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본 게시물은 1152×864 해상도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사 중 스탈린그라드, 아른헴, 베를린 등 처절한 시가전 중 하나로 꼽히는 바르샤바 봉기는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키며 도시 자체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전투다.
"우라( 만세 )~!! 파시스트들과 게르만스키들을 처단하자~!!" 1943년 쿠르스크 전투의 패전 이후 독일군은 최후의 기갑전력마저 대부분 소진당해 점차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고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 제9군과 중부 집단군을 궤멸시킨 이제 소련 본토 전역을 탈환한 소련군은 폴란드 영내로 밀려들고 있었다. 1944년 7월 경, 동부전선의 상황은 대단히 심각했다. 소련군이 6,000대 이상의 전차를 동원해 6월 20일에 감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나 독일 '제9군'이 먼저 박살났고 이어 발터 모델 원수의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며 소련 영토 전역을 탈환하고 7월 3일 폴란드 접경도시인 민스크를 탈환해 폴란드 국경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대량의 T-34/85 전차를 앞세운 소련군은 이제 1939년 당시 독일과의 경계선이었던 부그강을 건너 동프러시아와 폴란드 전역으로 밀려들어 오려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독일군으로서는 이들이 수도 바르샤바 근교의 비스툴라강만큼은 도하하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했고( 독일 본토의 일부인 동프러시아 지역까지 치고 들어온다면 상황이 대단히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 실제 "헤르만 발크" 대장이 이끄는 독일 제48 기갑군단은 부그강 유역에서 절묘한 기동방어전을 펼쳐 소련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저지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단 1개 기갑군단만으로 저지해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시 독일의 전차 생산량보다 손실량이 더 많은 상황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기갑부대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서부전선에서는 노르망디에 진출해 있는 기갑부대( 제1 SS 기갑군단, 제2 SS 기갑군단, 제2, 9, 116, 130 기갑사단 등 )들이 벨기에 쪽으로 몰려 팔레즈 협곡에서 몰살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독일군으로서 동서 양편의 크나큰 위기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당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거주하고 있던 전직 폴란드군 장성 부르 코모로보스키는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바르샤바를 탈환하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인들에게 있어 가증스런 나치 독일의 지배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바로 "소련군"의 진주였다. 과거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치렀고 식민지배를 받았던 폴란드로서는 독일군의 진주 못지 않게 소련군의 진주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주는 바로 폴란드가 공산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크레믈린의 선전방송은 바르샤바에 주둔한 폴란드 공산당과 빨치산들에게 봉기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 이런 생각에 더더욱 봉기를 부추기게 된 것은 7월 30일, 부그강을 도하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불과 7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해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독일군은 동·서 양편에서 전면적인 붕괴를 보이고 있고 이대로 소련군이 입성한다면 폴란드는 공산 위성국가로의 편입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들의 수도를 폴란드인 스스로의 힘으로 수복하면 제 아무리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한다 하더라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 명분이 없게 된다는 순수한 발상이 바르샤바 봉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상황에 소련군 입장에선 그냥 폴란드 영내로 진격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끝장이었던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일까? ) 무엇보다 시민들이 가장 몰랐던 점은 이 모든 상황이 바로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간계였다는 점이다( 15,000명의 장교단을 집단 처형한 카틴 숲 학살사건을 괜히 저질렀나? ) 마침내 1944년 8월 1일 17시, 모든 건물의 창문으로부터 거리의 독일군 차량들과 병사들을 향해 사격이 집중되었다. 최초 봉기에 가담한 45,000명의 시민군 중 23,000명이 폴란드군 출신이거나 전투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봉기는 초반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20시까지 바르샤바 시가의 주요 거리와 교차로들이 시민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마침내 바르샤바 시내 대부분이 시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갑작스런 기습공격을 받아 당황한 독일군들은 이렇다할 반격도 못해본 채 주요 건물과 관공서에 방어진을 구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봉기기 시작되고 시내 주요 지점마다 바리케이드와 토벽들이 구축되었다. 초반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민군은 독일군들이 진주한 각 관공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누구인가? 제 아무리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밀리고 있다고 하지만 빈약한 무장과 함께 대부분 빨치산이나 레지스탕스 출신들인 시민군에 비한다면 이들은 맹호와도 같은 존재였다. 거기에 소련군이 부그강변까지 진출하자 독일은 바르샤바 주둔군을 15,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강한 상태였고 시 외곽에는 벙커를 증설하고 철조망과 대전차 장애물들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바르샤바 지구 외곽에는 공군의 '헤르만 괴링 사단'과 무장 친위대( Waffen SS )의 제5 SS 기갑사단 "뷔킹" 등의 기갑부대를 위시한 9만명의 독일군이 소련군의 진공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코소프스키 대장의 소련 제1 벨로루시 방면군, 제1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비롯한 대규모의 소련군이 비스툴라강 너머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니 )
노획한 독일군의 군복과 철모로 무장해 어느 정도 전투준비를 갖춘 시민군들. 하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시민군들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바르샤바 시민들 중에도 친독일 협력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바르샤바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친위대( SS )와 게쉬타포 등은 사전에 친독 폴란드인들의 밀고로 봉기 계획을 파악한 상태였고 따라서 이들은 사전에 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리 파악은 했어도 봉기가 이처럼 대규모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시민군은 빗발치는 독일군의 MG 34/42 기관총의 탄막세례로 2,5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병원, 인쇄소 및 친위대의 식량창고와 군복창고를 점령했다. 여기서 노획한 친위대의 군복과 철모 등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어느 정도 전투 준비를 갖출 수 있었으나 이제 독일군의 거센 반격을 맞아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바르샤바 봉기를 다룬 영화 "업 라이징"( 2001 )에서는 봉기 진압에 타이거 전차가 투입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 바르샤바 전투의 주역은 판터와 Ⅳ호 전차, 돌격포, 브룸베어, sd.kfz 251 하프트랙 등이었다.
베를린에서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접한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뛸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이 더러운 폴란드 돼지들의 도시를 지구 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기회다!!" 힘러는 무장 친위대( Waffen SS )의 디를레방어 여단과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대대 등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대부분이 범죄자나 소련군 포로 등에서 선발된 2선급 병력이었다 ) 하지만 이 2선급 병력들만으로 거대한 시가지에 포진한 시민군을 진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변의 상황이 때마침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세좋게 비스툴라강변까지 진격해 들어왔던 소련군이 이유없이 진격을 멈춘 것이다( 크레믈린으로부터 하달된 스탈린의 진격중지 명령 ) 그 시각 크레믈린의 스탈린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봉기 소식을 접하며 그야말로 쾌재를 올리는 상황이었다. "그래, 다 죽여버려라. 시시건건 우리에게 대항한 반공주의자, 민족주의자라는 놈들은 이 기회에 독일군에게 모조리 죽어버려라. 어차피 공산당원들은 점령하고 다시 충원할 수 있으니 하나도 아까울 게 없다. 그리고 독일군도 이 전투에서 크던 작던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붉은 군대가 수월하게 진격할 수 있으니 더더욱 좋다!!" 크레믈린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독일군이 쉽사리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당장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한 시점에서 일어난 이 대규모 봉기를 신속하게 진압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이 진격을 멈추고 비스툴라강 너머에 전개한 상황이라면 우선 이 방면으로 투입할 기갑부대를 바르샤바로 집중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호기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고 그 원칙에 충실하게 제19 기갑사단의 전차와 돌격포, 돌격전차들이 바르샤바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헤르만 괴링 사단의 전차들이 투입되었다고 하나 이 사단은 비스툴라강 너머의 소련군을 막기 위해 제5 SS 기갑사단과 함께 그 방면으로 투입된 상태였다 )
"판저 포!( 전차대 앞으로 )" 바르샤바로 진격해 들어온 독일 제19 기갑사단의 "판터" 전차들. 원래 소련 기갑부대를 막기 위해 투입될 예정이었던 이 기갑사단의 전차와 돌격포, 돌격전차들이 증원되면서 독일군은 보다 효과적으로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치열한 시가전의 와중에 시신을 수습할 여유는 없었다. 전사한 시민군이나 시민들의 시신은 이처럼 주요 도로변에 방치되었고 8월의 폭염 속에 시신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리고 바르샤바에 진입한 무장 친위대의 디를레방어 여단과 카민스키 여단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굳이 인정을 둘 필요가 없다. 바르샤바의 폴란드인이라면 여자, 아이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여라!" 식의 힘러의 명령은 이들 부대에게 실로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 명령을 아주 충실하게 실행했다. 1944년 8월 5일, 바르샤바의 볼라와 오코타 지구에 진입한 디를레방어 여단은 전투보다는 강간과 학살, 약탈에 더 재미를 붙였고 이 날 하루에 두 지구에서 40,000명의 시민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8월 5일 디를레방어 여단이 진격한 거리는 불과 1km에 불과하다 ) 한편 색슨 가든의 브뤼흐 궁전에 갇혀 시민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바르샤바 총독인 "루트비히 피셔"와 주둔군 사령관 "라이너 슈타헬" 중장이 볼라 지구를 돌파해 진입한 아군 전차부대에 구출되기도 했다.
처절한 시가전의 와중에 적지 않은 수의 독일군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무기와 장비가 시민군에게 노획되는 일이 빈번했다. 도로의 포석을 뜯어내 구축한 임시 기관총 진지에 노획한 MG 42 기관총을 거치한 시민군 기관총팀
시가전은 전차에게 가장 취약한 전투 중 하나다. 시민군의 공격으로 격파된 제19 기갑사단의 판터 전차. 이들 차량들 중 일부는 시민군이 조종해 독일군에게 75mm 주포탄을 퍼붓기도 했다.
한편 시민군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제19 기갑사단의 전차와 돌격포를 앞세운 독일군은 8월 둘째 주의 공세 중 전차와 장갑차 등 9대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중순 경, 시민군의 생명줄과도 같은 정수여과장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따라 시민군 점령지구에서는 약 90여개의 우물을 파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시내 곳곳에 고립된 전우들을 구출하기 위한 독일군의 필사적인 공격과 더불어 시민군 역시 간간이 반격을 감행했기에 사상자는 속출할 수 밖에 없었다. 8월의 폭염 속에 전사한 시민들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어 썩어갔고 식량이 떨어지면서 개, 고양이, 쥐 등이 식용으로 사용되었으니 자연히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거기에 시민군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간간이 진입해 오던 전차와 돌격포를 능가하는 독일군의 중화기들이었다.
"포이어( 발사 )!!" 구경 600mm 자주구포인 "칼( Karl )"이 바르샤바를 향해 불을 뿜었다. 독일군은 기존의 포병대 외에 이와 같은 괴물 병기들을 동원해 바르샤바의 구획 하나 하나를 초토화시켜나갔다.
"콰릉!" "우르르르르르~" 8분 혹은 30분 간격으로 퍼부어진 600mm 포탄이 명중되면 빌딩이 영화의 폭파용 미니어쳐처럼 붕괴되고 만다. 8월 9일부터 18일 사이에 걸쳐 독일군은 제19 기갑사단을 비롯한 기갑부대를 투입하는 한편으로 독일이 열차포 못지 않게 강력한 중포병화기로 개발한 600mm 자주구포인 "칼"과 "카마"를 바르샤바 지구에 투입시켰다. 포병 전력이 없는 시민군은 이 두 괴물 자주구포가 발사하는 포탄을 그대로 맞아야 했고 포탄 한 발이 명중할 때마다 주요 구획들이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제19 기갑사단은 시가전인만큼 스탈린그라드의 전훈을 받아들인 또 하나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민군에게 닥친 또 하나의 강펀치!! 150mm StuH 48/L 12 곡사포를 탑재한 브룸베어! 제19 기갑사단 등에 배속된 이 돌격전차는 Ⅳ호 전차의 차체를 이용 298대가 생산되고, 전장에서 수리를 위해 회수된 8대를 개조한 것까지 합쳐 306대가 생산되었다. 바로 150mm "브룸베어" 돌격전차( 1943년 10월의 자포로제 방어전에서 대전차 임무도 수행 )가 그것이다. Ⅳ호 전차의 차체를 이용해 대형 전투실을 설치하고 150mm StuH 48/L 12 곡사포를 설치한 것은 영락없는 돌격포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T-34/76, KV-Ⅰ이라는 소련의 강력한 전차들을 만나 대전차 임무에 적합한 48구경장 75mm 대전차포를 탑재한 형식이 늘어난 돌격포( 물론 105mm 곡사포 탑재형도 있지만 )들과 달리 이 차량은 처음부터 곡사화력으로 보병을 지원하는 중돌격전차였고 바르샤바와 같은 시가지는 이런 차량들을 위한 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구경 150mm 곡사포탄이 명중된 건물들이 붕괴되고 강력한 판터와 Ⅲ호 돌격포를 앞세운 독일군의 반격 속에 시민군의 사상자가 점차 늘어났고 마침내 8월 14일 3만명의 희생자를 낸 바르샤바 구시가지가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독일군은 구시가지에 남아있던 시민군의 부상자들을 사살하는 한편으로 남은 시민군을 도심으로 몰아넣기 위해 비스툴라강 어귀의 시민군 거점들과 바르샤바 수력발전소를 공격하였으나 진압의 총지휘를 맡은 무장 친위대의 에리히 폰 뎀 바흐 SS 중장은 시민군 지도자 '부르 코모로보스키'와 협상의 뜻을 내비친다. 아무리 강력한 기갑부대와 중화기로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시키고 있다하나 비스툴라강 너머에 대규모의 소련 기갑부대와 포병대, 보병부대가 전개한 상황에서 이런 식의 학살과 진압에 너무 오래 매달리기엔 독일군의 전력이 충분치 못한 이유가 컸다.
"어?! 우리가 왜 진격을 멈추지?" "몰라, 스탈린 동지의 명령이잖아!" 비스툴라강에서 갑작스런 진격 중지 명령을 받은 소련군은 모처럼만의 휴식을 취하게 되지만 그 너머의 바르샤바에서는 처절한 사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철저하게 파괴당한 바르샤바 시가지. 칼과 카마를 비롯한 자주구포와 각종 중화기들의 공격을 얻어맞은 바르샤바 시가지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노획한 독일군의 MG 34 기관총으로 반격하는 시민군. 하지만 재정비된 독일군의 반격 속에 사상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예상 외로 빠르게 봉기를 진압해나가자 당황, 연합군 항공기의 소련 영내 착륙을 허용하고 자신도 항공기를 이용해 무기와 탄약을 바르샤바로 공수했다. 이 시민군은 소련제 7.62mm DP "데그챠레프"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당시 소련군의 지원을 알 수 있다.
처절한 시가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제19 기갑사단의 판터 전차, 쉬르첸( 사이드 스커트 )과 OVM 공구류 곳곳에 시민군이 발사한 것으로 보이는 탄흔이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연합군이 구원의 손길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문제는 연합군 제1선에서 바르샤바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영국 본토와 이탈리아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최소한 소련영내에 착륙해 재급유를 받아야 한다는 악재가 작용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동맹군이면서 연합군의 소련영내 착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샤바 구시가지가 함락되는 등 독일군의 진압이 너무 신속하게 이뤄지는 한편으로 시민군 지도자 부르 코모로보스키가 독일군에게 항복할 조짐을 보이자 스탈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안돼! 지금은 좀더 폴란드 놈들과 독일군의 힘을 빼놓을 시기야!! 예상 외로 너무 빠르게 끝나고 있어!" 그리하여 스탈린은 허용을 안했던 연합군 항공기의 소련영내 착륙을 허용하였고 크레믈린의 선전방송이 바르샤바 시내에 울려퍼졌다. "바르샤바 시민들이여! 조금만 더 버텨라!! 여러분의 고난은 곧 끝이 난다. 이제 우리 붉은 군대가 게르만스키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이러한 말뿐만 아니라 진짜 구원이 이어졌으니 9월 11일을 기해 비스툴라강 너머의 소련군이 공세를 재개하는 한편 독일군의 대공포화를 뚫고 소련군의 항공기들이 바르샤바에 55톤의 무기와 식량, 탄약 등 군수물자를 투하한 것이다. 한편 스탈린의 소련 영내 착륙 허용으로 9월 18일 110대의 미군 B-17 폭격기 편대가 거의 500톤의 물자를 바르샤바에 투하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대부분이 독일군 점령지역에 떨어지고 시민군에게 돌아간 것은 전체의 20%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9월 18일 이후 두번 다시 연합군 항공기의 소련 영내 착륙을 허용치 않았고 이 정도 물자로 바르샤바 시민들이 버틴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보급만을 보고 독일군과의 협상을 중단, 전투를 재개한 시민군의 실수도 너무나도 안타깝다 해야겠다( 결국 스탈린이 연출한 "블록버스터 학살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 그 와중에 폰 뎀 바흐 SS 중장은 인도적인 조치로 9월 9일과 10일에 걸쳐 시민들에게 바르샤바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하기도 했다.
치열한 시가전의 와중에 독일군의 피해도 급증했다. 바르샤바 시가전에 투입된 제19 기갑사단의 Ⅲ호 돌격포들. 가운데 차량은 아무래도 독일군의 포탄 구덩이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바르샤바의 시민군을 구원하기 위해 연합군의 움직임도 필사적이었다. 9월 18일 110대의 B-17 폭격기들이 독일군 진지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고 바르샤바로 군수물자와 보급품을 공수했다. 문제는 독일군 점령지역과 시민군 지역을 구분하지 못해 일단 투하한 물자들의 대부분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미군의 물자 보급까지 받아 전세는 독일군에게 유리했다. 소련군과 연합군의 반격이 없었기에 이들은 안심하고 기갑부대를 앞세워 시민군을 몰아부칠 수 있었던 것이다. 볼라 지구 길가의 쓰러진 가로수를 엄폐물 삼아 MG 42 기관총을 거치한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시민군은 궁지에 몰렸다. 독일군의 전차와 돌격포들이 강력한 지원 포격 하에 점차 시민군 거점을 하나 둘 압박하기 시작했고 지하수도로 숨어든 시민들에게는 약간의 신음만 울려퍼져도 화염방사기가 뿜어졌다. 판터 전차와 Ⅲ호 돌격포의 75mm 포탄들이 작렬할 때마다 건물들이 붕괴되었고 시민군의 시체가 산과 바다를 이뤘다. 이런 상황 하에 더 이상의 물자보급마저 끊기고 9월 말이 되자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졌고 무기와 탄약마저 완전히 바닥나 절망에 처한 시민군은 마침내 항복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28일 폰 뎀 바흐 SS 중장은 시민군 지도자 부르 코모로보스키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시해 협상을 했고 사실상 시민군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당시 시민군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항복한 시민군은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로서 대우할 것 2. 포로들의 관리는 친위대가 아닌 독일 육군에서 담당할 것 3. 비전투원인 일반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이미 독일군도 26,000명의 사상자 외에 적지 않은 수의 전차와 돌격포를 손실한 상태였고 곧 이어질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1944년 10월 2일 18시, 20만에 달하는 바르샤바 시민을 희생시킨 봉기는 끝이 났고 무장해제된 후 포로가 된 시민군 15,000명은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외에 약 35~55만명이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9만명은 노동 캠프로 이송되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진압되었다. 시가지로 진입하는 독일군의 Ⅲ호 돌격포와 브룸베어 돌격전차, sd.kfz 251 하프트랙
노획한 독일군의 sd.kfz 251 하프트랙으로 이동하는 시민군. 독일군의 철십자 마크가 선명하다. 하지만 독일군은 시민군을 인도적으로 대우했을 지는 몰라도 바르샤바라는 도시 자체에 대해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대로 독일 공병대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건물들에 폭약을 장착했고 격발기를 작동시킨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하나의 거대한 벽돌더미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자신이 연출한 학살극을 지켜본 스탈린의 진격명령으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한 것은 3개월 후인 1945년 1월이었다.
|