우 문병란 송기숙 조태일 이성부 김남주 김준태등이 참가, 활동을 벌인다. 민중.민족문학의 흐름을 잡은 자실문인들은 이를 전후해 집필작업과 문화강연, 「민족문학의 밤」행사를 수시로 개최하면서 민중문학의 걸작들을 쏟아낸다. 소설가 송기숙은 농촌문제를 다룬 「자랏골의 비가」와 친일파의 행적을 그린 「도깨비잔치」를 문병란은 농촌현장시 「죽순밭에서」「벼들의 속삭임」「함평고구마」를, 김준태시인은 「참깨를 털면서」를, 김남주시인은 「진혼가」등을 각각 출간한다. 이들 작품은 질곡에서 신음하는 민중과 지식인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면서 민중의식 형상화와 확산에 이바지 한다. 기성문인들의 저항과 함께 광주운동권과 농민운동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더욱 대중적이고 다양한 양식의 문화운동 필요성을 절감케 된다. 사회운동을 담당한 민청세대들과 이들과 연계된 학내운동세력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감옥에 가는, 흡사 「불나비」가 되는 운동방법에서 문화.예술을 통한 방법으로 대중의식화와 「행동적 앙가주망」저항을 모색한다. 그 첫단초는 78년 가을 78년 가을 농민운동의 기운이 가장 크게 일던, 해남.성등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인 김남주 박형선(민청.현 보성건설)과 농민인 정광훈(현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구속중) 윤기현(전농전남도연맹 사무국장) 조계선 김정순 등이 농민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곳에 소설에서 70년대의 지평을 연 「객지」의 작가 황석영이 해남에 내려와 「장길산」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자택에는 농민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이 들락거리고 황석영과 김남주는 78년 가을 해남읍 서림 당산마당에서 신명난 굿판을 연다. 서울대.이대탈반출신이 주축이 된 놀이패 「한두레」팀이 내려오고 광주에서도 오랜만의 굿판을 보기 위해 민청세대 청년들과 학내운동권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해남의 추수감사제는 민요 판소리 마당극 시낭송 깃발 현수막 등 여르장르의 연희양식과 선전방법이 동원돼 당대의 진정한 민중문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역동적으로 제시한 모범이 된다. 바로 이 한판굿은 뒤에 기독교농민회(기농)결성의 촉매가 되고 광주운동권그룹에 전투적인 민중문화운동조직이 생기는 계기가 된다. 이 행사에 참가한 의식학생들은 77년 겨울 광주YMCA탈춤강습에 참여한 수료생을 중심으로 Y가면극을 조직한후 방학기간동안 서울 「한두레」팀의 지도로 이론과 실기를 쌓는 강행군을 한다. 당시 「한두레」에서 내려온 사람은 채희완(현 부산대교수.전민족극협의회의장) 김봉준(화가) 류인택('영화사 기획시대)등이다. 방학기간동안 봉산탈춤 전과정을 이수한 Y가면극회는 마침내 78년 봄 개학과 함께 광주.전남에서 최초의 대학탈반인 전남대민속문화연구회를 등록시킨다. 창립멤버는 76학번이 주축으로 회장 김선출(사회학 3) 부회장 김윤기(법학 3) 김정희(미술과 3)등과 복학생 윤만식(축산학 3)등이다. 병영화된 학원에서 어렵게 뿌리를 내리던 전남대탈반은 본격적인 공연을 한번도 하지 못하고 그해 6월 민주교육지표사건에 회장과 부회장이 연류돼 잠시 활동을 중단돼다 윤만식 전용호(경제학 2) 등에 의해 재건된다. 전남대 탈반등장과 함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던 전남대 연극반도 기존의 순수예술극에서 벗어나 리얼리즘극을 추구하며 문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녹두서점을 경영하던 김상윤과 연극반 선배 윤상원(정외과 3)의 영향을 받은 박효선(국문 4)의 주도하에 김태종(국문 2) 이현주(국문과 2)등은 78년 러시아혁명을 다룬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공연금지 지시에도 불구하고 기습적으로 막을 올린다. 이제 유신체제가 막바지에 달하면서 문학과 연희패중심의 민중문화운동은 미술.노래등 여타 문화예술장르에 자극을 주면서 현장중심으로 위력을 떨쳐간다. 78년 11월 광주시 계림동천주교회에서는 「전국쌀생산자대회」가 열리고 전국에서 모인 5백여 농민은 전라도마당굿의 효시로 꼽히는 「함평고구마」공연에 열광한다. 전남대 연극반과 탈반이 모여 함평고구마사건의 승리를 극화한 이 작품은 풍부한 민중의 해학과 풍자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이후 마당굿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또 79년 1월 목포 한산촌에서 요양도중 윤한봉(5.18 최후수배자)에게 영향을 받은 홍성담(전 민족민중미술운동 전국연합의장)을 중심으로 최열(미술평론) 김산하(화가)등 조선대 미술과생들은 전남대 미술과생들과 함께 79년 9월 광주자유미술인회를 결성, 미술운동도 조직화된다. 이들은 당시 미술계에서는 가히 혁신적인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제1선언문」을 시작으로 몇번의 선언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으며 80년 1우러 「현실과 반영전」 등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민중미술운동을 준비해간다. 70년대 암울함을 달래기 위해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불려졌던 노래도 유신말기에 다다라 직접 창작과 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영랑과 강진」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실력을 발휘한 김종률(전남대 상대)은 「백제야학」에 참여하면서 민중가요에 눈을 뜬다. 5.18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한 김은 「아침이슬」의 김민기와 79년 겨울 「들불야학」에 참여하다 죽은 박기순의 장례식에서 만나 함께 백제야학에서 김민기작곡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공연한다. 6.29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서울에서 도피도중 서울문화운동그룹과 활동도중 체포됐던 김윤기 김선출도 다시 문화운동에 복귀하고 역량이 성숙된 연희패는 현장중심의 본격적인 사회문화운동전문집단을 조직화한다. 이 결과 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 출신이 중심이 되고 조선대 탈반, 전남대 국악반출신 일부 회원이 하나로 결집돼 이지역 마당극운동의 본류를 여는 극회 「광대」가 탄생된다. 윤만식 박효선, 김윤기 김태종 김정희 김선출 이현주 김영의(조선대 탈반) 김영중(전남대 연극반)등 회원들은 광주YWCA에 적을 두고 곧바로 공연작품을 준비해 창작마당굿 「돼지풀이」을 80년 3월 광주YWCA 무진관에서 공연한다. 이 작품은 회원들의 공동창작.공동연출작품으로 주기적인 농산물파동을 극복하는 농민들의 한과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마당극 공연에 앞서 양희은 임진택, 서울대노래패 「메아리」, 김영동 등 서울에서 온 찬조자들의 공연이 진행되며 여타 서울문화운동인사들도 대거 광주로 내려와 이날 공연에 동참한다. 윤한봉 등 현대문화연구소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2천여명의 관중이 한꺼번에 관람한 이날 공연은 이지역 민중문화운동의 한 획을 그으며 이후 무안.당진 등지에서 수차례의 현장공연을 계속한다. 그러나 극회 「광대」는 황석영의 재정 출연으로 동명동에 전용소극장을 마련, 완성을 얼마남기지 않고 개관기념작품인 「한씨연대기」(황석영작)연습도중 회원 대다수가 5.18 문화선전팀으로 참여한다. 문학 연희 미술 노래 등 여러장르를 통해 유신체제에 맞서 싸운 이지역 민중문화 운동역사는 5월과 함께 일시적으로 좌절했으나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에 거대한 「5월문화」를 펼쳐가고 있다. 고여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그런 전진하는 문화로서…. <김선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