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와 선추에 담긴 매력 ;
부채는 인위적으로 바람을 얻기 위한 세간이다. 그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같이 해왔고 생활 여건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필수적인 도구였다. 역사를 소급할수록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는 세계 어디서나 공통성을 갖는다. 다만 지역에 따라 재료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부채는 동양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다. 중세 유럽에 있어서는 부채가 귀했으나 15세기경부터 다시 유행했다. 오늘날 일반화된 접는 부채 즉 쥘 부채는 한국에선 고려 때 이미 발달 됐지만 일본에선 17세기 이후이다. 이런 생활용품일수록 필요에 의해 자연히 다른 형태로 변모하게 되고 다양한 기능에 맞춰 제법이 세분화되기 마련이다. 특히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선면의 경우, 서양에서 양피지와 견에다 그림을 그렸지만 동양의 종이는 붓질이 좋아 선면화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했다.
부채의 기능은 바람을 일으키는 구실만이 아니다. 한층 거룩하고 장엄한 의물(儀物)로서 쓰일 경우에는 그 규모와 형상을 과장할 수밖에 없다. 혹은 장신구의 일부로서 축소해 꾸민 예도 없지 않다. 신분 사회 속에서 부채가 지체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띠었다고 한다면 무당이 든 부채는 다분히 고풍스런 종교의식의 잔영이라 할 것이다. 또 창자(唱者)의 손에 들린 부채는 무엇을 뜻한다고 해석할 것인가. 멋스러움의 오랜 관습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건(王建) 태조가 고려를 세우자 후백제의 견훤이 공작선을 바쳤다고 하였다. 이것이 새의 깃털을 사용한 것이라면 우선(羽扇)의 일종이다. 학의 깃털을 사용한 것은 학령선 (鶴翎扇) 혹은 백우선(白羽扇)이라 일컫는다. 고려사를 보면 현종(顯宗)3년 (1012년)에 비단 부채의 매매를 금하게 하였다. 대살에다 종이를 바른 것인지 진주선(眞珠扇)과 같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당시의 부채의 사치가 대단 했다는 얘기다.
고려이후에는 한국의 부채가 중국 등 이웃나라에 귀한 선물( 공물 , 貢物)로 보내는 기록이 여기 저기 보인다. 송선(松扇), 접선(摺扇) 등이 그것인데 그중에서도 접선, 즉 쥘 부채는 고려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설(設)이 매우 유력하여 매우 흥미롭다. 접선이란 바로 요즘 용어로 합죽선(合竹扇)을 가리키며 굴수흡 (屈戍翕), 취두흡(聚頭翕) 이니 하는 것도 쥘부채의 머리 형태를 표현한 명칭이다.
육당(六堂 , 최남선(崔南善)) 은 고사통(古事通)에서 이르기를
“ 중국부채는 원래 단선(團扇, 햇빛을 가리는 의장기(儀仗器(旗?)))뿐이더니 북종 때에 고려로부터 접첩선(摺疊扇)이 들어가서 일시의 신식(新式)이 되고 차차 일반화해 갔다. 이 고려의 부채는 그 모양에 따라 ‘접선’ ‘접첩선’ 이라 하고 그 재료로부터 ‘송선’ ‘삼선(杉扇)’ 이라하고 선면에 산수 인물을 그려 넣어 화접선(畵摺扇) 이라 일컬었다 ”
조선초기 왕조실록에 의하면 최고관직인 일이품(一二品) 에는 분홍원선 , 삼사품(三四品) 에는 남저원선(藍苧圓扇), 오륙품(五六品) 에는 학령선 (鶴翎扇)을 쓰고 그밖에는 백접선으로 하자는 제안이 논의된 바 있었다. 여기에서 빛깔과 형태와 재료에 관해 명시했음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고려 때 비단 부채를 금했듯이 일련의 시대적 추세이다.
생각건대 한국 사람들은 굳이 비단부채를 탐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의식 용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종이부채를 즐겨 사용한 것이다. 그 점은 아마 중국의 선호(選好)와 다른 것이 아닐까. 부채는 부치는 촉감도 종이라야 더 가볍고 상쾌하며 접선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정다산 (丁茶山)은 주계(晝繼) 라는 중국 기록을 이용하여 ‘ 고려부채는 종이를 썼으되 해맑고 광택이 있다 ’ 고 하였다. 잘 도련한 한지(韓紙)의 특징을 지적한 말이라 해석된다.
19세기 기록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절선(節扇)을 올린다고 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아예 각 감영이나 통제영에서의 진상 숫자를 명시해 놓았다. 전주 감영에는 본시 선자청(扇子廳)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말기에 전주와 남원의 제품을 가장 좋은 것으로 손꼽았던 것도 그 까닭이다. 오늘날 경상도산이 거의 끊겼음에 비하여 부채하면 단연 호남(湖南) 이다.
단원(檀園) 이나 혜원(蕙園)의 풍속화를 보면 부채를 든 사람들이 적잖게 보인다. 의관(衣冠)의 일부처럼 평소에 지니었지 않았나 생각될 만큼 가짐새가 아주 자연스럽다. 조선시대 중엽에 쓴 ‘산림경제(山林經濟)’ 란 책에 의하면, 선비의 거처(사랑방) 에 비치하는 일용품 가운데 우선(羽扇)을 지목하였는데 , 이 경우의 부채는 다(茶) 향(香) 금(琴) 여의(如意) 와 마찬가지의 선비다운 청공제품(淸供諸品)으로 해석됨직하다. 책가도(冊架圖)를 보아도 부채는 빼놓을 수 없는 비품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심지여 선형(扇形) 화폭과 군선도(群扇圖)를 즐겨 그리는 화가 (운초(雲樵) 박기준) 까지 생겼었다. 그러고 보면 부채는 다분히 동양적이고 , 풍선(風扇)이상의 은밀한 상징성을 간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옛 문헌에 갖가지 부채이름이 열거되어 있지만 대개 그에 대한 설명이 안되어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근래 부채에 관해서는 저서와 단편적인 글 등 발표된 게 있지만 그에 대해 완벽 할만치 해명한 것은 아니다. 또 그 유물들이 옛 기록과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에 전승된 재료와 기법으로는 도저히 흉내 내기 힘든 탁월한 솜씨의 제품도 있음을 본다. 현대생활에서 재래 부채의 비중이 아주 미미해졌듯이 그 제작 솜씨도 쇠퇴해버린 것이 사실인데 공예의 측면에서는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절선(端午節扇)과 세모(歲暮)책력(冊曆)을 요긴하고 값진 선물로 여겼다. 지방에서 만드는 부채를 미리 나라에다 진상하면 왕은 그것을 단오에 재상이나 시종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 가장 크고 좋은 부채가 50시(矢)였다고 하니 살이 많은 접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판소리 변강쇠전에도 ‘ 50시 진상칠선(進上漆扇) 기름결어 손에 쥐고 ... ’ 란 구절이 있음은 당시 그것이 최상품이었음을 암시한다. 칠선은 부채 살에 옻칠한 부채이다. 옻칠한 부채는 한층 귀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조선 초기에 이미 칠선 사용에는 엄격한 통제가 가해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일반적으로는 아무런 칠이나 채색을 하지 않은 백(白)접선을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정리해 둘 것은 한국 부채의 기본형에 대한 분류이다. 둥근 선면에 자루가 달린 것을 단선(團扇)이라 하고 , 임의로 접고 펼 수 있게 하여 지참하기 간편하게 만든 쥘부채를 접선(摺扇) 이라 일컽는다. 단선의 대부분은 따로 나무자루를 깍아 댄 것들인데 둥글어서 원선, 어미(魚尾)모양이어서 미선(尾扇)이라 별칭하기도 한다. 부채살을 일부러 공철(孔鐵)로 둥글게 뽑아 쓰고 그 끝을 불에 구워 휘어서 흡사 오동잎을 연상케 하는 것이 오엽선(梧葉扇)이요, 까치선이니 태극선(太極扇)이니 , 화선(畵扇)이니 하는 것은 문양에 따른 별선(別扇)을 일컬음이다. 2개의 대쪽을 잘게 쪼개어 살을 일군 뒤 서로 어긋나게 대고 살을 펴서 실로 엮은 것이 제 몸 자루의 소박한 황선(黃扇)인데 흔히 미선이라 통칭되기도 하였다.
접선은 접는 부채란 뜻이며 근자에는 대나무의 표피부분을 양면으로 접합시켜 부채살을 만드는 방법이 유행되어 합죽선(合竹扇)하면 접선의 전부인 듯이 일색이다. 또 변죽에 있어서도 마디가 많을수록 좋은 것인 듯 오인돼 있는데 고선(古扇)의 가품(佳品)은 결코 죽절(竹節)을 선호한 흔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반죽선(班竹扇)(斑?), 단목선(丹木扇)에 있어서는 마디 없는 장죽(長竹)을 더 귀하게 여겼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큰 대나무를 베어도 소용(所用)에 맞는 것은 한 두 마디뿐이어서 대밭의 피해가 크다고 18세기 말 정조실록(正祖實錄)은 기록한 일도 있다. 접선은 본래 고려에서 발달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송나라에 전해져 중국에서도 일반화되었다고 전한다. 12세기 초의 공물목록 가운데 나전칠기와 지필(紙筆)과 더불어 접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면 이미 고려의 특산물로서 이웃나라에 보내어 자랑할 만 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단선은 사치를 더할수록 의식 용품 화 하였지만 , 접선의 경우에는 점잖게 지니는 것임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이 잘 꾸며진 것이 적지 않다. 곡두선(曲頭扇, 꼽장선)의 치레가 그러하려니와 변죽에다 화각(華角)을 붙이거나 자개를 박고 혹은 낙죽(烙竹)과 점반죽법(点班竹法)에 의한 격높은 시문(施紋)이 모두 손에 지니는 물건에 대한 정성과 애정의 표시이다. 또 접선치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선추(扇錘, 扇墜, 선초(扇貂)이다.
선추는 접선의 사북고리에 다는 수식(垂飾)이다. 옛날에는 양반이라 하더라도 과거(科擧)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쓰지 못했으며 벼슬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고 혹은 무관(武官)은 쓰지 못하고 문관(文官)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그 사실 여부 간에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능히 어떤 규제이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직한 일이다. 색실로 끈목을 짜서 매듭을 맺고 술을 단다는 것 자체가 지체 있는 계층에서만 허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식(服飾)으로서의 띠만큼 명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 준해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선추술은 분홍 다홍 자주 연보라 옥색 남색 등 다채롭게 쓰는 편인데 그 술에 있어서도 봉술이나 실술 같은 번다한 것은 피하고 주로 단정하게 딸기술이라든가 광다회를 이용하는 방울술을 다는 것이 예사였다. 그리고 긴 줄(끈목)을 아주 가늘게 써서 자칫 선추가 둔중하지 않도록 배려했음을 보게 된다. 선추술에는 보다 멋스러운 치레로 향을 꿰어 달기도 하고 침통같은 작은 장통형(長筒形) 조각품을 달기도 했다. 이 통에 비치하는 기물은 응급용의 침이나 바늘 혹은 귀이개와 이쑤시개 등을 넣기도 하였다. 침통형태가 다분히 장식성 위주라고 한다면 패철(佩鐵,나침판)은 항시 휴대할 수 있게 극소화(極小化)한 실용품이다.
윤도(輪圖)라 하면 손바닥만한 나침판을 가리키는데, 패철은 선추술이나 주머니끈에 달 수 있게 된 까닭에 이런 나침판 제작자를 흔히 선추장(扇錘匠)이라 불러온다. 곧 선추는 패철의 대명사처럼 상용되고 있으며 그런 자그마한 목편(木片)에다 정교하게 일력각(一力刻) 하는 재간이 선추장에 부수되는 기능처럼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선추술에 다는 목각품은 오래된 대추나무나 황양목 박달나무 등을 깍아 새기는데 특히 빛깔 곱고 윤나는 대추나무를 으뜸으로 친다. 더러는 물소뿔이나 목근(木根) 등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적은 예이다. 조각에 있어 반양각한 것을 민각이라 하고 맞뚫어 새긴 것을 통각이라 하는데 그 문양의 소재는 19세기에 가장 유행한 송학(松鶴), 일월(日月), 산수(山水), 누각(樓閣), 주록(走鹿), 불로초(不老草) 등 간명한 십장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종 석 (李宗碩, 문화재전문위원) 1989.5.31. ~ 6.11 신세계미술관 기획 ‘ 부채와 선추 ’ 신세계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