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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4 가지 이유
1. 다양한 삶의 역사를 개인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2. 나를 있는 그대로 개방함으로서 나를 아는 사람들, 나와 알게 될 사람들과 좀 더 가까워 지려고...
3. 나의 이야기를 읽고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라고...
4. 히스토리를 더욱 업그레이드 하여 집필 중인 책 등에 가치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이글은 5부작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1부 - 남다른 탄생과 변환점이 된 유년시절
2부 - 즐거움과 시련을 함께 음미한 중학시절
3부 - 삶의 전쟁터에 우뚝 피어난 두 송이 꽃
4부 - 극과 극을 체험한 평강공주와의 결혼
패션기술로 정상을 정복하다.
5부 - 인생 대모험: 패션을 떠나라! 성공의 황무지를 개척하라!
[산골소년에서 성공전문가로...]
제 2부: 즐거움과 시련을 함께 음미한 중학시절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 시작되어 부역(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는 일 등을 무료로 시키는 것)에 수시로 동원되었다.
이 때도 약간의 비리(?)가 있어... 힘있는 집안은 부역에 동원되지도 않고 은근슬쩍 빠져 나갔다. 그러나 우리 집처럼 약자는 단 하루도 빠질 수 없었다. ㅠㅠ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나의 의지강도는 대폭 상승하였다.
"반드시 힘을 키워야 한다."
나는 이 말을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온 몸에다가 감정을 혼합하여 뿜어냈다.
이렇게 약자는 보이지 않게 당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에 빠지게 되어있다. 물론 가난의 원인이 이것만은 아니지만... 가난에 기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회의 모순이다.
이런 모순 등으로 인하여 생활이 너무 어려워 간혹 초등학교도 가지 않고 일을 하는 친구도 있다. 마을에서 아주 가난한 집에 가면 쌀은 거의 찾을 수 없고, 보리쌀은 조금 넣고, 쑥과 무우로 만든 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안 먹는다고 할 수 없어 억지로 먹었지만 괴로웠다.
우리집은 가난해도 무우밥은 안 먹었다. 우리는 꽁보리 밥이지만, 아버지는 쌀밥으로 지어 주셨기 때문에... 혹 남기시면.. 누나와 내가 서로 먹겠다고 싸우기도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은 웰빙시대라 보리밥이 별미가 되었다.
이런 보릿고개 시절에 나는 중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야호~~
나의 영역을 넓히는 중학교에 입학하다
면소재지에 있는 수동중학교는 걸어서 1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있다. 마을버스는 당연히 없다. 어쩌다가 마을 앞을 지나는 트럭을 보면 반가워서 뒤에 매달리고 따라 가기도 했다.
나는 학교가는 것이 즐거웠다. 학교가 있는 곳도 시골이지만 나에게는 도시나 다름 없었다. 약국도 있고... 상점도 많고... 시장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초등학교 동창 중에서 여자들은 중학교를 가지 않은 친구가 제법 있었다. 그러니 중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그 자체도 행운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입학선물로 "돈이 비싸 한 벌은 못 맞춰 준다."면서 바지를 맞춰 주셨다. 운동화에... 교복에... 맞춤 바지에... 그야말로 나에게는 혁신적인 변화다.
운동화는 모두가 신었지만 맞춤 바지를 입은 친구는 소수였다. 그리하여 그 바지가 얼마나 자부심을 키워 주었는지...
옷이 한 사람의 정신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1학년은 3개반이다. 나는 남자들만 있는 1반이다. 2반은 남녀 혼성반이었는데... 나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2반에 배치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아주 만족했다. 3반은 여자들만의 반이다.
집안 사정상 참고서 같은 것은 살 형편이 안 되었다. 우리마을에서 가장 부잣집 어른이 나를 잘 보셨다. 그리하여 중학교 입학선물이라며 영어사전을 주셨다. 중학교 3년 동안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용돈을 따로 받지는 못했지만, 육성회비 등을 한 번도 미루어 본 적은 없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런 납부금을 제때 내지 않으면 아들이 기가 죽는다며 악착같이 챙겨주셨다. 농사일도 크게 하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하는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너무 귀하여 시키지 못하셨다.
1학년 말쯤에 어머님은 중고자전거를 하나 사 주셨다. 성인용 자전거라 다리가 짧아 페달을 다 돌릴 수는 없었지만, 학교가는 시간을 반이상 당길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이때 습득한 자전거 타기 실력 때문에 자전거 타는 것은 항상 자신이 있었다.
자전거를 처음 산 날... 친구와 같이 학교 운동장에서 배웠다. 운동장에서 제법 탈 수 있게 되어 도로로 나왔다. 친구가 뒤에서 자전거를 잡고 뛰어 따라 오고 내가 천천히 도로를 가고 있었다. 내가 잘 타는 것 같으니까 친구가 자전거를 놓고 따라 왔다. 조금 후 덜컹 하면서 약 5m 정도 되는 언덕에 자전거와 같이 굴렀다.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히 보리 밭에 굴러 떨어져 다친데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따끔 따끔 해 오는 것이 아닌가. 윽~~ 가만히 살펴 보니 온 몸에 가시가 박혔다. 언덕에 있는 넝쿨가시 위를 구르면서 몸에 박힌 것이다. 그 많은 가시를 어머니가 몇 시간에 걸쳐서 다 빼 주셨다. 얼마나 아펐는지... ㅠㅠ
희망의 불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부터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사주, 관상, 철학 등 이런 것들을 수시로 보셨다. 아마 미래가 불확실하여 더욱 그런 것들에 집착하셨을 것이다. 동네에 누가 와서 무엇을 봐준다라는 소문만 들리면 꼭 찾아가서 보셨으니까...
집에 찾아와서 봐 주시는 분도 계셨고... 때론 나를 데리고 직접 가시고... 때론 혼자 가시기도 하셨다. 누나와 나를 함께 보면 누나는 평범했지만 간혹 나쁜결과도 나오는데, 나는 항상 좋은 결과만 나왔다. 단 한 번도 "사주가 안 좋다." 이런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것도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비록 지금 힘들지만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잘 될 것만 같았다. 특히 "30대에 아주 잘 된다"는 소리는 지금도 머리에 콕 박혀있다.
많은 것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하나가 있다. 어른이 된 후의 결과를 보는 당사주(그림책으로 판명하는 사람의 팔자나 운세를 보는 법)를 보았는데...
그림에 부인이 둘로 나와 있는 것이다. ㅎㅎ
나 어릴적에는 첩이 허용(?)되는 시절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장가를 두 번 가거나 첩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가? 내가 비슷한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ㅠ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시절에는 무엇을 보고 자라는가가 이렇게 중요하다. 그것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으니... 자신 스스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같은 사실을 스스로는 어려서 잘 모르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들을 많이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설명: 2학년 소풍가서 폼 재고 찰칵 ^^.
중학교 2학년 때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다.)
누나는 질병과, 어머니는 술과 어울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누나에게 병명도 모르는 질병이 찾아왔다. 왼쪽 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시절에는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열병(?) 같다. 누나는 집에서 이것 저것 치료를 했다. 무당을 불러 굿판도 벌였다. 집에서 하는 온갖 정성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5년 정도 지난 후에야 거의 나았다. 누나는 아프기 때문에 심하게 일을 할 수 없었다. 우리집의 주요한 일꾼이 수입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집안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복합적인 생활고의 압박을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이 때 부터 어머니는 술을 가까이 하셨다. 돈이 없으니 술을 따로 사서 드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다가 동네잔치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을 많이 드셨다. 우리 남매는 창피하고 힘들었다. 나는 동네잔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잔치가 있는 날이면 누나와 내가 체력이 달려 어찌할바를 몰랐다. 간혹 완전히 녹초가 되시게 드시는데 그 때가 오히려 편했다. 창피만 하지 리어카에 태우고 오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어머니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여자만 있는 집안을 우습게 보았다. 여자만 사는 집에는 문 밖에다가 남자 고무신을 놓아 둘 정도였다. ^^
어린 나의 눈에도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을 얕보는 행위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어머니는 오죽 했으랴. 술을 많이 드시고 고함치시는 말씀에도 그 내용이 항상 들어있었다.
"너희들 우리집 무시하면 혼날 줄 알아. 철수가 이 다음에 크게 잘 될 것이다."
힘없는 어린 아들 하나에다가 친척도 없고, 누나마저도 아프니... 그 심정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심하게 드시는 술도 내가 19살 때 부산으로 모시고 난 이후.. 생활이 안정되고 나니 술을 끊으셨다.
나는 이 때의 지겨움 때문에 "술은 절대 취하도록 안 마시겠다"고 맹세했다. 다행스럽게 체질적으로 술은 못한다. 한계가 맥주 두 잔이다. 술은 못해도 노는 것은 좋아해서...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는 나이트클럽도 자주 다녔다. ^^
친구들 사이에 인기 만땅
또 하나 마음의 짐이 항상 나를 억눌렀다. 나는 가난하여 용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비를 못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용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친구들에게 항상 대접받는 처지였다. 내가 친구들에게 대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주로 대접받은 것은 군것질이었지만 간혹 영화도 보여 주는 부르조아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은 기꺼이 나를 위해 과자 등을 사 주지만 나는 미안했다.
나도 친구들에게 사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음에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이 마음의 빚을 18살 때 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충분하게 갚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나는 돈을 잘 벌었기 때문이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무난하게 했다. 친구들과 놀고 집안일 약간 도우고, 시험 때 공부하는 일이 전부였다. 평소에는 놀다가 시험을 10일 정도 남겨 두고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시골 중학교라서인지 평소에 공부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1년 선배인 한 마을의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는 전교에서 항상 일등을 했다. 그 누나와 함께 시험 10일전부터 꼬박 밤새워 공부 했다.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타이밍(잠 안오는 약)을 복용하며 공부했다. 1학년 때 처음 타이밍을 누나가 권해서 먹게 되었는데 반알 먹었는데 속이 메스꺼웠다. 3학년 때는 3알도 거뜬했으니... 중독이 된 것이다.
공부할 때는 서로 잠을 깨워주었다. 잠 잘 때는 항상 "3분 후에 깨어달라."였다. 누나는 차마 3분만에는 못 깨우고 10분정도에 깨운다. 이 때의 10분 수면은 그렇게 달콤하고 길게 느껴졌다. 5명 정도가 같이 공부했는데 내가 가장 끈질기게 공부했다. 탁월한 끈기는 부모님께 물려 받은 위대한 유산이다.
수면조절에서 내가 터득한 것이 있다.
'강력한 정신력은 신체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깨우침은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최선을 다하면 항상 깨우침이 남는다.
'최선'
내가 너무 좋아하는 단어다. 그리고 나의 행동강령이다.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친구를 조건없이 좋아했다. 교우관계가 좋아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면 소재지에 있는 친구들은 서로 자기 집에서 나를 자고 가라며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친구들이 워낙 많아 날마다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잔다고 가정해도... 같은 친구집에 또 가서 자려면 한 달 이상이 걸렸다. ㅎㅎ
가끔씩 친구집에서 자는 날이면 참으로 좋은 일이 있다. 반찬이 우리집 보다 좋아서 밥 먹는 것이 신났다. 아뭏튼 친구들의 생활이 나 보다 한등급 높았다. 이 당시에는 친구가 전부로 생각되었다.
간혹 친구들 중에 나의 인기(?)를 질투하여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 나와 친한 힘센 친구가 그 친구를 혼내 주기 때문에 못 마땅해도 나를 때리지 못했다. 보호막이 든든했다. ^^
선배들도 나를 매우 귀여워했다. 키가 반에서 3번째로 적었다. 졸업할 때 키가 145cm 정도였다.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에다가 공부도 잘 하는 편이어서인지 여학생 선배들에게 인기가 더 많았다. 특히 눈이 크고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 눈썹이 너무 길어 친구들끼리 성냥개비를 눈썹 위에 올린 적이 있다. 다섯개비가 올라갔다.
(사진설명: 중학교 2학년 때 전문사진관에서 찍었다. 여자친구에게 주려고... ^^
당시 이 사진은 사진관에도 크게 전시되어 있었고...
여학생들 사이에 이 사진을 서로 가지려고 몇 명이 다투기까지 했었다. ㅎㅎ
16장을 현상해 주었는데 당시 다 뺏기고, 지금은 유일하게 한 장 남아있다.)
2학년 때에는 전교생이 나를 다 알았다. 하긴 전교생이라고 해 봐야 600명 정도였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전교 부회장에 출마했다. 내성적인 성격탓에 출마연설을 하면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원고만 읽었다. 결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요한 직책을 맡은 것이다.
부회장이라는 직책은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선배들과 나란히 전교 교실을 돌며 학교생활에 대한 주의를 주기도 하고... 등교 때는 교문 앞에 서서 복장검사도 하고...
참~ 권력(?) 있는 자리였다. ^^
(사진설명: 전교생 앞에서 부회장 후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마을의 정일현 선배가 찍었다며 전해 주었다.
그 당시 줄 때 부터 사진이 다 구겨져 있었다.)
2학년도 남학생만 있는 1반에 배치되었다. 선생님들도 나를 좋아하셨다. 앞자리에 앉아서 똘망 똘망하게 쳐다 보니 귀엽게 봐 주셨다. 하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나의 능력에 불을 밝힌 선생님은 만나지 못했다.
중학교까지 우리 집에는 라디오도 없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쯤에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에서 최초로 텔레비전을 구입하였는데 당시의 드라마 '여로'를 보러 매일 갔든 기억이 있다. 그 집은 밤마다 극장이었다. 나 말고도 10여명이 텔레비전 보려고 와서 앉아 있었으니...
나는 당시의 인기 탤런트 이효춘을 보며 "이 다음에 장가갈 때 저런 여자를 만나야지"라며 생각하기도 했다. 참으로 착하고 예뻐 보였다.
이런 환경탓에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또 도시생활에 대한 정보나 소식은 전무하였다. 그런데 나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 왔다. 중학교 2학년 초에 배영철이의 집 모두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이사간지 1년 정도 지난 후에 영철이 아버지로부터 영철이 학교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 전학가서는 진도가 많이 뒤쳐저서 고생했는데... 지금은 반에서 5등 정도를 한단다.
"이런 일이 있나? 도시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공부를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나 보다 공부를 못한 친구가 부산가서 5등을 하다니..."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든 도시친구들에 대하여 나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다.
"아~ 도시에 가도 잘 할 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배영철이는 나에게 두 번 자신감을 준 셈이다. 초등학교 때는 그를 넘어섰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 중학교에서는 도시친구들에 대한 두려움 대신에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로 바꾸어 주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친구다. 이후 내가 부산에서 일을 할 때(17세 초) 영철이와는 자주 만났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놀았지만 특별하게 갈 곳이 없어 영철이 집에 자주 놀러갔다. 영철이 집은 변두리에 허름한 블럭 집이었지만... 나는 부러웠다. 재산이 많아 부산에다가 집을 살 수 있는 부모님을 만난 영철이가...
그 어느 일요일... 그날도 평소처럼 영철이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니 집에서는 무슨 잔치가 벌어졌다. 고향에서 손님들도 오시고...
영철이는 나에게 괜찮다고 몇 번 말했지만 나는 미안했다. 무엇인지 모르고 선물이나 축의금도 없이 그냥 찾아왔으니...
그 날 이후 나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상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머니에게 편지가 왔다.
"너 영철이 집에 가지 마라. 영철이 큰 아버지가 온 마을에 소문을 냈다. 네가 얻어 먹으려 친구집에 다니고 있다고..."
영철이 큰 아버지가 괘씸했다. 어떻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대응 방법은 단순했다. 그 이후로 영철이 집에 가지 않았다. 파릇 파릇 피어나든 우리의 우정싹이 이렇게 하여 시들어 버렸다.
평범 가운데서도 성공의식은 꿈틀대고 있었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학창시절에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은 많이 달라진다. 모든 직업이 중요하지만 특히 선생님이라는 직책은 소명의식이 꼭 필요한 직업인이 되어야 하는 자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사소한 이야기 하나에도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선생님께서 자라온 이야기를 하시는데.. 참 가슴에 많이 와 닿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명확하게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남 보다 잘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나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공부도 친구들에게 지기 싫어서 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는 이런 말이 듣기 좋았다.
"저 녀석이 학교에서 공부를 아주 잘 한대, 이 다음에 큰 일 하겠어."
중학교 시절에 대략 나의 미래를 설계한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진주고등학교를 가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멋진 성공자가 되리라 상상했다.
(사진설명: 경주 수학여행 때 투숙한 여관 복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별로 크지 않은 친구들과 서 있는데도 가장 키다 작다. 화면 왼쪽이 필자다.)
하고싶은 공부와 이별, 그리고 격동 속으로...
3학년이 되면서.. 은근히 속으로 바라던 남녀 혼합인 3반에 배치되었다. 와우~!!!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하여 잇빨도 매일 닦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
그런데 키도 크고 왈가닥인 여자아이가 나를 놀리기도 많이 하였다. 몰래 도시락을 가져 가서 먹고는 개구리를 넣어 놓기도 하고... 점심시간의 그 황당함이란... ㅠㅠ
곁에 와서 머리를 쓰다 듬으며 이런 말로 나의 얼굴을 붉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구~ 요 귀여운 것!!!"
"왜 이래... 놔 ..."
작고 내성적이라 별다른 대응도 못하고 혼잣말처럼 궁시렁 궁시렁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여학생들과 한 반에 있는 것이 좋았다. 이성에 일찍 눈을 떳기 때문에... ㅎㅎ
한 반에서 나를 아주 좋아하든 이쁜 여자 친구는 1학기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나는 제대로 표현은 못했지만 나도 그 여자애가 좋았다. 처음으로 애틋한 사랑의 꽃봉우리를 피웠다. 하지만 우리는 '첫사랑은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훗날 만나기는 했지만 서로의 길이 많이 달라있었다. 그렇게 첫사랑 꽃 봉우리는 활짝 피지도 못한채 시들고 말았다. ^^
3학년 때 부반장을 맡았지만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반의 친구들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제대로 통제를 못했다고, 반장과 부반장을 교무실로 불러 엉덩이를 맞은 기억밖에... ㅠㅠ
(사진설명: 졸업앨범에 삽입된 3학년 3반 사진이다.
본관정문 앞에서 찰칵... 남학생 맨 앞줄 가운데가 필자.
키 순서대로 앞 줄 부터 서 있는데.. 사진에도 가장 작게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니.. 박물관 같은 곳에서 보는 일제시대 사진같다. ㅎㅎㅎ)
졸업할 때가 되면서 나는 또 한 번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를 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는 상위권이라 고등학교 장학생 시험을 미리 보았다. 명문학교로 소문난 거창고등학교에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고 장학생시험을 보았다. 시험에서 탈락했다. 내 탓이다. 친구를 너무 좋아하여 중학교 막바지에 공부를 지독하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명문고등학교 장학생 시험에 탈락하니 읍소재지에 있는 00고등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줄테니 입학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자존심상 그 학교에 가기 싫었다. 도시로 유학을 가야 했는데 집안 형편이 그러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내가 중학교를 마치는 동안 집안살림은 제법 줄어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늘려 놓았든 소 세 마리가 한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위기감이 왔다. 내가 고등학교를 가면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을 몽땅 날려버릴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할 수 있는 기타 방법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이 남았다. 그것은 전라도 아영에 사는 '가까운 친척'을 찾아가는 것이었다.(가까운 친척이라 함은 말 못할 사정상 그렇게 표현하는 것임)
단숨에 달려갔다.
"00, 제가 공부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학비를 대 주시면 제가 커서 꼭 갚을께요.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못가요."
"우리도 돈이 없다. 미안하다."
"..."
"안녕히계세요."
"아니, 밥이라도 먹고 가야지."
"빨리 가 봐야 해요."
나는 안된다는 말을 듣자 마자 서운한 감정파도에 파묻혀 버렸다. 그 즉시 돌아 나왔다. 집으로 올 때 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충분히 학비를 빌려 줄 수 있는 생활인데...
아니... 그냥 학비를 주며 공부를 하라고 해야 될 사람이... 좋다 두고 보자."
나는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 집에 관련된 친척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
난 지금도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서로 코드가 맞고 신뢰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재산도, 간도, 쓸개도 다 빼 주고 싶다. 반대로 한 번 아니다라고 내가 결정한 사람은 다시 보지 않는다. 설령 보게 되어도 건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 모난 바닷돌도 파도에 수없이 휩쓸리면 둥글어 진다. 세월의 한파가 나의 각진 성격도 둥글게 만들었다. ^^
10년 정도 지난 후에 나의 생활을 중류 이상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친척을 만났다. 내가 가서 직접 말한 가까운 친척은 돌아가셨단다.
"아뿔사, 어찌 이런 일이..."
난 온 몸이 늘어지며 망연자실했다. 그 분이 돌아가신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ㅠㅠ
참으로 큰 죄를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 그런 오기가 나를 강하게 만든 것도 같지만... 너무 한 것 같다. 죄스런 마음만 솟구친다. 과거가 발목을 잡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일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있을 때 잘 해야된다.
(사진설명: 낡은 졸업앨범 속의 우리 반 친구들과 함께...
사진 속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가난했는데...
사진에는 그렇게 안 보여서 다행이네~~ ^^)
나는 공부 보다 집안을 키워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10개월 농사일을 열심히 했다. 농사에서 배웠다. 내가 농사일이 맞지 않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언제나 지기 싫어하는 나의 성격탓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장한 체력을 바탕으로 농사일을 하는 또래와 선배들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다. 요사이는 농사기법도 다양하지만 그 때는 오직 힘센 사람이 최고의 농부였다. 농사신동이 농사에 손을 든 것이다. ^^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대목이다.
이리하여 나는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에 취직하기로 마음먹었다. 산업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로 이동하는 시대였다. 마을의 비슷한 또래들도 도시로 갔지만 적응을 못하고 돌아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친구들이 보기게 안 좋았다. 이런 또래들을 보면서
"나는 나가면 무조건 성공한다. 저렇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소문 끝에 부산에 외 6촌 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온실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전생활로 진격하였다. 제도권 고등학교를 펄쩍 뛰어 넘어, 인생대학에 바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곳은 희망과 눈물 등 다양한 총알이 교차하는 전쟁터였다. 희망과 사랑 총알은 가슴깊이 박아두고 절망과 포기 총알을 악착같이 피하여 살아남은 사연...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이글은 기억샘물에서 새 물을 퍼 올릴 때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업그레이드 할 것입니다.
CF: 다음 글에서는 드라마틱한 나의 사회생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