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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감상 |
새벽 한시의 시
박인환
대낮보다도 눈부신
포오틀란드의 밤거리에
단조로운 그렌 미이라이 랍소디가 들린다.
쇼우 윈도우에서 울고 있는 마네킨.
앞으로 남지 않은 나의 잠시를 위하여
기념이라고 진 피이즈를 마시면
녹슬은 가슴과 뇌수에 차디찬 비가 내린다.
나는 돌아가도 친구들에게 얘기할 것이 없구나
유리로 만든 인간의 묘지와
벽돌과 콘크리트 속에 있던
도시의 계곡에서
흐느껴 울었다는 것 외에는......
천사처럼
나를 매혹시키는 허영의 네온.
너에게는 안구가 없고 정서가 없다.
여기선 인간이 생명을 노래하지 않고
침울한 상념만이 나를 구한다.
바람에 날려온 먼지와 같이
이 이국의 땅에선 나는 하나의 미생물이다.
아니 나는 바람에 날려와
새벽 한시 기묘한 의식으로
그래도 좋았던
부식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목마(木磨)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가을의 유혹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양복과 목관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약력
강원 인제(麟蹄)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平壤醫專) 중퇴.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리》 《남풍(南風)》 《지하실(地下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에 김경린(金璟麟) ·김수영(金洙暎)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끼었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간행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新協)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은 널리 애송되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